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 동방미디어
릴리의 방을 나섰을 때 피가 쏟아지는 왼팔만이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유리컵의 얇은 파편을 주머니에 넣고 안개가 자욱한 도로를 마구 달렸다. 집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거대한 생물에게 통째로 삼켜져 그 내장 속을 빙글빙글 도는 동화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번 걸려 넘어지고 쓰러졌다. 그때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유리가 잘게 부수어졌다. 빈터를 가로지르는 도중에 풀숲으로 쓰러졌다. 넘어진 채 젖은 풀을 씹었다. 쓴맛이 혀를 찔렀고, 바로 그때 풀 위에서 쉬고 있던 작은 벌레가 입 속에 들어왔다. 벌레는 까칠까칠한 가는 다리로 내 입안에서 몸부림쳤다.
손가락을 입안에 집어넣어 꺼냈더니, 등에 무늬가 있는 둥근 벌레가 침에 젖어서 기어 나왔다. 곤충은 침으로 젖은 다리로 미끄러져 가면서 풀 위에 내려앉았다. 벌레가 할퀴어 놓은 잇몸을 혀로 쓰다듬고 있는 동안 풀 위에 맺혀 있던 이슬이 내 몸을 식혀 주었다. 풀 냄새가 전신을 감싸면서 몸에 가득 찼던 열이 서서히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하다. 밤에 느긋하게 병원 정원에 앉아 있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거대한 검은 새는 지금도 날고 있고, 나는 쓴 풀이라든가 둥근 벌레와 함께 태내에 갇혀 있다.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이 나방처럼 몸을 딱딱하게 하지 않는 한 그 검은 새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는 없으리라.나는 그린 아이즈가 생각났다. "너는 검은 새를 보았어? 너는 검은 새를 보게 될 거야." 그린 아이즈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 방 밖의 저 창문 너머로 거대한 검은 새가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 검은 밤 그 자체와 같은 거대한 새. 빵 부스러기를 쪼아먹는 흔히 눈에 띄는 회색 빛 새들과 함께 하늘을 날고 있는 검은 새.
단지 그 검은 새는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에 부리가 뚫린 구멍이 창문 너머 저쪽에서는 마치 동굴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그 전체를 볼 수는 없는 것이리라. 내가 죽인 그 나방은 틀림없이 나의 전체를 깨닫지 못하고 죽은 것이 틀림없다.
"릴리, 새가 보여? 지금 밖에서 새가 날고 있지? 릴리 그걸 느껴? 나는 잘 알고 있어. 나방은 내 실체를 알지 못했지만, 나는 알아. 그건 새야. 거대한 검은 새. 릴리도 알고 있지?" "류, 당신 지금 미쳤어? 정신 좀 차려."
"릴리, 얼버무리지 마. 나는 이제 알았어. 다시는 속지 않겠어. 나는 알고 있어. 여기가 어딘지 알아. 새와 가장 가까운 곳이야. 여기서는 틀림없이 새가 보일 거야. 그 검은 새야. 이것을 깨닫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새야, 릴리. 검은 새가 보여?" "그만해! 그만해, 류. 그만 좀 해!"
"릴리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어? 나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을까. 새는 분명히 날고 있어. 저것 봐, 저 창문 너머를 날고 있어. 내 도시를 파괴한 새야." 릴리는 울면서 내 뺨을 때린다. "류, 당신 미쳤어. 그걸 몰라?"
'릴리에게는 새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릴리는 힘껏 창문을 연다. "릴리! 저것이 새야. 잘 봐, 저 마을이 새인 거야. 저것은 마을이 아니야. 저 마을에는 사람 따위는 살고 있지 않아. 저것은 새야. 모르겠어? 정말 몰라? 사막에서 미사일을 향해 폭발하라고 외친 남자는 새를 죽이려고 한 거야."
"새는 죽이지 않으면 안 돼. 새를 죽이지 않으면 나는 내 자신을 이해 못하게 되는 거야. 새가 방해하고 있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숨기고 있는 거야. 같이 새를 죽여 줘, 릴리. 아무 것도 안 보여, 릴리. 아무 것도 안 보여!"
나는 바닥에 쓰러져 나뒹군다. 릴리가 밖으로 달려나간다. 차 소리가 난다. 전구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새가 날고 있다. 창 밖을 날고 있다. 릴리는 어디에도 없다. 거대한 검은 새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나는 카펫 위를 흩어져 있는 유리컵 파편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움켜쥐고 떨리고 있는 팔에 푹 찔렀다.(8)(9)(5)(6)릴리가 나를 보고 있다. 치아들 사이로 하얀 거품이 고여 있다. 입안의 살을 깨문 듯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류, 도시는 어떻게 됐지? 릴리는 도로에 누워 하늘을 향한 채 묻는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루즈를 꺼내, 입었던 옷을 찢어내고 몸에다 그어대기 시작한다. 낄낄거리면서 배와 가슴, 목에다 빨간색 선을 그린다.
