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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2

레프 톨스토이 지음 | 고전문학


안나 카레니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제4부 출산과 용서, 그리고 청혼



분필로 나눈 암호 - 레빈과 키티의 화해


카레닌 부부는 한집에 살며 날마다 마주쳤지만 서로에게 남이나 다름없었다. 카레닌은 하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루에 한 번은 꼭 아내를 보았으나 집에서 함께 밥 먹는 일만은 피했다. 브론스키는 그 집 문턱을 넘지 않았고, 대신 안나가 밖에서 그를 만났다. 남편 카레닌도 그것을 알았다. 세 사람 모두에게 비참한 나날이었지만, 이것이 곧 지나갈 한때의 시련일 뿐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한겨울, 브론스키는 페테르부르크에 온 어느 외국 공작을 일주일 내내 떠맡아 경마장과 곰 사냥터와 술자리로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잘 먹고 만족스럽고 멍청한 그 공작이 꼭 제 모습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는 텅 빈 고깃덩어리 같은 인간이군. 나도 저 꼴이란 말인가?” 이레째 그를 열차에 태워 보내고서야 풀려나 집에 돌아오니 안나의 쪽지가 와 있었다. “저는 아프고 불행해요. 밖에 나갈 수도 없는데 당신을 못 보고는 더 못 견디겠어요. 오늘 저녁에 와 주세요.” 소파에 누운 그는 환영에 시달리다가 어둠 속에서 부들부들 떨며 깼다. 작고 더러운 농부가 헝클어진 수염으로 무언가를 뒤지며 프랑스어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꿈이었다. 그는 헛것이라 여기며 서둘러 그 집으로 갔다.

문간에서 그는 하마터면 카레닌과 부딪칠 뻔했다. 가스등이 핏기 없이 움푹 꺼진 얼굴을 비추었다. 카레닌은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모자에 손을 댄 채 지나쳐 마차로 사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차라리 결투를 청하거나 명예를 지키려 들면 나도 맞설 텐데, 저 나약함이라니.”

안나는 그를 보자마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고 오래도록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식탁에 앉자 그녀는 공작 이야기를 캐묻다가 이내 질투에 불이 붙었다. 그가 프랑스 무희 테레즈와 ‘아테네식 저녁’을 보냈다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당신들 남자들이란 어쩌면 그렇게 역겨운지!” 브론스키는 그녀의 잦은 질투에 마음이 식으면서도 그것이 곧 자기를 향한 사랑임을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시들었지만, 이제는 끊을 수 없는 사슬로 자신을 옭아맨 여자였다.

그가 몸은 좀 어떠냐고 묻자, 빈정거리던 기색이 걷히고 고요한 슬픔이 어렸다. “곧이에요, 아주 곧.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식으로는 아닐 거예요. 저는 그 일을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 거예요. 그래도 저 자신과 당신을 놓아줄 수 있으니 기뻐요.” 그녀는 꿈 이야기를 꺼냈다. 침실 구석에서 수염이 헝클어진 작고 끔찍한 농부가 자루를 뒤적이며 프랑스어로 빠르게 중얼거리더라는 것이었다. “쇠를 두드려라, 잘게 부수어라…….” 그러고는 하인 코르네이가 “마님은 해산하다 돌아가실 겁니다.” 하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브론스키는 제 꿈이 떠올라 똑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때 안나의 얼굴이 문득 부드럽고 엄숙한 빛으로 환해졌다. 제 몸속에서 움트는 새 생명의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카레닌은 그날 밤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정부를 집에 들이지 말라는 단 하나의 조건마저 짓밟혔다는 분노가 새벽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튿날 아침 그는 인사도 없이 아내의 방으로 들어서서 책상 서랍을 열었다. “뭘 찾으세요?” “당신 정부의 편지.” 그는 그녀가 긴요한 서류를 간직해 두는 서류집을 낚아채 겨드랑이에 끼고는 그녀를 도로 눌러 앉혔다. “몸가짐만 바로 하면 내 이름으로 당신을 지켜 주겠다는데, 그게 그리도 잔인하오?” “잔인한 정도가 아니라 비열해요!” 그녀가 미움에 차서 일어서려 하자 그는 팔찌 자국이 남도록 팔을 움켜쥐어 다시 앉혔다. “비열한 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밥을 먹으면서 정부에게로 달아나는 짓이오!”

