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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더 하루키 월드

쓰게 데루히코 지음 | 윌컴퍼니
웰컴 투 더 하루키 월드

쓰게 데루히코 지음

윌컴퍼니 / 2013년 12월 / 256쪽 / 15,000원





하루키라는 신비로운 작가 - 유명인은 되고 싶지 않다?



미디어를 피하는 이유

미디어가 발달하게 되면서 이제는 미디어를 피하는 유명인사도 많다. 하루키의 경우는 그야말로 극단적이다. TV 출연 의뢰는 일절 거절한다. 그 이유에 대해 하루키는, “외출했을 때 누가 말 거는 게 싫기 때문에, 얼굴을 공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했다. TV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자체를 꺼린다. 그는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전까지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그 무렵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의 메시지를 남긴 바 있다. “전철 안에서 마주치더라도 말을 걸지 말아 주세요. 멸종위기에 놓인 희귀동물처럼 가만히 내버려 둬주세요.” 어쩐지 안쓰러울 만큼 절박함이 담긴 메시지이다.

본인이 밝힌 ‘무라카미 하루키의 프로필’을 정리해보자. 신장은 168센티미터, 체중은 60킬로그램에, 혈액형은 A형, 별자리는 양자리이다. 오랫동안 수영을 했기 때문에 어깨와 가슴이 넓은 편이다. 수영을 즐기기 때문에 머리칼은 짧고, 조깅으로 단련된 다리에는 근육이 붙어 있다. 옷 색깔은 블루를 좋아한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는, “태어나서 ‘무라카미 씨는 핸섬하시네요’ 하는 칭찬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생긴 것 때문에 난처했던 적도 없다”라고 말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의외로 낮고 울림이 좋아서 목소리가 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유명인이란 신경의 피로를 유발하는 것이다. 한 번 유명세를 타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세계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종류의 호의와 악의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바라는 것은 어린 시절이나 학생 시절에 그랬듯이 ‘무명이라는 것’의 홀가분함일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인인 동시에 ‘무명성’을 갖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하루키는 그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실상을 지우려 하며, 독자들도 그의 의지를 존중해주기를 바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인 무라카미 치아키는 교토에 위치한 절에서 승려의 아들로 태어났다(일본에서는 승려도 결혼할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니시노미야 시의 명문학교 ‘고요가쿠인’의 국어교사로 근무하며 교감직까지 맡았지만, 이후 교토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승려가 되었다. 즉, 하루키는 승려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하루키는 데뷔 5년 차 무렵에 자신을 소개하는 에세이에서, “아버지는 교토의 승려 아들이고 어머니는 센바에서 상가를 운영하던 집의 딸이니, 어쨌든 백 퍼센트 간사이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덧붙이자면 어머니인 무라카미 미유키도 하루키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국어교사였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군인의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봤다. 그래서 그 모든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식사 전에 불단을 향해 경문을 외웠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 뒷모습을 보며 자란 소년이 하루키였다. 그 영향력이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하루키 스스로도 체코의 영자신문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교사이며 승려였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그러한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요. 그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써왔지만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도망친다는 건 불가능하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하루키 ‘마음’의 세계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하루키가 서양음악을 사랑했던 배경에는 물론 고베 지역(고베는 역사적으로 외래문물이 유입된 항구로, 국제적인 무역항이다.)이 갖는 특유의 서양식 감각도 있었겠지만, 피아노와 함께 자랐던 환경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클래식 음악과 재즈 음악에 조예가 깊고, 지금도 집에서 가끔 피아노를 연주한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회고적인 분위기 역시 재즈와 클래식이라는 회고적인 음악이 언제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하루키는 온갖 책들을 독파하며 세계의 문학과 역사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부친은 만화나 주간지만 아니라면 아들의 독서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키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지극히 평범하게 사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승려의 아들’이며 ‘피아노 소년’이자 ‘독서 소년’, 그리고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단카이 세대)에서는 보기 드문 ‘외아들’이었다는 점에서 과연 ‘평범한 아이’였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폭풍 속의 청춘

