바니보이
안토니 지음 | 사람사는세상
바니보이
안토니 지음
사람사는세상 / 2014년 3월 / 188쪽 / 12,800원
오래전에 once I was
비교적 온순한 성격인 안토니는 때론 거만한 행동을 하고, 산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간혹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 인생에 대한 많은 의문과 생각을 하지만 애써 답을 찾으려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신비한 세계에 빠져들 것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게 들려준 말이다. 태양의 궤도를 돌며 쉬지 않고 자전을 하는 지구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지구는 참으로 바쁘게 사는구나!’ 지구의 작지만 큰 몸짓을 보며 어느새 하루가 저물고, 한 달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지구의 작은 흔들림 탓인지, 나는 기차 여행을 할 때 역방향 좌석에 앉을 때면 늘 어지러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 한 가지 확신은 있다. 지구가 공전을 하든 자전을 하든, 기상이변으로 물고기가 떼로 몰려오든, 이 거대한 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흔적을 감춘다고 해도 내 마음은 항상 당신을 향해 열려 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현혹되지도, 당황하지도,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다.
불현듯 그녀만의 세계와 생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무언가에 이끌린 듯 커다란 상실감이 밀려왔다.
안토니는 커피전문점에서 일을 한다. 한가할 때면 그는 테이블도 닦고 또 유리창도 닦는다. 그러다가 창가에 서서 행인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다. 그러면 행인들도 고개를 들어 웃음으로 화답하고는 한다. 그는 커피를 참 맛있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커피를 맛있게 만들고 차를 잘 우려내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고 차분한 성격이다.’ 그는 평화로우며 아담한 마을에 살고 있다. 어느 저녁 무렵, 그는 이별의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받았다.
해변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을까. 바다에는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파도가, 내 마음속엔 오직 빗소리만이 가득하다. 지구는 과연 얼마나 크고, 세상은 과연 얼마나 넓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의 흔적을 간직한 채 살아가리라.
‘여행을 해야겠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 지금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바깥세상을 보고 싶을 뿐이다.
길에서 on the journey
걸어서 먼 길을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혼자일 때는 더욱 힘겨운 시간이다. 그래서 교통수단이 발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기차, 자동차, 자전거, 버스 등 이 세상에는 다양한 교통수단이 있고, 또 대부분 바퀴가 있어 먼 거리도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처럼 여행 중에 바퀴가 사라지는 것도 있고, 증기선처럼 바퀴가 아예 없는 것도 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비행기는 마치 거대한 새처럼 공항에 잠시 머물다, 다시 힘차게 날아오른다. 창밖으로 바라본 하늘은 푸른빛을 띠는가 싶더니 이내 빗줄기를 쏟아낸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어폰의 가느다란 선을 타고 흐르는 이름 모를 피아노곡을 듣는다. 비행기가 속도를 높이자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안정된 궤도에 접어들자, 시선을 돌려 머리 위에 있는 타원형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내 비행기는 구름층을 벗어났다. 구름 위로 눈부신 햇살이 가득하다. 눈물을 닦고 창밖을 바라보니 다양한 모습을 한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의 날개 모양, 여인의 얼굴 모양, 찻잔 모양, 보검 모양이 되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마치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알처럼 나의 생활을 그곳에 남겨 두었다.
『다크서클 여배우』
“가방을 여기에 두어도 될까요?”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들어왔다.
“네, 괜찮아요.”
그러자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띠며 하얀색 가방을 올려놓았다. 안토니는 다시 세계 지도를 펼쳐 표기를 했다. 일본, 그리스, 프랑스…….
“세계 여행?”
여자가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꽃이 활짝 핀 나무 한 그루를 찾으려고요.”
호기심이 발동한 여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녀의 맑은 눈이 빛나면서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있었다.
“예전에 그녀와 사랑할 때 꽃이 활짝 핀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그녀가 얘기했었거든요.”
“그러면 왜 그분이랑 같이 가지 않나요?”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가방을 뒤적이던 다크서클의 여인이 팸플릿을 꺼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가수였다.
“팸플릿도 보내야 하고, 신곡도 준비해야 하고, 앨범도 만들어야 하고, 모르는 사람과 맘에 없는 말도 해야 하고, 어떤 때는 나보다 유명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과 스캔들도 만들어야 해요.”
“가수도 힘들군요.”
안토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인 줄 알았어요.”
가슴속 응어리라도 풀어내려는 듯,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북받치는 것을 잠시 가라앉히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더 이상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여가수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은 다른 형태의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죠. 팬들의 사랑은 진실하고 열정적이지만 쉽게 사라지죠. 결국 제가 그들의 인생에 중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여가수는 조용히 말했다.
마녀가게에서
어느 골목에 들어서니 유난히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게가 눈에 띈다. 안토니는 마치 무언가에 강력하게 이끌리듯 자기도 모르게 그 상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척이나 조용한 광장은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까지 들린다.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서니 신비한 광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막상 안에 들어와 보니 밖에서만 바라보던 느낌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가게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가득 차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사방을 둘러싼 자주색 나무 선반 위에는 크고 작은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디선가 할머니의 둔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안토니가 인사를 건넸다.
“저 병 안에 든 것들이 무엇인가요?”
“향기입니다.”
할머니가 짧게 대답했다.
“아, 향수 가게구나.”
“향수 가게가 아니랍니다. 저는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를 수집해 준답니다.”
“향기를 수집해 준다고요?”
안토니는 혼란스러웠다.
