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 -
이방인 (L'etranger) 알베르 카뮈 지음
제1부
양로원에서 온 전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제였을 수도 있다. 잘 모르겠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삼가 조의를 표함.” 그것만으로는 아무 뜻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은 알제(프랑스령 알제리의 수도)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마랭고에 있다. 사장은 이틀 휴가를 주면서도 표정이 달갑지 않았다. 나는 “제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사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히려 그쪽에서 내게 조의를 표해야 마땅했다.
셀레스트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에마뉘엘에게 검은 넥타이와 완장을 빌려 두 시 버스에 올라탔다. 날은 몹시 더웠다. 버스는 덜컹거렸고 휘발유 냄새가 났다. 길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반사광 속에서 나는 거의 내내 잤다.
원장은 내가 엄마의 유일한 부양자였느냐고 물었다. 나를 탓하는 듯해 설명하려 하자 그가 말을 막았다. “변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머님은 여기서 더 행복하게 지내셨어요.” 맞는 말이었다. 집에 있을 때 엄마는 말없이 나를 눈으로 좇기만 했다. 양로원에 들어온 처음 며칠은 자주 울었지만 습관 탓이었다. 지난 1년 동안 거의 찾아오지 않은 것도 조금은 그 때문이었다. 일요일을 빼앗기는 탓도 있었다.
엄마는 작은 안치실에 있었다. 흰 석회벽에 유리 천장을 얹은 아주 밝은 방이었다. 뚜껑을 덮은 관 위로 덜 박힌 나사못들이 반짝였다. 뒤따라 들어온 수위가 얼굴을 볼 수 있게 나사를 풀어 주겠다며 관으로 다가갔다. 내가 그를 말렸다. “안 보시겠습니까?” “네.” 그가 멈칫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싶어 거북했다. 잠시 뒤 수위가 나무라는 기색 없이, 그저 알고 싶다는 듯 물었다. “왜요?” “모르겠어요.” 그는 흰 콧수염을 비틀며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밤이 되자 수위가 스위치를 올렸고,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셨다. 구내식당에 가서 저녁을 들라고 권했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수위가 밀크커피를 타 주기에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 받아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엄마 앞에서 피워도 되는지 몰라 망설였다. 생각해 보니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수위에게 담배를 권했고, 우리는 함께 피웠다. 흰 벽에 부딪히는 불빛 때문에 눈이 피로해 전등을 하나만 꺼 달라고 부탁했으나, 전부 켜거나 전부 끄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열린 문으로 밤공기와 꽃 냄새가 흘러들었다. 나는 조금 졸았다.
무언가 스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림자 하나 없이 눈부신 방으로 엄마의 친구들이 열 명쯤 조용히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얼굴 생김새며 옷차림이 하나하나 또렷이 보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깊게 팬 주름 한가운데 눈 대신 흐릿한 빛만 박혀 있었다. 노인들이 맞은편에 둘러앉아 고개를 주억거리자, 나를 심판하러 와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잠깐 스쳤다.
한 여자가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규칙적인 울음이었다. 수위가 귓속말로 알려 주었다. “어머님의 하나뿐인 친구였는데,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답니다.” 울음이 그치자 이번에는 노인들의 침묵이 괴로웠다. 다들 제 생각에만 빠져 있어서, 한가운데 누운 이 죽은 여인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 본 것이었다. 밤새 나는 자다 깨다를 되풀이했다. 새벽이 되자 노인들은 잿빛 얼굴로 방을 나가며 모두 내 손을 잡았다.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보낸 이 밤이 우리를 가깝게 묶어 주기라도 한 것 같아 놀라웠다.
아침에 다시 마신 밀크커피는 아주 맛있었다. 바다 쪽 언덕을 넘어온 바람에 소금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엄마 일만 아니었다면 즐거운 산책길이었을 것이다. 원장이 관을 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보지 않겠다고 했다. 원생 중에는 엄마의 오랜 친구인 토마 페레만 장례 행렬을 따르도록 허락받았다. 둘이 늘 붙어 다녀서 원생들이 페레에게 엄마를 ‘약혼녀’라 놀리곤 했다는 것이다.
