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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나무생각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나무생각 / 2026년 4월 / 272쪽 / 22,000원





1부 술꾼의 노래



신이 다가와


신이 다가와

나 여기 있다 말하길 기다리는가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신은

아무 의미 없다

신은 태초부터 너의 가슴에 들이치고 있다

너는 그걸 알아야 한다

너의 심장이 빨갛게 타오르고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을 때

신은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



고독


고독은 비와 같습니다

바다에서 석양을 향해 오릅니다

아득히 외진 평원에서

고독한 하늘을 향해 오르고

하늘에 이르러서는 도시로 와서 내립니다



고독은 동틀 녘에 비로 내립니다

모든 골목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몸들이

실망하고 슬퍼하며 서로를 놓아줄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함께

한 침대에서 자야 할 때

그때 고독은 강물 되어 흐릅니다



불안


시든 숲에 울리는 새 울음소리

이 시든 숲에선 무의미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선명한 새 울음소리

세상에 나온 그 순간에

시든 숲 위로 하늘처럼 드넓게 퍼집니다

만물이 순순히 그 울음소리에 자신을 맡깁니다

온 땅이 그 소리 안에 소리 없이 몸을 누인 듯하고

거대한 바람마저도 그 소리에 기대는 듯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던 시간은,

그 소리에서 벗어나면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창백하고 조용합니다



가을의 끝


얼마 전부터 모든 것이 변해가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일어나 움직이고

죽이고,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모든 정원이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노랑에서 황금빛으로,

그리고 서서히 진행되는 낙하

그 길이 내게는 얼마나 멀었던가요



지금 나는 텅 빈 뜰에서

가로수 너머 저편을 내다봅니다

저편 아득한 바다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고도 힘겹게 거부하는

하늘이 보입니다



술꾼의 노래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꾸 들락거리는

그것을 나는 잡고자 했지

그때 술이 그것을 잡아주었다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아)

그 후 술은 내게 이것저것을 잡아주었고

나는 결국 술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지

어리석게도!



지금 나는 술의 장난에 놀아나고

술은 나를 경멸하며 흩뿌리고

오늘도 나를 이 짐승, 죽음에 던져주네

죽음은 나를, 이 더러운 카드를 손에 쥐면

그의 잿빛 부스럼 딱지를 긁어내고

똥통에 던져버릴 테지



그러한 밤이면 1


그러한 밤이면 너는 골목길에서

미래의 존재들, 길고 창백한 얼굴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들은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말없이 그냥 지나치게 두겠지

그러나 그들이 말을 시작한다면

지금 거기 서 있는 너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진 몸이리라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존재임에도

이미 죽은 존재처럼 침묵한다

미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지만

마치 물속에서처럼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한동안 그것을 견디며

마치 물결 아래 있는 것처럼

물고기들의 조급함과 닻을 내리는 밧줄들을 지켜보리라





2부 깨어 있는 숲이여



내 영혼 행복을 갈망하네


내 영혼 행복을 갈망하네

짧고도 허망한 그 놀라운 환상을…

샘물의 소용돌이에서, 소나무의 속삭임에서

행복이 다가오는 소리 들리는구나



은빛 조각배가 보랏빛 언덕에서

창백한 푸른 하늘로 떠오를 때

짙은 그림자 드리운 꽃나무들 아래에서

행복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하얀 옷을 입고 떠난 내 사랑,

가슴에 붉은 꽃을 꽂고서

일요일마다 먼지와 수풀 사이를 함께 거닐었던

내 사랑처럼

행복도 그 붉은 꽃 꽂고 있을까?



