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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 -
아버지와 아들(Отцы и Дети)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아르카지 키르사노프: 상냥하고 호감이 가는 귀족출신의 대학졸업생

예브게니 바자로프: 모든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고 과학을 신봉하는 20대 후반의 의대생

파벨 키르사노프: 전통과 권위를 소중히 여기며 허세와 매너리즘에 빠진 전형적인 귀족

안나 오진초바: 냉정하고 지적이며 부유하고 아름다운 29세의 과부





니힐리스트 바자로프

1859년 5월 20일에 아르카지는 학업을 끝마치고 친구와 함께 고향 메리노에 도착했다. 여인숙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니콜라이 키르사노프는 마침내 학사가 된 아들을 보고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맞이했다. “아버지, 제 친구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편지에 썼던 바자로프입니다.” “정말 기쁘오. 우리 집에 묵기로 했다니. 실례지만 이름은?”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입니다.” 바자로프는 느리긴 하지만 사내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국식 검정 양복에 유행을 따라 조그만 넥타이를 매고 반짝이는 반장화를 신은 중키의 신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아르카지의 큰아버지인 파벨 키르사노프였다. “잘 돌아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형에게 바자로프를 소개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난 오늘 네가 도착하지 않는 줄 알았다.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니?” 파벨 페트로비치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조카에게 물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좀 지체됐을 뿐이에요. 대신 배가 고파죽겠어요. 아버지, 빨리 상을 차리라고 말해주세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기다려, 나도 함께 갈 테니.”

바자로프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저 사람은 누구지?” “아르카샤의 친군데, 아주 영리한 청년이랍니다.” “우리 집에 묵을 작정인가?” “그래요.” “아니, 저 털북숭이가?” “네, 그렇다니까요.” “아르카지도 제법 세련된 것 같군. 그 애가 돌아와서 기뻐.” 파벨 페트로비치가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잠시 후 아르카지와 바자로프가 돌아왔고, 그들은 말없이 저녁식사를 했다. 특히 바자로프는 말 한마디 없이 게걸스럽게 먹기만 했다. 저녁식사 후 모두들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자네 큰아버지는 좀 괴짜시더군. 이런 시골에서 멋부리는 꼴이란, 정말 가소롭지 않은가! 게다가 그 손톱은 전시회라도 내보내고 싶더군!” 바자로프가 아르카지의 침대 옆에 앉아 짧은 파이프를 빨아대면서 말했다. “아마 자넨 모르겠지만 그 분도 한때는 사교계에서 날렸고 많은 여자들을 홀리기도 했지. 다음에 그 분의 이야기를 해 주겠네.” “낡은 유습이야. 하지만 자네 아버지는 훌륭해. 괜히 시를 읊고 농장경영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어 보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야.”

다음날 아침, 바자로프는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개구리를 잡으러 늪으로 갔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우아한 아침 가운을 걸치고 나와 아르카지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바자로프란 친구는 뭐하는 사람이냐?” “그 친구는 니힐리스트예요.” “니힐리스트라. 그건 내 판단에 의하면 라틴어의 니힐(nihil), 즉 허무에서 나온 말 같구나. 그렇다면 그 말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뜻하는 거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아무 것도 존경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맞장구를 치고 다시 버터를 바르기 시작했다. “결국 만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인간입니다.” 아르카지가 말했다. “그건 같은 얘기가 아니냐?” “아닙니다, 같은 얘기가 아닙니다. 니힐리스트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존경받는 원리라도, 그것을 그대로 신조로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 그게 좋다는 거냐?” “그건 사람 나름이죠, 큰아버지. 그것으로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나빠지는 사람도 있겠죠.” “알겠다. 그건 우리하고 상관없는 거구나. 우린 구시대의 인간이니까 원칙 없이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고 숨을 쉴 수조차 없단다. 너희들은 완전히 변했구나.”