그는 내일 모스크바로 떠나 이혼 절차를 변호사에게 맡기고 아들은 누이에게 보내겠다고 했다. “세료자를 데려가 저를 괴롭히시려는 거군요. 당신은 그 애를 사랑하지도 않잖아요. 세료자만은 남겨 주세요!” 그러나 그는 손을 뿌리치고 방을 나갔다.

페테르부르크의 이름난 변호사를 찾아간 카레닌은 이혼 소송을 의뢰했다. 한껏 멋을 부린 대머리 변호사는 이야기 도중에도 날아다니는 나방을 잡아채면서, 회색 눈에 어리는 짓궂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카레닌이 종교적 양심 때문에 편지로 입증하고 싶다고 하자, 변호사는 편지만으로는 부족하며 목격자가 직접 증언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결과를 바라신다면 그만한 수단도 감수하셔야지요.” 카레닌은 일주일 안에 연락하겠다고 하고 물러났다.

모스크바에 닿은 카레닌은 가제트니 광장에서 제 이름을 명랑하게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멋들어진 외투를 걸친 스티바 오블론스키였고, 마차 창으로는 돌리와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카레닌에게 처남은 세상에서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스티바는 기어이 그를 붙들고 이튿날 만찬에 오라고 졸랐다.

다섯 시가 지나 스티바가 들어섰을 때 응접실은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레빈의 이복형 코즈니셰프와 페스초프, 늙은 공작, 키티, 카레닌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키티는 레빈이 들어설 순간을 그리며 얼굴이 붉어지지 않도록 문만 바라보았다. 스티바는 손님들을 폴란드 논쟁으로 끌어들여 응접실을 단숨에 활기로 채웠다.

키티가 와 있다는 말에 레빈은 기쁨과 두려움으로 숨이 막혔다.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응접실에 들어서서 그녀를 보니, 겁에 질려 수줍어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입술을 떨며 차가운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못 본 지 정말 오래됐죠!” “당신은 못 봤을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봤습니다.” 레빈이 행복에 젖어 말했다. “에르구쇼보로 마차를 타고 가실 때요.” 옆에 섰던 스티바가 그를 카레닌에게 소개했다. 두 사람은 기차에서 세 시간을 나란히 보내고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사이였다.

식탁에서 코즈니셰프는 폴란드 논쟁을 농담으로 매듭지었다. “외래 민족을 러시아화하는 길은 오직 하나, 아이를 되도록 많이 낳는 것이지요. 스티바, 자네는 몇이나 두었나?”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키티는 레빈에게 곰 사냥 이야기를 청했다. 그녀가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용서를 구하는 마음과 다정한 사랑이 배어 있어, 레빈은 행복에 목이 메었다. 자신과 그녀만 남고 온 세상이 저 아래로 까마득히 멀어진, 어느 봉우리 꼭대기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식사가 끝나 부인들이 자리를 뜨자, 샴페인에 얼근해진 투롭초프가 불쑥 말을 잘랐다. “프랴치니코프 소식 들으셨소? 트베리에서 아내 문제로 결투를 벌이다 상대를 죽였다지 뭡니까.” 하필 카레닌의 아픈 데를 정통으로 찌르는 이야기였다. 그때 돌리가 겁먹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카레닌을 붙잡았다. “와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안나의 결백을 굳게 믿는 돌리는, 이 차가운 사내가 시누이를 파멸시키려 한다는 생각에 입술을 떨었다. “안나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의무를 저버리고 남편을 속였소. 그게 안나가 한 짓이지요.” “안나와 죄라니, 저는 그 둘을 도무지 한자리에 놓을 수가 없네요!”

돌리의 두둔은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아물지 않은 상처만 다시 헤집어 놓았다. “8년 세월도 아들도 모두 잘못이었으니 새로 살고 싶다고 아내가 제 입으로 말하는데, 그게 어찌 착각이겠소.” 그는 돌리의 다정한 얼굴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속을 털어놓았다. “의심하던 시절엔 그래도 희망이 있었소. 지금은 희망 없이 모든 것을 의심하오. 아들마저 미워서, 때로는 저 애가 내 아들이 아닌 것만 같소.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오.” 돌리는 그가 가엾어졌고, 친구의 결백을 믿던 마음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혼만은 안 돼요! 당신은 그리스도교인이잖아요. 당신이 버리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요?” “기회도 주었고 어떻게든 건져 보려 했소. 한데 제 손으로 파멸을 택하고도 그것을 구원으로 여길 만큼 본성이 썩었다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돌리는 제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이 저를 속였을 때 저도 모든 걸 내던지려 했어요. 그때 누가 저를 붙잡아 줬는지 아세요? 안나예요. 안나가 저를 살렸어요. 당신도 용서하셔야 해요.”

