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 샘터
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샘터 / 2012년 5월 / 303쪽 / 13,000원
봄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침실 창문이 '쏴아' 하고 큰 소리를 냈다. 강한 바람에 날려 온 굵은 빗방울들이 유리창을 두드린 것이다. 나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깼다. 요즘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밤중에 몇 번이나 깬다. 게다가 일단 눈을 뜨면 날이 샐 때까지 좀처럼 잠들지 않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자그마한 방에 이불 세 개를 나란히 깔고 우리 셋은 함께 '川(내 천)'자로 누워 잠을 잤다. 그러나 이제 아내 사에코가 사용하던 이불은 이미 벽장 깊은 곳에 넣어버렸다. 나는 잠든 딸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 올리듯 쓰다듬었다. 미지근한 물방울이 내 양쪽 볼을 주르르 타고 내려와 낡은 시트를 적셨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사에코를 잃은 후 허락된 첫 눈물은 나조차 기묘하게 느낄 정도로 끝없이 흘러내렸다.
해맑게 웃고 있는 사에코의 영정 위로 짙은 향기를 품은 원두커피의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사에코는 향 연기보다 커피를 더 좋아할 것 같았다. 세트로 된 두 개의 컵에 커피를 따랐다. 이 컵은 도예작가인 내가 직접 구운 것이다. 도예가 대부분이 부업을 해야만 생활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좋아하는 흙장난만 하고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으니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침 식사 후 노조미와 함께 거실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약속대로 『우사미밋치』를 읽었다. 이 그림책의 주인공인 '미밋치'는 노조미의 잠옷에 그려진 분홍색 토끼였다. 이야기 속에서 미밋치는 가슴 설레는 일이 생길 때마다 엄마 토끼에게 "엄마, 행복의 두근두근"이라고 말하며 자기 가슴을 가리킨다. 그러면 엄마 토끼는 그 기다란 귀를 미밋치 가슴에 대고 "정말이네. 미밋치의 두근두근이 그대로 전달돼서 엄마도 같이 행복해졌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노조미는 종종 이 그림책을 읽어주는 사에코에게 자기 심장 소리를 들려줬던 모양이다.
"노조미, 오늘부터 9일 동안이나 쉬는데,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그때, 노조미가 갑자기 창밖을 향해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입과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빠, 저기 봐, 정말 멋져!" 노조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 순간, 나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무지개였다. 비는 어느새 멈췄고, 멋진 일곱 색깔 아치가 산뜻한 아침 해를 맞은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저 무지개 한번 만져보고 싶다. 저 건물 너머로 가면 만져질 것 같은데? 아빠 차 타고 가면 금방 갈 수 있지?" "갈 수 있긴 하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사라지고 다른 곳에 가 있을걸?"
"아빠 차 빠르잖아." 노조미의 까만 눈이 넘치는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 딸의 표정을 보는 것이 왠지 무척 오랜만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그거 있잖아. 행복의 두근두근." 노조미는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그 작은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어른보다 꽤 빠른 리듬으로 작은 심장이 열심히 뛰고 있었다. 노조미의 발랄한 생명의 음색……. 생각해보면 그 음색은 사에코가 지녔던 '생명의 증거' 그 자체였다. "좋아. 지금부터 아빠랑 같이 무지개 찾기 모험을 떠나볼까?"
***
당연히, 그곳에 무지개는 없었다. 다시 차를 타고 노조미가 가리키는 해변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제법 긴 오르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앞쪽으로 줄지어 선 차들의 빨간 미등이 보였다. 기다란 자동차 행렬을 따라,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가다가 폭이 좁은 터널로 들어갔다. 15분 이상 걸려 가까스로 터널 출구 부근까지 왔을 때 왼쪽 보도에 작은 간판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맛있는 커피와 음악♪-카페 '곶' 여기서 좌회전> 설마 이런 곳에 찻집이 있을까?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자갈길을 따라가다 저 멀리 오른편 아래쪽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 순간, 노조미가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있다. 정말로, 찻집이! 주인이 손수 꾸민 듯한, 푸른색 페인트로 칠해진 운치 있는 작은 목조 건물이었다. 차를 세우고 내리자 멀리 벼랑 아래에서 바다 냄새를 품은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어쩌면 여긴 작은 곶의 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너머 아득히 먼 곳으로 시선을 보낸 순간, 나는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저것 봐, 노조미. 바다 저편에 후지 산이 보여." 노조미가 "세모 모양의 산이네"라고 말했을 때, 뒤에서 자박자박자박 하고 자갈밭을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하얀 개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어, 이 개 다리가 없어." 자세히 보니 오른쪽 앞다리가 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쪽 다리가 없는 하얀 개의 안내로 찻집으로 들어갔다. 약간 어스레한 실내에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땔감이 없는 낡은 장작 난로 옆에 초로의 여성이 서 있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날씬하고 전체적으로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었다. 예상대로 다른 손님은 없었다. 테이블이 두 개뿐인 아담한 가게인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바다와 하늘과 초원과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후지 산. 구도도 훌륭했다. 나름 예술가인 내가 보기엔 마치 풍경화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가게 같았다.
