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웅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 지음 | -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페초린: 주인공.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일단 그것을 얻고 나면 쉽게 버린다. 매사에 권태를 느끼는 돈 많은 귀족이다.
막심 막시므이치: 소박하고 인간적이며 정이 많은 이등대위
벨라: 족장의 둘째 딸. 페초린에게 사랑받았지만 버림을 받고 결국 죽게 된다.
그루쉬니스키: 사관 후보생. 재치 있고 재미있지만 상대방의 핵심을 찌르지는 못한다.
베라: 남편이 있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주는 대담한 여자
벨라-말 한 마리와 바꾼 여인
여행을 하던 나는 우연히 막심 막시므이치를 만나 그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됐다. 어느날 막심 막시므이치는 페초린과 체르케스의 처녀 벨라에 얽힌 사랑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전에 자신이 지휘하던 요새에 페초린이라는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을 때 있었던 일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페초린이었습니다. 훌륭한 사나이였소. 다만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죠.”
어느 날, 페초린은 막심 막시므이치와 함께 족장의 큰 딸 결혼식에 참석하게 됐는데, 거기서 마주친 족장의 작은 딸 벨라에게 페초린은 마음이 끌렸다.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에 산양의 눈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죠. 페초린은 생각에 잠겨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녀도 자주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구석에는 불타는 다른 두 눈이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는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카즈비츠였습니다.“
카즈비츠에게는 카라교즈라는 아주 훌륭한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말을 잘 타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러워 하는 유명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번 그 말을 훔치려 했지만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벨라의 남동생 아자마트도 카즈비츠의 말을 탐내고 있었다. 이것을 안 페초린은 아자마트에게 은근히 물었다. “네게 그 말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그에게 무엇을 줄래?”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렇다면 내가 그 말을 갖다주마. 그 대신 너는 누이 벨라를 줘야 한다. 카라교즈가 그녀의 몸값이 되는 거지.” 이렇게 해서 페초린은 벨라를 자신의 집에 데려왔다. 페초린은 벨라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지만 벨라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랑스런 벨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잖아. 널 위해서라면 난 모든 걸 다 바칠 용의가 있어. 난 네가 행복해지길 원해. 이젠 좀 마음을 바꿀 수 있겠지?”
그러나 그녀는 변함이 없었고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했다. “나는 네가 나라는 놈을 알게 되면 사랑해 주리라 생각하고 널 훔칠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잘못 본 거야. 잘 가라! 너는 자유의 몸이야.” 그리고 문을 열고 나서자 그 순간 그녀는 뛰어와 흐느껴 울면서 페초린의 목에 매달렸다. 벨라는 자신도 페초린을 본 첫날부터 강한 인상을 받고 그의 꿈을 꿨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페초린은 벨라에게 싫증이 나 사냥을 하며 밖으로만 나돌았다. 페초린은 막시므이치에게 말했다. “나는 불행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교육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하느님이 이렇게 만들어 내셨는지 알 수 없어요. 부모님의 보호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모든 쾌락을 미친 듯이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쾌락들은 곧 싫증 났습니다. 독서를 하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도 역시 나를 싫증나게 했습니다. 그때 권태를 느꼈죠. 벨라를 처음 보았을 때 바보처럼 그녀야말로 운명이 내게 보내준 천사인 양 생각했죠. 나는 또다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야만인 여자와의 사랑이 귀부인의 사랑보다 더 좋을 것도 없었습니다. 무지함과 순박함도 교태와 마찬가지로 싫증이 났습니다. 지금은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따분할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페초린은 벨라를 남겨두고 막심 막시므이치와 함께 멧돼지 사냥을 떠나게 됐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요새 근처에서 총성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그곳으로 달려갔는데, 말을 탄 사람 하나가 뭔가 하얀 것을 안장 위에 얹고서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 놈은 카즈비치였고 안장 위에 얹은 것은 바로 벨라였다.
벨라를 납치하려다 들킨 그는 저항하는 벨라를 단검으로 찌르고 페초린의 총을 맞고 달아났다. 칼에 찔린 벨라는 의식을 잃고 결국 이틀만에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앞에서조차 페초린은 너무 담담했고 얼굴 표정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석 달 후 페초린은 다른 연대로 전속명령을 받아 그루지야로 떠났다.