그러나 그 말은 이미 그의 귀에 닿지 않았다. 이혼을 결심하던 날의 증오가 다시 끓어올랐다.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소. 나는 그 여자를 위해 못 한 것이 없는데, 그 여자는 그 모든 것을 진창에 짓밟았소. 나는 평생 누구도 미워해 본 적이 없지만, 그 여자만은 온 영혼으로 미워하오!” “너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고 하셨잖아요…….” 돌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레닌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니, 그것만은 될 수 없는 일이오.” 그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는 조용히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그동안 레빈과 키티는 카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레빈은 초록 천 위에 단어의 첫 글자만 늘어놓았다. “당신이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을 때, 그것은 영영 그렇다는 뜻이었나요, 아니면 그때뿐이었나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암호였건만 그녀는 그 뜻을 읽어 냈다. “영영이라는 뜻이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그녀가 첫 글자들을 적었다. “그때는 달리 대답할 길이 없었어요.” 레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지금은요?” “그때 일을 잊고 용서해 주신다면요.” 레빈은 떨리는 손으로 분필을 쥐었다. “잊을 것도 용서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를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으니까요.” 그녀가 짧게 한 글자를 적었다. “네.” 멀리서 돌리가 두 사람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레닌과 이야기하느라 가라앉았던 마음이 그제야 풀렸다.

키티가 돌아간 뒤, 레빈은 그녀 없이 견뎌야 할 열네 시간이 죽음처럼 두려웠다. 위원회 모임에서는 누구를 보아도 더없이 선량하고 사랑스러워 보였고, 돈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조차 실은 서로를 아끼는 좋은 사람들임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창가에 앉아, 눈 덮인 지붕 위로 떠오르는 별과 십자가를 오래 바라보았다. 아침이 밝자 학교로 가는 아이들도, 갓 구운 빵 냄새도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마음을 뒤흔들어, 그는 기쁨에 겨워 웃다가 울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그는 셰르바츠키가로 마차를 몰았다. 가벼운 발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키티가 등 떠밀리듯 다가와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고, 레빈은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공작부인이 울다 웃다 하며 달려와 눈물로 그의 뺨을 적셨다. 늙은 공작도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눈가가 젖어 있었다. “오래전부터 늘 바라던 일이라네.” 단둘이 남자 키티가 털어놓았다. “한때 제 행복을 밀어냈을 때에도 저는 늘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레빈도 자기가 그녀만큼 깨끗하지 못하며 신앙도 없다는 것을 언젠가 빠짐없이 고백하리라 다짐했다.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카레닌에게 전보 두 통이 날아들었다. 하나는 그가 그토록 탐내던 자리에 스트레모프가 임명되었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내가 보낸 것이었다. “저는 죽어 가고 있습니다. 부디 와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당신의 용서를 받으면 좀 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속임수라 여기면서도 “죽어 가고 있습니다”라는 한 구절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임종을 앞두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라면, 가지 않는 것이야말로 잔인하고도 어리석은 짓이리라.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밤 기차의 피로를 안고 안개 낀 거리를 내달리는 내내, 그녀가 죽으면 제 처지가 단번에 풀리리라는 생각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산모는 어떤가?” “어제 무사히 해산하셨습니다.” 카레닌은 우뚝 멈춰 선 채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이 그녀의 죽음을 얼마나 바라 왔는지 그제야 똑똑히 깨달은 것이다. “누가 와 있나?” “의사와 산파, 그리고 브론스키 백작이 와 계십니다.”

