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이리 2
헤르만 헤세 지음 | 고전문학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지음다음 날, 우리는 발랑스 호텔에서 열린 티 댄스파티에 갔다. 나는 현대적인 재즈 음악과 쾌락을 좇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이 낯설고 혐오스러웠다. 헤르미네는 그곳에서 색소폰 연주자인 파블로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헤르미네는 그가 세상의 모든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며 그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대했다. 나는 그들의 친밀함에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헤르미네는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꾸짖으며 춤을 추라고 명령했다. 나는 근처에 서 있던 벨벳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금발 여성을 바라보며, 나 같은 늙고 뻣뻣한 남자는 비웃음만 살 것이라고 뒷걸음질 쳤다. “내가 너를 비웃는 건 상관없다는 거니? 넌 정말 겁쟁이구나. 모든 사람은 여자에게 말을 걸 때 비웃음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거야. 어서 가, 하리. 그러지 않으면 네가 복종하겠다는 말을 믿지 않겠어.”
그녀의 강요에 못 이겨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춤을 청했다. 다행히 그녀는 웃으며 응해주었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는 배운 규칙들을 잊고 오직 리듬에 몸을 맡겼다. 파트너의 유연한 움직임을 느끼며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춤의 기쁨을 맛보았다. 춤이 끝나자 헤르미네가 다가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알겠니? 여자의 다리가 식탁 다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좋아, 이제 폭스트롯은 마스터했네. 내일은 보스턴 춤을 배우고, 3주 뒤에는 가면무도회에 가는 거야.”
잠시 후 파블로가 우리 자리에 합류했다. 그는 아주 세련된 옷차림에 보석 반지를 끼고 있었지만, 말수는 거의 없었다. 내가 음악 이론과 재즈의 음색에 대해 지적인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는 그저 나긋나긋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는 복잡한 생각 대신 현재의 리듬과 감각에 충실한 존재였다. 나중에 헤르미네는 파블로가 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주었다. “참 불쌍한 사람이에요. 저 눈을 봐요. 웃는 법을 전혀 모르고 있잖아요.”
파블로가 떠나고 음악이 다시 시작되자 헤르미네가 일어났다. “자, 이제 나랑 한 번 더 출까? 아니면 더 이상 춤추고 싶지 않니?” 그녀와 춤을 출 때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쾌활하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의식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헤르미네는 꽃잎처럼 부드럽게 몸을 맡기며 나에게 맞춰주었고, 그녀에게선 여인의 향기와 사랑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온전히 자신을 내맡길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너무나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는 나의 동료이자 누이였고, 내 어린 시절 친구이자 지적 열망을 공유했던 헤르만과 꼭 닮은 나의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전하자 그녀가 대답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난 결국 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야. 서두를 것 없어. 우선은 서로를 알아본 동료로서 즐겁게 지내자고. 난 너에게 나의 작은 무대를 보여주고 춤과 즐거움, 그리고 바보짓을 가르쳐줄게. 넌 나에게 네 생각과 지식을 보여주면 돼.” “헤르미네, 너에게 보여줄 건 별로 없어. 넌 나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잖아. 그런데 내가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니? 내가 지루하지 않아?”
그녀가 어두운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듣기 싫어. 절망과 고독에 빠져 있던 네가 내 앞을 가로질러 나의 동료가 되었던 그날 밤을 생각해봐. 내가 왜 너를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나도 너와 똑같기 때문이야. 나 역시 너만큼이나 혼자고, 삶과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견디기 힘들어해. 삶에 최고의 것만을 요구하면서 그 삶의 천박함과 무지함에 타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꼭 몇 명씩은 있는 법이지.”
나는 경악하며 외쳤다. “이해해, 나의 동료여! 하지만 넌 삶의 예술가잖아. 어떻게 그런 네가 절망할 수 있지?” “난 절망하지 않아. 고통이라면 잘 알지만 말이야. 내가 춤을 잘 추고 겉모습이 당당하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정신과 예술, 사상처럼 가장 깊고 아름다운 것들에 익숙한 네가 삶에 환멸을 느낀다는 게 오히려 나에겐 놀라운 일이야.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끌린 거야. 난 너에게 춤과 미소를 가르치겠지만 그렇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을 거야. 너도 나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겠지만 역시 행복해지지는 않겠지. 우리가 둘 다 악마의 자식들이라는 걸 아니?”
