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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키요 사르니엔토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지음 | -
페리키요 사르니엔토(El Periquillo Sarniento)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주인공. 자신이 겪었던 부랑배의 생활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찬파이나: 서기. 페리키요를 조수로 데리고 있지만, 그의 여자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내쫓는다.

라파멘타스: 이발사. 페리기요를 조수로 데리고 있었지만, 이발사 마누라의 흉을 보다가 쫓겨난다.

푸르간테: 의사





태어나서 고아가 되기까지

내 이름은 페드로 사르미엔토다. 그런데 이 좋은 이름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근지러운 앵무새)라는 듣기에 거북스러운 이름을 달게 되었을까? 그 내력은 이렇다. 내가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갔을 때 눈치 빠른 친구놈들은 내가 옴을 앓은 적이 있고 또 입이 싸다는 사실을 대번에 눈치채고는 페리키요(앵무새, 수다쟁이) 사르니엔토(옴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때로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영악할 때도 있다.

나는 1771년인가 1773년인가 하는 해에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중류층 가정에 외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점잖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으나, 어머니는 좀 방정맞고 생각이 없는 여자였다. 내 성질머리가 더럽게 비틀어진 것은 모두 내 어머니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외아들이라 그랬는지, 어머니는 나를 떼쟁이로 키우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나마 하나 있는 자식을 제대로 키워보자고 했지만, 어머니의 앙탈과 눈물과 고집 앞에 두손, 두 발 모두 들고 말았다. 나는 내 유년시절을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보냈다. 나는 고자질로 하인들을 다스렸고, 투정으로 어머니를 조종했고, 어리광으로 아버지의 매를 피했다.

자기 버릇 개 못준다고, 학교에 입학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었지만, 남 탓할 일은 아니다. 나는 원리원칙을 배우기보다는 요령과 술수를 터득하는 데 바빴고, 배짱만 있는 놈들과 어울리며 순진한 학생들 골려먹기에 분주했다. 내가 보기에 학교라는 곳은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첫째 문제는 선생들이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생각도 못하고 아이들 앞에서 함부로 신세 타령을 일삼는 선생, 무조건 매를 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선생, 필요한 매도 들지 못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선생...... 진짜 나 같은 놈이 다시는 없기 위해서라도 학교 선생 선발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교육을 마치자 아버지는 직업 교육을 시키려 했다. 남겨줄 재산이 없었으니 확실한 밥벌이나마 보장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반대였다. 하찮은 귀족 나부랭이 출신이었던 내 어머니에게는 ‘실사구시(實事求是)’라거나, ‘명실상부’라거나 하는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저 체면만이 중요했다. 그러니 어머니가 실속 없는 허영심으로 나를 대학에 보내려 고집을 피웠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옥신각신. 내 부모님은 내 진학 문제로 평생에 처음으로 부부싸움이라는 것을 했다. 아버지의 판정패. 나는 당당하게 대학에 들어갔다. 그것도 밥벌이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문대학에.

대학에 가서도 농땡이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먹고 대학생이었다. 대학생 배지를 달아놓으니 아는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도 입만은 살아 있었다. 언젠가 하루는 시골 농장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친구놈의 꾐에 빠져 투우놀이를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다가 소에 받혀 죽다 살아났고, 말을 탄다고 깝죽거리다가 떨어져 온몸에 상처를 입었고, 또 아가씨들 앞에서 잘난 체한다고 혜성에 대해 들먹이다 망신만 톡톡히 당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이 되자 아버지는 다시 직업 얘기를 꺼냈다. 나는 죽기보다 싫었다. 내 삶의 철칙은 먹고 놀기였으니까.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내가 아무리 멋대로 산다고는 해도 아버지 앞에서는 불가항력이었다. 직장을 구하기 싫으면 군대라도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으름장에 나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우선 위기는 벗어나야 했으니까. 게다가 가만 보아하니 수도사 생활이야말로 진짜 놀고먹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수도원에 들어간 첫날부터 후회했다. 놀고먹기는커녕 못 먹고 새빠지게 일만 했던 것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싶어 그럭저럭 견디는 가운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이때다 싶어 아버지 죽음을 핑계삼아 수도원을 빠져나왔다. 잔소리꾼이 없어졌으니 완전히 내 세상이었다. 허랑 방탕, 유유자적, 안하무인.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아버지가 남긴 알량한 재산은 어느새 바닥이 나고 어머니마저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제는 혈혈단신, 사고무친, 천애고아가 되었다. 장례를 치를 돈도 없었던지라 나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서 어머니 장례를 치러주겠지 하는 기대만 품고 있었다. 사실 장례 절차라는 것은 문제가 많다. 쓸데없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식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못 먹을 감이라면 나무 채 불이라도 확 싸질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오랜 세월 몸종으로서 어머니에게 충성을 다해온 할망구가 갖은 애를 써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기어들어가 잔머리를 굴려 나머지 재산을 처분하고 막막한 세상으로 떠밀려나왔다.



