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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

최선 지음 | 북오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

최선 지음

북오션 / 2013년 12월 / 312쪽 / 15,000원





1장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간의 강은 자신의 흐름으로 - 가브릴라 데르좌빈



시간의 강은 자신의 흐름으로

인간의 모든 일을 실어가고

망각의 늪 속에서 부패시키네

사람들, 권력들 그리고 황제들까지도



무엇인가 리라와 피리의 소리를 통해

남는다 하나 그것도

영겁의 혀에 삼켜져 버려

공동의 운명을 피할 수 없으리





그대의 손가락은 향냄새로 감싸이고 -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



그대의 손가락은 향냄새로 감싸이고

눈꺼풀 속으로 슬픔은 잠들었네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네

아무도 애석하지 않네



봄을 전하는 사람처럼

그대 푸른 곳으로 가면

하얀 계단에서 신이 몸소

그대를 밝은 천국으로 이끌리라



백발의 보제는 나직하게 속삭이며

고개를 조아리고 조아리네

시간의 해묵은 먼지를

성긴 수염으로 쓸어내며



그대의 손가락은 향냄새로 감싸이고

눈꺼풀 속으로 슬픔은 잠들었네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네

아무도 애석하지 않네





회상 - 알렉산드르 푸슈킨



세상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던 낮이 침묵하고

도시의 말없는 거리 위로

밤의 반투명한 어둠과 함께

낮의 노고의 보상으로 잠이 드리워지면

고요 속에 내게로 천천히

고통스러운 각성의 시간이 찾아온다

밤의 무위 속에서 양심의 가책은

뱀이 문 상처인 듯 더 화끈거리며 타오르고

상상들이 들끓는다 슬픔으로 짓눌린 영혼 속에는

우울한 사념들만이 복받쳐 응어리진다

회상은 말없이 내 앞에

그 긴 두루마리를 펼친다

나 내 삶을 읽으면서

혐오에 떨며 저주하고

괴로움에 한탄하며 쓴 눈물 흘려도

슬픈 구절들을 지우지 않는다





2장 오, 그대는 궁핍하고도 풍요로워라





도시 -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그래, 나 사랑한다, 이 거대하고 긍지 높은 도시를

하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유에서이다

내가 도시에서 사랑하는 것들은

위풍당당 저택들, 궁전의 화려한 광채,

오래된 대리석 강변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비통한 심정으로 나는 도시 속에서 다른 것,