막심 막시므이치 - 페초린과의 우연한 만남
그런 얘기를 하고 헤어진 막심 막시므이치를 나는 우연히 여관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막심 막시므이치는 그곳에서 페초린의 하인을 만났다. 그러나 페초린은 거기에 없었다. “그래, 저녁에는 그가 오나? 그렇지 않다면 자네가 그에게 갈 일 없나? 만일 가게 되거든 여기에 막심 막시므이치가 있다고 전해주게. 그렇게만 말하면 그는 금방 알거야. 그는 아마 당장 뛰어 올게요.“ 막심 막시므이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래된 죽마고우를 만난다는 기쁨에 밤새도록 페초린을 기다렸지만 N부대장 집에 머물고 있다는 페초린도, 그의 하인도 나타나지 않았다. 페초린의 무관심은 그를 슬프게 했다. 그는 자신과 페초린의 우정을 방금 말했고, 그가 자기 이름을 듣자마자 달려올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아침, 막심 막시므이치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나는 위수 사령관에게 다녀와야 합니다. 만약 페초린이 오거든 내게 사람을 보내 주시오.” 10분도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페초린이 나타났다. 화자는 곧장 막심 막시므이치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말로만 들었던 페초린은 중간키에 균형 잡힌 체구, 넓은 어깨를 가졌는데, 굳세 보이는 신체조건은 방랑생활의 온갖 어려움과 기후의 변화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로드로 만든 그의 먼지투성이 프록코트는 맨 아래 단추 두 개만 채워져 있어 눈부실 만큼 깨끗한 속의 옷을 볼 수 있게 해줬다. 그가 한쪽 장갑을 벗었을 때 나는 그의 손가락들이 창백하고 가느다란 것을 보고 놀랐다. 그의 걸음걸이는 무관심하고 느릿느릿했으나, 오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터놓지 않는 성격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피부는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천적으로 곱슬머리인 금발은 창백하고 고상한 이마를 그림처럼 드러나게 했다.
몇 분 후 막심 막시므이치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뛰어왔다.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양쪽 무릎은 떨렸다. 그는 페초린을 포옹하려 했으나 페초린은 꽤 냉담하게 손을 내밀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군요, 친애하는 막심 막시므이치! 그래,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페초린이 말했다. “자네는? 이게 얼마 만인가? 그런데 이번엔 어디로 가나?” 노인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페르시아로 갈 겁니다. 그리고 더 먼 곳으로...” “정말로 지금 가는 건가? 지금 헤어져야 하는 건가?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 가야합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사실 전 할 얘기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 가야 합니다. 절 잊지 않으신 걸 감사드립니다.”
노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슬프고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벌써 마차에 앉았고 마부는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그때 막심 막시므이치가 소리쳤다. “멈춰요. 멈춰! 내게 자네 서류가 남아있네. 그것을 어떻게 할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막심 막시므이치의 눈에 노여움의 눈물이 속눈썹에서 반짝거렸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를 취하려 애썼다. “물론 우린 친구였지.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놈의 친구란 말인가! 나는 부자도 아니고 고관도 아닌 데다, 나이도 그와는 전혀 맞지 않는데.” “그런데 페초린이 당신에게 남긴 서류라는 건 도대체 뭡니까?” 나는 물었다. “누가 알겠어요? 언뜻 보기에 무슨 수기 같던데.”
나는 막심 막시므이치에게 그것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땅바닥에 내던진 공책들을 가져왔다. 한 시간 후 나는 떠날 채비를 했다. “이대로 헤어져야 한다니 정말 섭섭합니다. 막심 막시므이치.” “어디 우리 같은 무식한 늙은이가 당신들 뒤를 쫓아다녀서야 되겠소? 여기서는 그럭저럭 상대해 주지만 나중에는 만나도 손 내미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하더군요.”
우리는 꽤 서먹서먹하게 작별을 했다. 마음씨 좋은 막심 막시므이치는 다시 고집 세고 트집잡기 좋아하는 이등대위가 돼버렸다. 무엇 때문일까? 페초린이 무관심했거나 혹은 포옹하려 했을 때 그가 냉정하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일 것이다.
페초린의 수기
최근 나는 페초린이 페르시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페초린의 수기를 게재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고, 남의 작품에 제목을 붙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페초린이 카프카즈에 체류했던 시기의 내용만을 책으로 펴냈다.
타만-평화로운 밀수꾼들의 삶에 던져지다
근무지를 이동하다가 페초린은 ‘타만’이라는 해안도시에 머물게 됐다. 그는 숙소를 구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해안가에 자리잡은 조그만 농가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고 한참이 지나자 열 네 살 가량의 장님 소년이 나왔다. 본의 아니게 그를 오랫동안 바라봤는데, 문득 알아볼 수 없는 미소가 얇은 입술에 스쳐 지나갔다. 그 미소가 왠지 몹시 불쾌했다.
방에는 긴 의자 두 개와 식탁, 그리고 난로 옆에 놓인 커다란 궤짝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벽에는 성상 하나도 없었다. 어쩐지 불길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오두막의 흙바닥 여기저기에 어른거렸다. 바닥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창문틀 그림자 위로 웬 그림자 하나가 문득 나타났다 사라졌다. 누군가 창문 옆을 뛰어 지나간 것이다.
페초린은 외투를 걸치고 단검을 허리에 찬 다음 오두막에서 나왔다. 맞은편에서 장님 소년이 오고 있었다. 페초린은 조용히 그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있게 바위에서 바위로 뛰고 장애물을 이리저리 피해가는 것을 보면 초행길이 아닌 게 분명했다. 마침내 그는 무슨 소리를 들으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웅크리고 앉아 자기 옆에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몇 분이 지나자 사람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지, 장님아?” 여자 목소리였다. “폭풍이 심해서 얀코는 오지 않을 거야.” “얀코는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아, 저것 봐, 얀코는 바다도 바람도, 안개도 무서워하지 않아. 잘 들어봐. 이건 그가 노를 젓는 소리야.” 장님 소년이 말했다.