나는 모든 것이 텅 빈, 단지 중유 냄새만이 가득 찼다는 걸 깨닫는다. 도시라니, 그런 건 어디에도 없다. 미친 듯 춤추며 축제를 벌이는 아프리카 여인처럼 루즈로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난 릴리가 말한다. "류, 나를 죽여 줘. 왠지 이상해. 차라리 그냥 나를 죽여 줘." 눈물이 가득 고인 릴리가 외친다. 우리는 내동댕이쳐졌다. 철조망에 몸을 부딛쳐 본다. 철조망에 붙은 뾰족한 바늘이 어깻죽지 살을 찌른다.
나는 내 몸에 구멍을 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오로지 중유 냄새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생각에만 계속 빠져 있다 보니, 주위에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게 된다. 땅바닥을 기면서 릴 리가 나를 부른다. 다리는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고 온통 빨간색 알몸으로 땅에 널브러져 계속 자기를 죽여 달라고 외치고 있다. 나는 릴리에게 다가갔다. 릴리는 격렬하게 몸을 떨면서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다.
"빨리 죽여 줘, 어서 죽여 달란 말야!" 나는 빨간 줄이 그어진 릴리의 목에 손을 얹는다. 그때, 하늘 끝이 반짝 빛났다. 순간 창백한 섬광이 모든 것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릴리의 몸도, 내 팔도, 미군기지도, 산들도, 하늘도 비쳐졌다. 그리고 나는 투명해진 것들 저 건너에 곡선이 그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뭉개진 곡선, 하얗게 높낮이가 있는 부드러운 곡선이었다. "류, 자신이 어린애라는 거 알지? 역시 류는 어린아이야." 나는 릴리의 목에 둘렀던 팔을 떼고서, 릴리의 입 속에 고인 흰 거품을 혀로 핥았다. 릴리가 내 옷을 벗기고 끌어안는다. 무지개 빛 기름이 어딘가에서 흘러와서 우리의 몸이 있는 데서 좌우로 갈라졌다.전철 안은 번쩍번쩍 빛이 났다. 전철 굴러가는 굉음과 술 냄새가 가득 차 있어 나는 속이 뒤집어졌다. 요시야마는 니브롤에 취해 붉어진 눈으로 전차 안을 돌아다니고, 모꼬는 출입문앞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하철역에서 우리는 다시 니브롤을 두 알씩 씹어 먹었다. 요시야마가 가슴을 누르며 지하철 바닥에 토해낸다. 요시야마 주변의 승객들이 와아! 하며 도망을 친다. 시큼한 악취가 이쪽으로 흘러온다. 선반 위에 있던 신문지로 요시야마는 입을 쓰윽 닦는다.
토한 것 중에 엷은 액체만이 전철의 진동으로 바다에 펴졌다. 그 차량으로는 새로 타는 승객이 없다. '개 같은 자식들!' 그렇게 중얼거리며 요시야마는 창문을 주먹으로 두드린다. 나는 머리가 무거워 손잡이를 꽉 잡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다. 모꼬가 얼굴을 들고 내 손을 잡지만 감각이 둔해져서 그걸 느끼지 못한다.
전철 한 켠에서 등을 돌리고 책을 읽는 여자 앞에 요시야마가 섰다. 입가에 침을 흘리는 요시야마를 보고 여자는 도망치려고 했다. 요시야마는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팔을 잡고 몸을 세게 돌려 끌어안았다. 여자의 얇은 브라우스를 찢는다. 비명이 전철 소리보다 크게 울린다. 승객들이 다른 차량으로 도망간다.
여자는 책을 떨어뜨리고 핸드백 속은 뒤집어져 바닥에 흩뿌려진다. 모꼬는 싫은 표정을 지으며 "배고파." 하고 졸린 눈으로 중얼거린다. "류, 피자 먹고 싶지 않아? 앤쵸비 과자, 핫소스 듬뿍 넣고. 입안이 얼얼하도록 매콤한 것 말이야." 여자가 요시야마를 떼밀어 버리고 이쪽으로 달려온다. 바닥의 오물을 피해 턱을 내밀고 열린 앞가슴을 가리면서. 나는 여자의 다리를 걸었다.