감옥 생활

집을 나오니 갈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내 대부(代父)라는 사람도, 내 가까운 피붙이도 나를 외면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셔 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남에게 뒤질 새라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한껏 처먹고 하던 작자들이, 한푼 없는 알거지 대자(代子)나 조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나와 같은 피를 나눠가졌다는 사실을 창피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다. 나는 가슴에 한을 품고 두고보기로 했다.

나는 진짜 거지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다 동창생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시골 농장에서 나를 골려주었던 놈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때 그는 하늘에서 내려주신 동아줄이었다(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썩을 대로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 동창생도 한때 잘 나갔지만, 친척 어른한테 사기를 치다 쫓겨난 신세였다. 그는 노름판에서 바람잡이로 놀면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그는 내게 동업을 제의했다. 어쩐지 수상쩍어보이는 짓이었으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놈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내 인생은 글자 그대로 막나가기 시작했다. 노름판에서는 별놈의 짓거리가 다 벌어지는 법이다. 처음에는 완전 숙맥으로 꿔다놓은 보릿자루 꼴이었으나, 판을 들락거리다 보니 차츰차츰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손놀림도 부드러워졌고, 눈썰미도 갖추게 되었다. 돈 주인이 한눈 파는 사이 판돈을 슬쩍하는 법도 익혔다. 또 재수없이 걸리는 날에도 파렴치한 표정으로 극구 부인할 능력도 갖추게 되었다. 단순, 무식, 과감. 노름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세 가지 철칙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촌놈 하나를 꼬셔 등쳐먹으려다 재수없게 걸리고 말았다. 워낙에 용의주도했던 친구놈은 용케 빠져나갔고,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했던 나는 그 촌놈한테 붙들려 늘씬하게 얻어맞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틀림없이 맞아죽었을 것이다.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운영하는 자선병원도 가관이었다. 병을 고치기보다는 병을 키워 저 세상으로 보내는 전초기지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천우신조로, 우여곡절 끝에 목숨이 붙은 채 병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성질을 이기지 못해 따지고 잔소리하다가 간호사들한테 늘씬하게 얻어터지긴 했지만.

병원을 나오자 다시 그 친구가 달라붙었다. 무슨 악연인지. 친구란 놈이 이번에는 강도질을 하자고 유혹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덕분에 이만큼 고생한 것으로 만족한다고. 나는 노파심에서 친구를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친구는 자신만만했다. 완벽한 시나리오를 짰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고사했다. 친구는 나더러 겁쟁이라며 떠들고 다니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했다.친구놈이 일을 벌이는 동안,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현장으로 가보았다. 드디어 일은 터지고, 친구 놈은 달아나고, 현장에 있던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강도당한 집 하녀가 나를 한패거리로 지목했던 것이다. 재수가 없으려니 모든 정황이 내게 불리했다. 그래서 나는 감옥에 갇히고 마는 신세가 되었다.

감옥도 어차피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한 곳이었다. 햇병아리 죄수로서 나는 능청맞은 고참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했다. 돈 뺏기고 욕을 먹고 매를 얻어맞았다. 시쳇말로 뭐 대주고 뺨맞는 꼴이었던 것이다. 감옥 서기도 사람 골려먹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무슨 놈의 조서는 그렇게도 많이 작성하는지, 또 뭔놈의 알고 싶은 것은 또 그렇게나 많은지...... 오만 가지 질문에 오십만 가지 거짓말을 늘어놓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안토니오씨라는 내 평생의 은인을 만나게 되었다. 예쁜 마누라를 둔 덕분에 어처구니없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점잖은 사람이었다. 이 양반 사연도 구구절절했다. 그는 예쁘고 날씬하고 춤 잘 추는 마누라를 자랑하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돈 많은 귀족이 마누라를 어떻게 해보려고 자기를 함정에 빠트렸던 것이었다. 이 양반은 자기 주제가 그러면서도 내 후원자로 나섰다. 안토니오씨는 나의 무죄를 인정해주었고,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내 뒤를 봐주었고, 또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피와 살이 되는 여러가지 영양가가 풍부한 원리원칙도 들려주었다. 반면 ‘새끼 독수리’라는 영악한 놈은 내게 들러붙어 피를 빨아먹기도 했다.



어느덧 안토니오씨도 무죄가 입증되어 감옥에서 나갔다. 끈 떨어진 연이라고나 할까. 새끼 독수리한테 속절없이 이리저리 뜯기는 와중에, 그래도 왕년에 먹물깨나 먹었다고 나를 그렇게나 골려먹었던 바로 그 감옥 서기의 눈에 띄어 나는 조기 석방과 함께 서기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꽃피는 호시절: 의사와 판사 시절

나는 서기의 조수로 일을 하면서 법조계의 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서기라는 사람들의 술수, 아니 법조계 자체에 깔려 있는 엄청난 부조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진리나 진실에는 눈을 감은 반면, 편법이나 술수라면 눈에 불을 켜고 배우고 익혔다. 이 서기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곤란한 처지에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가방끈이 짧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학력이 서기의 가방끈을 늘여주었다. 나는 서기의 손발이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그러다 서기의 애인에게 한눈을 파는 바람에,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여자는 서기가 어느 죄수일을 빌미로 집에 붙잡아놓고 재미보던 여자였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아니었다. 단지 재미삼아 그랬던 것뿐이었다.

