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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센트

다구치 란디 지음 | 한숲
1. 낯선 러브호텔에서 불쾌한 기분으로 잠을 깼다. 옆에 있는 남자는 오랫동안 같이 일해온 카메라맨인 기무라다. 어젯밤 과음을 한 탓에 어쩌다 이 남자와 한 침대에 있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남자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나 콘센트를 찾아 노트북 전원을 꽂고, 전화기 단자를 찾아 노트북 모뎀에 연결했다.

전원스위치를 누르자,"윙-" 하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노트북 시스템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순간이 좋다. 화면에 라이트가 켜지고 쉴새없이 소리를 내며 하드디스 크가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움직여, 움 직여, 소인들아."

기무라가 깨서 주식 사이트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나에게 주식이 재미있느냐고 묻는다. 자주 듣는 질문이다. '그럼 당연하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인데.' 그걸 모르고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금융전문 잡지의 자유기고가라는 내 직업 때문에 그는 내가 지금 자기에게 무관심하고 일만 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 같다. 기무라는 어이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를 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 내게 말한다. "난 잠깐 즐긴다는 생각으로 이러는 거 아냐." 난 그만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는 왜 기무라와 잔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로부터 오빠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오빠는 2개월쯤 전부터 행방이 묘연했었다. 오빠의 죽음에 대해서 나는 무척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오빠는 어젯밤 러브호텔의 천장에서 내가 섹스 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 다. 죽어서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더니 여동생은 만취해서 남자에게 안겨있었던 것이다. 안아준 남자의 어깨 너머를 보다가 무표정한 오빠의 눈과 마주쳤다. 등골이 오싹했다.

2. 밤 8시쯤 고후 분지 근처의 역에 도착해 예전과 달리 깨끗이 포장된 논길을 따라 집을 향해 걸었다. 오빠도 자주 이 길로 학교에 다녔다. 내가 어렸을 때 오빠는 나를 무척 괴롭혔다. 처음엔 장난으로 하다가 어느 순간 몰입하기 시작하면, 눈에 초점을 잃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나를 계속 때렸다. 그런 때는 이 사람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로등 불이 미치지 않는 논둑 길의 어둠 속에 하얀 그림자가 움직였다. 시로였다. 시로는 어릴 적 오빠가 아끼던 하얀 개인데, 어느 날 만취한 아버지가 오빠가 보는 앞에서 시로를 때려 죽였다. '지금 이 개가 시로일 리가 없어.' 그것은 이미 20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었다. 나는 개의 뒤를 쫓아 걸었다.

시로는 건널목 앞에서 나를 한 번 돌아보고 짖더니 건너편으로 달려갔다. 사고가 많아서 '사람잡는 건널목'이라 불리는 곳이다. 건널목 저편의 어둠 속에서 시로와 나란히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등이 굽고 여윈 뒷모습은 틀림없이 오빠였다. "오빠!" 하고 몇 번 부르자 그 사람은 돌아보려 했지만, 그 순간 굉음을 울리며 나타난 전철이 갑자기 시야를 가로막았다. 전철이 지나간 후에는 시로도 오빠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건널목에서 오빠를 봤다는 내 말에 아버지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 나의 멱살을 잡더니 오빠는 죽어서 끔찍한 모습으로 이미 썩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인을 물었지만, 엄마마저도 침묵할 뿐이다. '맞아, 이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것은 무엇 하나 말해주지 않았어.'

3. 오빠의 시체는 부동산 여직원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오빠는 두 달 전 아파트를 계약하고 2개월 분의 방세를 미리 지불했다고 한다. 선불한 두 달이 지났지만 방세가 들어오지 않자 부동산에서 여직원을 오빠의 아파트로 보냈던 것이다. 여직원은 아파트에 들어서기도 전에 생선이 썩는 듯한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술에 취한 아버지와 함께 아파트를 찾았다. 심한 냄새에 이웃 주민들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우리를 훔쳐보고 있었다. 사체가 있던 부엌의 타일바닥에는 엄청난 양의 검붉은 피가 젤리처럼 응고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꾸물대고 있었다. 나는 생전에 오빠가 좋아하던 콜라를 굳어가는 피 앞에 따놓았다.