하늘에는 벌써 햇살이 가득했다. 태양이 땅을 내리누르기 시작했고, 더위가 빠르게 치밀었다. 검은 옷 속으로 열기가 찼다. 원장은 엄마와 페레 씨가 저녁이면 마을까지 산책하곤 했다고 들려주었다. 하늘 가까운 언덕까지 늘어선 사이프러스나무, 붉고 푸른 흙, 드문드문 들어선 단정한 집들을 보며 나는 엄마를 이해했다. 이 고장의 저녁은 서글픈 휴전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넘쳐흐르는 햇빛 아래 풍경 전체가 떨고 있었다. 가혹하고 우울한 풍경이었다.
행렬이 움직이자 다리를 저는 페레가 뒤처졌다. 태양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솟아올랐다. 뺨으로 땀이 줄줄 흘렀고, 모자가 없어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했다. 곁에 서 있던 인부가 하늘을 가리켰다. “푹푹 찌네요.” “네.” “저분이 어머니세요?” “네.” “연세가 많으셨나요?” “그럭저럭요.” 정확한 나이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늘의 광채를 견디기 어려웠다. 새로 깐 길에서는 태양열에 타르가 터져 나와, 발을 디딜 때마다 번들거리는 속살이 드러났다. 파랗고 흰 하늘과 단조로운 검은빛들 사이에서 나는 멍해졌다. 터져 나온 타르의 끈적한 검은빛, 상복들의 칙칙한 검은빛, 영구차의 번쩍이는 검은빛. 태양과 가죽 냄새, 말똥 냄새, 니스와 향 냄새, 밤을 꼬박 새운 피로가 눈앞과 머릿속을 온통 흐려 놓았다. 페레는 아지랑이 속으로 뒤처졌다가 들판을 질러 우리를 따라붙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다.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쿵쾅거렸다.
그 뒤의 일은 너무 서둘러 진행되었고, 너무도 뚜렷하고 자연스럽게 지나가 버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오직 한 가지만 빼고. 마을 어귀에서 행렬 뒤를 따르던 간호사가 늙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가늘게 떨리는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려요. 그렇다고 빨리 걸으면 땀이 나서 성당 안에서 오한이 들고요.” 맞는 말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날의 몇몇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따라잡았을 때의 페레의 얼굴. 굵은 눈물이 주름에 막혀 흐르지 못하고 번져서, 무너진 뺨에 물빛 니스칠을 한 것 같았다. 묘지의 붉은 제라늄꽃, 꼭두각시처럼 관절이 꺾여 쓰러지던 페레, 엄마의 관 위로 쏟아지던 핏빛 흙과 거기에 섞인 나무뿌리의 하얀 속살, 그치지 않던 버스 엔진 소리. 그리고 버스가 알제의 불빛 속으로 들어섰을 때, 이제 침대에 누워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의 후련한 기쁨.
토요일의 바다, 일요일의 발코니
잠에서 깨어나서야 사장이 왜 언짢은 낯을 했는지 깨달았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일요일까지 보태 나흘을 쉬게 되었으니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엄마 장례를 오늘이 아니라 어제 치른 게 내 탓은 아니다.
항구 해수욕장에서 마리 카르도나를 만났다. 예전에 우리 사무실 타자수였고, 그때 내가 탐냈던 여자다. 부표로 기어오르는 마리를 받쳐 주다 가슴을 스쳤다. 나도 부표에 올라 장난스레 마리의 배에 머리를 얹었다. 온 하늘이 눈에 가득 찼고, 하늘은 온통 푸르고 금빛이었다. 목덜미 아래에서 마리의 배가 조용히 오르내렸다. 저녁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자, 마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프랑스의 인기 희극 배우 페르낭델이 나오는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옷을 갈아입던 마리가 내 검은 넥타이를 보고 상중이냐고 물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언제였느냐기에 대답했다. “어제요.” 마리는 몸을 살짝 뒤로 뺐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이미 사장에게 했던 말이라 그만두었다. 그런 말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어쨌거나 사람은 늘 조금은 잘못이 있게 마련이다.
저녁이 되자 마리는 그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영화는 간간이 웃겼지만 대체로 바보스러웠다. 나는 마리의 가슴을 쓰다듬었고, 영화가 끝날 무렵 어설프게 입을 맞추었다. 극장을 나와 마리는 내 방으로 따라왔다.
