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 -
첫사랑(Первая Любовь)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열 여섯 살의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 연상의 지나이다를 사랑하면서 온갖 모순된 감정을 체험한다.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스물 한 살의 가난한 공작부인의 딸. 뭇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로 평소에는 조용하고 차갑지만 지나이다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나이다와의 첫 만남 - 흥분과 감격
그 무렵 나는 열 여섯 살이었다. 나는 대학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았고, 공부도 되지 않았다. 나는 엽총을 들고 뜰을 돌아다니다가 이웃집 담장 너머에서 날씬한 몸매의 키 큰 처녀를 발견했다. 처녀 주위에는 네 명의 청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처녀는 작은 회색 꽃으로 그들의 이마를 돌아가며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처녀의 거동에는 말할 수 없는 매력이 풍겼다. 나는 놀랍고 재미있어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는 모든 걸 잊고 그 날씬한 몸매며 예쁜 손, 하얀 수건 밑으로 보이는 헝클어진 금발과 반쯤 감겨진 영리한 눈과 속눈썹, 그 밑의 갸름한 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젊은 친구.” 갑자기 곁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의 아가씨를 그렇게 바라보는 법이 어디 있어?” 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검은 머리칼을 짧게 깎은 어떤 남자가 비웃는 눈초리로 날 빤히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 순간 처녀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표정이 풍부한 활기찬 얼굴에 커다란 회색 눈동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얼굴을 떨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하얀 이가 반짝 빛났고 눈썹은 약간 이상하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땅바닥에 떨어진 엽총을 주워들고는 커다란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방으로 도망쳐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나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흥분을 느꼈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새로 이사온 이웃인 자세키나 공작부인 댁을 방문했다. 조그맣고 가무잡잡한 눈을 한 쉰 살 가량의 부인이 날 맞아줬다. 그녀는 허물없이 내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더니 어제 담 너머로 봤던 그 처녀가 문지방에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얘가 내 딸이랍니다. 실례지만 당신 이름이 뭐죠?” 공작부인이 말했다. “블라디미르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흥분한 나머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처녀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띤 채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머리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벌써 무슈 볼데마르를 만난 적이 있어요. 이리 오세요, 내 방으로.” 그녀는 내게 머리를 까딱해 보이고는 나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는 자리에 앉더니 털실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기 앞의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을 한 다음, 열심히 털실 뭉치를 풀어 헤쳐 내 양손에 걸었다. “어제 날 보고 어떻게 생각했죠? 아마 날 욕했을 테죠.” 잠시 후에 그녀가 물었다. “난, 난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난 당황하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날 잘 모르겠지만 난 참 이상한 여자예요. 난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서 사실 얘기를 듣고 싶어요. 당신이 열 여섯이란 말을 들었지만 난 스물 한 살이니 내가 손위죠? 그러니 언제나 내게 사실대로 말해야 해요...... 내 얼굴을 봐요. 왜 날 쳐다보지 않죠?” 난 어쩔 줄 몰라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 미소는 이전과는 달리 무척 호의를 품은 것이었다. “날 좀 보라니까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아가씨......”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첫째, 이제부터 날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라고 불러줘요. 둘째, 젊은이가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건 못된 버릇이예요. 그건 어른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어때요, 내가 맘에 드나요?” “물론입니다.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난 숨길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한테 가정교사가 있나요?”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아, 아뇨, 가정교사 없이 지낸 지 벌써 오랩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가 프랑스인 가정교사와 헤어진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이때 열어 젖힌 현관문으로 우리 집 하인 표도르가 나타났다. 그는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그에게 걸어갔다. “왜 그래?” “마님이 도련님을 불러오라고 해서 왔어요. 일을 다 봤으면 빨리 돌아올 것이지 뭘하고 있느냐고 화를 내고 계십니다.”
“이봐요, 무슈 볼데마르, 자주 놀러 와야 해요.” 지나이다는 이렇게 소리치고 또 웃어대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뭣 때문에 내내 웃기만 하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늦게 돌아왔다고 잔소리를 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않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서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음 날 점심에 공작 부인과 지나이다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공작 부인은 코담배를 들이마시며 체면 차리지 않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지나이다는 그야말로 공작의 딸답게 거만할 정도로 위엄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식사를 하는 동안 그녀 옆에 앉아서 침착하고 친절하게 그녀를 접대하면서 이따금 그녀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녀도 가끔 아버지를 쳐다보곤 했는데, 그 눈길은 거의 적의를 품은 것처럼 이상야릇했다. 어머니는 공작 부인과 지나이다를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점심이 끝난 후, 그녀가 내 옆을 지나면서 “저녁 여덟 시에 우리 집에 꼭 놀러 와요” 하고 속삭이고는 하얀 숄을 뒤집어 쓰고 급히 사라졌다.