죽은 그의 방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청소기였다. 마치 청소를 시작하려고 막 콘센트에 꽂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오빠는 왜 청소를 그만 둔 것일까.' 오빠가 죽은 지금 그 이유는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오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며칠을 누운 상태로 지낸 것처럼 방에는 아무런 생활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고향집에 돌아오자 장의사에서 한 남자가 와 있었다. 남겨진 가족에게 끔찍하고도 현실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을 대하고 있자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와 협의하며 밤샘과 장례식을 치르는 이틀 동안 나는 장의사에게 기묘한 동료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그에게 오빠의 부고를 듣고 오는 길에 건널목에서 오빠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경험상 장례식이 지역적으로 몰리는 현상을 매번 겪는다며 죽은 자는 서로 부르는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4. 현기증이 날 정도로 무더운 날씨에 나는 오빠의 아파트에서 소독회사의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쑥한 얼굴을 한 소독회사의 주임인 젊은 청년은 장의사 남자처럼 이런 일에 있어서 프로인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사람이 죽은 장소를 보면 뭔가 죽은 사람이 남기는 메시지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오빠 방은 아무리 둘러봐도 청소기의 콘센트 외엔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이것은 오빠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인지도 몰라요. 오빠는 죽기 전에 내게 콘센트 이야기 를 해준 적이 있어요." 내 말을 들은 청년은 펜치로 콘센트 코드 끝을 잘라서 내게 주었 다. 자른 코드 부분에 가는 선이 드러나 있었다. 내 손안에 놓은 콘센트는 말라붙은 새의 다리 같았다.

5. 기무라는 내 소파에 앉아 그 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나는 술에 취한 채로 무작정 러브호텔로 가자고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하고 있었다. 기무라는 약간 실망한 듯 했지만, 내가 다시 그를 불러 줘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기무라는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갰다. 그 순간 역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오빠의 방에서 맡았던 죽음의 냄새가 그에게서 났던 것이다.

그에게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말했더니 그는 친절하게도 모두 이해한다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내 코는 오빠의 죽음에 대한 쇼크로 인해 과민해진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 냄새는 환상일까. 일시적인 것일까. 아니면 계속될까. 문득 고향집으로 가던 건널목에서 본 사람의 모습이 분명 오빠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무라의 말대로 나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빠의 죽음에 대해 쇼크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6. 졸업 후 처음으로 대학을 찾았다. 이 곳으로 오는 길에도 내내 시체가 썩어가던 냄새 입자를 맡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를 맡으면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 오빠의 시체가 썩어 가던 냄새야...'

오래된 대학 건물의 복도를 지나 '심리학 연구실'이라 쓰여진 낡은 간판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아직 구니사다 아츠오를 만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 시절 그 교수의 연구실에서 심리학을 배웠다. 심리분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환자가 카운셀러에게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는 일이 흔히 있는데 이를 '전이'라 한다. 그와 나도 '전이'와 '역전이'로 인해 열애에 빠져버린 사제지간이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심정을 이성적으로는 전이라고 인정하고 싶었지만 그에 대한 감정과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냉정하던 그도 1년이 지나자 나를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우리는 만날 때마다 거의 매번 섹스를 했다. 하지만 그는 점점 더 변태적인 것을 나에게 요구했고, 전이가 사라져버린 어느 날 나는 그를 깨끗이 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나의 부탁을 들어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를 마주했다. 구니사다는 냉소적이면서도 사무적인 태도로 나의 방문과 오빠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에게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오빠가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았던 사실과 그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그에게 상담 받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오빠는 졸업식날 친구들에게서 따돌림을 받은 이후 다른 곳으로 직장을 잡아 고향을 떠났다. 그 뒤로도 수없이 직장을 옮겨다니면서 끝내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그를 참아내지 못했다. 서로 폭력을 휘둘렀고 가족간에 살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그를 나의 자취방으로 데려왔다. 가족간의 카운셀링은 99% 실패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오빠는 내 말은 잘 듣는 편이었고 나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모습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내가 그를 견딜 수 없어 그때부터 나는 남자친구 집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없어져버렸다. 아버지에게서 부모 자식간의 연을 끊는 위자료 조로 100만 엔을 받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두 달 후 그는 썩은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

나는 이런 결과를 예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런 결과를 예감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알고 있을지 모르는 그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고 지금 그 숨겨진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구니사다는 이런 내 두려움과 예민해진 내 후각에 대한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나에게 분명한 환자로서 카운셀링을 받을 것을 제안했다. 다음 약속을 정한 후 그는 끝까지 나를 사무적인 태도로 대했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상처를 받았다. 내가 상처를 받다니... 이미 구니사다에게 의존하게 된 것 같아 두렵고도 놀라웠다.

7. 나는 엄청난 피로감을 느끼며 집에 돌아와 곧바로 잠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오빠는 나를 애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오빠를 실망시킬까 봐 두려워서 일부러 연인처럼 행동했지만, 곧 당치도 않은 일을 저질렀다는 후회가 들었다. 내가 다가오는 그를 거부하자 오빠는 뭔가를 깨달은 듯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우리는 고향의 역을 향해 걷고 있었고, 오빠는 어느 순간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맣게 변해버렸다. '다시 한번 애정을 쏟으면 오빠는 틀림없이 원래 크기로 돌아올 거야.' 나는 왠지 확신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오빠를 보니 오빠의 몸에서 하얀 새 다리 같은 콘센트 한 가닥이 나와 있었다.