냉정한 표피 뒤 그의 고통,

그 끔찍스러운 아픔을 본다



질퍽한 땅을 대리석으로 입혀

바다로부터 보호하고

기쁨과 고통의 파도를

엄숙하게 감추어도

강이 그의 발아래

사치와 쾌락을 가져다주어도

그 사치와 쾌락 속에는

근심, 땀, 고통의 무거운 자취가 배어 있다



궁정의 등불이 밝게 빛나도

그 안에 즐거운 음악이 소리 높이 울려도

그건 기만, 순 기만, 그것들은 누르지 못한다

미쳐 버릴 만큼 끔찍한 고통의 신음을

나는 사치스런 커튼 뒤 유리창 속에서

오직 고통을 알아채는 데 익숙하다

어두운 골목에는 어디나 그 흔적이 있다

한결같은 그 고통의 흔적이



내 도시로 한밤이

그림자도 없이 놓이는 시간에

모든 것이 투명한 이 시간에

내 앞을 어른거리며 지나가는 망령들의 무리

밤이 낮처럼 환하고 주위가 온통 고요하고

모든 것이 투명하고 평온한 이때

이 평온 속에 잠깐 고질병이 수그러지면

투명하게 드러나는 그 곪은 상처





수치를 모르고 밤낮없이 - 알렉산드르 블록



수치를 모르고 밤낮없이

곤드레만드레 퍼마시다가

숙취에 무거워진 머리로

신의 집으로 몰래 들어간다



세 번 깊이 절하고

일곱 번 ? 성호를 그은 후

내뱉은 침들로 얼룩진 바닥에

몰래 뜨거운 이마를 댄다



동전을 접시에 놓고

세 번, 그리고 일곱 번,

수세기 동안 수없는 입맞춤으로 닳아진

성상에 입 맞춘다



하나 집으로 돌아와 똑같은 동전 때문에

누군가를 속이고

굶주린 개를 문 앞에서 내쫓으며

딸꾹질하며 발로 걷어찬다



등잔불 아래 성상 앞에서

주판을 튕기며 차를 마시고

배뚱뚱이 궤짝을 열고

이자 계산서에 침을 질질 흘리다가



폭신한 솜털 침대 속에 널브러져

무거운 잠에 곯아떨어지는……

그래, 바로 그, 나의 러시아여,

너는 그 어느 나라보다 내게 소중하구나





다가올 세대들의 영예로운 공적을 위하여 - 오시프 만델슈탐



다가올 세대들의 영예로운 공적을 위하여

사람들 중에서도 기품 높은 종족을 위하여

나 아버지의 잔치에서 마실 술잔도

기쁨도 명예도 다 잃었다



어깨로 이리사냥개처럼 시대가 나를 덮치지만

내게는 이리의 피가 흐르지 않아라

차라리 나를 모자처럼 구겨서

시베리아 두꺼운 외투 소매 속으로 처박아 다오



나 비겁한 자도 허약한 자도 더러운 자도

바퀴 속에 박힌 피투성이 유골도 보지 않도록

내게 밤새도록 푸른 모피 같은 별들이

원초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도록



예니세이강이 흐르는 밤 속으로 나를 이끌어 다오

소나무가 별까지 닿아 있는 그곳으로

내게는 이리의 피가 흐르지 않아라

오직 사람만이 나를 죽일 수 있으리





3장 내 가슴 저리고…… 내 슬픔 찬란하오





내 의식은 고통으로 짓눌렸다 - 야코프 폴론스키



내 의식은 고통으로 짓눌렸다

내 눈물도 다 타 붙었다

늪 위로 전나무들 얽혀 있고

갈대는 검은데 몇 줄기 빛살들

어둠에서 물 위 허공을 향하네



별들이,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데

내 가슴속으로는 밤의 어둠만이

차가운 전율로 파고들 뿐

분노의 심연 위 사랑의 빛은

거의 보이지 않네





나 그대에게 아무 말 않을 테요 - 아파나시 페트



나 그대에게 아무 말 않을 테요

그대를 조금도 번거로이 않을 테요

나 혼자 속으로 되뇌는 것,

죽어도 드러내지 않을 테요



낮 동안 내내 밤꽃들은 자오

하나 태양이 숲 뒤로 넘어가면

꽃잎들이 고요히 펼쳐지고

내 심장도 사르르 피어나오



아프고 지친 이 가슴에

촉촉한 밤이 불어오면…… 떨리는 나,

나 그대를 조금도 번거로이 않을 테요

그대에게 아무 말 않을 테요





낮과 밤 - 표도르 튜체프



영혼들의 신비한 세계 위로

이 이름 모를 나락 위로

신의 높은 의지에 의해

금실로 짠 덮개가 덮씌워진 거야

낮은 ? 바로 이 반짝이는 덮개 같아

낮은 지상의 것들에 생기를 주고

아파하는 영혼을 달래 주는 친구야

인간들에게도 신들에게도!



하나 낮이 저물면 ? 밤이 닥쳐온다

가까이 들이닥쳐 ? 운명의 세계로부터

금실로 짠 덮개를

발기발기 찢어 던져 버린다……

그러면 우리에게 벌거벗은 채 드러나는 것은

공포와 죽음이 머무는 그 나락

우리와 나락은 하나가 되지 ?

그래서 바로 밤이 무서운 거야!