"주문하시겠어요?" 여성이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나이에 맞는 주름을 품은 그 표정은 왠지 친해지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참을 바라보고 싶어지는 그런 미소였다. 온기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푸근했다. "저기, 곶 블랜드 커피랑 사과 주스 주세요." 바로 그때, 노조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밖이 아닌 내 등 뒤 무엇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환호성을 질렀다. "응?" 그 말에 이끌려 뒤를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우와…… 이건, 정말 멋진 그림이구나. 드디어 찾았다."
노조미는 의자에서 쿵 하고 내려와 환히 웃으며 "아빠" 하고 부른다. 그리고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행복의 두근두근, 여기 있어."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로의 여성에게 눈짓으로 잠깐 실례한다는 뜻을 전하고 의자에서 내려와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노조미의 가슴에 귀를 댔다. 두근 두근 두근……. 자그마한 심장이 깡충깡충 뛰며 경쾌한 음색을 연주하고 있었다. "노조미의 두근두근이 그대로 전달되어 아빠도 같이 행복해졌어." 그러자 이번에는 나와 노조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초로의 여성이 손에 든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노조미 곁에 가만히 몸을 웅크리는 것이었다. "노조미 양, 아줌마한테도 행복의 두근두근, 들려줄래?" 노조미는 "좋아요"라고 미소 지으며 몸을 갖다 대 주었다. "어머…… 정말로 멋진 두근두근인데? 아줌마도 행복해졌어." 그녀는 여전히 웃음이 담긴 얼굴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보물이네요."
"네……." 나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벽에 걸린 무지개 그림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빛의 입자를 아로새긴 듯한 아름다운 오렌지빛 저녁 하늘과 바다. 그곳에 성스러운 무지개가 걸려 있다. 무지개는 하늘과 바다보다 한층 더 빛났다. 액자 안의 세계는 말 그대로 그림 같아서 현실과 동떨어진 광채를 발하는 듯했다. 가게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스케치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노조미가 그림을 바라보며 무지개 색깔을 손꼽아 헤아린다. "여섯, 일곱…… 여덟, 어? 아빠, 무지개, 여덟 색깔이야!"
"정말. 그렇구나. 그림이라서 그런가……?" 노조미가 고개를 갸우뚱하니 초로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저 그림 말이야, 진짜 무지개를 보면서 똑같이 그렸대. 그러니까 아마 진짜 무지개도 여덟 색깔이었을 거야. 아줌마는 지금까지 한 번도 헤아려본 적이 없는데, 오늘 색깔 하나를 선물 받은 기분인걸."
여성의 이름은 가시와기 에쓰코였다. 에쓰코 씨가 만들어준 커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워서, 한 모금 입에 머금자마자 그만 감탄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게다가 컵까지 훌륭했다. 가장자리가 동그스름한 하트 모양이다. "참 세련된 컵이네요."
"노조미 양의 하트를 생각하고 고른 컵이에요. 참, 아까 무지개 그림을 보셨을 때, 드디어 찾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다음 말을 이은 건 노조미였다.
"아빠랑 무지개 찾기 모험을 하고 있었거든요."
에쓰코 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랑스럽다는 듯 노조미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랑 똑같은 여행을 했구나."
"네?"
"나도, 무지개 찾기 모험을 하는 중이거든."
무슨 뜻일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에쓰코 씨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집에 계신가 봐요?"
"며칠 전에 타계했습니다."
"아……."
에쓰코 씨는 자그맣게 한숨을 흘리더니 옛 시절을 회상하는 듯했다.
"오늘 두 사람이 무지개를 찾아 여기로 온 것에 운명 같은 걸 느껴요." 그녀는 "잠깐만요"라고 말하고는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때까지 흐르던 잔잔한 재즈가 갑자기 중단되고 가게 안이 소리 없는 고요함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이프오르간을 닮은 아름다운 음색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노조미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자애롭고, 투명하고, 엄숙하고, 거룩한 음악이었다. 내 양팔과 등에 찌르르 전율이 흘렀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곡이에요."
"네……."
"여긴 커피와 음악을 선사하는 곳이에요. 지금 당신에겐 틀림없이 이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메이징 그레이스, 직역하면, '놀라운 은혜'라는 뜻이죠." "놀라운, 은혜……."
