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사막이 필요하다
아킬 모저 지음 | 더숲
당신에게는 사막이 필요하다
아킬 모저 지음
더숲 / 2013년 7월 / 432쪽 / 14,000원
1장 누구에게나 한 조각 황량한 광야의 고독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정확히 그날을 기억할 수 있다. 처음 사막을 향해 떠났던 그날. 벌써 35년이 흘러버린 바로 그날, 내 인생은 180도 바뀌어버렸다. 내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학교를 다니고 있던 터라 6주 동안의 여름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계획했다. 함부르크를 떠나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여행이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왕국에서 나는 장거리 버스를 타고 꿈처럼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를 가로질렀다. 마침내 페스, 라바트, 카사블랑카 그리고 마라케시를 지나 모로코 남부에 이르렀다. 내 눈앞에 모래와 암석의 광야가 펼쳐졌다.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눈이 시리게 짙푸른 하늘 아래 물결치는 황갈색 모래언덕, 그 끝없는 광야를 마주한 순간, 그건 내게 차라리 신의 현현(顯現)이었다. 눈 닿는 곳까지 이어진 모래, 멈추지 않는 바람에 장엄한 풍경으로 거듭나는 황금의 바다는, 아무리 독창적이고 대담한 환상이라도 결코 자아낼 수 없는 그림이었다. 바람은 지극히 섬세한 무늬와 호화로운 모래의 선을 그려냈고,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모래파도가 넘실넘실 밀려가 지평선 너머에 닿아 있었다. 모래파도의 색깔은 그것이 태양을 마주하고 섰는지, 등지고 섰는지에 따라 오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아른아른 빛났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현실이라기보다 오히려 꿈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그건 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실재하는 존재였다. 모래도, 사구의 바다도, 광야도, 새파란 하늘도……. 그 순간 벼락에 맞은 것처럼 차고 넘치는 행복감이 몰려왔다. 나는 이미 내 존재 바깥에 서 있었고, 온몸을 휘감는 흥분을 느꼈다. 그런 감정은 서서히 자라난 것이 아니라, 끔찍한 쓰나미처럼 한순간에 전신을 덮쳐왔다. 한순간 나는 이성은 물론 영혼마저 빼앗긴 느낌이었다. 위대한 사랑을 인식하는 순간처럼 충만한 감정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앞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나는 빗살무늬 모래의 높은 언덕 위로 달려 올라가 배낭을 팽개치고 소리쳤다. 무언가 미친 소리를 내질러가면서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달렸다. 버릇없는 아이처럼 모래 위를 달렸고, 터벅터벅 걷다가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모래언덕을 떼굴떼굴 굴러 내려갔다. 그러다 다음 언덕이 나오면 다시 기어올라갔다. 한동안 나는 따스한 모래 위에 배를 대고 엎드려 있었다. 모래가 자꾸 입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엎드려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마음이 가라앉아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드넓은 광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경이로움의 극치! 모래언덕, 모래파도,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넘실넘실 깔려 있는 모래 양탄자! 그때 나는 그 순간의 느낌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 순간에 나는 내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1950년대의 그림들. 발트 해안의 휴양지 그뢰미츠. 그곳은 부모님이 이탈리아의 리비에라, 아드리아 해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꿈같은 하이킹 루트 다음으로 선호했던 휴가지였다. 주말이나 휴가 때가 되면 나는 머리에 챙 넓은 하얀 선캡을 쓰고, 플라스틱 삽과 양동이 그리고 화려한 색상의 모양찍기 틀로 무장하고 열심히 땅을 팠다. 정확히 말하면 하얀 모래밭이었다. 계속해서 코, 입, 귀 그리고 눈에까지 모래알이 척척 달라붙었다. 모로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15년이 지난 후에 나는 사하라의 물결무늬 모래밭에서 나뒹굴었고, 눈, 코, 입 그리고 귀 안에서 모래알을 느꼈다.
수건으로 계속 문질러가며 얼굴에서 모래알을 닦아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움직이는 점 몇 개를 발견했다. 그 점들은 아라비아 낙타에 올라탄 사람들의 무리였다. 작은 규모의 캐러밴(대상).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어디서 온 걸까? 어디로 가려는 걸까?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 걸까? 무엇을 해서 먹고사는 걸까? ‘사막 인간’이라면 완전히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삶은 단순한 생존에만 맞추어져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들을 떠올리는 사이에 내가 사막의 삶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달았다. 그런 의문에 대한 대답들은 모래와 돌이 만든 광대한 평원 저 너머에 놓여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가 매혹적인 모습으로 내게 손짓했다. 갑자기 나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사막, 사하라 깊숙이 그저 걸어 들어가는 것 말고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이미 나는 사하라에 들어와 있었다. 그로부터 5일 동안 걸으면서 무지의 세상 속을 쏘다녔고,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다. 문명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빨리빨리’의 삶을 벗어난 자리, 존재하기 위해 꼭 무엇인가 소유해야 할 필요가 없는 여기에서 걸음을 옮기는 사이, 내 생각은 어디로든 마음대로 뻗어가 한없이 자유로운 헤엄을 쳤다. 창조의 욕구로 가득한 풍경 속에서 나 자신까지 잃어버렸다. 아주 작아진, 그러나 자연의 일부인 내가 풍경 속에 있었다.