내가 정원이면 좋겠습니다


내가 정원이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꿈이 분수대 옆에 새로운 꽃을 피워내는 곳,

어떤 꽃들은 제각기 떨어져 생각에 잠기고

어떤 꽃들은 말 없는 대화로 하나 되는

그런 정원이면 좋겠습니다



꽃들이 이리저리 살랑일 때면, 그 머리 위에서

나의 말도 나뭇가지처럼 살랑이면 좋겠습니다

꽃들이 쉴 때면, 선잠에 취한 꽃들의 말을

조용히 엿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서우리만치 아주 쓸쓸하여


우리는 무서우리만치 아주 쓸쓸하여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말은 우리의 방랑 앞에 나타난

숲과 같아요

우리의 의지는 우리를 휘휘 돌며 다그치는

바람일 뿐이에요

우리 자신이 곧 갈망이기 때문이지요

피어나는 꽃 속에 담긴 갈망…



너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너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네게 사과를 건네고

너의 금발을 조심스레 쓰다듬던 일을!

그 시절 나는 잘 웃었고 너는 아직 어렸었지



어느덧 나는 진지해졌고

내 가슴속에는 젊은 희망과 오래된 비탄이 타올랐어

언젠가 가정교사가 너의 손에서

‘베르테르’를 빼앗던 그 무렵이었지



봄이 아우성치던 날, 나는 네 뺨에 입을 맞췄고

너는 기쁨에 찬 큰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지

그날은 일요일이었어

멀리서 종소리가 울리고

전나무 숲 사이로 불빛이 새어들었지…



깨어 있는 숲이여


깨어 있는 숲이여

고통의 겨울 한복판에서

대담하게 봄기운 가슴에 품고

너의 은빛 방울방울 떨구어 내고 나니

푸르러지는 너의 갈망이 보인다



너의 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건

너의 깊은 곳에 이르는 문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없다는 것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두면 축제처럼 될 터이니

모든 날을 그냥 그렇게 두세요

아이가 길을 걸으며

바람 불 때마다 날아드는 꽃잎을

선물처럼 그냥 두듯이



꽃잎을 모아 간직하는 일 따위

관심 없어요

아이는 제 머리카락에 들어와 붙잡힌 꽃잎

살며시 떼어내 풀어주고

사랑스러운 젊은 시절을 향해

새 꽃잎을 달라 두 손을 내밀어요





3부 오래된 집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벽 선반에서

나의 쇼펜하우어를 꺼내 봅니다

그는 삶을 일컬어

“슬픔으로 가득 찬 감옥”이라 했지요



그의 말이 맞더라도, 나 아무것도 잃은 것 없어요

감옥의 고독 속에서도

그 옛날 달리보*처럼

행복하게 내 영혼의 현을 깨우니까요



* 체코의 전설적인 기사. 위험인물로 체포되어 탑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다.



오래된 집 안에서


오래된 집 안, 탁 트인 전망

프라하 전체가 커다란 원을 그립니다

멀리 아래쪽에서 슬금슬금

땅거미가 소리 죽이고 기어갑니다



시내는 유리에 가로막힌 듯 뿌옇습니다

오직 성 니콜라스 성당의 청록색 돔만이

투구를 쓴 거인처럼

선명하게 우뚝 솟아 있습니다



멀리 무더운 거리의 끊임없는 소음 속에

벌써 여기저기 등불이 반짝입니다

지금, 저 오래된 집 안에서

누군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불쌍한 아이


뺨이 움푹 들어간 한 소녀를 알고 있어요

소녀의 어머니는 약했고

소녀의 첫 옹알이는

아버지의 욕설에 덮여버렸지요



가난은 오랜 세월 끈질기게 머물렀고

배고픔은 덤이었어요

그렇게 소녀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머리칼에 비쳐 드는 황금빛 햇살도 소용없었지요



소녀는 울타리에 핀 꽃들의 미소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해요

만령절에도 꽃은 피고 햇살이 비추는구나



구름 동화


망치질 소리 잦아들듯

한낮이 은은한 소리 내며 잦아들었어요

언덕 풀숲 위에 커다란 달이

노란 골드멜론처럼 누워 있어요.