나는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그리고 에쓰코 씨의 시선을 따라가다 한곳에 머물렀다. 에쓰코 씨는 노조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노조미는 그 무지개 그림을 깊이 응시하고 있다. 천국에 닿을지도 모르는 빛의 다리. '보물이네요…….' 조금 전 에쓰코 씨가 했던 말이 가슴속에 되살아났다."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잃지만, 또 그와 동시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얻기도 하지요. 그 사실만 깨닫는다면, 그다음부턴 어떻게든 되게 마련이에요." 실제로, 나도 그랬으니까……. 끝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에쓰코 씨의 목소리가 이렇게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룩한 음악에 둘러싸인 채 나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하트 모양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가게에 내가 구운 커피 컵을 선물하자. 오늘의 추억을 담은 컵을 만들어, 이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사용하게 하자.' 내 안에서 정말로 오랜만에 창작 의욕이 샘솟았다. 흙을 만지고 싶어 손가락 끝이 근질거릴 정도로……. 나는 사에코가 이 세상에 남겨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안아 올리고 힘껏 볼을 비볐다. "잘 먹었습니다." 에쓰코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순간, 나는 이미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을 "더 프레이어"(The Prayer)
오우~~~웅! 갑자기 테라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이러면 안 되지, 그림 따위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냉큼 돈을 꺼내 도망가야 해.' 마치 뒷머리가 끌어당겨지듯 그림에 미련이 남았지만, 나는 내 시선을 무지개 그림에서 억지로 떼어냈다. 그리고 돈이 들어있을 계산대를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런데 다음 순간, 공기에 이변이 느껴지면서 온몸이 경직된다. '커, 커피 냄새가? 설마……. 가게 안에 배어 있는 냄새겠지.' 난 다시 떨리기 시작한 무릎에 힘을 실었다. 심장이 마구 날뛰어 관자놀이까지 고동쳤다. 구식 금전등록기의 버튼을 누른다. 띵! 철커덕!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가 나면서, '금전등록기가 열렸다'고 생각한 순간.
와장창! 미닫이문 너머 안쪽 방에서도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 역시. 하, 할머니. 깨어 있는, 건가…….' 나는 애써 열어놓고도 돈을 꺼내는 것조차 잊고 옆에 둔 칼을 급히 손에 쥐고 슬금슬금 창문 쪽으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들키면 해치울 생각 아니었어? 무슨 말이야. 내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 내 뇌가 제어 불능에 빠지려 하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허억." 나는 너무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소리'는 '음악'이었다. 조용한 '멜로디'다. '역시, 할머니, 깨어 있어…….' 그때, 드르륵, 계산대 뒤 미닫이문이 조용히 열렸다. 당황하여 뒷걸음질치던 나는 기타에 걸려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미닫이문이 완전히 열리자 네모나게 쏟아져 나오는 하얀빛 속에 자그마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 실루엣이 나를 향해 말했다. 너무나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어서 와요." 갑자기 가게 조명이 켜졌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칼을 할머니 쪽으로 쑥 내밀었다. "어머, 그 칼 참 잘 들게 생겼다. 우리 집 칼은 통 안 갈았더니 요즘 잘 들지가 않아요." 할머니는 태연한 얼굴로 말하고는 커피잔을 창가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드세요."
"조, 조용히 해. 도, 돈 내놔."
그러나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미소가 더 깊어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지금 조용히 하고 있고, 돈은 저기 있잖아요. 뭐, 조금밖에 없지만."
서슴없는 할머니의 말에 나는 목이 막힌 듯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 이제 됐으니 여기 앉아요. 식으면 커피가 불쌍하잖아."
흐르던 음악에 남성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영어로 된 듀엣곡이다. 노래가 서서히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그 아름다운 클라이맥스에 이끌려, 뿔뿔이 흩어졌던 내 마음의 조각들이 원위치로 돌아온다. "이 곡은요, 유명한 가스펠송인데 <더 프레이어>라고 해요. 우리말로 바꾸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당신에겐 틀림없이 이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나, 나한테, 그 곡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보였어요. 당신."
"나를 보고 있었어요?"
"몰래 봤죠. 미닫이문 틈으로. 저 무지개 그림 보고 있었죠? 그 모습이, 왠지는 몰라도, 기도하는 모습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더 프레이어>를 선택해본 거예요."
기도하는, 모습? 저 그림을 보면서 나는…… 그랬다,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다. 온갖 노력을 해도 자꾸만 자꾸만 추락하는 최악의 인생이 마치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속에 기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걸까……. "무섭지 않았나요? 나를 보고."
"당연히 무서웠죠. 방에서 가슴 졸이고 있는데 금전등록기가 큰 소리로 열리는 바람에, 정말 깜짝 놀라서, 선물로 받아 소중히 여기던 커피잔을 하나 깨뜨렸잖아." "죄송합, 니다……." 도둑질하러 들어왔다가 커피잔이 깨졌다고 사과하는 자신이 왠지 정말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런 나를 보고 에쓰코 씨가 킥킥 웃는다. "사실은…… 나도 기도하고 있었어요. '각오를 단단히 하고 훔치러 들어왔다가도 저 그림에 넋을 잃는 사람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기를' 하고 말이죠."
"저…… 죄송합니다……." 사죄의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마치 둑이 터지듯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흘러넘쳐 눈물을 멈추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것 봐, 역시, 좋은 사람이었어." 테이블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엔 따스한 온기가 있었다. 나는 한동안 엎드린 채 울었다. 오십이 넘은 다 큰 남자가 소리 내어 흐느꼈다. 눈물의 원인은 너무나 복잡하여 생각할 정신도 없었고, 에쓰코 씨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내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에쓰코 씨가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실컷 울고 난 나는 얼굴을 들고 에쓰코 씨를 보았다. "실수할 자유가 없는 자유란 가치가 없다. 인도의 지도자였던 간디가 했던 말이래요. 멋지죠? 예전에, 저 무지개 그림을 그린 사람이 가르쳐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