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병동 2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지음 | 고전문학
암 병동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지음
제2부
제1-1장 모래 속으로 사라지는 강올레크 코스토글로토프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기이한 병원 생활을 수수께끼처럼 늘어놓았다. 창살 있는 창문, 줄지어 늘어선 침대, 겁에 질린 채 누워있는 사람들. 아침에는 빵과 설탕, 차가 나오고 저녁이면 창문을 열고 닫는 문제, 누구의 병세가 더 나은지, 혹은 더 나쁜지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는 곳. 그는 이곳이 교도소와 놀랍도록 닮았다고 썼다. 심지어 불시 검문이 있고, 목욕은 큰 행사지만, 따뜻한 물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며, 우습게도 신참이 들어와 터무니없는 질문을 해대기도 하는 곳.
<사랑하는 엘레나 알렉산드로브나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어딘지 짐작하셨나요? 이곳은 암 병동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5주째 살고 있습니다. 마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가장 우울한 것은, 제게는 정해진 ‘형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치료 2주 만에 찾아왔던 황홀한 기분,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단순하고 기쁨에 찬 ‘행복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퇴원했어야 했는데. 이제 유익한 치료는 끝나고, 해로운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루 두 번 엑스레이 폭격을 맞으며, 저는 지독한 메스꺼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배는 저절로 끊었고, 지금은 침대에 등을 대고 다리를 약간 올린 채 머리를 침대 가장자리에 걸치는 자세로만 겨우 견딜 수 있습니다.>
그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베개도 없이 침대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가장자리로 늘어뜨린 채 겨우 편지를 이어갔다.
<절인 오이가 메스꺼움에 좋지만, 이곳에서는 구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여인용 가운에 군용 벨트를 두르고, 담벼락의 무너진 틈으로 몰래 빠져나가 시장에 갑니다. 제 꼴이 우스꽝스럽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모든 것에 익숙해진 우리 민족의 정신적 건강함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종양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제 피는 파괴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백혈구를 늘린다며 우유 주사를 놓으려 하고, 수혈을 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습니다. 특히 방사선과 과장인 돈초바는 제가 주사를 피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저를 몰아붙입니다. 물론, 저는 그녀를 속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담당하는 젊은 여의사 강가르트에게는 단호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녀는 목소리 한번 높이는 법이 없었고, 제대로 인상을 찌푸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녀가 원치 않는 처방을 내릴 때면,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고, 저는 그만 굴복하고 맙니다. 나는 의사들의 대화를 엿듣고, 의학 서적을 구해 읽으며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결국, 나는 긴 생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왜 미래를 깊이 들여다보고 싶겠습니까? 처음에는 감시 아래 살았고, 그다음에는 고통 속에서 살았지요. 이제 나는 감시도 고통도 없이, 잠시 살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레닌그라드도 리우데자네이루도 원치 않습니다. 그저 우쉬-테레크의 별빛 아래 야전 침대에 누워 잠들고, 한여름 밤 친구들과 함께 스텝 지대의 길을 따라 걸어가 추가강의 물결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제 야망의 전부입니다.
우리 추가강은 어떤 바다나 호수로도 흘러가지 않지요. 모래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강, 갈 곳 없이 흐르는 강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삶이 바로 그 강과 같습니다. 어떤 성취도 허락되지 않고, 불명예 속에서 질식할 운명. 서로에게 건네는 두 줌의 물, 인간적인 접촉과 대화, 도움이 남은 전부인. 하지만 의사들은 그 마지막 한 줄기 물마저 빼앗으려 합니다. 그들이 ‘호르몬 요법’이라 부르는 끔찍한 치료. 한 번의 낙인으로 평생 성불구로 만드는 그 치료를, 의사들은 제 동의도 없이 결정했습니다.
