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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귄터 그라스 지음 | -
제 1부



폭 넓은 스커트

나는 정신병원의 수용자다. 나의 간호인인 브루노 뮌스터베르크는 거의 한눈을 팔지 않고 나를 지켜 보고 있다. 문에는 엿보는 구멍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호인의 눈은 갈색이어서 파란 눈을 가진 나를 꿰뚫어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의 간호인은 도무지 나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는 내 편에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문 뒤의 감시자가 내 방에 들어오기만 하면 내 생애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을 그에게 들려주곤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왜냐하면 자기가 삶을 맛보게 된 날짜를 기록하기 전에, 적어도 조부모의 한쪽이라도 기억해 내는 끈기가 없는 인간은 누구든 자신의 생애를 서술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의 할머니 안나 브론스키는 10월 어느 날, 오후 늦게 스커트를 몇 벌 겹쳐 입고 감자밭 가에 앉아 있었다. 오전 중이었으면 할머니가 얼마나 능숙하게 시든 감자 덩굴을 긁어 모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가를 볼 수 있었으리라. 1899년 그녀는 네 벌의 스커트를 하나의 체계에 맞춰 입고서 카슈바이 중심부의 비사우 근처에, 아니 오히려 벽돌 공장에 보다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전신주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할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안쪽으로 끌어당기고 눈을 찡그린 채 감자를 우물우물 씹었다. 자세히 보니 세 사나이가 전신주 사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중에 작고 땅땅해 보이는 사나이가 벽돌 공장을 가로질러 갔다. 키가 좀 크고 약간 마른 다른 두 사나이도 보였다. 이런 광경은 매일같이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작고 땅땅한 사내가 콧수염을 와들와들 떨면서 헐떡이며 할머니 가까이로 다가왔다. 할머니의 장화 밑창 바로 앞까지 기어 오더니, 마치 작고 뚱뚱한 짐승처럼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탄식했다. 이젠 감자 같은 것을 씹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장화 밑창을 기울여서 스커트를, 아니 네 벌의 스커트를 모두 높이 쳐들었다. 이 사나이가 기어 들어갈 수 있도록 단번에 높이 쳐들었다. 주위는 세계 최초의 날이나 최후의 날과 같이 고요하였다. 그 스커트 안에서 그는 자리를 잡고서 헐떡이거나 떨거나 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자들은 할머니에게 다가와서는 콜야이체크를 보았는지를 물었다. 할머니는 기억을 더듬는 체하며, 그와 같은 사나이가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비사우 쪽에 해당하는 지점을 가리켰다. 지방 경찰의 제복을 입은 그 사나이들은 할머니의 멍한 시선으로부터 어떠한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콜야이체크는 스커트 밑에 있는 동안 쭉 풀려 있었던 바지의 단추를 재빨리 채웠다. 그는 이미 그녀의 스커트로부터 떠날 수 없었다. 나의 할머니 안나 브론스키는 그날, 밤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꿨다. 콜야이체크는 방화범으로 수배 받고 있는 몸이었는데, 그에 의하여 나의 어머니 아그네스가 탄생된 것이다. 콜야이체크는 주변의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대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가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고독한 거부의 모습인 나의 할아버지 콜야이체크.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해답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전쟁 중의 어린 사랑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나는 모른다. 나의 어머니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스무 살 정도였던 얀 브론스키에게 반했다. 얀은 어머니의 외종사촌으로서 단치히 제1중앙우체국의 중급 관리직에 부임하기 위해서 비사우와 그의 아버지 빈첸트를 떠나온 것이었는데, 약간 지나치리만큼 귀여운 달걀 모양의 얼굴과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얀은 세 차례의 징병검사를 받았으나 허약 체질이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징병을 유예받았다. 얀은 어머니의 남편이 된 마체라트라는 사나이의 존재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사를 갔다. 얀은 폴란드의 우체국으로 자발적으로 전근했다. 그가 국적을 폴란드로 택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어머니의 태도에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가 올리바 부근의 질버하머 야전 병원에서 견습 간호부로 근무하고 있던 1918년 여름에, 알프레트 마체라트는 대퇴부 관통상으로 그곳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는 라인란트 태생으로서 특유의 쾌활성으로 모든 간호부들에게 호감을 사게 되었다. 간호부 아그네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상처가 완전히 나은 후에도 단치히에 머물렀다. 1923년 나의 어머니는 독일 제국인인 마체라트와 결혼했다. 그는 식료품점을 인수해서 어머니와 서로 도와 가게를 꾸려갔다. 점포와 붙어 있는 주택은 비좁은 데다 조잡하게 지어졌으나 소시민의 집으로선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앨범

