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고전문학
전쟁과 평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등장인물1. 베주호프가 - 갑작스러운 부와 진리 탐구
피에르 베주호프 - 주인공.
베주호프 노백작 - 아버지.
엘렌 쿠라기나 - 피에르의 첫 아내.
2. 볼콘스키가 - 자존심과 지성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 - 주인공.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볼콘스키 노공작 - 아버지.
마리야 공작 영애 - 여동생.
리자 - 안드레이의 첫 아내.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볼콘스키(애칭 니콜렌카) - 안드레이의 아들.
3. 로스토프가 - 정과 낭비
나타샤 로스토바 - 주인공.
니콜라이 로스토프 - 오빠.
일리야 로스토프 백작 - 아버지.
백작 부인 - 어머니.
베라 - 맏딸.
소냐 - 사촌.
페탸 - 막내.
4. 쿠라긴가 - 파괴자들
바실리 쿠라긴 공작 - 아버지.
엘렌 - 딸.
아나톨 - 아들.
이폴리트 - 아들.
그 밖의 주요 인물돌로호프 - 냉혹하고 담대한 장교.
데니소프 - 니콜라이의 상관이자 벗.
안나 미하일로브나 드루베츠카야 - 몰락한 공작부인.
보리스 - 안나 미하일로브나 공작부인의 아들.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 - 살롱의 안주인.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 모스크바 사교계의 엄격하면서도 다정한 귀부인.
플라톤 카라타예프 - 포로수용소의 농민 병사. 피에르에게 삶의 답을 준다.
쿠투조프 / 바그라티온 / 나폴레옹 - 실존 인물들.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담는 그릇.
제1권 · 1805, 평화로운 시작
안나 파블로브나의 야회와 피에르의 등장1805년 7월, 페테르부르크. 겉으로는 화려하고 우아하지만 속으로는 속물근성과 허영이 들끓는 사교계의 중심, 황후의 최측근 시녀 안나 파블로브나의 야회가 열렸다. 가장 먼저 도착한 권력자 바실리 쿠라긴 공작에게 안나가 대뜸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공작, 이것이 진정 끔찍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적그리스도(나폴레옹)의 만행을 두둔하신다면 더는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어요.”
안나는 알렉산드르 1세만이 유럽을 구원할 메시아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바실리 공작의 방탕한 아들 아나톨을 엄청난 재력가인 볼콘스키 공작의 딸 마리야와 맺어주는 혼담을 제안했다. 바실리는 겉으로는 “두 아들은 내 인생의 무거운 십자가”라 한탄하면서도, 안나의 달콤한 제안에 깊숙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날 밤 손님들 가운데 사교계의 이질적인 두 젊은이가 단연 눈길을 끌었다. 한 사람은 안경을 쓴 거구의 청년, 죽음을 앞둔 거부 베주호프 백작의 서자 피에르였다. 외국에서 자라 러시아 상류사회의 예법에 서툰 그는 어색하고 둔탁한 처신으로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차갑고 권태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응시하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이었다.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잔혹한 처형을 비난하며 목소리를 높일 때, 피에르가 불쑥 끼어들며 열띤 어조로 외쳤다. “그것은 국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혼란을 잠재우면서도 시민의 평등과 언론의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지켜낸, 실로 위대한 영웅입니다!” 좌중은 사생아의 불손하고 위험한 발언에 경악하며 술렁였으나, 오직 안드레이만이 친구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야회가 끝난 뒤 피에르는 안드레이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출정을 앞두고 상념에 잠겨 있던 안드레이가 문득 무거운 속내를 토로했다. “피에르, 결혼은 절대 서두르지 마.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확신할 때까지는 말이야. 응접실의 가벼운 수다, 헛된 소문, 화려한 무도회와 허영… 나는 지금 이 저주받은 마법의 굴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여자에게 매이는 순간, 사내는 죄수처럼 모든 자유와 가능성을 잃게 되는 법이지.” 피에르는 차갑지만 흔들림 없는 의지를 지닌 안드레이를 완벽한 인간의 표본으로 우러러보며, 자신 역시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겠다고 명예를 걸고 다짐했다.