뒹구는 여자를 다시 잡아 세워 입술을 빨려고 한다. 여자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리며 몸을 빼내려고 한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승객들에게 요시야마가 '개자식들!' 하고 작은 소리로 내뱉는다. 승객들이 유리창 너머로 동물원 우리 안을 들여다보듯 우리를 보고 있다. 역에 도착하자 우리는 여자에게 침을 뱉고 플랫폼을 달렸다.
"이봐요. 저놈들을, 저놈들을 잡아줘요." 중년남자가 전철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넥타이를 휘날리면서 외치고 있다. 요시야마는 달리면서 토했다. 토한 것이 셔츠에 흘러내려 더러워졌고, 고무 슬리퍼 끄는 소리가 플랫폼에 울려 퍼진다. 요시야마가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굴렀다. 난간 손잡이에 부딪힌 눈자위에서 피가 배어난다. 요시야마는 달리면서 계속해서 콜록거리고 무엇인가 중얼거린다.
개찰구에서 모꼬가 역무원에게 팔을 잡히자 요시야마는 역무원의 얼굴을 후려갈긴다. 우리는 통로의 북적거리는 인파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주저앉으려는 모꼬를 잡아 일으킨다. 눈이 아파서 관자놀이를 문지르니 눈물이 나온다. 구역질이 파도처럼 맹렬하게 통로의 타일을 타고 기어오른 것 같아 나는 손으로 입을 꾹 누른다.(1)(2)(3)(4)비행기 소리가 아니었다. 귓가에 벌레가 날고 있는 소리였다. 파리보다 작은 벌레는 눈앞에서 잠시 동안 맴돌다가 어두운 방구석으로 사라졌다. 천장에 매달린 전구를 비추고 있는 흰색의 둥근 테이블에 유리 재떨이가 놓여 있다. 필터에 루즈가 묻은 가느다란 담배가 그 안에서 타고 있다.
정면에 큰 화장대가 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등이 땀에 젖어 있다. 여자는 다리를 앞으로 뻗어 검정색 스타킹을 둥글둥글 말아 벗었다. "잠깐만. 거기 타월 좀 갖다 줘. 분홍색 타월 있지?" 릴리는 말하면서 스타킹을 둘둘 말아 이쪽으로 던졌다.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와인을 다 마신 후, 릴리는 내가 보는 앞에서 금색 판탈롱 바지를 벗었다. 배에 고무줄 자국이 나 있다. 전에 릴리는 모델이었다고 한다.
류, 매니큐어 좀 지워 줘. 끈적끈적해서 기분이 안 좋아. 안아 일으켰더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등이 푹 파인 드레스를 입었는데, 진주 목걸이가 미끄러져 내릴 정도로 온몸이 땀투성이었다. 내가 매니큐어를 지워주자 "미안해, 가게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숱 많은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난 릴리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벽장으로 걸어가 은색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가는 주사기를 꺼냈다. 갈색의 작은 병을 불빛에 비춰 액체의 양을 살피고는 얼마만큼의 분량을 주사기 속에 빨아들여 몸을 구부려서 허벅지에 찔러 넣는다. 떠받치고 선 다리가 희미하게 떨린다.
내 방은 시큼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헤로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오키나와의 코끝에 땀이 촘촘히 맺혀 있다. 그것을 보니 릴리가 말한 대로 정말로 지독하게 무더운 밤이라고 생각되었다. 끈적끈적한 침대에 누워 축 늘어진 몸을 흔들면서 "자기는 안 더워? 오늘은 정말 지독하게 더운 날이야." 하고 릴리는 반복해서 말했다.
"류, 있지. 이 헤로인 얼마였어?" 도어즈의 레코드를 가죽 가방에서 꺼내면서 레에꼬가 묻는다. 10달러라고 대답하자, "정말? 오키나와(沖繩) 지방보다 싸네."하고 오키나와가 큰소리로 말했다. 오키나와의 풀어진 눈은 노랗게 탁해져 있다.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이미 상당히 취해 있었다.