8. 전화벨 소리에 꿈이 조각났다. 기무라와 통화를 하는 내내 나는 꿈속에서 본 콘센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빠가 <세계 잔혹 이야기>라는 영화 얘기를 하면서 콘센트에 대해 말했던 것을 기억해내고는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놓고 기무라와의 약속장소에 나갔다.

기무라는 내게 결혼하자고 말했다. 남자에게 지나치게 헤픈 내 사생활을 오랫동안 보아왔으면서 프로포즈를 하느냐고 묻는 내게 그는 나를 정말 좋아한다고 했다. 난 딱 부러지게 기무라처럼 사람이 너무 좋은 남자는 재미없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에게서 심한 냄새가 느껴진다. 현기증이 나서 쓰러지려고 하는 나의 팔을 기무라가 잡는다. 괜찮으냐고 묻는 그의 입에서 또 다시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9. 상담을 하는 구니사다는 여전히 차분하고 사무적인 어조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시체 냄새를 맡았다는 것과 지난번에 꾼 오빠가 작아진 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오빠가 처음 내 아파트로 왔을 때, 나는 정말 연인을 맞는 것처럼 오빠를 위해 옷과 세면도구를 준비해 두었었다. 그때 오빠는 어린아이처럼 내가 해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기무라의 프로포즈에 대해 말했더니, 구니사다는 내가 유혹을 하는 여자라고 했다. 나는 오빠도 기무라도 유혹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을 번갈아 떠올리고 있자니 소름끼칠 정도로 께름칙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오빠와 기무라는 어딘가 닮은 데가 있는 것이다.

10. 집에 돌아와서 <세계 잔혹 이야기> 비디오를 틀어 오빠가 말했던 장면을 찾아보았다. 3편의 한 에피소드 중에 콘센트를 꽂았을 때만 살 수 있다고 믿는 한 정신분열증 아이가 나왔다. 남자아이는 인형처럼 미동도 않고 있다가 콘센트를 꽂으면 움직였다. '이거야!' 오빠는 가끔 이 소년에 대해 말했었다. 내가 오빠의 방에 있던 청소기의 콘센트에 집착했던 것은 오빠에게 이 소년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빠의 몸에서 콘센트가 늘어져 있는 꿈을 꾼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비디오 속의 소년은 마치 자신이 전기로 움직이는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 간이기를 거부하고 기계로서 사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왜일까. 아마도 기계인 쪽이 그에게는 살기 편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왜일까. 어떤 원인의 결과일까... 그런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빠 역시 스스로 콘센트를 뺀 것인지도 모른다.

콘센트를 뺀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려 정신을 차렸다. 기무라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같이 풀어가자고 한다. 기무라에 의하면 우리가 처음 밤을 보낸 날 내가 천장 구석을 쳐다보며 오빠가 저기 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11. 또 꿈을 꿨다. 대학 시절로 돌아가 온천으로 심리학 합숙 세미나를 온 것 같다. 구니사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를 애무하고 있다가 사람들이 들어오자 옷장 안으로 숨어버린다. 뭔가를 눈치챈 듯한 혼다 리츠코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12. 구니사다에게 그와 섹스하는 꿈을 꿨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내가 자기를 아직 믿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자기를 매정하게 차버린 나를 미워하지 않느냐고 오랫동안 참아 오던 질문을 던졌다. 구니사다는 많이 괴로웠지만 실연이라는 것은 자기 동일성의 위기라는 이론을 몸으로 깨달은 귀중한 체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나를 상담해 주는 것은 의사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나는 분명 구니사다를 신뢰하지 않는다. 기무라와 자던 날과 고향의 건널목에서 오빠의 모습을 본 일은 말하지 않았다. 심리학적으로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낸 환영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연구실에서 나와 멍청히 대학 캠퍼스를 걷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진짜 혼다 리츠코를 만났다.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을 따라가다 보니 대학 시절 나는 여장부 스타일의 그녀에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게도 리츠코는 나를 질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구니사다에게 빠져 같은 또래의 남자들에겐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의하면 모든 남학생들이 나와 사귀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나에게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며 관심을 가졌었다고 했다.

이성적인 면이 강했던 리츠코였지만 지금은 예상외로 샤머니즘을 테마로 연구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네오 샤머니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샤먼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어쨌건 간에 나는 샤먼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리츠코의 일에 흥미가 갔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오빠의 영혼을 불러 왜 죽었는지 꼭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샤먼이란 존재는 공동체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거야?" "글세, 굳이 말하자 면 그들은 공동체 속의 콘센트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리츠코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13. 난 오빠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리츠코의 말대로 샤먼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기무라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가달라고 말했으나, 힘이 없는 그의 목소리로부터 뜻밖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냄새가 난다는 내 말을 듣고 혹시나 싶어 병원에 가봤더니, 몸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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