어머니는 집에서 나를 출산했다. 나는 태어났을 때 이미 정신적인 성장이 완성되어 있어서, 나중에는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만 하면 될 뿐인 그러한 총명한 갓난애였다. 어머니는 말했다. "오스카르가 세 살이 되면 양철북을 사줘야지." 어머니가 약속한 양철북에 대한 나의 애착을 북돋아 주고 또 그 악기를 점점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하고 또 간절한 욕망의 대상이 되게 한 장본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어머니는 마체라트와 결혼한 첫날부터 얀과 간통을 했다. 앨범을 보면 불행한 두 사람의 맹목적인 정열이 사진에 역력히 찍혀있다. 마체라트가 주선한 무신경한 사진사에 의한 것이다. 어머니가 얀의 무릎 위에 앉아 있고 얀의 한쪽 손은 어머니의 스커트 밑에 감춰져 있다. 마체라트는 자신이 내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앨범 속 사진에서 나는 북을 가지고 있다. 톱니 모양으로 빨간 빛, 흰 빛으로 구분해서 칠한 새 북이 내 배 앞에 매달려 있다. 나는 착하디착한 얼굴을 하고 의기양양하게 북채를 양철 위에서 교차시키고 있다. 줄무늬의 스웨터를 입고, 반짝거리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다. 머리털은 멋을 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브러시처럼 머리 위에서 빳빳하게 서 있고, 푸른 두 눈은 다른 사람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한 힘과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 사진을 보면, 나는 그 무렵 어떤 태도를 취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고 또한 결심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가는 되지 않겠다. 더구나 식료품상은 되지 않겠다고. 그리하여 그 상태로 머물렀고 오랜 세월에 걸쳐 신체도 복장도 그대로였다. 나는 세 살짜리 어린이 그대로였으나 세 배나 현명한 어린이였다. 어른보다 키는 작으나 어른들을 능가하고, 안팎 모두가 완전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유리, 유리, 유리 쪼가리

9월의 어느 맑은 날 나의 세 번째 생일이었다. 나는 딸기 시럽의 병이 가득 차 있는 선반과 함께 우리 집 지하 창고 시멘트 바닥 위에 거꾸로 떨어졌다. 치명적은 아니면서도 한 번의 추락으로, 나는 성장 정지에 대한 이유를 어른들에게 내세울 수 있었다. 양철북을 쳐서 나와 어른들과의 사이에 필요한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는 소리를 고음으로 유지하고 떨게 하면서, 노래하면서 외치고, 외치면서 노래 부르는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 북을 빼앗기면 큰소리를 지르고 큰소리를 치면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박살이 났다. 나는 노래로 유리를 부술 수가 있었다. 나의 능력은 우리들의 도시에 알려졌다.



어머니는 더 이상 무시하지 못 할 지경에 다다른 나의 발육 부진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내 손을 끌고 수요일마다 홀라츠 박사의 치료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홀라츠 박사는 <의사와 세계>라는 전문지에 나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노래로 유리를 파괴하는 오스카르 M의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이미 눈을 뜬 회의심에 찬 눈으로 보건대, 홀라츠 박사의 소논문은 교수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의사가 장황하면서도 솜씨 있게 늘어놓은 억지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라스푸틴과 ABC