“그래, 악마는 곧 정신이고 우리는 자연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에 매달린 그의 불행한 자식들이야. 황야의 이리 논고에서도 인간은 하나나 둘이 아니라 열, 백, 혹은 천 개의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지.” 헤르미네가 환하게 웃었다. “그거 아주 맘에 드네! 네 경우엔 정신적인 부분만 너무 발달해서 삶의 잔재주에는 아주 뒤처져 있어. 사색가 하리는 백 살이나 먹었지만, 춤추는 하리는 태어난 지 반나절밖에 안 된 셈이지. 우리는 그 어린 하리와 그의 못난 형제들을 키워야 해. 그런데 마리아는 어땠어?”
“마리아? 아, 아까 그 여자 말이야? 아주 친절하게 내 춤을 받아줘서 고마웠어.” “그게 다야? 하리, 그녀와 사랑을 나눠봐. 넌 이미 그녀에게 반했잖아. 넌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네가 일 년에 한두 번 만나서 싸우기나 하는 고상한 친구에게 정절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건 알지만, 사랑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난 네 선생님으로서 네가 삶의 가벼운 면들을 더 알길 바래. 황야의 이리 씨, 이제 예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질 때도 됐어.”
“헤르미네, 난 늙은이야!” 내가 괴로워하며 외치자 그녀가 대꾸했다. “넌 어린애일 뿐이야. 춤을 배우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을 배우는 데도 게으름을 피우는 거지. 이제 평범한 인간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거야. 내일 세 시에 보스턴 춤을 가르쳐주러 갈게. 참, 음악은 어땠니?” “정말 좋았어.” “거봐, 또 한 걸음 나아갔네. 전에는 재즈가 천박하다고 싫어했잖아. 이제 파블로가 이끄는 이 음악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된 거야.”
축음기가 내 서재의 고상한 공기를 오염시키고 미국식 춤이 내 음악의 정원을 망쳐놓듯, 내 고립된 삶 속으로 새롭고 두려운 영향력들이 침투해 왔다. 천 개의 영혼에 대한 교의는 옳았다. 매일 새로운 영혼들이 깨어나 소란을 피웠고, 나는 과거의 내 인격이 얼마나 큰 망상에 불과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를 시와 음악, 철학에 정통한 지식인으로만 규정하며 나머지 본능과 충동들을 황야의 이리라는 꼬리표를 붙여 혼돈 속에 방치해왔던 것이다.
이런 인격의 붕괴는 결코 즐거운 모험이 아니었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참기 힘들었다. 쾌락을 좇는 사람들 사이에서 춤을 출 때면 내가 신성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배신하는 기분이 들었다. 헤르미네가 곁에 없었다면 나는 당장 이 우스꽝스러운 유희의 세계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늘 거기서 나를 지켜보고 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꿰뚫어 보며 미소 지었다.
인격이 파괴되어 가면서 나는 왜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그 비겁한 공포는 나의 관습적이고 거짓된 소시민적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모차르트와 괴테를 연구하고 인도주의를 외치던 하리 할러는 사실 모순덩어리였다. 그는 전쟁의 야만성에 저항했지만 총살당할 용기는 없었고, 자본의 권력에 반대하면서도 은행에 주식을 넣어두고 이자를 챙겼다. 그는 고독한 예언자 행세를 했지만, 속마음은 돈에 초연하기보다 연연해하는 소시민일 뿐이었다. 그는 자유를 갈망하기보다 지적인 유희로 명성을 얻던 과거로 돌아가길 원했다.