방 안에서는 브론스키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카레닌을 보자 그는 사라져 버리고 싶은 듯 몸을 움츠렸다가 가까스로 일어섰다. “그녀는 죽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당신 뜻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여기 있게만 해 주십시오.” 카레닌은 남의 고통 앞에서 늘 일곤 하던 그 신경의 떨림을 느끼며 침실로 들어섰다. 안나는 열에 들떠 뺨이 진홍빛으로 달아오르고 눈은 반짝였으며, 가쁜 숨결로 헛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왜 안 오시지? 세료자는 저녁을 먹었나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던 그녀는 문득 그를 보고는 공포에 질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 아니에요. 나는 그이가 무섭지 않아요. 무서운 건 죽음이에요. 알렉세이, 이리 와요. 이제는 다 알겠어요.”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안엔 다른 여자가 있어요. 그 여자는 그 사람을 사랑했고, 나는 당신을 미워하려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어요. 그 여자는 내가 아니에요. 바라는 건 한 가지뿐이에요. 용서해 주세요, 남김없이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가세요. 당신은 너무도 선한 사람이에요.”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불덩이처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를 밀어냈다.

문득 카레닌은 깨달았다. 신경의 동요라고만 여겨 온 그 떨림이, 실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행복을 안겨 주는 복된 마음의 상태였음을. 용서와 사랑의 벅찬 감정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는 무릎을 꿇고 불덩이처럼 뜨거운 그녀의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손을 내밀라고 일렀다. “얼굴을 가리지 마세요. 저분은 성자예요. 그이를 용서해 주세요.” 카레닌은 수치로 일그러진 브론스키의 두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고, 눈물을 흘리며 손을 내밀었다. 의사들은 산욕열이니 백에 아흔아홉은 죽는다고 했으나, 사흘째 되던 날에는 살아날 가망이 있다고 말을 바꾸었다.

브론스키는 카레닌의 위대함 앞에서 자신이 비열하고 하찮게만 느껴졌다. 우스운 걸림돌로만 여기던 그녀의 남편이 우러러보아야 할 만큼 높이 솟아오른 것이다. 식어 가는 줄로만 알았던 정념은, 그녀를 영영 잃었음을 깨닫자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사납게 타올랐다. “잠들자, 잊자!” 그는 되뇌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당신은 나를 진흙탕에 짓밟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던 자신의 말과 우스꽝스러운 제 꼴만 또렷이 떠올랐다. 그는 권총을 왼쪽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고. 충격에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멍청하게도! 빗나갔어!” 그때 형수 바랴가 달려와 그를 살려냈다.

두 달 뒤 카레닌은 자신이 얼마나 그릇 생각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죽어 가는 아내 곁에서 그는 평생 나약함이라 부끄러워하던 연민에 처음으로 자신을 내맡겼고, 용서의 기쁨 속에서 일찍이 누려 본 적 없는 평화를 얻었다. 제 핏줄도 아닌 갓난아기 딸마저 사랑하게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아기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걷히자 안나는 그를 두려워했고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가 다정하게 말을 건넬 때마다 그녀는 견딜 수 없이 그가 싫었다. “하느님, 저는 왜 죽지 못했을까요!”

스티바 오블론스키가 찾아오자 안나는 눈물 젖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남자의 나쁜 점 때문에 사랑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이의 좋은 점 때문에 미워해. 그이가 훌륭한 사람이고 내가 그 손가락 하나만도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미워한다니까.” 스티바는 이혼을 권하러 카레닌을 찾아갔다. 카레닌은 거짓 간통 혐의를 스스로 뒤집어쓰는 것도, 이혼으로 안나를 영영 파멸시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끝내 거스를 수 없는 잔혹한 힘에 무릎 꿇듯,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치욕은 내가 짊어지겠소. 아들마저 내주겠소. 좋을 대로들 하시오.”

브론스키는 몸이 회복되어 가면서 그 행동으로 수치를 씻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를 영영 잃었다는 회한만은 떨쳐낼 수 없었다. 카레닌이 이혼에 동의했다는 소식에 그는 굳게 다졌던 결심마저 잊은 채 달려가 그녀의 얼굴과 손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래요, 당신이 이겼어요. 나는 당신의 것이에요.” “이탈리아로 갑시다. 거기서 당신은 건강을 되찾을 거요.” 안나가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의 너그러움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혼도 바라지 않아요. 다만 세료자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브론스키는 군에서 사임했다. 한 달 뒤 카레닌은 아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에 홀로 남았고, 안나와 브론스키는 끝내 이혼을 마다한 채 외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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