하루키는 고교 시절에 효고 현립 고베 고등학교에 다녔다. 공립학교답게 생활지도가 그다지 엄하지 않아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일 년간 재수를 하고, 1968년 4월 열아홉 살의 나이로 도쿄로 올라와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에 다닐 당시, ‘전공투(全共鬪)’나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의 반란’의 계절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와세다 대학의 분쟁은 유난히 거셌다. 와세다 대학의 전공투 학생들은 학생자치회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학생자치회를 지키는 그룹(가쿠마루 파)은 규모로 동료를 불러 모으면서, 두 개의 대집단이 학교 안에서 격돌하는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즐기던 나머지 ‘행실불량’이라는 이유로 기숙사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거처를 옮김과 동시에 그는 학교에 가기보다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신주쿠의 재즈 카페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와세다 대학이 큰 요동에 휘말리던 1969년 봄, 하루키는 학교에서 더 먼 곳으로 두 번째 이사를 하게 된다. 대학의 안팎에서 하루가 멀다고 학생들의 건물 봉쇄나 데모, 집회가 열렸지만, 하루키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젊은이들의 반란’의 계절을 경험한 것이 청춘 하루키의 심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당시 많은 학생과 마찬가지로 수업에도 거의 나가지 않고 제대로 된 취업활동도 하지 않았다. 즉, ‘시대’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부부의 탄생

하루키는 1971년에 분쿄 구의 센고쿠로 이사했다. 다카하시 요코와 정식으로 정혼했기 때문이다. 센고쿠의 보금자리는 침구점을 운영하는 아내 요코의 친정집에서 마련했다. 다카하시 요코 즉, 현재의 무라카미 요코는 가톨릭 중고등학교 ‘명문여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는데, 하루키와는 동갑이다. 그녀는 하루키의 업무와 자산을 관리하는 유능한 매니저이자, 하루키 작품에 대한 훌륭한 비평가 겸 조언자로 오랜 시간 하루키의 일과 생활을 뒷받침해온 인물이다. 디자이너와 사진가로서 작업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며, 사진집 『바람이 부는 대로』와 익명의 잡담집 『그 사람과 이야기한 근사한 일본어』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대학 입학 후 첫 수업이 있던 강의실에서, 학과는 다르지만 옆자리에 앉은 다카하시 요코가 ‘제국주의가 뭐야?’라고 질문한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상당한 양의 책을 읽었고, 대학 입학 당시에도 영어ㆍ국어ㆍ세계사의 세 교과목으로 입학시험을 치렀다. 때문에 요코의 질문에 별 어려움 없이 대답했고, 그 뒤로 조금씩 가까워지며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 하루키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나름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두 사람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당히 이른’ 결혼에 성공하며 학생부부의 탄생을 알렸다.

재즈 카페 시절

하루키 부부는 이후에 고쿠분지로 이사를 하고, 1974년 부부가 함께 재즈 카페를 열었다. 카페 이름은 하루키가 미타카에 살던 시절부터 키우던 고양이 ‘피터’의 이름에서 따와 ‘피터 캣’이라고 붙였다. 하루키의 얘기로 반쯤은 자신들의 돈으로 감당하고 나머지 반은 양가의 부모에게 빌렸다고 한다. 두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했다. 카페에서는 낮에는 주로 차를 팔고 밤에는 술도 함께 팔았다. 일요일에는 젊은 뮤지션들이 라이브 공연을 열기도 했다. 하루키는 카운터 안쪽에서 음료나 스낵을 만들고, 아내 요코는 손님 응대나 계산을 담당했다.