이 하리 할러라는 인간은 정말 구역질이 났다! 그럼에도 나는 떨어져 나가는 그의 가면에 매달려 있었다. 고상한 척하며 무질서와 우연을 혐오하던 옛 하리의 모습은, 내가 괴테의 초상화에서 발견했던 그 치명적인 가식과 다를 바 없었다. 이제 그 근사한 그림은 수선이 절실했다. 이상적인 하리 할러는 비참하게 해체되었다. 그는 도둑을 만나 바지가 찢겨 누더기를 걸친 고위 관리와 같았다. 이제 품위를 지키는 척하며 잃어버린 평판을 한탄하는 대신, 그 누더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역할을 공부해야 할 때였다.
헤르미네가 파블로를 무척 좋아했기에 나 역시 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만 했다. 처음 보기에 그는 아무런 고민도 없는 아이처럼 공허해 보였고, 나의 음악 이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내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그에게 짜증을 내자, 파블로는 슬픈 표정으로 내 손을 어루만지더니 금색 상자에서 가루를 한 꼬집 권했다. 그것을 들이마시자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헤르미네는 파블로가 고통을 멎게 하거나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하는 온갖 약물에 정통한 달인이라고 말해주었다.
어느 날 부둣가 근처에서 만난 파블로에게 나는 왜 음악에 대한 내 의견에 대꾸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리 씨, 제 생각에 음악에 대해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저는 음악가이지 교수가 아닙니다. 음악에서 중요한 건 옳음이나 교양 같은 게 아니에요.” 내가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지 묻자 그가 덧붙였다.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강렬하게 음악을 연주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바흐나 하이든의 전곡을 머릿속에 담고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누가 행복해질까요? 하지만 제가 색소폰을 잡고 신나게 연주하면 사람들의 눈이 반짝이고 다리가 움찔거리기 시작하죠. 그것이 바로 음악을 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정신적인 음악과 불멸의 가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모차르트와 유행하는 폭스트롯을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다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파블로는 내 팔을 다정하게 만지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하리 씨. 당신이 어떤 등급을 매기든 저는 상관없어요. 모차르트는 백 년 뒤에도 연주되겠지만 <발렌시아> 같은 곡은 이 년 뒤면 사라지겠죠. 그건 신의 손에 맡기면 됩니다. 우리 음악가들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요구받는 곡을 최대한 아름답고 표현력 있게 연주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이 사내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고통과 즐거움, 공포와 환희가 기묘하게 뒤섞인 날들이 이어졌다. 옛 하리와 새로운 하리가 내 안에서 격렬하게 싸웠고, 때로는 면도날을 떠올릴 만큼 고통스러웠다. 어느 날 밤, 나는 대성당에서 열린 고전 교회 음악 독주회에 다녀왔다. 북스테후데나 바흐, 하이든 같은 선율은 내 젊은 시절의 고결한 세계를 떠올리게 했고, 나는 그 거룩한 분위기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성당 밖으로 나오자 거리의 식당에서는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내 삶이 얼마나 따분한 미로 속에 빠져 있는지 절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독일 정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지식인들은 로고스와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말 없는 음악의 세계로 도망쳐 현실을 외면해 왔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미학적 유희에만 몰두하는 우리 같은 존재들은 장군이나 기업가들에게 아무런 쓸모없는 수다쟁이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면도날을 생각하며 저주를 내뱉었다. 음악의 여운과 복잡한 사유에 사로잡힌 채, 나는 삶과 현실에 대한 절망감을 안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저녁 세실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춤을 추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고, 나를 이런 경박한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은 헤르미네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슬픔에 잠겨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선 순간, 평소와 다른 낯선 향기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아름다운 마리아를 발견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경악과 마법 같은 황홀경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헤르미네가 나를 위해 준비한 가장 강렬한 선물임이 분명했다. “마리아!” 내 외침에 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제가 왔어요. 저 때문에 화나셨나요?” 나는 헤르미네가 열쇠를 주었음을 짐작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예쁜 마리아. 다만 오늘 밤은 내가 너무 슬퍼서 당신을 즐겁게 해줄 수가 없군요. 내일이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내 머리를 감싸 쥐고 긴 입맞춤을 건넸다. “꼭 즐거워할 필요는 없어요. 헤르미네가 당신에게 고민이 있다고 말해줬거든요. 그나저나 내가 여전히 마음에 드나요? 지난번 춤출 때는 나를 무척 사랑해 주셨잖아요.” 나는 그녀의 눈과 입술,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까지 헤르미네를 원망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감사함만이 남았다. 마리아의 애무는 그날 밤 들었던 훌륭한 음악과 어우러지는 고귀한 완성이었다. 그녀의 꽃 같은 얼굴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날 밤 마리아의 곁에서 나는 아이처럼 깊고 평온한 잠을 잤다. 잠결에 그녀와 나눈 대화를 통해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엿보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영리하고 아름다운 그녀들은 때로는 타자기를 두드리며 일하다가도 때로는 부유한 남성들의 연인이 되어 화려함과 빈곤 사이를 나비처럼 떠돌았다. 그들은 소시민들보다 삶을 더 사랑하면서도 삶에 덜 집착하는, 아이 같으면서도 세련된 존재들이었다.
