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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 2

헤르만 헤세 지음 | 고전문학


지와 사랑

헤르만 헤세 지음





11장


골드문트는 니콜라우스에게서 예술의 깊이를 배웠지만, 그의 스승은 골드문트에게 복잡한 감정을 일으켰다. 니콜라우스는 그가 이상화한 예술가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현실적인 장인이었다. 골드문트는 스승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스승은 아름답고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내면서도 상업적인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예술이란 진정한 열정과 진실을 담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단순히 장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열망이 있었다. 스승의 딸 리즈베스였다. 그녀는 골드문트에게 낯설고 묘한 매력을 풍겼다. 차갑고 깨끗해 보이면서도 고고한 그녀의 모습은 다른 여인들과는 달랐다. 골드문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조각상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에서 숨겨진 감정을 끄집어내고 싶었고, 예술적 영감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와는 가까워질 수 없었고, 그녀를 둘러싼 욕망과 갈등은 점점 더 그를 괴롭게 했다.

한편, 골드문트의 예술적 영감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동안 그는 많은 여인들을 만났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어머니를 넘어 모든 인간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상징, ‘에바’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언젠가 그 상징적인 어머니를 작품으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골드문트는 조각을 통해 나르치스를 표현하기도 했다. 나르치스는 그의 친구이자 정신적 스승으로,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존재였다. 그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골드문트는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을 찾았다. 그는 조각을 할 때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친구의 모습이 나무에서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예술의 신성함을 느꼈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이렇듯 창조자와 분리된, 스스로 존재하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스승 니콜라우스는 예술을 순수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상업적인 의뢰도 받아들여 대가를 챙기곤 했다. 골드문트는 그가 수익을 위해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왜 아름다운 리즈베스를 위해 돈을 쌓아가고 있을까?’ 골드문트는 예술이 돈과 물질에 얽매이는 것을 혐오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참된 예술의 순수함이었다. 골드문트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예술가가 된 이유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본질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했다. 단순히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은 그의 열정을 채울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순간, 이런 작품들이 진정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승 니콜라우스는 골드문트의 다루기 힘든 성격에 종종 후회했지만, 그의 재능과 미완성의 가능성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골드문트의 자유분방한 생활방식과 그의 무책임한 태도, 재산과 돈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잦은 싸움과 여러 연애 사건은 니콜라우스를 곤혹스럽게 했고, 특히 골드문트가 자신의 딸 리즈베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골드문트가 완성해가고 있는 ‘요한’ 조각상에는 경이로운 정서가 담겨 있었고, 스승은 그것을 보며 묘한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다.

골드문트는 수도원 시절의 순수한 소년에서 벗어나 이제는 강렬한 매력을 지닌 남자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는 여성들에게 인기 있었지만, 남성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감정과 내면은 일찍이 나르치스와의 우정을 통해 일깨워졌고, 여러 여성과의 관계에서 경험을 쌓아갔다. 여성들은 골드문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모든 여성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녀들마다의 독특한 매력을 찾았다. 연애의 덧없음과 사랑의 찰나적 아름다움이 그를 슬프게 했으나, 그 감정 자체도 사랑이었다.

예술은 골드문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이 두 세계가 만나 화합하는 장이었다. 예술 속에는 감각적이면서도 영적인 양면이 존재했다. 그는 니콜라우스의 성모 마리아 조각상에서 그 진정성을 발견했고, 그의 가장 큰 염원은 이런 진정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술은 그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반복적인 작업과 수많은 도구, 물질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가혹한 여정이었다. 그가 평소에 불안하고 방황하며 싸움에 몰두하는 이유도 이로 인한 억눌린 자유의 갈망 때문이었다. 그는 일상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과의 관계와 어두운 골목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싸움에서 위안을 찾았다.

골드문트의 ‘요한’ 조각상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완성되었다. 아침이 밝아 그의 조각이 마무리되었을 때, 골드문트는 성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자기 작품 앞에 서서 그 순간이 얼마나 희귀하고 특별한 것인지, 앞으로 자신의 삶에 이런 순간이 다시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신성한 경험에 감동했다. 그는 이 조각상이 자신의 친구 나르치스의 얼굴을 반영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르치스의 영혼이 담긴 이 조각상은 고요하고 신성하며, 혼란 없이 맑은 모습을 지녔다. 이 완성된 작품을 바라보며, 골드문트는 작품과 이별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했다. 그는 ‘요한’을 마치며 동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예술 작업의 끝에 도달했다고 느꼈다.

골드문트는 이 작품을 스승 니콜라우스에게 보여주었다. 니콜라우스는 조각을 꼼꼼히 살펴본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것은 네가 이룬 최고의 작품이다. 자격이 충분하니 조만간 장인 인증서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마.”라고 했다. 스승의 칭찬에 골드문트는 기쁨과 함께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날 골드문트는 스승의 초대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리즈베스와도 마주했다. 골드문트는 그녀에게 이끌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냉정하고 거리감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열어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식사 후 골드문트는 다시 떠날 결심을 다지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거리를 배회했다.