이 무렵의 하루키는 너무 바빠 글을 쓸 겨를이 없었다. 하루키가 직접 이야기한 이 시절의 심경은 다음과 같다. “아마도 나는 매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고쿠분지의 재즈 카페 주인장으로 조용히 인생을 마감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가게는 꽤 번창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빌딩의 재건축 문제로 ‘피터 캣’은 1977년, 센다가야로 자리를 옮겨 새로이 문을 열었다. 주인장 부부가 와세다 대학 문학부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편집자나 작가도 자주 찾아왔다. 작가 무라카미 류와 나카가미 겐지도 이 가게의 손님이었다.

고양이들의 이력서

고양이는 외아들이었던 하루키에게 어린 시절부터 가장 친근한 ‘동료’였다. 결혼 후에도 아이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고양이가 곧 ‘가족’이었다. 참고로 하루키는 아이를 갖지 않았던 이유로 ‘그동안 여유 없이 생활하며 생활 패턴이 굳어져 버렸고, 집에서 위태위태하게 일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하루키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아이를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가족일 뿐 아니라 작가의 작업을 돕는 ‘조수’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괴로울 때 동물 이야기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키 역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야깃거리가 바닥나 난처할 때가 있지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그럴 때는 동물을 소재로 써보기를 추천합니다. 나는 ‘힘들 때 동물에게 의지하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하루키의 작품 중에는 동물을 다룬 이야기가 많다. 고양이, 양, 코끼리, 원숭이, 개, 말, 캥거루, 바다사자, 까마귀, 개구리, 지렁이, 반딧불이……. 특히 고양이가 압도적이다. 단편 〈인육 먹는 고양이〉라든지 그림책 『둥실둥실』은 고양이를 소재로 한 책이고, 장편소설 『태엽 감는 새』와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인상적인 장면에서 고양이가 자주 등장한다.

하루키는 모두 11마리의 고양이를 키웠다. 그중에서 ‘기린’은 무라카미 류에게 받은 고양이인데, 병에 걸려 요절하자 화장하여 그 뼈를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미다나(집안의 수호신을 모시는 단)에 모셨다고 한다. 무라카미 류에 대한 일종의 예의를 다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기린’을 작은 수호신으로 삼은 만큼 하루키에게 고양이는 일종의 ‘수호신’인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미국에 머물 당시, 고양이를 키우기가 마땅치 않자 궁여지책으로 자신의 웹사이트에 ‘말로’라는 가상의 고양이를 등장시켰을 정도다. 이처럼 고양이는 하루키의 ‘작은 수호신’이며, 중요한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기 시작한 날들 - 그래, 소설을 쓰자!



진구 구장에서의 깨달음

하루키가 소설을 쓰려고 결심한 것은 스물아홉 살을 맞이한 봄, 도쿄 센다가야의 ‘피터 캣’ 근처인 진구 구장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개막 시합을 관람할 때였다고 한다. “난 1978년 시즌 개막전 때 천계(天啓)를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실화지요. 야쿠르트-히로시마 전이었는데 야쿠르트의 투수는 야스다였습니다.” 야스다 다케시는 야쿠르트의 괴짜 명물투수로, 펭귄처럼 서 있는 특이한 자세에서 직접 고안해낸 기묘한 변화구(자칭 ‘마구’)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야쿠르트의 선두 타자 데이브 힐튼이 2루타를 쳤는데, 그때 갑자기 번뜩 떠올랐어요. ‘그래, 소설을 쓰자’라고. 그리고 완성한 것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습니다. 농담이 아니고요.” 하루키는 이때 어떻게 ‘천계를 받았던’ 것일까. 하늘의 계시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의하면 “천사의 깃털처럼 하늘에서 내려온다”라고 하니, ‘천사’가 어딘가에서 진구 구장으로 ‘깃털’을 띄웠다고 할 수 있다. ‘천사’가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1978년’(시대), ‘신인’(환경), ‘스물아홉 살’(나이)의 세 가지이다.