나는 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가벼운 선망을 느끼면서 같은 또래 소년들의 책가방에 눈길을 쏟았다. 그러나 가벼운 선망일 뿐이며 분명히 그 이상은 아니었다. 내가 페스탈로치 학교의 스폴렌하우어 선생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가 지식을 주입시키려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석판의 학교는 취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클라인하머 거리의 빵집인 그레트헨 세플러의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레트헨 집의 잡동사니 밑에 책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교양에 힘쓰느라고 정신병원의 장서들을 자기 방으로 차츰차츰 끌어들이는 오늘날까지도 나는 실러와 그 일파를 경멸하면서 라스푸틴과 괴테 사이를, 기도 치료사와 석학 사이를, 여인들을 사로잡는 음험한 자와 여인들에게 기꺼이 사로잡히는 명랑한 시성(詩聖)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자신을 라스푸틴의 형이라고 생각하면서 괴테의 엄격함을 두려워했다.



나는 북을 가지고 계속 쳐대었다. 거리에서 때로는 연단 밑에 쭈그리고 앉아 많든 적든 성공을 똑똑히 보고, 시민 집회를 와해시키고, 연설자의 말을 더듬게 하고, 행진곡이나 찬가를 왈츠나 폭스트롯으로 변형시키기도 했다. 나는 붉은 깃발이나 검은 깃발의 모임, 보이 스카우트, PX의 시금치 빛깔의 셔츠, 여호와의 증인, 키프호이저 동맹, 채식주의자들, 청년 폴란드의 신풍 운동이라는 집회에서도 연단 밑에 앉아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역시 파괴적이었다. 북으로 안 되는 것은 소리로 죽였다.

어머니는 가끔 구토증을 유발하곤 했다. 어느 날 나는 부엌에서 어머니가 언제나 싫어하던 기름에 튀긴 정어리에 덤벼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가스 불로 데워서 마시는 것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그날 밤 시립 병원에 운반되어야 했다. 마체라트는 소리쳤다. "도대체 어째서 당신은 아이를 원치 않는 거야? 누구의 아이든 좋지 않은가?" 임신 3개월 째 어머니가 죽었을 때 홀라츠 박사는 황달과 생선중독이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보며 관 위에 올라타고 싶었다. 그 위에 앉아서 북을 치고 싶었다. 북채로 관 뚜껑을 두들기고 싶었다. 애도객들이 사제를 따라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그들 앞에서 북을 치고 싶었던 것이다.



헤르베르트 트루친스키의 등

나는 드디어 열네 살이 되었다. 고독을 사랑하고 자주 산책을 나갔다. 북을 가지고 갔으나 양철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절약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북이 부서지면 다시 양철북을 보충 받을 것이 의문시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죽은 후로는 헤르베르트 트루친스키가 내 노력의 목표였다. 지금도 나는 그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헤르베르트는 '스웨덴 집'이라고 하는 선술집의 급사였다. 가게의 손님은 대개 스칸디나비아 인들이었다. 그러나 자유항으로부터 러시아 인이나 폴란드 인들도 왔으며, 홀름의 부두 노동자들과 가끔 입항하는 독일 제국 군함의 수병들도 찾아왔다. 유럽적인 선술집에서 웨이터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스웨덴 집'에서의 소용돌이 치는 여러 나라 국어의 혼란을, 영어와 폴란드어의 조각말을 뒤섞은 그의 낮은 독일어의 시골말로 맡아서 처리할 수가 있었다.



헤르베르트 트루친스키의 등에는 상흔이 있었다. 나는 그의 등을 생각해낼 때마다 항상 앉아서 북을 치고 있었다. "아아, 그것! 그건 우크라이나 놈이 찌른 거야!" "아, 그건 조금 스친 상처야. 2년 전이었던가, 필라우에서 수뢰전대(水雷戰隊)가 이곳에 왔을 때, 수병놈들이 거만하게 굴면서 말이야…" 헤르베르트는 스웨덴 집의 혼란 속에서 고작 백 파운드의 무게로 거구인 자신을 괴롭혔던 레트 인 선장을 타살하고 사직서를 냈다. 재판소는 직업상 흔히 있는 일이라며 그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후 헤르베르트 트루친스키는 박물관 수위의 회색 제복을 입었다. 그는 해양 박물관에 2주일 가량 근무했고 나에게 북을 사주었다. 트루친스키는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목각의 여인 니오베에게, 정욕에 눈이 어두워져 교미하려다 구급차에 실려갔다. 나는 지금 정신병원에서 그의 상처난 등과 함께, 나무와 육체 사이에 있었던 그 사랑의 시도를 회상하고 있다.