마리아는 내게 감각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새로운 통찰을 가르쳐주었다. 은둔자이자 미학자였던 내게 천박하게만 보였던 댄스홀과 바의 세계가 그녀들에게는 순수한 삶 그 자체였다. 마리아가 색소폰 연주자 파블로와 어느 미국 노래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나는 그녀의 순수한 감동이 모차르트나 바그너를 찬양하는 학자의 희열보다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파블로가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파블로는 정말 멋진 사내예요. 나도 그가 마음에 듭니다. 마리아, 그런데 왜 당신은 나처럼 볼품없고 늙은 사내를 좋아하는 거죠?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색소폰도 불 줄 모르는데 말이에요.” 내 물음에 그녀는 나를 나무랐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매력이 있는걸요. 당신이 수줍게 내 목에 입을 맞출 때면 내가 예뻐서 고마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정말 기뻐요. 다른 남자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죠.” 에로스의 마법 같은 그녀의 손길이 닿자 오랫동안 비어 있던 내 내면의 풍경들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함께한 어린 시절, 헤르미네의 분신 같은 친구 헤르만, 그리고 나를 떠나간 아내의 모습까지. 고독한 황야의 이리의 영혼 속에는 수많은 별과 성좌들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 밤의 사랑 속에서 수백 가지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비참함 속에 잊고 있었던 그 이미지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내 삶의 보고이자 가치였다. 내 인생은 불행의 미로를 헤매며 허무에 이르렀고 인간사의 쓰라림으로 가득했으나, 그 안에는 자랑스러워할 만한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 어떠하든 내 삶의 핵심은 고귀했으며, 그것은 사소한 유희가 아닌 별들을 향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지만, 나는 그 밤의 깊은 다정함 속에서 나눈 대화와 행동들을 기억한다. 몰락 이후 처음으로 내 삶의 광채를 되찾았고, 우연을 운명으로 인식하며 내 존재의 파편들을 신성한 조각들로 보게 되었다. 내 영혼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흩어진 형상들을 모아 하리 할러이자 황야의 이리인 나의 삶을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한다면,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이 되어 마리아를 몰래 집에서 내보낸 뒤, 나는 그녀와의 밀회를 위해 근처에 작은 방을 하나 구했다. 나의 춤 선생 헤르미네는 엄격하고 망설임 없이 나에게 보스턴 춤을 가르쳤다. 그녀는 나와 함께 가장무도회에 가기로 결정하고는 의상 비용을 요구했지만, 정작 어떤 옷을 입을지는 끝까지 비밀에 부쳤다.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내게는 여전히 금지된 영역이었다.
가장무도회를 앞둔 3주 동안 나는 경이로운 행복을 맛보았다. 마리아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첫 번째 여인처럼 느껴졌다. 이전까지 나는 여성들에게서 지성과 교양을 찾았고, 책 한 권 읽지 않은 여자와는 한 시간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교양이 필요 없었다. 그녀의 모든 문제는 감각에서 직접 비롯되었다. 그녀의 예술과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은 타고난 감각과 신체의 곡선, 피부와 목소리를 이용해 연인에게서 최대의 즐거움을 이끌어내는 데 있었다. 그녀는 여름과 장미의 향기를 지녔으며 그것들의 의미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