지나이다와 다섯 남자들, 그리고 나
나는 여덟 시 정각에 프록코트를 입고 앞 머리칼을 높이 치켜올려 빗고는 공작 부인댁으로 갔다. 그곳에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 복작대며 벌금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나이다가 날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자, 이리 오세요. 여러분, 소개합니다. 이분은 옆집 도련님인 무슈 볼데마르예요. 그리고 이분들은 마레프스키 백작, 의사 선생인 루쉰, 시인 마이다노프, 예비역 대위 니르마츠키, 경기병 벨로브조로프예요.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바래요.”
나는 몹시 당황해 누구에게도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몹시 얼떨떨한 모양인데 볼데마르씨에게 설명을 해야겠군요. 우린 지금 벌금놀이를 하고 있는데 이 집 아가씨가 벌을 받게 돼 있소. 제비를 뽑은 사람이 아가씨의 손에 키스할 권리를 갖게 되오.” 루쉰이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맨 마지막에 모자 속에 손을 넣어 표를 한 장 집어 펼쳐보았다. 아아! 종이에 ‘키스’라는 두 글자를 봤을 때 내 마음이 어땠으랴! ‘키스!’ 나는 엉겹결에 소리쳤다.
“브라보! 이 분이 뽑았어요. 정말 기뻐요!”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맑고 달콤한 눈길로 내 눈을 쳐다봤고 내 심장은 금방 터질 것 같았다. 지나이다는 내 앞에 서서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하고 위엄있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눈 앞이 캄캄했다. 한쪽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양쪽 무릎을 털썩 꿇고는 서투르게 지나이다의 손가락에 입술을 갖다대어 코 끝이 그녀의 손톱에 걸려 가볍게 긁혔다.
벌금놀이는 계속 됐다. 조용한 귀족 집안에서 자랐으며 주위와 격리된 채 엄격한 교육을 받아온 나는 이렇게 떠들썩한 고함소리와 들뜬 분위기,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의 교제로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극도로 흥분해 누구보다도 더 큰소리로 웃고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지나이다는 계속 호의를 보이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벌인가를 받게 됐을 때 나는 그녀와 나란히 붙어앉아 한 장의 얇은 비단 숄을 함께 뒤집어쓰게 됐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해야만 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우리 둘의 머리는 갑자기 무덥고 반쯤 투명한 향긋한 안개에 싸여 버렸다. 이 안개 속에서 그녀의 눈은 부드럽게 빛났고 방긋이 벌어진 입술은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내 얼굴을 간지럽히며 화끈거리게 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이상야릇한 미소를 띠며 ‘어때요, 네?’ 하고 속삭였다. 나는 단지 얼굴을 붉히고 웃음 지으며 그 말을 외면했다. 숨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벌금놀이가 싫증이 나서 우리는 줄돌리기를 했고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마침내 우리는 녹초가 됐다. 나는 녹초가 돼 정신이 몽롱할 만큼 행복을 느끼며 밖으로 나왔다. 헤어질 때 지나이다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다시금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자리에 눕지도 않았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있었다. 내가 느낀 것은 실로 감미로운 것이었다. 나는 꼼짝도 않고 앉아서 천천히 숨을 쉬었다. 오늘 저녁의 일을 생각하며 나는 사랑에 빠졌나 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사랑이란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선뜩해졌다. 어둠 속에서 지나이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어둠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 눈은 여전히 뜻 모를 미소를 머금고, 생각에 잠긴 듯 상냥하게 날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와 헤어지던 순간과 똑같은 눈길이었다. 마침내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발끝으로 침대에 다가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조심스럽게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창밖에서는 무수히 가지가 뻗은 것 같은 길고 희미한 번개가 쉴 새 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것은 번쩍거린다기보다 마치 죽어가는 새의 날개처럼 파닥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그대로 새벽까지 서 있었다. 날이 밝아왔다. 새벽 놀이 진홍빛 반점을 이루며 나타났다. 해가 떠오를 시간이 되자 번개도 차츰 빛을 잃고 사라져갔다. 그 가냘픈 전율도 점점 뜸해지고, 마침내 떠오르는 태양의 맑고 찬란한 햇빛 속으로 빠져들어가 사라지고 말았다.
내 마음속의 번갯불도 사라져갔다. 나는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정적을 느꼈다. 그러나 지나이다의 자태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서 떠날 줄 몰랐다. 나는 잠을 청하기 전에 석별의 정과 신뢰에 찬 경애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모습에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었다. 오오, 보드라운 감성이여, 부드러운 음향이여, 감동어린 영혼의 친절함과 평온함이여, 감미로운 첫사랑의 녹아나는 기쁨이여. 그대들은 어디 있는가, 그대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소년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로
아버지는 내게 기묘한 감화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와 나의 관계도 이상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 공부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모욕을 주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나의 자유를 존중해 주고 공손한 태도까지 보였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아버지가 남성의 전형적 인물로 보였다.