골드문트는 갑작스러운 충동에 말을 빌려 성당으로 향했다. 몇 년 전 처음 니콜라우스의 성모 마리아를 보고 감동했던 그 성당에서 그는 작품을 다시 마주했다. 이 성모상이 주는 감동은 여전히 크고 신비로웠다. 그것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가 지닌 무수한 노력과 고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그것을 바라보며 예술이 자유와 삶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물었다. 그는 예술이 단순한 취미가 아닌,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길임을 깨달았다. 성모상은 그의 ‘요한’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예술을 향한 그의 길이 멀고도 힘들다는 걸 다시 느꼈다. 성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골드문트는 예술을 향한 열정과 함께 자유를 향한 갈망에 사로잡혀 갈등이 깊어갔다.



12장


골드문트는 이날 아침부터 일터에 나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도시에 머물며 시장을 배회하던 그는 고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은빛 물고기와 무심하게 그 죽음을 거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물고기들의 금빛 눈과 몸짓에는 공포와 저항이 서려 있었지만, 시장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웃고 소리치며 물건을 흥정했다. 골드문트는 그런 모습을 보고 혐오감과 연민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무게를 외면한 채 매일을 살아가고, 예술의 깊은 감동에도 무감각한 채 평온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그를 슬프게 했다.

이런 날이면 그는 어린 시절의 나르치스와의 대화, 그리고 과거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특히 떠돌이 학자 빅토르를 죽인 일에 대한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지금 빅토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뼈는 남아있을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고, 그 덧없는 죽음이 자신의 예술적 갈망과 연관된다는 모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날, 그는 깊은 무력감 속에서 삶과 죽음의 순간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장면을 잠시 떠올렸다. 이 이미지 속에서 골드문트는 인류의 원형인 ‘어머니’를 보았고, 그 모습이 그의 마음 깊이 새겨졌다. ‘어머니’는 탄생과 죽음을 포용하며, 삶과 소멸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였다. 그는 이 이미지가 예술로 완성되길 바랐지만, 현재로서는 그저 꿈처럼 아득한 바람이었다.

골드문트는 스승 니콜라우스를 찾아가자고 결심했다. 스승의 작업이 한창일 무렵, 그는 스승의 곁에 다가가 말했다. “스승님, 전 떠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조각을 만들며 돈을 벌고 싶지 않아요. 저는 예술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아요. 대신 세상을 경험하고, 삶의 극한까지 다다르고 싶습니다. 제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길을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니콜라우스는 골드문트를 가만히 응시하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 말을 이해한다, 골드문트. 네가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하거라. 하지만 예술이 주는 만족을 너는 이미 알지 않느냐? 그것을 쉽게 버릴 수 있을까?” 그 말에도 골드문트의 마음은 이미 결심이 굳어 있었다. 그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존경했지만, 그를 속박하는 일상과 안정적인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예술이 진정한 열망의 대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꿈꾸던 무언가를 재현하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니콜라우스와 같은 길을 걷는다면 그는 언제나 예술의 노예가 될 것이며, 예술이 요구하는 정교함과 기술만이 남게 될 것이었다. 그는 예술이 아닌, 원초적인 어머니의 형상에서 진리를 찾고 싶었다.

사실 니콜라우스는 골드문트의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골드문트를 마스터로 인정해 작업실의 일부를 맡길 생각이었다. 나아가 그를 사위로 삼을 계획도 있었다. 그런데 골드문트의 재능은 탁월했으나, 그의 방랑벽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우스는 자신의 작업실을 그의 손에 맡길 용기를 냈다. 마침내 그 계획을 설명할 날이 오자, 골드문트는 거절을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중하게 니콜라우스의 제안에 감사하지만, 자유로운 방랑의 삶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이 말을 듣고 격노한 니콜라우스는 그에게 즉시 떠나라고 하며 결별을 선언했다.

골드문트는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방을 나섰고,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소지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별 인사를 하는 대신, 조용히 홀로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강가에 앉아 물속의 반짝이는 물체들을 보며 그는 예술과 삶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했다. 물 밑바닥에 잠긴 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모습에서 그는 진정한 미와 신비가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꿈과 예술, 그리고 삶의 비밀은 형태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깃든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그저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이제 골드문트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는 떠돌이 시절, 추운 들판에서의 자유로움을 그리워했다. 새벽이 되자, 그가 집을 떠날 때 그가 묵던 집 주인의 딸 마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골드문트를 위한 우유 수프를 준비해 두었고, 골드문트는 그런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마리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골드문트는 다시 방랑의 길을 나섰다.