그러나 안드레이와의 굳은 맹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날 밤 피에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나톨이 주도하는 타락한 술자리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잔혹한 결투꾼 돌로호프가 3층 창턱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아무것도 붙잡지 않은 채 독한 럼주 한 병을 단숨에 비우는 미친 내기를 벌이고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돌로호프가 빈 병을 흔들며 일어서자, 극도로 흥분하여 인사불성이 된 피에르 역시 이 광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는 술자리의 여흥거리로 끌려온 거대한 곰을 부둥켜안고 기괴한 춤을 추며 날뛰었다. 급기야 소음을 단속하러 들이닥친 경찰서장마저 제압해버리고는, 서장과 곰을 등 맞대어 꽁꽁 묶은 뒤 모이카 강물에 통째로 던져버리는 전대미문의 난동을 부렸다. 이 엄청난 기행으로 주동자인 돌로호프는 장교에서 일반 병사로 강등당했고, 아나톨은 아버지 바실리 공작의 빽으로 간신히 처벌은 면했으나 페테르부르크에서 쫓겨났다. 피에르 역시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 추방당해 모스크바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로스토프가의 온기와 베주호프 백작의 죽음같은 무렵, 모스크바에 위치한 로스토프 백작의 웅장한 저택에서는 막내딸 나탈리야(나타샤)의 명명일(영명축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른들이 격식을 차리는 응접실로, 열세 살 난 나타샤가 인형을 품에 안은 채 까르르 웃으며 폭풍처럼 뛰어들었다. 직설적이고 호탕한 여장부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모스크바로 쫓겨 온 피에르를 발견하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제 아비가 죽어가는 판에 곰에다 경찰을 묶고 놀아? 차라리 총이나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게 낫겠다!”
한편 식탁에 둘러앉은 남자들은 다가오는 전쟁과 선전포고를 화제로 열띤 논쟁을 벌였고, 젊은 대학생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피를 토하듯 “우리 러시아인은 오직 죽거나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라며 애국심을 불태웠다.
어른들의 심각한 세계 너머로, 소년 소녀들의 풋풋하고 치기 어린 사랑이 얽히고설키고 있었다. 나타샤는 수줍어하는 보리스를 온실로 이끌고 가서는, 훌쩍 화분 위로 뛰어올라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넌 날 사랑해?” “응. 하지만 네가 조금만 더 크길 기다릴게. 사 년만 기다려 줘, 그때 꼭 청혼할게.” 나타샤는 작은 손가락을 꼽으며 활짝 웃었다. “열셋, 열넷, 열다섯, 열여섯… 좋아! 그럼 약속한 거야.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이후 나타샤는 화분 뒤에 숨어 사촌 소냐가 니콜라이 오빠와 열정적으로 입 맞추는 장면까지 훔쳐보며 묘한 황홀경에 빠졌다. 깍쟁이 맏언니 베라가 동생들의 비밀을 어른들에게 일러바치겠다며 심술을 부리자, 나타샤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언니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 우리 마음을 절대 모를 거야. 언니는 감정 자체가 없는 사람이니까!” 한편 마음 따뜻한 백작 부인은 가난에 시달리는 옛 친구 안나 미하일로브나에게 보리스의 군장 비용으로 거금 오백 루블을 남몰래 쥐여주었고, 두 늙은 벗은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시각, 모스크바 최고의 거부 베주호프 백작이 여섯 번째 뇌졸중 발작을 일으키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4만 명의 농노와 수백만 루블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유산이 누구의 손에 떨어질지를 두고 온 모스크바 사교계가 들썩였다. 바실리 공작은 다급히 백작의 큰조카 카티시를 찾아가 은밀히 속삭였다. “백작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생아 피에르에게 남기고, 그를 합법적인 적자로 인정해 달라는 탄원서를 황제 폐하께 써 두었어. 그 유언장이 파기되지 않으면 우리는 단 한 푼의 유산도 만질 수 없네.” 막대한 부를 놓칠 위기에 격분한 카티시는 마지못해 베개 밑 서류첩에 그 문제의 유언장이 숨겨져 있다고 실토했다.