눈을 떠 보니 마리는 가고 없었다. 일요일이라 짜증이 났다. 나는 일요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베개에 남은 마리의 머리칼 냄새를 맡으며 열 시까지 뒹굴었고, 누운 채로 정오까지 담배를 피웠다. 엄마가 함께 살 때는 알맞던 집이 이제는 너무 넓어져, 나는 방 하나에서만 지낸다.
오후에는 발코니로 나가 거리를 내다보았다. 산책 나온 가족들과 극장으로 서두르는 젊은이들이 지나가자 거리는 텅 비었다. 맞은편 담배 가게 주인이 의자를 거꾸로 놓고 걸터앉아 있기에 편해 보여 나도 의자를 돌려 앉았다. 다섯 시가 되자 축구 경기장에서 돌아오는 전차에서 누군가 “우리가 이겼다!” 하고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받아주었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자 막 돋아나던 별빛이 바랬다. 사람과 불빛으로 들끓는 보도를 오래 지켜보았더니 눈이 피로했다. 이윽고 첫 고양이 한 마리가 적막한 거리를 천천히 건넜다. 빵과 파스타를 사 와 식탁에 선 채로 먹었다. 창문을 닫고 돌아서다 거울에 비친 식탁 모서리를 보았다. 알코올램프와 빵 부스러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는 이제 땅에 묻혔고, 나는 다시 일을 나갈 테고,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무실, 그리고 층계참의 두 이웃
오늘은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했다. 사장은 친절했다. 엄마 나이를 묻기에 틀리지 않으려고 “예순쯤 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장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제 다 끝난 일로 여기는 눈치였다. 점심시간에는 에마뉘엘과 함께 부두를 내달려 지나가는 트럭 짐칸에 올라탔다. 먼지와 뙤약볕 속에서 에마뉘엘은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 댔다. 저녁에는 부두를 따라 느긋하게 걸어 돌아왔다. 하늘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고, 내 마음은 흡족했다.
어둑한 계단에서 옆집의 살라마노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은 스패니얼 한 마리와 8년째 단둘이 살고 있다. 개는 피부병 때문에 온통 딱지투성이인데, 노인도 개를 닮아 얼굴에 불그스름한 딱지가 앉아 있었다. 한 핏줄처럼 닮았으면서도 둘은 서로를 증오한다. 산책을 나갈 때마다 개가 줄을 끌면 노인은 사정없이 개를 후려치고 욕을 퍼붓는다. 그러고는 길바닥에 멈추어 서서 서로를 노려본다. 개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노인은 증오에 찬 눈으로. 오늘도 노인은 “빌어먹을 놈! 썩을 놈!” 하고 씩씩거렸다. 개가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묻자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분을 삭이며 내뱉었다. “이놈은 늘 들러붙어 있어.”
그때 또 다른 이웃인 레몽 생테스가 들어왔다. 동네에서는 기둥서방 노릇을 한다고 수군대지만, 직업을 물으면 늘 “창고 관리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지만 내가 말을 잘 들어주어서인지 자주 말을 붙여 온다. 레몽의 이야기는 꽤 흥미롭고, 그와 어울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저녁을 같이 먹자고 청하기에 밥을 짓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따라갔다.
레몽은 손에 붕대를 감으며 시비를 걸어온 녀석을 두들겨 팼다고 했다. “보다시피 내가 먼저 손을 댄 게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그는 이 일로 조언을 구하고 싶다면서, 내가 남자답고 물정을 잘 아니 도와주면 진정한 친구로 삼겠다고 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친구가 되고 싶지 않으냐고 다그쳤다.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레몽은 만족스러워하며 순대를 굽고 포도주를 내왔다.
음식을 먹으며 레몽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싸움을 건 자는 그가 돈을 대 주던 여자의 오빠였다. 방세에 하루 20프랑씩 밥값까지 주었는데, 여자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허구한 날 돈이 모자란다고 징징댔다. 그러다 가방을 뒤져 보니 복권 한 장과 팔찌 두 개를 전당포에 맡긴 전당표가 나왔다는 것이다. “나를 속여 먹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피가 터지도록 패 준 뒤 쫓아냈지만, 아직 벌이 덜 끝났다고 했다.