13장


새로운 유랑을 시작한 처음 동안은 되찾은 자유를 실컷 음미하며 골드문트는 우선 고향도, 시간도 잊은 나그네의 생활방식을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랑자들은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날씨와 계절에만 예속되어 아무런 목표도 없이 하늘을 지붕 삼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우연에 대해서는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놓고, 어린애 같은 용감한 생활, 초라하나마 굳센 생활을 보낸다.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예들이며 아무 죄 없는 동물들의 황제들이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시시각각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받는다. 해와 비와 안개를, 또 눈과 더위와 추위를, 안락과 괴로움을 받는다.

그들에게는 시간도, 역사도, 노력도, 집을 가진 자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발전이라든지, 진보라든지 하는 기묘한 우상도 없다. 유랑자는 그가 멍들기 쉬운 감정을 가지든 안정되지 않은 마음을 가지든, 솜씨에 능숙하든 우둔하든, 용감하든 겁쟁이든 항상 마음은 어린아이요, 항상 첫날과 같이 온갖 세계 역사의 시작 이전처럼 생활하고, 항상 생활은 근소하고 단순한 본능과 필요에 의해서 인도되어진다.

골드문트는 유랑생활 중 로베르트라는 순례자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로베르트는 로마 순례를 다녀온 경력이 있는 젊은이로, 신앙적 순수함을 간직한 채 교회의 그늘에서 삶의 안식을 찾는 인물이었다. 그의 단순한 삶과 태도는 골드문트에게 흥미로웠고,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차이와 공통점을 느끼며 함께 길을 걷게 되었다. 골드문트는 새로운 여정을 통해 점점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아갔다.

그들은 며칠을 함께 걸으며 서로의 방랑 이야기와 지혜를 나눴다. 로베르트는 골드문트가 자신이 그리는 장엄한 그림을 설명하는 박식함에 감탄했고, 그의 건강과 용기, 성실함을 존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골드문트가 여성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은 다소 불편했다. 그들의 여행은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무리를 지은 농부들이 그들을 막아서며 폭력적으로 위협했던 것이다. 결국 골드문트는 로베르트와 함께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 그들은 한 농가에 도착했다. 이 집은 정적에 싸여 있었고, 집 안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골드문트는 문을 열고 집 안을 둘러보았는데, 그곳에서 부패한 시체들을 발견했다. 방 한구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부터 젊은 아이와 여인까지, 죽음의 흔적이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골드문트는 죽음이 남긴 흔적과 비극의 표현을 섬세하게 관찰했지만, 그 고요한 집에서 풍기는 끔찍한 냄새와 참혹한 장면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밖에서 기다리던 로베르트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골드문트가 전염병, 즉 흑사병에 걸릴까 두려워했다. 골드문트는 그를 진정시키며, 자신들 둘 다 같은 위험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들은 죽음이 지배하는 이 땅을 지나며,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골드문트는 겁에 질려 몸을 불태우려는 로베르트를 종종 꾸짖고, 그가 더 냉정하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이끌었다. 골드문트는 죽음의 비극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죽음의 풍경 속에서, 그는 ‘영원한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불멸과 파멸을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였다.

어느 날 그들은 폐허가 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시내는 방비가 단단했지만, 마을엔 감시자도 없고, 대문도 열려 있었다. 로베르트는 이곳에 들어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골드문트는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마을은 적막에 싸여 있었고, 그는 몇 대의 수레가 쓸쓸하게 시신들을 실어 나르는 광경을 보았다. 수십 구의 시신이 얕게 판 구덩이에 던져졌고, 그 위로 불길이 일었다. 그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던 골드문트는 다시 마을로 들어가, 조용히 쏟아지는 분수 소리와 아이들의 흐느낌이 메아리치는 거리에서 죽음과 삶의 모순을 느꼈다.

골드문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거리를 걸어 다니다 어느 집 창문에서 머리를 빗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소녀는 잠시 부끄러워하다가 골드문트의 미소에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을 전체가 죽음의 공포에 빠진 와중에도 소녀와 골드문트의 시선 교환은 찰나의 생명과 희망을 담고 있었다.

“거기서 뭐해?” 그가 웃으며 묻자, 소녀는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너 아직 아프지 않니?”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이 죽음의 도시에서 나와 함께 숲으로 가서 좋은 시간을 보내자.” 그녀는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결심을 굳히고 골드문트와 함께 도망치듯 길을 떠났다. 로베르트는 이 소녀와 함께 오는 골드문트를 보고 경악했다. “저 여자 때문에 위험에 빠질 거야!”라며 반대했지만, 골드문트는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우리 셋이서 어디 조용한 곳을 찾아 평화롭게 지내자.” 로베르트는 마지못해 동의했고, 그들은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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