그날 밤, 야심만만한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영문도 모르는 피에르를 이끌고 백작의 임종을 지키러 저택으로 들어섰다. 상황 파악이 안 된 피에르는 모든 것을 안나에게 맡긴 채 무거운 침묵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장엄한 도유성사가 끝나고 피에르가 다가가 아버지의 살진 손에 눈물로 입을 맞추자, 죽음을 앞둔 백작은 마비되어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팔과 잔뜩 겁에 질린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없이 가련하고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에르의 커다란 눈망울에도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슬픔의 순간에도 응접실에서는 탐욕스러운 바실리와 카티시가 유언장이 든 서류첩을 차지하기 위해 추악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며 셋째 공녀가 뛰쳐나와 소리쳤다. “백작님이 숨을 거두시는데 나만 팽개쳐두고 밖에서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거예요!” 그 찰나의 틈을 타, 안나 미하일로브나가 표범처럼 서류첩을 낚아채어 침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유산을 빼앗긴 바실리 공작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절망에 찬 목소리로 울먹였다. “오, 신이여. 우리는 덧없는 욕망을 좇아 얼마나 자주 죄를 짓고 서로를 속이며 살아가는지요. 결국 모든 것은 저 무서운 죽음으로 끝날 것을….”
결국 숨겨진 유언장은 효력을 발휘했고, 어리숙한 사생아 피에르는 하루아침에 베주호프 백작의 칭호를 물려받으며 러시아 제일의 억만장자가 되었다. 헛된 계략을 꾸몄던 바실리는 빈손으로 쓸쓸히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벌거숭이 산의 엄격한 가풍과 안드레이의 출정같은 시기, 모스크바 외곽에 위치한 노(老) 볼콘스키 공작의 영지 ‘벌거숭이 산’. 과거 ‘프로이센 왕’이라 불릴 만큼 철저한 규율을 자랑하던 이 늙고 완고한 장군은 황제의 미움을 사 유배된 이래 시골에 칩거하며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게으름과 맹목적인 미신을 가장 큰 악덕으로 여겼고, 오직 끊임없는 활동과 냉철한 지성만을 미덕으로 숭배했다. 집안의 모든 일과는 시계 톱니바퀴처럼 분 단위로 어김없이 통제되었다.
노 공작은 딸 마리야 공녀에게 손수 기하학을 가르쳤는데, 독한 담배 냄새가 밴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매서운 눈을 번득일 때면 마리야는 공포에 질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곤 했다. “이런 멍청한 바보 같으니라고!” 노인은 불같이 호통을 치다가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떨고 있는 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 주곤 했다. 차갑고 엄격한 통제 속에서 마리야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은 깊은 신앙심과, 어릴 적부터 편지를 주고받던 오랜 벗 줄리와의 서신 교환뿐이었다.
얼마 후, 전장으로 떠나기 전 안드레이가 만삭의 아내 리즈를 데리고 벌거숭이 산에 도착했다. 하얗게 분을 발라 넘긴 구식 가르마 머리에 낡은 외투를 걸친 노 공작이 차가운 얼굴로 아들을 맞이했다. “그래, 위대한 전사께서 오셨구나! 감히 보나파르트를 꺾어보시겠다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두 부자는 나폴레옹의 능력을 두고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노 공작은 그를 운 좋게 시대의 파도를 탄 “보잘것없는 프랑스 애송이”라며 가차 없이 깎아내렸고, 안드레이는 “아무리 아버님께서 조롱하셔도, 보나파르트가 천재적인 전술을 지닌 위대한 장군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라며 팽팽히 맞섰다. 차가운 시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쥐 죽은 듯 앉아 있던 리즈는, 식사가 끝난 뒤 마리야에게 조용히 다가가 속삭였다. “네 아버님은 정말 너무 영리하신 분이야. 그래서 더 무섭고 숨이 막혀.”
이튿날 출정의 아침, 마리야가 조용히 안드레이의 방을 찾았다. “오빠, 리즈를 너무 모질게 대하지 마. 낯선 시댁에 홀로 남겨질 그 애의 처지가 지금 얼마나 외롭고 두려울지 헤아려 줘.” 그러고는 품에서 집안 대대로 참전하는 사내들이 지녀왔던 낡고 작은 은빛 성상을 꺼내 내밀었다. “이 성상으로 오빠의 무사 귀환을 축복할게. 전장에서 절대 몸에서 떼어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안드레이는 미신을 비웃는 듯한 가벼운 냉소를 띠면서도, 누이의 간절함을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조용히 성호를 그은 뒤 성상에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노 공작은 아들을 서재로 은밀히 불러들였다.