4장 잔혹한 시대에 자유를 외쳤고





나 홀로 길을 나선다 - 미하일 레르몬토프



나 홀로 길을 나선다

안개 사이로 비치는 자갈길로

고요한 밤 황야는 신을 맞이하고

별과 별이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은 장엄하고 경이롭고!

땅은 푸르게 빛나며 잠들어 있다……

한데 난 왜 이렇게 가슴 아프고 괴로울까?

나 뭘 기다리는 걸까? 뭘 애석해하는 걸까?



나 삶에서 이미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지나간 그 무엇도 애석해 하지 않는다

내가 찾는 건 자유와 평온!

그저 나를 잊고 잠들었으면!



하나 무덤의 차가운 잠 말고……

가슴속에 삶의 힘이 꿈꾸고

가슴이 숨 쉬며 고요히 부풀어 오르게

그렇게 영원히 잠들었으면



밤이나 낮이나 달콤한 목소리

사랑을 노래해 내 귀를 어루만지고

내 위로 영원히 잎을 피우는

울창한 참나무 몸을 숙이고 설렁였으면





유명해지는 것은 추해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유명해지는 것은 추해

상승시키는 것은 이것이 아니야

사료집을 만들고

초고를 보고 야단법석하지 말아야 해



창작의 목적은 자신을 바치는 것이지

떠들썩한 명성이나 성공이 아니야

속절없이 격언처럼 모든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건 바로 수치야



스스로를 치켜세우지 말고 살아야 해

결국에 가서 온 공간의 사랑이 자기에게로 쏠려

미래의 부름을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해



생애 속에 빈 구석을 남겨 두어야 하지

작품은 완전해야 해 종이 위엔

삶의 장과 절을 꼼꼼히 적어야 하지

가장자리에 주를 표시해 가며



무명 속으로 잠수해야 해

그 속에 발자취 감추어야지

마을이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추듯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 네 삶의 자취를 따라

한 뼘 한 뼘 밟아 가겠지

네 자신이 구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무엇이 승리이고 패배인가를





5장 지평선 멀리 하늘 품속 나무들의 속삭임





노랗게 익어 가는 들판이 물결칠 때 - 미하일 레르몬토프



노랗게 익어 가는 들판이 물결칠 때

신선한 숲이 바람 소리에 설렁일 때

뒷마당엔 빨간 나무딸기가

초록 잎의 달콤한 그늘로 몸을 감출 때

노을이 질 때나 아침이 금빛으로 다가올 때

향기로운 이슬을 머금고

덤불숲 뒤에서 은빛 방울꽃이

안녕하며 고개를 내밀고 나올 때



찬 샘물이 어렴풋한 꿈속으로 생각을 빠뜨리고

계곡을 따라 춤추듯 흘러가며

그가 달음질쳐 온 평온의 세계에 대한

비밀스런 전설을 이야기할 때



그때 내 불안한 영혼은 달래지고

그때 내 이마의 주름살은 펴지며

이 땅에서도 나 행복에 이를 수 있고

하늘에서 나 신을 보네





가을 저녁 - 표도르 튜체프



가을 저녁 빛 속에는

겸허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불길한 빛깔, 현란한 단풍

맥없이 가벼이 서걱대는 붉은 잎새들

서럽게 고아가 되어가는 땅,

안개 덮인 고요한 청람빛 하늘,

이제 막 폭풍이 다가올 것을 예견하듯

때론 찬바람이 불어닥치는데

파멸과 쇠잔 ? 모든 것에

그 부드러운 시듦의 미소가 있다

이성을 가진 존재의 미소라면

고통의 신성한 부끄러움이라 부를 만한





마지막 꽃들이 더 소중하네 - 알렉산드르 푸슈킨



마지막 꽃들이 더 소중하네

들판에 화려한 첫 꽃들보다도

우리 가슴에 우울한 생각들을

더 생생하게 일깨우는 마지막 꽃들

그렇게 간혹 이별의 순간은

더 생생하네, 달콤한 만남의 순간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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