군대에서 7년, 수용소에서 7년. 두 번의 신화적인 시간을 보낸 후,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능력마저 박탈당하는 대가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사람이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삶에 색과 향기와 흥분을 주는 모든 것을 지불해야 한단 말입니까? 소화, 호흡, 근육과 뇌 활동뿐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걸어 다니는 설계도가 되라구요? 이건 터무니없는 대가가 아닙니까? 조롱이 아니냐구요?>
제1-2장 괴로워하며 살 필요가 있을까코스토글로토프는 편지를 계속 이어갔다. 그가 당장이라도 병원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진단서’라는 위대한 여신 때문이었다. 조사관이나 보안 책임자가 그를 내일 당장이라도 300킬로미터 떨어진 사막으로 보내버릴 수 있지만, 이 진단서 한 장만 있으면 ‘지속적인 관찰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선생님!’이라며 버틸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을 해온 것처럼 또다시 교활하게 굴고, 속이고, 시간을 끄는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맨드레이크 뿌리로 내 종양을 한 번 더 두들겨 패 줄 생각이에요. 이차 전이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죠. 강력한 독으로 자신을 치료하는 것에는 뭔가 고귀한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독은 무해한 약인 척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독이다! 조심해! 아니면 죽는다!’라고 솔직하게 말해주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상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친구가 전해준 측지 탐사대 소식에 잠시 흥분했지만, 전과자인 자신을 받아줄 리 없다는 현실을 금세 깨달았다. 친구가 보내주겠다는 돈은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평생 빚지지 않고 살아온 그였지만, 문득 자신에게도 물려줄 유산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양가죽 재킷, 담요로 쓰는 검은 천 2미터, 깃털 베개, 침대로 쓰는 나무 상자 세 개, 냄비 두 개, 수용소 시절의 밥그릇과 숟가락, 양동이, 그리고 석유 등잔까지. 그는 유언장을 쓰는 걸 깜빡했다며 농담을 던지고는, 150루블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편지 말미에 그는 ‘인나 스트롬’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썼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감정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또 무엇을 원할 권리가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상황이 이보다 더 나빴던 적도 있다”는 위대한 위로의 말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금 기운을 냈다. 그는 친구들의 한결같은 마음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편지를 맺었다.
<그러니 계속 번창하십시오, 나의 친구들. 그리고 당신들의 빛이 계속 빛나기를. 당신의 올레크.>
제2-1장 왜 잘 살지 않는가?3월 5일, 밖에는 차가운 이슬비가 내렸지만 병동 안은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했다. 됴마는 마침내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고 외과 병동으로 옮겨갔고, 그의 자리에는 두 명의 ‘신참’이 들어왔다. 첫 번째 신참은 됴마의 침대를 차지했다. 곱사등이에 허리는 휘었고, 얼굴은 노인처럼 닳아 있었다. 그의 눈은 퉁퉁 부어 아래 눈꺼풀이 처져 있었고, 그 때문에 눈은 부자연스러운 원형을 띠고 있었다. 그 크고 둥근 눈으로 그는 병동의 모든 사람을 불쾌할 정도로 유심히 뜯어보는 듯했다.
지난 한 주 동안 됴마는 끊임없는 통증에 시달렸다. 한때는 생명과도 같았던 다리가 이제는 저주받은 짐처럼 느껴졌다. 한 달 전만 해도 삶의 끝처럼 보였던 수술이 이제는 구원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기준은 그렇게 변하는 것이었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그는 병동 사람들에게 매달리며 위안을 구했다. 바딤은 그에게 이미 했던 말을 반복해야 했다. “넌 운이 좋은 거야. 나 같으면 기꺼이 네 자리를 대신했을 거야.” 하지만 바딤은 누구도 오래 위로하지 못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 위로를 구하지 않았고, 주어진다 해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위로하려는 모든 시도에는 어딘가 줏대 없고 종교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부심 강하고 침착했던 바딤 역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거무스름하던 산악인의 피부는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고, 이따금 입술이 고통으로 떨렸다. 8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모스크바를 오가며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한 달을 보내자 그의 확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말 타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졌고, 고통은 사타구니까지 퍼졌다. 한때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방사능 물을 이용한 광석 발견’에 대한 신념도 희미해져 갔다. 책을 읽는 집중력도 떨어졌다. 투쟁보다 포기가 더 쉬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세련된 자제력을 갈기갈기 찢고, 덫에 걸린 야수처럼 울부짖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장난 그만하고 내 다리 놔줘!”