10분쯤 지나자 천천히 파도를 타고 보트 하나가 해변으로 접근해 왔다. 보트에서는 타타르풍의 양털모자를 쓴 중간키의 남자가 내렸다. 그가 손을 흔들자 세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보트 속에서 뭔가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 어깨에 짐을 매고 해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페초린은 곧 그들을 볼 수 없게 됐다. 오두막으로 돌아왔지만 이 이상스런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페초린은 뜬눈으로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다음날 페초린은 울타리 옆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서 갑자기 어디선가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오두막 지붕 위에 줄무늬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한 처녀가 서 있었다. 페초린은 어젯밤에 들은 목소리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온종일 페초린의 숙소 주위를 빙빙 돌았다. 저녁 무렵 페초린은 그녀를 당황시킬 생각으로 어젯밤에 봤던 일을 거만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봤지만 아는 것은 적죠. 그러나 알고 계신 것이 있다면 비밀로 해두세요.” “내가 만일 위수사령관에게 밀고라도 한다면?” 그러자 그녀는 노래를 부르면서 관목 숲에서 쫓겨난 새처럼 자취를 감춰버렸다. 해가 지고 페초린이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신비스런 그 여자는 다시 나타나 속삭이고는 사라졌다. “오늘밤 모두 잠들면 바닷가로 나오세요.”
페초린은 권총을 찔러넣고 밖으로 나갔다. 간밤에 장님을 따라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보트에 올라타세요.” 그녀는 배로 뛰어올랐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바다에 떠 있었다. “이건 말이예요.”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몸을 안으면서 대답했다. “이건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예요.”
바로 그때 뭔가 첨벙하고 물 속으로 떨어졌다. 페초린은 권총을 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그의 옷에 매달렸고, 그들 사이에 결사적인 몸싸움이 시작됐다. “당신은 보았어. 당신은 밀고할 거야!” 오랜 몸싸움 끝에 페초린은 그녀를 파도 속에 밀어넣었다. 페초린은 낡아빠진 노의 반쪽을 찾아 간신히 배를 부두에 댈 수 있었다. 페초린은 그 신비스런 여자가 긴 머리칼에서 거품을 짜내는 것을 보았다. 페초린은 호기심이 일어 몰래 다가가서 풀밭에 엎드렸다.
“얀코! 모든 게 끝장이예요!” “이봐, 장님,” 얀코가 말했다. “...에게 전해라(그 이름은 듣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심부름꾼이 아니라고. 이제는 위험해.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가야겠어. 그녀는 나와 함께 떠난다.” “그럼 나는?” 장님이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내가 알게 뭐냐?”그들은 조그만 돛을 올리고 급히 멀어져 갔다. 장님은 내내 바닷가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 지나자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장님 소년은 분명 울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페초린은 슬퍼졌다. 무엇 때문에 운명은 그를 평화로운 밀수꾼들의 삶으로 끌어들였을까? 잔잔한 샘물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그는 그들의 안정을 깨뜨렸고, 그 돌멩이처럼 그 자신도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뻔했던 것이다.
공작의 딸 메리-엇갈린 사랑
페초린은 카라카즈의 온천 파지고르스크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옛 친구인 그루쉬니스키를 만났고, 리고브스카야 공작부인의 딸 메리를 알게 됐다. 그루쉬니스키는 메리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녀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날, 페초린은 의사인 버나드로부터 자신의 옛 애인이었던 베라가 그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베라는 리고브스카야 공작부인의 먼 친척으로 이미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페초린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페초린은 공작의 딸 메리에게 일부러 냉담하게 대했는데, 이런 그를 그녀는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무도회날, 페초린은 메리에게 무례하게 구는 술 취한 신사로부터 메리를 도와주게 됐다. 이 일로 메리는 페초린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당신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당신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당신을 둘러싼 숭배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내가 그 속에 묻혀 버릴까봐 두려웠지요.” 페초린은 말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페초린은 여전히 그녀에게 무관심한 척했고 메리는 그의 무관심이 속상하고 마음 아팠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페초린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오히려 이런 사실을 즐기면서 스스로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한편, 그루쉬니스키는 메리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페초린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루쉬니스키는 페초린에 대해 적대적인 한 패의 주도적 인물이 됐다.
그러던 어느날, 페초린은 우연히 그들이 모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엿듣게 됐다. “여러분, 페초린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 놈의 용기를 시험해 보면 어떨까요?” “좋아요, 좋아.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되지?” “그루쉬니스키가 특히 그에게 화 나있으니까 그를 앞세우는 거야. 공연히 트집을 잡아 페초린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만드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권총에다가 총알을 넣지 않는 거야. 페초린이 겁을 먹게 될 거라는 건 내가 보증을 하지. 어때?” “훌륭한 생각이야! 찬성이야, 찬성!”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