이때 삼베 저고리와 바지에 진흙을 묻히고 수초가 달라붙은 낡고 둥근 모자를 쓴 바자로프가 성큼성큼 테라스로 다가와 머리를 한번 끄덕이고 말했다.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차 마시는 시간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 포로를 잘 간수해둬야 하니까요.” “그게 뭐요, 거머리요?”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아닙니다. 개구리입니다.” “그걸 먹나요, 아니면 기르나요.” “실험용이죠!” 바자로프가 태연히 받아넘기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걸 해부하겠지. 원리는 믿지 않으면서 개구리는 믿거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아르카지는 유감어린 눈으로 큰아버지를 바라봤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살짝 한쪽 어깨를 움츠렸다. 바자로프는 돌아와서 허겁지겁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전공이 물리학인가요?” 파벨 페트로비치가 바자로프에게 물었다. “네, 물리학이죠. 하지만 대체로 자연과학을 하는 편입니다.” “요즘은 게르만인이 그 방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더군.” “그렇습니다. 독일인은 그 방면에서 우리의 스승 격이죠.” 바자로프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일부러 비꼬기 위해 ‘독일인’ 대신 ‘게르만인’이라고 말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르카지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그건 대체 어떤 이유 때문이오? 당신은 권위라는 걸 믿지 않소?” “네, 그런 걸 믿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사리에 맞는 말만 해주면 거기에 동의합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독일인은 늘 사리에 맞는 말만 하나요?”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닙니다.” 바자로프는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분명 그는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난 독일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소. 옛날에는 실러니 괴테니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화학자니 유물론자니 하는 자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훌륭한 화학자는 어떤 시인보다 스무 배나 더 쓸모가 있습니다.” “아니, 저런. 그럼 당신은 예술을 인정하지 않나요?” “돈을 버는 예술 말입니까, 아니면 치질을 고치는 예술 말입니까?” 바자로프는 경멸 어린 미소를 띠며 소리쳤다. “아, 그래, 농담도 꽤 잘 하시는군. 그럼, 당신은 모든 걸 다 부정하고 그저 과학만을 믿는다 그 말이군?”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는 아무 것도 믿지 않습니다.” “잘 알겠소. 그건 그렇고,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여러 법칙에 대해서도 당신은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소?” “아니, 이건 심문입니까?” 파벨 페트로비치의 안색이 변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이 대목에서 둘의 대화에 끼여들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잠시 후 형과 함께 자리를 떴다.



바자로프와 파벨 페트로비치의 논쟁

거의 2주일이 지났다. 마리노에서의 생활은 그 나름대로의 질서에 따라 흘러갔다. 아르카지는 생활을 즐기며 놀며 지냈고, 바자로프는 일을 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바자로프의 무례한 태도며 퉁명스런 말투에 익숙해졌다. 아내를 잃고 홀로 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정부(情婦)가 된 가정부의 딸 페니치카와도 허물없이 친해졌다. 그러나 파벨 페트로비치만은 마음 속으로 바자로프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바자로프를 오만불손한 철면피에, 남을 잘 비꼬는 상놈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싸움은 그 날 밤 차를 마실 때 일어났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미 싸울 태세를 갖추고 초조한 듯 단호한 표정으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바자로프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말없이 차만 연거푸 마셔대고 있었다. 어쩌다 화제가 근처에 사는 지주에게로 옮겨갔다. “건달입니다. 형편없는 귀족입니다.” 페테르부르그에서 그 지주를 만난 일이 있던 바자로프가 거침없이 말했다.

“한 마디 묻겠소만, 당신 생각엔 건달과 귀족이 같은 뜻이오?” 입술을 바르르 떨며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문을 열었다. “저는 형편없는 귀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은 귀족이나 형편없는 귀족이나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감히 이 자리에서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자유주의자, 진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귀족, 진짜 귀족을 존경하지요. 의사 양반, 영국의 귀족들을 상기하시오.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지만 남의 권리도 존중합니다. 또 자신의 의무도 스스로 수행하고 있소.”

“실례지만, 파벨 페트로비치씨. 당신은 그렇게 자신을 존중하면서 팔짱을 끼고 조용히 앉아있는데, 도대체 그것은 사회의 복지에 어떤 이익이 되는 겁니까?” “그건 전혀 다른 문제요. 당신의 표현대로, 내가 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지 당신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는 거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아리스토크라티즘’이오. 현대 사회에서 원리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자들은 부도덕한 인간이거나 머리가 텅빈 공허한 인간들이오. 안 그런가. 니콜라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리스토크래티즘, 리버럴리즘, 프로그레스, 플린시플. 이런 쓸데없는 외국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건 러시아인에게 거져 준대도 필요없습니다.” “그럼 당신의 의견으로는 도대체 무엇이 필요하다는 거요? 당신의 말을 듣고 있자니, 우리는 마치 인류의 테두리 밖에, 그 법칙의 테두리 밖에 놓여 있는 것 같소. 그건 당치도 않은 말이오. 역사의 논리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논리가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건 또 무슨 뜻이오.?” “그야 뻔하죠. 우리에겐 그런 추상론이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러시아의 국민을 모욕하는 거요. 원리나 규칙 같은 걸 인정할 수 없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소. 도대체 당신은 무엇에 따라 행동하는 거요.” “큰아버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우린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구요.” 아르카지가 끼여들었다. “우린 우리가 유익하다고 인정하는 것에 따라 행동합니다. 지금은 부정이 가장 유익하니까, 우린 부정하는 겁니다.”

바자로프가 말했다. “모든 걸?” “네, 모든 걸.” “뭐라구? 예술이나 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건 입에 담기도 무서운 일이군...” “모든 걸 부정합니다.” 바자로프가 침착하게 되풀이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아르카지는 만족한 나머지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실례지만, 당신은 모든 걸 부정하고 있소, 아니 모든 걸 파괴하고 있소... 하지만 건설도 필요하지 않나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말문을 열었다. “그건 이미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선 자리부터 청소할 필요가 있으니까요.”“아니야, 아니야!” 파벨 페트로비치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난 여러분이 러시아의 국민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믿을 수 없소. 그들은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가부장적인 사람들이오. 그들은 신앙 없이는 살아갈 수 없소...” “전 그 말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결국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왜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당신들은 러시아 국민 전체에 반대한다는 건가?” 파벨 페트로비치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들은 뭘 하오?”