한편 됴마는 코스토글로토프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워 머리를 통로 쪽으로 늘어뜨린 코스토글로토프는, 이제 큰 소리로 말하기 힘든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기죽지 마, 됴마. 레프 레오니도비치가 여기 있어. 내가 봤어. 그가 순식간에 잘라버릴 거야.” 그 말에 됴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길고 가는 팔을 가진 그 외과 의사가 복도에 나타나기만 해도 환자들은 마치 한 달 내내 기다려온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안도했다. 곱슬머리에 원숭이 같은 털북숭이 손을 가진 레프 레오니도비치 아래 눕는 것은, 그가 살려주든 아니든 실수 때문은 아닐 거라는 묘한 확신을 주었다.
“그 사람, 수술 잘하나?” 됴마가 떠난 침대에 앉아 있던 신참이 불쑥 물었다. 그는 한밤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깬 사람처럼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의 이름은 슐루빈이었다. 슐루빈은 부엉이 같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크고 둥근 눈으로 병동 사람들을 오랫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병동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존재만으로 병동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파벨 니콜라예비치 루사노프는 열두 번째 주사를 맞았다. 이제는 헛소리 없이 주사를 견딜 수 있었지만, 두통과 쇠약감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죽을 위험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의 종양은 거의 사라졌고, 목을 감싸던 부분도 부드러워졌다. 쇠약함만 견디면 되었다. 그는 잡지를 읽고, 강장제를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고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냈다. 한때 으르렁대던 ‘뼈다귀나 씹는 놈’ 코스토글로토프조차 얌전해졌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전투 없이 평화롭게 몇 시간이고 보내곤 했다.
계단참에는 ‘환자들끼리 서로의 병에 대해 의논하지 마시오!’라고 쓰인 붉은 현수막이 걸렸다. 파벨이 환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여러 번 건의했던 사항이었다. 그는 암 환자들을 한곳에 모아두는 대신 일반 병원에 분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서로를 겁주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서 진실을 숨길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그는 믿었다.
제2-2장병동의 사람들은 오고 갔지만,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낙담하고 시들어 있었다. 곧 퇴원할 아흐마잔만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지만, 그 웃음은 다른 이들에게 질투심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둡고 우울한 병동에 짧은 키의 활기찬 사나이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안내하던 간호사를 지나쳐 마치 자신을 기다리던 의장대를 사열하듯 병동으로 뛰어 들어왔다. 축 늘어져 있는 환자들을 보고는 휘파람을 불며 유쾌하게 핀잔을 주었다.
“이봐, 친구들, 바보들 아니야? 발이 오그라들기라도 했나?” 그는 반쯤 군대식으로 경례를 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찰리, 막심 페트로비치! 만나서 반가워! 편히들 쉬어!” 그의 얼굴에는 암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감과 삶의 환희로 반짝이는 미소에 몇몇 환자들이 마주 웃었다. 파벨 니콜라예비치도 그중 하나였다. 한 달 내내 얼간이들 틈에 있다가 드디어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난 것 같았다.
찰리는 자신의 침대를 찾아 대담하게 걸어갔다. 파벨의 옆자리였다. 그는 침대에 앉아 위아래로 퉁겨보더니 농담을 던졌다. “60퍼센트는 닳았군. 수간호사가 쥐덫 잡는 사람은 아닌가 봐.” 그의 주머니에서는 면도기와 함께 거의 새것 같은 트럼프 카드가 나왔다. 그는 파벨에게 카드 게임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가르쳐주면 되지, 어디서 배우겠어?” 찰리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속담에도 있잖아. 못하면 가르치고, 안 하면 억지로 시킨다고!”