"야, 너 보건소에 있었다는 게 진짜야?" 헤로인을 싼 알루미늄 상자를 열면서, 나는 오키나와에게 물었다. "응, 우리 꼰대가 나를 넣어 주었어. 미국 놈 보건소야. 나를 처음 붙잡은 놈들이 미국 헌병이었으니까. 먼저 미군 시설에서 치료를 받은 뒤, 이쪽으로 다시 보내지게 된 셈이야. 류, 역시 미국이란 나라는 앞서 있는 나라야. 난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레에꼬가 옆에서 대화에 끼여든다. "류, 매일 그처럼 모르핀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미군 보건소에 들어가고 싶어." 알루미늄 상자 구석에 놓인 헤로인을 귀이개로 모으면서 오키나와가 말했다. "이 바보야, 레에꼬 너처럼 흐리멍텅하면 들어갈 수 없어. 진짜 꾼들밖에는 안 된다고. 나처럼 양쪽 팔에 주사 자국의 옹이가 빽빽이 박힌 진짜밖에는 들어갈 수 없단 말이야."스푼을 촛불 위에 올려놓는다. 한순간에 수용액이 끓어오른다. 스푼의 안쪽은 거품이 일고 김이 난다. 바깥쪽은 까만 그을음으로 더러워진다. 오키나와는 천천히 촛불에서 스푼을 떼어서 아가에게 수프를 먹일 때처럼 후후 불어 식힌다. 그래그래, 하면서 오키나와는 스포이트를 가만가만 눌러 피에 섞인 헤로인을 한꺼번에 내 혈관 속에 밀어넣는다. "한방 맞은 기분 어때?"
오키나와는 웃으면서 바늘을 빼낸다. 살갗이 떨리면서 바늘이 빠져 나오는 순간, 헤로인은 손가락 끝까지 돌아 둔한 충격이 심장까지 전해져 왔다. 눈앞에 하얀 안개 같은 것이 끼어 오키나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슴을 누르고 일어섰다.
숨을 쉬고 싶은데도 호흡의 리듬이 바뀌어져 잘 되지 않는다.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지고 입 속이 타는 것처럼 말라 있다. 레에꼬가 내 오른쪽 어깨를 안듯이 붙잡아 준다. 구역질이 발끝에서 치솟아 오르듯 울컥울컥 올라와 나는 신음 소리를 내며 침대로 쓰러졌다. 베개에다 얼굴을 묻는다. 목구멍은 말라붙었는데도 쉴새없이 침이 입가로 흘러내려, 그것을 혀로 핥을 때마다 아랫배에서 지독한 구역질이 올라온다.
레에꼬는 담배에 불을 붙여 침으로 젖어 있는 내 입술에 물려주고 오키나와를 향해 말한다. "이리 좀 와 봐. 류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린 꼬마 같아. 떨고 있잖아. 가여워라. 어머나! 눈물도 흐르네." 담배 연기는 살아 있는 동물처럼 폐의 벽을 할퀸다.
불이 꺼졌다. 오키나와와 레에꼬가 옷을 벗는 소리가 들린다. 레코드의 음악이 커졌다. 도어즈의 소프트 퍼레이드. 그 음악소리 사이로 두 사람이 비벼대는 융단 소리와 레에꼬의 억누른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레에꼬와 오키나와가 일어나 서로 땀을 닦아주고 나서 다시 초에 불을 켰다. 눈이 부셔서 나는 몸을 돌린다.
둘은 내 쪽에서는 들리지 않는 작을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구역질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치솟아 오른다. 입술을 앙 다물고 시트를 꽉 잡고 참았더니, 머리까지 올라온 구역질이 다시 가라앉으면서 사정할 때와 똑같은 쾌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오스카의 방 한가운데에 주먹만한 하시시가 향로에서 타고 있다. 자욱히 피어나는 연기는 숨을 쉴 때마다 원하지 않아도 가슴속으로 스며들어간다. 30초도 지나지 않아 모두들 하시시에 완전히 취해버린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내장이 흐물흐물 기어 나오고, 다른 사람의 땀이라든가 입김이 구멍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게다가 하반신은 깊은 늪에 잠긴 것처럼 푹 젖어 있고, 입은 누군가의 몸을 핥아 체액을 빨아 마시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접시에 담긴 과일을 먹고 와인을 마시는 동안, 방 전체가 열기로 후끈거리기 시작한다."릴리, 자동차로 드라이브 한 적 있지? 몇 시간이나 걸려 바다라든가 화산으로 가는 거야. 아침에 아직 눈이 따끔거릴 만큼 졸릴 때 출발하여 도중에 경치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거야. 아침에 출발할 때, 카메라의 필터가 안 보였는데 어디에 넣어 두었을까? 라든지, 어제 낮 시간 텔레비전 프로에 나온 그 여배우의 이름이 뭐였더라? 라든지 아무튼 별의별 생각을 다하지 않겠어? 그러면 떠오른 그 생각이 차에서 보이는 풍경과 겹쳐져 가는 거야."
"카메라와 필터와 꽃밭, 그리고 발전소가 하나가 되는 거야. 마음이 내키는 대로 눈에 보이는 것들과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천천히 머릿속에서 섞어. 꿈이라든가 읽은 책이라든가 기억들을 찾아내어 오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