전년도인 1977년에는 신인 작가 무라카미 류가 큰 인기를 얻으며 단숨에 ‘유명인’에 등극했다. 고쿠분지 시절 히피 차림으로 ‘피터 캣’에 재즈를 들으러 왔던, ‘별 볼 일 없는 미대생’ 무라카미 류였다. 그는 1976년에 훗날 하루키도 수상하게 되는 ‘군조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더 나아가 이시하라 신타로와 오에 겐자부로의 뒤를 잇는 ‘학생작가’로서 아쿠타가와상까지 받았다.

또한 1977년에는 하루키와 동갑인 와세다 대학 출신 작가 미타 마사히로가 『나란 무엇인가』라는 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와세다 대학의 학원투쟁 중 두 세력의 싸움에 휘말리면서 설 곳을 잃고 ‘난 대체 무엇인가?’라는 고뇌에 빠진 한 학생을 경쾌한 어조로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1978년에는 미국의 대학에서 와세다 대학으로 옮겨온, 같은 세대의 다카하시 미치쓰나가 검도부 고교생의 생활과 심정을 묘사한 『9월의 하늘』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드디어 와세다 대학의 ‘단카이 세대’가 이야기를 시작한 셈이다.

센다가야의 ‘피터 캣’에는 편집자와 작가가 자주 드나들었다고 했다. 따라서 카운터 안에서 일하던 하루키가 묵묵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가지 자극을 받았으리라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즉, ‘1978년’이라는 시대가 배경이 되고, 야쿠르트의 ‘신인’(데이브 힐튼)의 깜짝 안타를 보면서, 나도 ‘신인 작가’에 도전해보자는 속내가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스물아홉 살’이라는 것은 그 시절 프로야구 개막을 약 삼 개월 앞둔 1월 12일에 하루키가 맞이한 나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남자들의 머릿속에는 ‘서른에 자립하다’라는 공자의 말이 입력되어 있어 스물여덟~아홉이 되면 ‘이제 곧 서른이니까 실천해야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하루키의 표현을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십 대에는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일에만 필사적으로 매달려 살다가, 스물아홉 살이 되자 드디어 일종의 계단참과 같은 곳에 다다랐다. 거기서 나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부엌작가’의 탄생

“서재 같은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서 글을 쓰면 좋았겠지만, 굳이 밤 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쓰는 사람 대부분은 그만큼 생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기껏 해봐야 부엌의 테이블 정도가 작업공간이었다.” 이것이 작가로 출발할 무렵의 하루키였다. “내 최초 두 권의 소설도 ‘키친 테이블 소설’이다. 종일 가게 일을 하다 문을 닫고, 기분전환 겸 맥주 한두 캔을 마신 뒤 아파트 부엌의 테이블에 앉아 소설을 썼다.”

‘최초 두 권의 소설’이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이다. 이 두 작품은 이후의 장편소설에 비하면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하루키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이 자신의 ‘부엌소설’인 것이다. 이 ‘부엌소설’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을 텐데, 정작 하루키는 다소 미숙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특히 그는 짧은 토막글을 이어나가는 매력적인 구성을 ‘부엌’에서 쓴 탓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구성이 상당히 토막토막 끊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에 글을 쓸 시간이 한두 시간밖에 없어서, 한창 분위기가 잡혀간다 싶을 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라며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부엌작가’들의 작품이 하루키의 작품처럼 ‘토막토막 분단되어’ 있지는 않다. 이 토막글에 의한 구성은 유독 하루키 작품에서만 볼 수 있다. 혹시 그 무렵, 젊은 소설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열광적인 인기를 누렸던 커트 보네거트라는 미국 작가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보네거트를 유명하게 만든 『고양이 요람』은 127개의 프래그먼트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실존하지 않는 종교 ‘보코논 교’를 둘러싼 코믹한 이야기이다. 가공의 교주 ‘보코논’의 이력과 활동, 명언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다는 점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가공의 작가 ‘데릭 하트필드’에 관한 기술(記述)과 닮았다. 하지만 하루키의 작품이 보네거트의 모방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네거트의 작품을 애독하는 독자들과 공통된 독서 기반 속에서 환영을 받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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