“연인을 잃은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항상 슬프지요. 전 그런 사람을 돕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네, 마치 빵을 담고 있는 바구니와 같죠. 바구니 안에 빵이 상했으면 빵을 버려야 새로운 빵을 담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바로 그 빵을 버리도록 도와준답니다.”
안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기억을 지우는 일이 향기와 무슨 관계가 있죠?”
“기억만 지워서는 소용이 없답니다. 향기를 지우지 않으면 기억은 다시 살아날 테니까요.”
“그럼, 저 유리병에 담긴 것은 모두 과거 연인들의 향기란 말씀이신가요? 그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를 여기 남겨두고 행복해졌나요?”
“그건 확실히 말하기가 좀 어렵네요.”
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다만, 예전처럼 슬퍼 보이지는 않았답니다. 만약 기억을 지운다면, 슬픈지 기쁜지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우니까요. 마치 새것과도 같이요. 당신도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를 이곳에 남겨두고 싶나요?”
안토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전 새로운 빵 바구니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 바구니는 빵 향기가 없으니 빵을 담는 바구니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를 가지고 있어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그러면 계속 여행을 하세요. 더욱더 강해지길 바랄게요.”
‘더 이상 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
한참 후에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동안 사랑했던 당신의 매력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사랑을 시작할 때는 늘 빠른 속도를 내고, 막상 사랑을 하게 되면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레 아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하기는 쉽지만,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친구 the fox
숲은 매우 깊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 가는 길이 쓸쓸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급기야 오늘이 며칠인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소리 소문 없이 여우가 나타났다. 그 모습이 마치 덥수룩한 불덩어리 같았다.
여우와 함께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꽤 먼 거리를 걸었지만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몹시 기뻤다. 어느 날, 여우가 드디어 나에게 말을 건넸다.
“너무 적막하네. 우리 친구하자.”
나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안 돼. 너를 무척 좋아해서 너와 친구가 될 수 없어. 난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친구와 이별을 한 아픔이 있거든.”
여우는 나를 보며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네가 나를 보는 느낌이 좋아. 그 느낌은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거든.”
나는 여우를 위로했다.
“그건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여우의 말에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같이 걸어갔다. 이따금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여우와 자리를 바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걸었다. 길가에 서 있는 나무에 열매가 가득했다. 내가 여우를 높이 들어 올리고, 여우가 매우 기뻐하며 열매를 땄다. 그리고 우리는 나무 밑에 앉아 과즙이 가득 찬 열매를 맛있게 먹었다. 여우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우리가 이미 친구가 되었다고 느꼈다.
목적지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평소와 같이 길가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여우는 고양이처럼 내 품속에 파고들어 움츠린 채 슬픈 울음을 토해 냈다. 나는 여우에게 물었다. 왜 우냐고! 아이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흘리는 눈물인 걸까? 그는 성장의 눈물이라고 말했다. 성장의 눈물!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지 여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남긴 털 조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이 텅 빈 채 혼자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리고 갑자기 목 놓아 울었다. 한 번도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나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와 친구가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결국 그렇게 나 홀로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 생활 life in the city
도시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찾는다. 직업을 찾고, 살 곳을 찾고, 연인을 찾고, 추억을 찾고, 꿈을 찾는다. 어떤 이는 다른 이를 찾고, 어떤 이는 자신을 찾고, 어떤 이는 무언가를 찾고…….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정작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도시에 있는 아파트를 숙소로 정했다. 철로 옆에 있는 아파트 위로 가끔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하루는 전화 벨소리, 자동차 소리, 비행기 소리가 동시에 울린 적도 있다. 그날 저녁,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통계학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삼분의 일을 잠자는 데 사용한다고…….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삼분의 일이라는 시간을 침대에 누워 생각에 열중한다. 또 다른 삼분의 일의 시간은 맨발로 주방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는다. 그리고 나머지 삼분의 일의 시간은 비몽사몽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고, 머릿속은 현실과 비현실의 장면들이 섞여 파노라마처럼 하나하나 펼쳐진다. 잠들지 못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 중 있었던 다양한 일을 노트에 적는 것이다.
오후 두세 시쯤이 되면 가끔 혼자 외출을 했다.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나는 거리와 골목을 산책했다. 사람들이 가꾸어 놓은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어떤 나무에는 노란색 레몬이 가득 열렸고, 어떤 나무에는 보라색 꽃이 만발했다. 또 어떤 나무에는 꽃이 나뭇잎보다 더 많았고, 그늘진 부분의 꽃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활짝 피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러나 햇살이 가득 드리운 곳의 꽃은 이미 시들기 시작했다.
길가에는 유모차를 밀고 있는 여인, 러닝셔츠를 입고 미끄럼틀에서 노는 아이, 공원 벤치에 누워 책을 보는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집 안에서는 moon river가 느리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on the way home
안토니는 짐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기차 안에서 그는 노트를 펼쳤다.
네게 어떤 사랑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또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너를 바라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 방식이 아닐까! 지금 무언가를 애타게 원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날이 올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추억이야.’ 어느 친구가 들려준 말이다. 하지만 추억은 단지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영향을 줄 뿐, 가져갈 수도 남길 수도 없는 게 아닐까.
사랑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과연 같은 의미일까? 꽃을 사랑하는 것은 그 꽃을 위해 물을 주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은 그 꽃을 꺾는 것이다. 그러면 좋아한다는 것과 싫어한다는 것은 과연 다른 의미일까? 꽃을 좋아해도 그 꽃을 꺾고, 싫어해도 역시 그 꽃을 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