일단 한번 사막에 발을 디딘 사람은 더 이상 사막을 벗어날 수 없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독특한 근원 한가운데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사막에서의 삶은 근본으로 축소된다. 사막이 내뿜는 절대적인 고요와 고독 속에서 인간은 그가 본래 속했던 곳,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내던져지고 만다. 아무 예고도 없이 마주친 그 놀랍고 새로운 경험들을 가슴에 차곡차곡 채우고 나는 독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독일에서의 학교는 여전히 내게 힘들고 어려운 일상을 준비해놓은 곳이었다. 때때로 나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사막이 나의 환상에 너무 크고 멋진 날개를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먼 나라를 지나는 긴 여행을 간절하게 꿈꿨다.
그 시기에 나는 내 작은 방의 방바닥에 몇 시간을 꼼짝 않고 누워서 탐험가와 학자들의 수많은 여행보고서들을 탐독했다. 그중 많은 작품들이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모험이 가득한 읽을거리에 푹 빠지고, 축구화의 징이 다 닳도록 축구장을 죽어라 뛰어다니는 것은 당시 나에게 학교생활보다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때그때 여러 가지 다양한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이유는 단 하나, 다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실제로 여행을 떠났을 때는 봄방학과 여름방학 동안으로 계획했던 이 여행들을 ‘내 마음대로’ 몇 주 더 연장하고 말았다. 아랍의 캐러밴과 함께 사하라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였다. 그 후 다시 독일로 돌아왔을 때 학교 성적이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여러 차례 학부모 상담을 거쳐야 했으며 심지어 전학까지 감수해야 했다. 결국 어찌어찌 하면서 마침내 나는 실업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넣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공적으로 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건 모두 엄마 덕분이었다.
내 양아버지 에르하르트는 엄마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언제나 혼자 있기를 좋아해서 아무도 고독으로 둘러쳐놓은 장막을 뚫고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의 일상 속엔 양아버지의 침묵만이 아니라, 타인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냉담함, 벌을 주면서 훈계하고 때때로 따귀까지 때렸던 일들이 적잖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든 일들은 내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상처로 남았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엄마를 책망하고 꾸짖는 걸 아주 즐겼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자주 심한 다툼으로 이어졌다. 그런 다툼엔 종종 인생계획과 돈 문제 등이 얽혀 있었다. 양아버지와 엄마가 다투면 나는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고,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는 내면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양아버지가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가족들에게 넉넉한 느낌을 주는 날이 전혀 없었던 것 아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아주 짧고 드물었다. 그래서 내가 독립해서 살게 되자 양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몇 년 전 양아버지가 엄마와 내 곁을 영원히 떠났다. 양아버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호감 쪽으로 기울여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오늘날까지도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존재로 남아 있다. 때때로 만일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안아주었다면, 그동안 경험했던 어떤 사막여행보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내 첫 번째 여행은 도피였다. 무시하고 경멸하는 공간, 내 생명의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듯 가슴을 옥죄는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첫 번째 아프리카 여행 이후에 나는 상당히 주저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함부르크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물론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알리바이였을 뿐이다. 그런 삶은 단 한순간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몰래 몇 가지 다른 전공과목을 수강했다. 아프리카학, 아랍어, 인류학 등이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대학 공부는 나를 채워주지 못했다. 나는 다른 삶의 방식을 탐색했다. 어쩌면 내게 올바른 것이고, 내 존재에 더욱 적합할 수도 있는 삶의 방식, 그 탐색 과정은 좁디좁은 관습과 한정된 경계를 가진 시민적 삶의 반대편을 향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길을 떠났고 많은 여행을 했다. 내가 삶의 의미와 삶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찾아다녔던 이 여행들은 나를 세상 곳곳으로 이끌었다. 사막과 원시림을 지났고, 산맥과 바다를 건넜다. 그런 어느 순간 우연히 잡지와 스폰서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내가 꾸었던 꿈들이 실제 현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직업까지 되었다. 그리고 벌써 거의 30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지구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지금 그런 내 직업에 충실하다.
이 새로운 길은 나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삶으로 인도했다. 그 삶 속에서 나는 하이테크 일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대하는 것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그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매혹과 위협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사막의 두 얼굴에 푹 빠져서, 나는 삶이 품고 있는 단순한 의미들을 배웠다. 인류의 진보를 평가하는 기준이 기술적인 성취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걷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방식을 발견했는지의 여부임을 알았다. 여행을 마치고 또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는 여러 언어의 기본적인 어휘들을 배웠고, ‘유목민의 생활방식’에 점점 더 적응해갔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간 세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멋진 인생의 스승이자 ‘영혼의 고향’이 되었다.