“여자들 치맛자락에 매달려 질금거리지 않고 단호하게 전장으로 떠나주어 고맙다. 사내에게 군무와 국가의 부름은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법이지.”그는 오랜 전우이자 총사령관인 쿠투조프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아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안드레이는 아버지를 향해 담담히 부탁했다.“만약 제가 전사하고 아내가 아들을 낳거든, 부디 아버님께서 거두어 훌륭하게 길러 주십시오.”노 공작이 매서운 눈빛으로 응수했다.
“허나 네가 니콜라이 볼콘스키의 핏줄답지 않게 전장에서 비겁하게 처신했다는 소문이 내 귀에 들린다면, 나는 죽어서도 너를 부끄러워할 것이다!”“그런 염려는 거두셔도 좋습니다, 아버지.”
안드레이는 결연하고도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저택 현관 앞에는 이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안드레이가 작별을 위해 만삭의 아내를 껴안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리즈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실신해 쓰러졌다. 안드레이는 기절한 아내를 조심스레 안락의자에 뉘어 놓고는 “마리야, 모든 걸 부탁해” 하며 굳은 얼굴로 누이의 손에 입을 맞춘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굳게 닫힌 서재 문 너머로는 노 공작이 코를 요란하게 푸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마리야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오라버니가 사라진 빈 문을 향해 간절히 성호를 그으며 신의 가호를 빌었다.
제2권 · 1805, 첫 출정
오스트리아 주둔과 강등된 돌로호프1805년 10월, 쿠투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원정군은 나폴레옹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보병 연대의 사열이 진행되는 가운데, 연대장의 눈에 푸르스름하고 남루한 병사 외투를 입은 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술자리 난동 사건으로 장교에서 졸병으로 강등된 돌로호프였다. 연대장이 그의 불량한 태도를 지적하며 호통을 치자, 돌로호프는 한 치의 굽힘도 없이 무례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대꾸했다. “상관의 명령에는 복종하겠습니다만, 모욕까지 묵묵히 참아낼 의무는 제게 없습니다.”
그날 오후, 오스트리아의 마크 장군이 피 묻은 검은 붕대를 머리에 감은 채 사령부로 들이닥쳤다. “당신 앞에 서 있는 이 패배자가 바로 그 불운한 마크요.” 울름 요새에서 오스트리아 전군이 나폴레옹에게 허망하게 항복했다는 흉흉한 소문은 참담한 사실로 확인되었다. 쿠투조프의 부관 안드레이 볼콘스키는 동맹군의 붕괴로 이번 원정의 절반이 이미 무너져 내렸음을 직감했다. 그때 복도에서 눈치 없는 익살꾼 제르코프가 마크 장군을 비웃듯 머리를 조아렸다. “무사히 살아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장군!” 그 꼴을 본 안드레이는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를 거칠게 돌려세웠다. “자그마치 사만 명의 병사가 학살당하고 동맹군이 궤멸했는데, 넌 지금 그게 웃음거리로 보이나!”
텔랴닌의 도둑질과 로스토프의 고뇌파블로그라드 경기병 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 중인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기병대위 데니소프와 한 숙소를 쓰고 있었다. 어느 날 데니소프가 베개 밑에 넣어 둔 군자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평소 굽실거리는 태도 탓에 로스토프가 몹시 꺼리던 장교 텔랴닌이 방에 다녀간 직후였다. 의심을 품고 여관으로 달려가 보니, 텔랴닌이 그 새 금화로 버젓이 밥값을 치르고 있었다. “그 돈은 데니소프 대위의 것이오. 당신이 훔쳐 갔군.” 로스토프의 추궁에 텔랴닌의 비굴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작님, 제발 저 같은 젊은 놈을 파멸시키지 마십시오. 돈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제겐 부양해야 할 늙은 부모가 있습니다!” 가난과 수치심에 질린 그의 모습을 보자 로스토프는 역겨움과 연민에 휩싸여 돈을 바닥에 내던지고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