그걸 맛보고 싶었던 작은 구름 하나

마침내 환하고 둥근 그 달을

한 입 덥석 베어 물어

볼록해진 뺨으로 급히 씹었어요



구름은 도망치려다 한참을 머무르며

빛을 몽땅 빨아 먹었어요

그때 밤이 황금빛 과일을 높이 들어 올리자

구름은 까맣게 녹아내렸답니다



태양의 마지막 인사

- 베네스 크니퍼의 그림을 보고


거룩한 태양이 녹아들고 있었다

하얀 바닷속으로 뜨겁게

바닷가에 두 수도자가 앉아 있었다

금발의 젊은이와 백발의 노인



노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이렇게 평화로이 쉴 수 있기를

젊은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이런 영광의 광채가 있기를



평화


프라하는 전쟁이라는 기형아를 분만했고

그는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서른의 나이로

칼스 다리에서 죽었습니다



마침내 쇳조각은

그저 농부의 살갗에 생채기나 내게 되었고

교회 종탑에서 타올랐던 불꽃은

아늑한 화덕으로 되돌아갔습니다





4부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이별


이별이 뭔지 나는 겪었고, 지금도 잘 알고 있다

극복되지 않는 어둡고 잔인한 그것

이별은 아름답게 포장된 것을 잠시 보여준 뒤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 이름을 부르고, 떠나보내고,

뒤에 남겨진다, 모든 여인들처럼…

그것은 그저 작고 하얀 손짓일 뿐이다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이제는 알아보기도 어려운

가만히 계속되는 손짓,

어쩌면 뻐꾸기가 앉았다 급히 날아가 버린

자두나무가 아닐는지



여름비 내리기 전


한순간 공원의 모든 초록이

뭔지 모를 무언가를 빼앗기고

그 기운이 창가로 더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머무는 것이 느껴집니다



비를 알리는 물떼새 울음이 수풀에서

절박하고 세차게 울립니다

문득 히에로니무스가 생각납니다

그 하나의 목소리에서 고독과 열망이

이렇게나 강하게 솟구칩니다



그 목소리, 쏟아지는 비의 응답을 듣게 되겠지요

큰 방의 벽들은 우리 말을 들으면 안 되는 양

걸려 있는 그림과 함께 멀리 물러나 있습니다



그때 오후의 빛을

바랜 벽지가 반사합니다

어릴 적 막연히 두려워했던

그 오후의 빛을



맹인

- 파리에서


보라, 그가 걸어간다

새하얀 찻잔에 생긴 까만 금처럼

자신이 지나는 어두운 자리만큼

환한 도시를 가르며



빈 종이 같은 그의 얼굴에는

온갖 사물들의 반영이 휘갈겨져 있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직 그의 촉각만이 생동한다

작은 파장 안에서 세계를 감지하려는 듯이



고요를, 그리고 저항을 

그러다 기다리던 누군가를 고르듯

간절하게 손을 내민다

청혼하듯 엄숙하게



백조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 사이로

묶인 듯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이 고역은

마치 백조의 뒤뚱거리는 걸음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가 날마다 딛고 서 있는 이 땅을

더는 밟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물 위로 불안하게 착지하는 백조의 앉음새를 닮았습니다

물은 백조를 포근히 받아 안고

행복했으나 덧없던 시간이 찰랑찰랑 흘러갑니다

이제 백조는 조용하고 당당하게

더 성숙하고 위엄 있게

유유히 헤엄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촘촘히 별을 뿌려놓은


촘촘히 별을 뿌려놓은 하늘이

우리의 근심 위에서 한껏 뽐을 낸다

베개 속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울어라

여기, 울고 있는 얼굴은 물론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울음을 그친 얼굴에서

황홀한 우주가 시작된다

그대가 그곳으로 향할 때

누가 그 흐름을 막으랴

그대에게 밀려오는 저 별들의 힘찬 흐름에

그대가 돌연 맞서려고 할 때 말고는 없으리라

호흡하라, 대지의 어둠을 들이마시고 다시 올려다보라!

다시 얼굴 없는 가벼운 심연이 저 위에서 그대에게 기대리라

밤을 품은 옅어진 얼굴이 그대의 얼굴을 받아주리라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되지 않겠다는 갈망이여



* 릴케가 묘비명으로 써달라고 유언한 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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