제 2부



폴란드 우체국

우체국 서기로 출세한 얀과 마체라트 사이의 가깝던 우정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해소돼 버렸다. 정치적 상황이 점점 날카로워짐에 따라 더욱 분명하게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나의 어머니의 야윈 영혼과 풍만한 육체의 붕괴와 더불어 그 영혼에 자신들을 함께 투영시키고 그 육체에서 자신들을 함께 소모시키던 두 사나이의 우정도 붕괴돼 버렸다. 얀은 나의 생부(生父)임을 의미하는 브론스키 일가의 특징인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곳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폴란드가 대승(大勝)을 놓쳤다"느니, "단치히 자유시가 독일 제국을 다이아몬드 하나로 압도적으로 밀어붙였다"는 식의 패배담과 개가(凱歌)가 흘러 나왔다.



폴란드 우체국 안으로 얀이 나를 유인해들인 것은, 그곳 관리들에게 폴란드가 봉화(烽火)역이 될 수 없으므로 용기를 고무하는 군기(軍旗)를 그들에게 가져다 주기 위해서였다. 향토 방위 대원들은 우편 자동차 적하장 위편에 있는 소포실로 통하는 문을 폭파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전투가 한창일 때도, 전투의 소음이 주위를 메우고 있을 때도 북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폴란드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폴란드,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저씨처럼 친절하게 대해주는 두 명의 방범대원에게 매달려서 슬픈 듯이 우는 흉내를 내고, 얀을 가리키며 순진한 아이를 폴란드 우체국으로 끌고 가서 폴란드식의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방탄(防彈)역에 이용했다고 유다와 같은 연기를 했다.



그는 자스페에 잠들다

무엇으로도 쫓아 버릴 수 없는 집요한 죄책감이 나를 괴롭히는 나날, 난 여느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내 무지 탓으로 얼버무렸다. 그 시절에는 무지라는 것이 유행했고 요즈음도 무지라는 말은 멋진 모자처럼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어울리는 것이다. 교활하게도 무지를 가장한 오스카르, 야만적인 폴란드 인의 순진한 제물을 가장한 오스카르는 그 후 열과 신경과민 때문에 시립 병원에 후송되었다. 그리고 마체라트에게 통지되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나의 아저씨이고 아버지인 얀 브론스키를 묘지로 보냈다. 얀을 포함한 30명의 폴란드 우체국에서의 사나이들은, 시스스탕게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무너져서 황폐해진 자스페 묘지의 담 저편 부드러운 모래 속에 묻힌 것이다. 단치히 자유시는 이후 마지막 저항의 거점이었던 헬라반도가 함락되면서 그 벽돌 고딕과 대독일제국과의 병합을 축하할 수가 있었고, 지치는 일 없이 검은 메르세데스에 서서, 거의 쉴 새 없이 팔을 직각으로 올려 인사하는 제국 재상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그 푸른 눈을, 환성을 올리면서 볼 수가 있었다.



마리아

나는 병원에서 퇴원을 했고 역사가 큰소리로 특별 성명들을 발표하면서 기름을 잘 친 차량처럼 유럽의 도로ㆍ수로ㆍ하늘을 스쳐 지나가면서 날듯이 정복하고 있는 동안, 양철북을 두들겨 대고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나의 작업은 지지 부진했으며 도대체 진전이 없었다. 마체라트는 식료품 가게에 나의 불쌍한 친구 헤르베르트의 막내 누이동생, 마리아 트루친스키를 고용했다. 상냥하고 유순한 마리아는 마리아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마리아와 같은 여자였다. 우리 가게의 평판을 다시 회복하게 해주었고 나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데, 무엇보다 마리아는 내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광대뼈,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코, 양 쪽으로 쭉 째진 두 눈, 한 줌에 잡힐 듯한 머리통, 중간 크기보다 오히려 작은 편인 신체를 가졌다. 약간 넓은 양 어깨와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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