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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단편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톨스토이 단편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스노우폭스북스 / 2026년 5월 / 332쪽 / 19,800원





1부 폭풍의 한가운데 _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과 폭력 앞에 서다



악마 (1889)


예브게니 이르테네프는 빛나는 청년이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정부 부처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고, 모스크바의 좋은 집안 출신 어머니와 시골에 큰 영지를 가진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그에게는 무엇 하나 모자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스물여섯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것은 영지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쌓인 큰 빚이 함께 따라왔다. 아버지가 영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었다. 가족회의 끝에 예브게니가 결정을 내렸다. 페테르부르크의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직접 영지를 일으키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빚을 갚고 어머니와 동생을 돌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예브게니는 페테르부르크의 동료들과 작별을 나누고 시골로 향했다. 어머니도 모스크바를 떠나 그와 함께 영지로 내려왔다.

영지에 도착한 예브게니는 곧장 일에 뛰어들었다. 새벽이면 들에 나가 농민들과 함께 일을 살폈고, 손에는 늘 농학 책이 들려 있었다. 새 농기구를 들였고 곡식 종자도 좋은 것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농민들이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묵묵히 일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차츰 그를 따랐다. 한 해가 지나자 영지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브게니에게는 차마 말 못 할 고민이 있었다. 그는 아직 청년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또래의 청년들처럼 가벼운 연애도 하며 살았는데, 시골에 내려온 뒤로는 그런 일들이 모두 끊어졌다. 영지 안에는 만날 수 있는 또래의 여자가 없었고, 어머니가 가까운 도시의 좋은 집안 처녀들을 소개하려 해도 그는 번번이 미루었다. 영지의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그 무렵 그는 결심을 했다. 시골에 머무는 동안에는 어떤 여자에게도 손을 대지 않겠다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다짐이 점점 무뎌졌다. 어느 날, 예브게니가 마부를 따로 불러 조용히 물었다.

“이 마을에 혹시 정숙한 여자, 형편이 어렵지만 단정한 여자가 있나?”

마부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나리.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며칠 뒤, 마부가 한 여인을 데려왔다. 스체파니다라는 이름이었다. 마을에 사는 농촌 여인으로, 남편은 일 때문에 도시에 나가 있었다. 스무 살 남짓의 그녀는 키가 크고 얼굴이 단단했으며 짙은 눈썹에 입매가 다부졌다. 예브게니 앞에 선 채 그를 바라보는데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됐다. 일주일에 한 번쯤, 마부가 스체파니다를 영지의 외딴 헛간으로 데려왔다. 예브게니는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만남은 짧았고 두 사람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예브게니가 매번 약간의 돈을 쥐어주면, 스체파니다는 묵묵히 받았다. 처음에 예브게니는 자신이 한 일을 가볍게 여겼다. 그저 청년 시절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농민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누구의 마음을 흔든 것도 아니고 그저 몸의 필요를 채웠을 뿐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설득했다.

한 해가 지나자 영지가 더 단단해졌다. 빚이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어머니가 다시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예브게니도 미루지 않았다. 마침내 도시의 한 이름 있는 가문의 처녀를 소개받았는데, 이름은 리자였다. 부드러운 얼굴에 맑은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두어 번 만나는 사이에 마음이 맞았고, 그렇게 약혼이 정해졌다. 약혼이 결정된 직후, 예브게니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제 그 여자는 더는 부르지 마. 끝났네.”

“알겠습니다, 나리.”

마부가 짧게 답했다. 예브게니는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라 믿었다. 자신은 곧 결혼할 사람이고, 좋은 가정을 꾸릴 사람이었다. 스체파니다는 잊어야 할 과거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결혼식이 치러졌고, 리자가 예브게니의 집으로 들어왔다. 신혼은 평화로웠다. 리자는 예브게니를 깊이 사랑했고 예브게니도 그런 그녀를 아꼈다. 머지않아 리자가 아이를 가졌다. 영지의 일도 순조롭게 흘러갔고 어머니도 흐뭇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브게니가 들에 나가 일을 살피던 중에 길에서 한 여인을 보았다. 멀리서 봤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스체파니다였다. 흰 머릿수건을 쓰고 어깨에 농기구를 든 채, 다른 여인들과 함께 들로 가는 중이었다.