서기의 집을 나와 방황하던 나는 예전에 내 아버지가 단골로 다니던 이발사를 만나 그 집에 빌붙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는 틈틈이 그 당시 이발사들처럼 외과 의술을 배우게 되었다. 내가 이발 연습을 할 때면 강아지들이 욕을 보았고, 외과 수술을 연습할 때면 시골 할망구들이 치를 떨었다. 이발사 조수로 있던 어린놈은 꼭 나를 빼박아놓은 놈이었다. 그놈의 인생관이 나와 아주 똑같았던 것이다. 놀고 먹기. 나는 놈과 죽이 맞아 입 품팔이로 나날을 보냈다. 내 별명 페리키요가 말해주듯 나는 입이 상당히 헤픈 편이다. 어느날 조수놈과 죽이 맞아 이발사 마누라 흉을 보다가, 이발사 마누라로부터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그 집에서 쫓겨났다.

나는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약방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이것도 먹물을 먹은 덕분이었다. 이때 나는 약에 대해 얼치기로 도가 트게 된다). 이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안심하는 순간, 조수로서 건방지게 약을 조제한다고 까불다가 잘못 조제하는 바람에 약방에서마저 쫓겨나게 되었다. 나는 약방에서 쫓겨난 즉시, 약방 주인과 경쟁 관계에 있던 고집쟁이 돌팔이 의사의 조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틈틈이 의학을 연구(?)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나는 의사의 책과 돈을 훔쳐 시골 마을로 가서 돌팔이 의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면서. 예전에 사귄 이발사 조수를 동업자 이발사로 데리고 다녔다. 한마디로 조수와 나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사기꾼이었다. 장님 문고리 잡는다는 말처럼, 초반에는 운이 좋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우연이라는 것도 확률이 문제 일텐데, 앞에서부터 잘 풀려나가면 갈수록 맞을 확률은 떨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곧 우리 일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내 손에 걸리면 어느 누구도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자 마을 신부가 하소연했다. 이렇게 다 죽여버리면 교회는 어떻게 꾸려나가느냐고. 참다못한 신부는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했다. 나와 의학에 대한 간담회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엉터리 돌팔이 의사인 나 때문에 수많은 의사들이 싸잡아 욕을 먹었다. 그래도 나는 굴하지 않고, 심기일전하여 환자들을 죽여나갔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무심치 않았다. 마침내 나는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돌 벼락을 맞으면서. 당연지사였으며, 인과응보였고, 사필귀정이었다.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방황했다. 싸움도 하고, 사기도 치고 역으로 사기도 당하고, 노름판도 기웃거리고, 따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뜻밖의 복권 당첨. 벼락부자로서의 호기. 결혼. 방랑. 방탕. 다시 패가망신. 다시 떨거지가 된 나는 교회에 취직하여 시체를 파내기까지 했다. 시체 손가락에 끼여 있던 반지 하나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또한 거지 패거리에 합류하여 가짜 병신 노릇도 했다. 짭짤한 벌이였다. 그러나 동냥을 얻기 위해 어린 자식을 꼬집어뜯는 엄마 거지를 보고는 삶에 회의를 느꼈다.

이래저래 지내다가 시골 마을 판사의 조수로 취직한 나는 다시 한번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왕년에 배우고 익힌 것들이 훌륭한 재산이었다. 판사라는 작자들의 속임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판사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탄핵받아 쫓겨나자, 나는 판사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내 세상이었다. 때린 데 골라 또 때리듯, 한 번 법에 걸린 놈들은 영원한 밥줄이었다. 나는 바람잡이까지 고용했다. 바람잡이로 하여금 노름판을 벌이게 하고는 급습했다. “돈을 줄래, 감옥에 갈래?” 이렇게 위협하면서 돈을 받아 챙겼다. 공갈, 협박, 공금 유용으로 나는 배를 채웠다. 말 그대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순대를 채웠던 것이다. 이때 주머니도 채워놨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후회막급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나는 다시 감옥살이 신세를 졌고, 결국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군 입대와 외국 나들이

군대에 들어간 나는 그 동안 갈고 닦은 잔머리를 굴려 직속 상관인 대령의 부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내가 대령을 이용해서 그렇지, 이 대령은 내 평생의 은인이었다. 대령은 지혜롭고도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대령은 틈만 나면 나를 일깨워주었다. 군대는 요령이라는 말이 있다. 요령이라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말이 군대지, 대령의 직속 부하로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내 위치를 최대한 이용해 돈벌이에 열을 올렸다. 대령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까. 대령이 죽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다. 대령이 죽고 나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대령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자선 사업가였다. 나는 내 사업으로 한 재산 마련하기도 하였거니와, 대령의 유산까지 상속하게 되어 상당한 재산가가 되어 있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면 제대하여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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