나는 몇 주 때로는 몇 달을 사막에서 보내다가, 다시 대도시 함부르크에서 한 가정의 가장 노릇을 하는 삶을 누렸다. 사막과 도시라는 이중적 삶은 결코 나를 분열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어쩌면 그건 아내 덕분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 아내.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주는 것만큼의 자유를 내게도 허락하는 아내.
이제까지 나는 서른 번의 탐사를 하면서 총 5년의 시간을 사막에서 보냈다. 영혼이 걸음을 멈추는 속도로 나는 거의 2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전진했다. 그 길들을 따라 나는 다섯 개 대륙의 먼 과거로 여행했다. 수수께끼 같은 사원의 흔적들, 고대의 동굴벽화들, 묻혀버린 도시, 돌이 된 숲, 감춰진 공룡 무덤 그리고 신비한 성지들. 스물다섯 개의 사막들이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불타고 있다. 바다처럼 넓은 광야에 몸을 맡기고 나는 신에 대한 나의 관념을 만났다. 아득한 경계에 자리 잡은 죽음 같은 고요 속에서, 비록 혼자 걷고 있어도 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절실한 외로움과 간절한 욕망의 순간에, 그리고 넘치는 행복과 생의 기쁨에 젖어든 순간에 자주 나를 지탱해주는 종교의 힘을 발견했다. 또한 사막에 거주하는 다양한 부족들을 만나면서 내 의식은 근본을 지향하도록 성장했다. 비단 자연의 정신을 재발견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절실하게 체험했다. 사막에서 중요한 것은 한 조각의 오트밀 빵, 한 줌의 쌀, 한 모금의 물, 한 줄기 온기와 무엇보다 배려하는 마음이다.
무엇이 나를 이리로 이끌었는가 하는 여행의 동기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 뿌리나 출신에 대해서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과거에 우리 친척들 중에 비슷한 흥미를 가졌던 사람이 있었는지 물었다. 혹시 내 친아버지가 여행, 모험,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들이 규칙적으로 나를 압박했지만, 나는 충분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스물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그 의문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내 방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아킬, 잘 있었니? 오늘 오후에 한 라디오 방송에서 너의 캐나다 여행에 대한 인터뷰를 들었다. 이번에도 또 많은 체험을 했더구나…….” “도대체 누구신데……?” “내 이름은 하리 카르스텐이다. 네 아버지란다. 벌써 오랫동안 너를 지켜봐왔지만, 과연 네게 연락을 해야 하는 건지 늘 망설이기만 했단다. 그런데 오늘 네 목소리를 들었어. 참 포근하고 따뜻한 목소리더구나. 내게 용기를 주는 목소리……. 그래서 이렇게 전화기를 들었단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나를 한 번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 만일 그래준다면 정말 기쁠 텐데…….”
전화 통화 이후 며칠 동안 나는 견딜 수 없는 갈등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쁘고 흥미롭고 호기심도 일었다. 이후 이루어진 첫 번째 만남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일종의 탈피 과정이었다. 과거의 부끄럽고 어색한 공간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어서 더욱 어색한 시간, 둘 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이었다. 친근한 모습으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존중하고 기다리면서. 그러는 사이에 내가 가진 유전형질 중에 어떤 두드러진 것들이 엄마와 외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먼 나라들과 모험적인 탐사여행을 좋아했다. 청소년 시절에 스웨덴의 탐험가이자 학자인 스벤 헤딘을 방문하기 위해 그의 고향을 찾아갔을 정도였다. 또한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이 아버지가 수십 년에 걸쳐서 몇 번이고 다시 읽은 책들과 같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한 아버지는 등산 마니아로 마테호른과 킬리만자로의 정상에도 올랐다고 했다. 이런저런 사실에서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사과는 절대 가지에서 먼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과거에 대해 마침표를 찍었고, 내일을 향해 생각할 뿐 어떤 비난이나 해명도 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했다. 서로를 공감하는 가운데 우리 둘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우정이 생겨났다. 함께 축구를 했고 영화를 보았고 여행을 떠났다. 심지어 아버지는 나의 남독일 순회강연회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나는 과거 양아버지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받았다. 사랑과 애정, 관심과 인정이었다.
어떤 사람은 사막을 사랑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뒤도 안 돌아보고 아주 빠르게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내 경우엔 모든 고난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막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막을 사랑한다. 언젠가 다시 사막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아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시아 사막의 위대한 탐험가인 스벤 헤딘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에게나 사막이 필요하다.” 내게 꼭 맞는 말이다. 가끔씩 내게는 그저 한 조각 황량한 광야의 고독이 필요하다. 내가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생각들을 떠올리는 곳이며, 때때로 상당히 부조리하게 변하는 인간 존재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인식의 절정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곳이다.
2장 세계의 사막을 지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