예브게니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결혼한 뒤로 스체파니다를 마주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잊고 살아온 줄 알았는데 그녀의 모습 한 번에 모든 것이 다시 떠올랐다. 헛간에서 그녀를 안고 있던 자신, 짙은 눈썹, 다부진 입매까지.

‘그저 한 번 본 것뿐이다. 지나갈 것이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그날 밤 침대에 누웠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옆에 잠든 리자가 아니라 들길 위의 스체파니다였다.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예브게니는 자신에게 거듭 다짐했다.

‘지나갈 것이다. 며칠이면 다 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로 예브게니는 들에 나갈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스체파니다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보고 싶었다. 멀리서라도 한 번 보고 싶었다. 그 마음을 누르려고 자기 자신에게 화도 내보았지만 누르면 누를수록 더 커져만 갔다.

어느 날, 들에서 일하는 농민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그 안에 스체파니다가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시선을 거두고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짧은 만남이 예브게니에게는 가슴 깊이 박혔다. 그날 저녁, 서재에서 책을 읽으려 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덮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싸우고 있었다.

‘한 번만이다. 한 번만 만나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안 된다. 그건 나를 속이는 일이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된다. 멈춰야 한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자신은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 리자가 옆방에 잠들어 있다는 것,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자기 아이의 존재가 차례로 떠올랐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예브게니는 책상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며칠이 그렇게 흘러갔다. 예브게니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식욕도 점점 줄어들었다. 리자가 알아채고 걱정스레 물었다.

“여보,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요.”

“아무것도 아니야. 영지 일이 좀 많아서 그래.”

그는 짧게 답했다. 리자도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눈에는 옅은 근심이 어렸다.

어느 날, 마음을 굳힌 예브게니가 마부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그 여자를 한 번만 데려와다오.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마부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알겠습니다, 나리.”

그날 저녁, 예브게니는 외딴 헛간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이토록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납덩이처럼 묵직했다. 죄책감에 짓눌리면서도 발걸음은 자꾸만 그곳을 향했고, 스스로를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헛간이 가까워졌을 때, 예브게니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가슴이 세차게 쿵쿵 뛰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그제야 실감했다.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안 된 자신이, 임신한 아내를 두고 또다시 헛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그곳에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예브게니는 리자의 침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방 안에서 리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더없이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 이마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며, 예브게니는 오늘 밤 유혹에 무너지지 않아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헛간으로 가다 돌아온 자신이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다행이긴 했지만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한 번은 돌아왔지만 다음번에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발이 결국 다시 그쪽으로 향하리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뒤로 예브게니는 점점 더 무너져갔다. 들에 나가는 일이 두려워졌다. 스체파니다를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들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영지 일은 직접 살펴야 했으니까. 들에 나설 때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보지 않겠다. 눈을 들지 않겠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신경 쓰지 않겠다.’

그러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보이면 가슴이 다시 뛰었고,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평화로울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것을 눈치챘다. 무엇 때문에 그가 흔들리는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평소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그를 따로 불렀다.

“예브게니, 무슨 일이 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네 얼굴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구나. 리자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아닙니다. 리자는 잘 있습니다. 영지 일이 좀 복잡해서 그럴 뿐입니다.”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 눈빛에는 깊은 걱정이 서려 있었다.

얼마 후 리자가 출산했다. 딸이었다. 처음으로 딸을 안았을 때, 예브게니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면서도 동시에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작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다짐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흔들리지 않겠다. 좋은 아버지가 되겠다. 다시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겠다.’