“우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관리가 뇌물을 먹고, 우리나라에는 길다운 길이 없고, 상업도, 공정한 재판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욕설만 하는 거요?” “욕설만 할뿐입니다.” “그게 니힐리즘이라는 거요?” “그게 니힐리즘입니다.”

바자로프는 이 ‘나리’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열변을 토한 데 대해 은근히 화가 나서 더 불손하게 대답했다. 끝없는 논쟁에 지루해진 바자로프는 ‘개구리를 해부해야겠다’고 말하고 아르카지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저렇다니까, 저게 바로 현대의 청년이야! 바로 저게 우리의 후계자란 말씀이야!” 파벨 페트로비치가 입을 열었다. “후계자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심난한 듯 한숨을 내쉬며 되뇌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이따금 아르카지를 훔쳐볼 뿐이다.



오진초바와의 짧은 사랑, 그리고 환멸

다음 날 바자로프는 아르카지와 함께 아르카지의 먼 친척뻘이 되는 ×시의 마트베이 일리치를 방문했다. 마트베이는 대정치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도지사가 베푸는 무도회에 함께 갔다. 거기에서 바자로프는 옛 알음알이인 시트니코프를 만났고, 그를 통해 ‘해방된 여자’인 쿠크시나와 스물 아홉 살 된 과부 오진초바를 소개받았다. 바자로프는 지적이고 차가운 오진초바를 냉소적으로 대했으나 그녀에게 은근히 마음이 끌렸다. 오진초바는 아르카지와 바자로프를 자신의 영지인 니콜스코예로 초대했고, 그들은 사흘 뒤에 그녀를 방문했다.

오진초바는 동생인 카탸와 함께 생기 넘치는 얼굴에 처녀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음악과 미술과 자연 등에 대해 토론하고 책을 읽고 카드놀이를 했으며, 밤에는 주변을 산책했다. 바자로프는 이렇게 오진초바의 집에서 보름 가량을 보냈다. 바자로프는 오진초바와 의견이 맞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오진초바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없었던 마음의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걸핏하면 화를 내고 말수도 적어지고 눈초리도 사나와졌다. 이 ‘새로운 사건’의 원인은 오진초바가 바자로프의 마음에 불러일으킨 감정이었다. 바자로프는 로맨틱한 사랑은 넌센스이며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진초바와 얘기할 때 로맨티시즘에 대해 냉담한 경멸을 표시했지만, 혼자 남게 되면 자신 속에서 로맨티스트를 발견하고 울분을 느꼈다. 모순과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던 바자로프는 어느 날 오진초바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는 바보처럼 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진초바는 사랑의 고백을 한 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는 그를 보고 그가 무섭기도 하고 가엾게도 생각되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애정이 어려 있었다. 그는 재빨리 돌아서서 뚫어질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을 움켜잡고 갑자기 그녀를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겼다.“당신은 내 마음을 모르셨던 거예요.”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황급히 속삭였다. 바자로프는 입술을 깨물고 밖으로 나갔다. 30분 후 하녀가 오진초바에게 바자로프의 쪽지를 전해주었다. ‘오늘 떠나야 할까요, 내일까지 남아 있어도 괜찮을까요’ ‘왜 떠나시렵니까? 나도 당신을 몰랐고, 당신도 날 모르셨던 거예요.’ 오진초바는 이렇게 회답을 보내고 마음속으로는 ‘나도 나 자신을 몰랐던 거야.’하고 생각했다.

그날 밤 오진초바는 바자로프의 사랑고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후, 결국 바자로프와의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마음의 안정을 택하기로 했다. 다음 날 바자로프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아르카지와 함께 노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으로 훌쩍 떠났다.



마리노에서의 결투

바자로프의 늙은 부모는 3년만에 갑자기 귀향한 아들과 아들의 친구를 반갑고 따뜻하게 맞았다. 그들은 아들에 대한 대견함과 사랑하는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금은 외경심을 갖고 바자로프의 신경을 건드릴까 봐 조심조심 말하고 행동했다. 바자로프와 아르카지는 평화로운 시골을 산책하면서 한가하게 지냈다. 그들은 건초를 한 다발씩 깔고 낟가리 밑에 누웠다. “자넨 여기서 얼마나 살았지?” 아르카지가 물었다.

“2년쯤 살았을 거야. 그리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방랑생활을 했지. 주로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아다니면서.” “자넨 부모를 사랑하는가. 예브게니?” “사랑하고 말고, 아르카지!” “그분들은 자넬 너무나 사랑하더군!” 바자로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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