내 생각을 묻기에 별생각은 없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이고, 여자를 응징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한다고 했다. 레몽의 속셈은 이랬다. 여자에게 뼈아픈 모욕과 후회가 동시에 들 만한 편지를 쓴다. 편지를 보고 여자가 찾아와 잠자리를 가질 때, “끝나는 바로 그 순간” 얼굴에 침을 뱉고 내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충분한 벌이 될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레몽은 편지를 조리 있게 쓸 자신이 없다며 지금 당장 한 장 써 줄 수 있겠느냐고 청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여자의 이름을 듣고서야 무어인(북아프리카의 아랍계 원주민) 처녀라는 사실을 알았다. 편지는 떠오르는 대로 썼지만 레몽 마음에 쏙 들도록 맞추어 주었다. 그렇게 해 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소리 내어 읽어 주자 그는 한 번 더 읽어 달라고 조르더니 무척 흡족해했다. “네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안다는 건 진작 알아봤지.” 그가 말을 놓았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 넌 내 진짜 친구야.”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레몽이 그 말을 되풀이하기에 나는 “그래” 하고 받았다. 친구가 되든 안 되든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편지를 봉하고 남은 포도주를 다 비운 뒤 우리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잠이 쏟아졌지만 몸을 일으키기가 귀찮았다. 내가 지쳐 보였던지 레몽은 기운을 내라면서, 어머니 일은 안됐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내 손을 힘껏 쥐며 남자들끼리는 통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방을 나와 문을 닫고 층계참의 어둠 속에 잠시 우두커니 섰다. 건물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계단 밑바닥에서 서늘하고 축축한 바람이 올라왔다. 귓속에서 웅웅거리는 내 피의 박동 소리만 울렸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살라마노 노인의 방에서 개가 낮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와 보낸 주말
그 주에 레몽이 찾아와 편지를 부쳤다고 말했다. 토요일에는 마리가 왔다. 마리는 예쁜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나는 마리가 몹시 갖고 싶었다. 알제 근처 바닷가에서 헤엄칠 때 마리가 물속에서 몸을 밀착하며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서둘러 돌아와 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열어 둔 창으로 여름밤 공기가 햇볕에 그을린 몸 위로 흘러드는 느낌이 좋았다.
이튿날 아침, 내 잠옷을 걸친 마리가 웃자 나는 또 마리가 갖고 싶었다. 잠시 뒤 마리가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말은 아무 뜻도 없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점심을 차리다가 다시 웃었고, 나는 입을 맞추었다.
그때 레몽의 방에서 “넌 날 배신했어” 하는 고함과 함께 여자의 비명이 터졌다. 마리는 경찰을 불러오라고 했지만 나는 경찰이 싫다고 말했다. 그래도 경찰이 왔다. 말할 때는 담배를 빼라는 경찰 앞에서 레몽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경찰의 두툼한 손바닥이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오후에 레몽이 찾아왔다. 경찰이 싫다는 내 말에 그는 무척 흐뭇해하더니, 내가 자기 증인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가 자기를 배신했다고만 하면 된다기에 증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
밤에는 개를 잃어버린 살라마노 영감이 찾아와 신발 끝만 내려다보며 물었다. “보호소에서 그놈을 돌려주겠지요, 뫼르소 씨? 안 그러면 난 어떻게 됩니까?” 벽 너머로 이상하고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왠지 모르게 엄마 생각이 났다.
바뀌지 않는 삶
레몽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 일요일에 친구의 바닷가 오두막으로 여자 친구와 함께 오라고 했다. 옛 애인의 오빠가 낀 아랍인 무리가 온종일 자기를 미행했다고도 덧붙였다.
이윽고 사장이 나를 부르더니, 파리에 새로 낼 사무소로 가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사장은 삶을 바꾸는 데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 사람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고, 어떤 삶이든 다 거기서 거기이며, 여기서 사는 내 삶도 전혀 싫지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사장은 언짢은 표정으로, 내가 늘 엉뚱한 대답만 하고 야망이 없다고 나무랐다. 생각해 보면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 이미 그런 것은 실상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