다짐은 한동안 그를 지켜주었다. 딸을 돌보고, 리자를 돌보고, 영지를 돌보는 일에 온전히 몰두했다. 들에 나가도 눈을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한두 달이 그렇게 흘러갔다. 한동안 평화를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어느 봄날, 예브게니가 영지의 일꾼들과 함께 외지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가는 길에 농민들이 모여 일하는 들판을 지나게 됐다. 시선을 던지지 않으려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거기에 스체파니다가 있었다. 잠시 일을 멈추고 허리를 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예브게니는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지난 몇 달 동안 누르고 누르고, 또 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그는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러는가. 왜 나는 고작 이 한 가지를 이기지 못하는가. 다른 모든 것은 다 잘 해내지 않았는가. 영지를 일으켰고 가정을 꾸렸고 아이를 가졌다.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왜 이 한 가지가 나를 무너뜨리는가.’

그러나 답은 없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자기 안의 무언가가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해야 했다. 평생 그는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의지가 있고, 책임감이 있고,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한 여인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전부 다 잃는다. 리자도 잃고, 딸도 잃고, 어머니도 잃고, 영지도 잃는다. 한 번의 만남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발이 다시 헛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며칠 안에, 어쩌면 오늘 밤이라도, 그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었다.

예브게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서랍을 열자 그 안에 작은 권총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 차가운 쇳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생을 끝낼 것인가,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런 자기 자신과 평생 싸우며 살 것인가. 세 갈래의 운명이 그 앞에 놓여 있었다.

두 가지 결말


톨스토이는 이 작품의 결말을 두 가지 형태로 따로 써두었다. 어느 쪽이 더 옳은 결말인지 결정하지 못한 채 모두 원고로 남겨둔 것이다. 그에게는 어느 쪽도 거짓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진실이었다.

첫 번째 결말


예브게니가 권총을 들었다. 총구를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둔탁한 파열음이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총소리를 듣고 리자가 달려왔고 뒤이어 어머니도 달려왔다. 그러나 예브게니는 이미 의자 옆에 쓰러진 뒤였다. 지난 몇 달간 그를 짓누르던 중압감은 그의 얼굴에서 사라져 있었다. 처음으로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리자가 무너지듯 그의 곁에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날 밤 영지에 큰 슬픔이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무엇이 그를 이토록 참혹한 결말로 몰아넣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청년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스체파니다는 마을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잠시 일하던 손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스쳐 지나갔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두 번째 결말


예브게니가 권총을 들었다. 그러나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지 않았다. 그는 깊숙이 모자를 눌러쓰고 권총을 외투 안에 숨긴 채 집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들판이었다. 스체파니다가 일하고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마침 그녀는 다른 농민들과 함께 일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예브게니는 길목 한쪽에 숨어 그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농민들이 먼저 지나가고 스체파니다가 맨 뒤에서 혼자 걸어왔다. 예브게니를 발견한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 보였는지,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예브게니가 권총을 들어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둔탁한 소리가 들에 울려 퍼졌고, 그녀는 길 위로 쓰러졌다. 예브게니는 잠시 얼어붙은 듯 그곳에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마을로 걸어가 제 발로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재판이 열렸다. 예브게니는 모든 것을 인정했다. 다만 그녀를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인정하고, 담담히 형을 받아들였다. 결국 그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리자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한참을 울다가 친정으로 돌아갔고, 주인을 잃은 영지는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 스체파니다는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작은 흙더미 하나가 그녀의 무덤이 되었다. 누구도 그녀가 왜 죽어야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귀족 청년이 농촌 여인을 살해했다는 사실만이 마을에 떠돌 뿐이었다.

편집자 해설


이 작품은 1889년에 쓰였지만 톨스토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끝내 발표되지 않았다. 그는 이 원고를 자기 책상 서랍 안에 22년 동안 넣어두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야 부인이 그것을 발견했고 1911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톨스토이가 왜 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이 작품이 그 자신의 한 시기를 너무도 정직하게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청년 시절, 자기 영지에서 한 농촌 여인과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부끄러움으로 안고 살아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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