그는 얼굴에 비해 코가 유난히 컸다. 크고 부드러우며 붉은빛이 도는 코. 하지만 바로 그 코가 그의 얼굴에 순박하고 매력적이며 솔직한 느낌을 주었다. “포커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임이야! 포커에서는 안 보고도 돈을 걸거든.” 찰리는 아흐마잔까지 끌어들여 즉석에서 포커 강습을 시작했다. 넬랴가 바닥을 닦으러 들어오자, 그는 그녀에게도 희롱을 던지며 순식간에 병동의 분위기를 장악했다. 그의 활기에 파벨은 부러움을 느꼈다.
“그런데… 어디가 아픈 것이오?” 파벨이 조용히 물었다. “나? 폴립이 있어!” 찰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위장에 있는 것 같아. 아름다운 내 위장을 잘라내겠지. 4분의 3 정도는 잘라낼 거야.” 그는 손날로 자기 배를 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이오?” 파벨이 놀라서 물었다. “아무것도. 그냥 익숙해져야지. 보드카만 잘 넘어가면 돼!” 찰리는 파벨에게 충고했다. “이웃 양반, 내 말 들어봐. 죽고 싶지 않으면 속상해하지 마. 말이 적으면 고통도 적어. 이게 내 충고야!”
아흐마잔이 가져온 합판으로 임시 카드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불이 켜지고 방이 밝아졌다. 파벨은 마치 건강한 사람처럼 침대에 걸터앉았다. 찰리의 말처럼 병을 대하면 저절로 물러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한 생각에 잠겨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 기다려봐.” 찰리의 능숙한 손가락 사이로 카드가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가 한창 패의 순서를 설명하던 중, 문가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찰리 씨, 어디 계십니까? 아내 분이 왔습니다!” “가방을 가져왔나?… 좋아, 친구들, 잠시 휴식.” 그는 대담하고 무심하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
병동은 다시 조용해졌다. 파벨은 침대에 누웠다. 그는 구석에서 부엉이 같은 슐루빈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머리 옆을 끈질기게 질책하듯 누르는 압박감. 그 압박감을 덜기 위해 그는 슐루빈에게 물었다. “뭐가 잘못됐소?”
제2-3장슐루빈은 파벨의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붉은빛이 도는 거대한 눈으로 그의 머리 너머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늘 있던 일이지!” ‘늘 있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례한 작자라고 생각하며 그는 돌아누워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가 기다리던 것은 찰리의 카드놀이가 아니라 신문이었다. 그날은 스탈린 사망 2주기,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날이었다. 신문 지면에 검은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지, 초상화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사설의 제목은 무엇인지. 지난 2월의 숙청 이후 모든 것이 중요했다. 조국의 미래는 곧 자신의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때, 엑스레이실에서 돌아온 바딤이 신문을 들고 있었다. 파벨은 그를 불렀다. 바딤은 망설이다가 파벨의 침대 곁에 앉았다. 파벨은 신문을 보자마자 검은 테두리도, 초상화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겁에 질려 바딤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없소, 그렇지 않소?” 그는 바딤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그가 보여주었던 ‘올바른’ 사상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까닭 없이 사람을 유형 보내지 않습니다.” 바딤은 이미 파벨이 찾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
그는 파벨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학술원 회원이 쓴 평범한 기사를 가리켰다. ‘스탈린과 공산주의 건설의 몇 가지 문제들’. 그게 다였다. ‘몇 가지 문제들’이라니. 군사적 승리도, 철학적 천재성도, 인민의 사랑도 모두 사라졌다. 파벨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불과 두 달 전, 그의 75세 생일에는 거대한 사진과 함께 ‘위대한 후계자’라는 제목이 실렸는데!” 그를 가장 상처 입힌 것은 배신감이었다. 영원히 울려 퍼질 것 같던 영광이 불과 2년 만에 이토록 초라해질 수 있다면, 대체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