나는 공작 부인 집을 방문한 것에 대해 아버지에게 상세히 얘기했다. 아버지는 간간이 웃음을 띠고 재미있다는 듯 나를 쳐다보면서 짤막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대꾸도 하면서 나를 치켜올렸다. 처음에 나는 지나이다의 이름조차 입 밖에 낼 용기가 없었지만 끝내 참을 수가 없어 그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나의 ‘열정’은 그날부터 시작됐다. 나는 이미 단순한 소년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내가 됐다. 지나이다가 곁에 없으면 나는 풀이 죽어 아무 것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온종일 그녀만을 열렬히 생각했다. 나는 슬픔에 잠겼다. 그녀 앞에서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나는 질투를 하거나, 자신이 보잘 것 없음을 스스로 의식하거나, 바보같이 뾰로통해지거나, 어리석게 굽실거렸다.
그러나 억제할 수 없는 힘이 나를 자꾸 그녀에게로 끌고 갔다. 지나이다는 내가 자기를 연모하는 걸 곧 알아차렸고 나도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연정을 재미있어 하고, 날 희롱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또 괴롭히기도 했다. 나는 지나이다의 손에서 마치 말랑말랑한 밀납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 혼자만이 그녀를 연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집을 드나드는 뭇 사내들이 그녀에게 홀딱 반해 있었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밧줄에 묶어 자기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했다. 그녀는 그들의 마음 속에 때론 희망을, 때론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기분내키는 대로 그들을 조롱했지만, 그들은 꿈에도 거역할 생각을 하지 않고 기꺼이 그녀에게 복종했다. 생기에 넘치는 아름다운 그녀의 몸 전체에는 교활함과 어수룩함, 기교와 단순, 조용함과 활달함이 뒤섞인 특이한 매력이 흘러 넘쳤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그녀의 얼굴은 표정이 풍부했다.
어느 날 나는 정든 담 옆의 안쪽을 걷고 있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지나이다를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창백하고 깊은 비애와 피로의 빛이 뚜렷한 걸 본 나는 가슴이 죄어들었다. 난 엉겁결에 웅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당신은 정말 날 사랑하고 있나요?” 그녀가 한참만에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가요? 물론 그렇겠죠. 똑같이 생긴 눈이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생각에 잠기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난 모든 게 싫어졌어. 난 정말 견딜 수 없어. 이런 일을 수습할 수 없어... 아아, 괴로워. 정말 괴로워 죽겠어.”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나는 겁을 먹고 물었다. 지나이다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순간 그녀를 슬프게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생명이라도 흔쾌히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는 온통 밝고 푸르렀다. 어디선지 비둘기가 구구 울어댔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무슨 시든 낭송해 줘요. 난 당신이 시를 낭송할 때가 좋아요. ‘그루지야의 언덕에서’를 들려줘요.”나는 앉아서 ‘그루지야의 언덕에서’를 낭독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시가 좋다는 거죠. 이 세상에 없는 걸 말해 주니까.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녀는 입을 다물더니 벌떡 일어섰다. 우리는 마이다노프가 기다리는 곁채로 걸어갔다. 나는 줄곧 지나이다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녀가 말한 마지막 말뜻을 풀어보려고 애썼다.
“혹시 남모르는 연적이 뜻밖에 그대 마음 사로잡은 건 아닐까?” 갑자기 마이다노프가 콧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걸 보고 놀란 나머지 온몸이 싸늘해졌다. 나는 이미 전부터 질투하고 있었지만 바로 이 순간에 ‘그녀가 사랑에 빠졌구나’하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아아!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대는 누굴까?’ 나의 진짜 번민은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나는 머리를 짜내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봤다. 그리고 가능한 한 은밀하고 끊임없이 지나이다를 감시했다. 그녀에게 변화가 생긴 건 분명했다. 그녀는 혼자 산책하러 나가서 오랜 시간 헤매고 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손님이 와도 나타나지 않고 몇 시간이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저 사내가 아닐까? 혹 이 사내가 아닐까?’ 그녀를 사모하는 사내들을 하나하나 손꼽아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자문해봤다. 나는 마레프스키 백작이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위험 인물일 거라고 단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담장 위에 앉아서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첨탑의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갑자기 뭔가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발 밑의 한길에는 연회색 드레스를 입고 장미빛 양산을 쓴 지나이다가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발을 멈추더니 밀짚 모자 챙을 뒤로 돌리고 벨벳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거기서 뭘 하고 있어요? 그런 높은 담장 꼭대기에서?” 그녀는 몹시 야릇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아, 그렇지. 당신은 밤낮 날 사랑한다고 맹세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내게로, 이 한길로 뛰어내려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