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벤치의 기적
게르노트 그릭슈 지음 | 시아출판사
작은 벤치의 기적
게르노트 그릭슈 지음
시아출판사 / 2004년 5월 / 256쪽 / 8,500원
관리국장 지그마어 취른 씨
함부르크 시 공원 관리국장 지그마어 취른 씨의 책상 위에는 똑같은 모양으로 작성된 신청서 3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두 취른 씨의 서명을 기다리는 서류들이다. 함부르크 시 관청 소유의 볼펜들은 걸핏하면 잉크가 굳어 잘 써지지 않았다. 지그마어 취른 씨는 책상에 앉아 입김으로 볼펜 끝을 열심히 녹이고 있었다. 지난 42년간 그는 단 두 번 사랑에 빠졌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취른 씨는 열다섯 살이었다. 상대는 이리나라는 같은 학교 여학생으로,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한 채 무용 선생님의 짝으로 그녀를 떠나 보내야 했다.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취른 씨의 호르몬이 두 번째로 들끓었을 때는 그의 나이 서른여덟 이었다. 취른 씨의 눈을 멀게 한 상대는 마르가레테 람프레흐트라는 공원관리국 직원이었다. 취른 씨는 이 새파란 부하 직원을 회의실 분위기의 점잖은 식당으로 데려가서는 양배추 절임을 곁들인 훈제 소시지를 권했다. 취른 씨는 그 날의 저녁식사 이후로 마르가레테가 다시는 데이트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녀를 미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취른 씨라고 해서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취른 씨는 감정의 변화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이렇다 할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신문 유머 란을 보고 피식 웃음 짓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1967년 5월 21일, 함부르크 시 공원 관리국장 지그마어 취른 씨는 나무로 된 공원 벤치 하나를 제작․설치할 것을 의뢰하는 주문서와 요청서에 서명을 했다. 벤치가 설치될 장소는 큰 알스터 호수(알스터 호수는 북쪽의 큰 알스터 호수와 남쪽의 작은 알스터 호수로 나뉘어 있다)의 서안에 펼쳐진 작은 잔디밭으로, 특히 여름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호숫가 산책로였다. 취른 씨는 신청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에도 그것이 몇몇 사람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십 년 후, 새 천년이 시작될 즈음 이 벤치를 둘러싸고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데자뷔
* 데자뷔 : 처음 보는 장소, 또는 물건이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전에 본 적이 있는 착각
갑자기 두터운 먹장구름이 나타나 하늘을 뒤덮더니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파비안은 황급히 벤치에서 일어나 읽고 있던 신문으로 머리를 가린 채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러나 큰 알스터 호수 주변에는 나무 몇 그루만 듬성듬성 서 있을 뿐 비를 막아줄 장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모든 피신처 중에서 제일 꺼려지는 곳인 보트 정박소 옆의 조그만 화장실 건물을 택했다. 파비안은 깊은 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번 공원 벤치를 바라보며 폭우가 얼마나 계속될지 생각했다. 아주 차가운 비, 불쾌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봄날의 소나기였다. 파비안은 손으로 얼굴을 내리훑었다. 뿌연 시야가 서서히 환해지면서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바로 옆에 한 여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맞아, 눈! 바로 눈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은 마치 예전부터 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파비안은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야말로 파비안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그러한 흡인력은 단순히 그녀의 외모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과 짜릿함, 그리고 설렘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폭우는 쏟아지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여인은 파비안에게 과거를 되새겨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43년 중 파비안은 자기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이런 멋진 여성을 만났었는지 기억해내려고 생각을 집중했다. 파비안은 완전히 잊고 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고 자신의 젊은 시절, 파티, 록페스티벌, 피서지 등 이 여인이 나타났을 법한 사건과 장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봤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재미있다는 듯 파비안을 쳐다보던 그녀는 그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말을 받기 시작했다. “흠, 그러니까 그 다음엔 뷔르츠부르크로 갔었군요.” “2년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죠.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 직장 때문에 그곳으로 갔지만 그 도시는 나를 완전히 지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외로웠던 적도 아마 없었을 거예요. 그때가, 가만 있자. 제가 스물일곱일 때 였군요.”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왔더니 어땠어요?” “친했던 녀석 들 중 몇몇은 저처럼 다른 곳으로 떠났더군요.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 했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에 뛰어들어야 했어요. 술집과 클럽을 헤매고 다녔고….” 거기까지 말하고, 파비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기대에 가득 찬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비르기트?” 그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비르기트가 말했다. “비는 그쳤어, 벌써 15분전에 말이야.”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알스터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파비안은 비르기트와 함께 있을 때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했던 것을 떠올렸다.
파비안은 카이저켈러라는 디스코텍에서 비르기트를 처음 만났다. 그 후 그들은 자주 만났다. 극장, 식당, 전시회에 함께 가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관에서 막스 에른스트의 스케치들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 비르기트가 갑자기 파비안의 손을 잡았다. 손과 손을 맞잡은 것 뿐 이었지만 지금까지 그녀와의 우정을 플라토닉하게 유지하려 애쓰던 파비안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해 말한 적은 거의 없지만 파비안은 비르기트의 남자 친구가 잘생기고 똑똑하며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또한 비르기트와 그녀의 남자 친구 사이에 위기가 닥쳤다는 암시는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열흘 뒤 포르투갈에서 날아온 그녀의 엽서에는 “우리는 잘 지내고 있어. 정말이지 굉장한 휴가야. 참, 얼굴은 모르지만 랄프도 안부를 전해달래.”라고 적혀 있었다. 그 후로 파비안은 다시는 비르기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휴가지에서 돌아온 비르기트가 파비안의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겼지만 그는 무시해버렸다. 그러자 비르기트도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녀가 포르투갈에서 휴가를 보낸 시간을 빼고 나면 그들의 로맨스는 5주만에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것이 16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왜 더 이상 연락 안 했는지 알아? 널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어. 그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어. 가끔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만을 원한 게 아니었으니까. 난 몹시 괴로웠다고!” 한참 동안 파비안을 말없이 쳐다보던 비르기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정말 그것 때문에 전화를 안 한 거였니?”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파비안이 말했다. “난 이혼했어. 2년 전에.” “난 결혼 안 했어. 그저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났을 뿐이야.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그리고 당시 랄프는 포르투갈에서 돌아와 넉 달 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어.” 파비안의 얼굴이 굳어지자 비르기트는 그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하지 그랬니….” 파비안의 눈시울이 젖어왔다. 슬픔의 눈물도 기쁨의 눈물도 아니었다. 단지 감정이 넘쳐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뿐 이었다. “그럼 오늘은…. 오늘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이니?” 말을 더듬으며 파비안이 물었다. “난 우연 같은 건 안 믿어. 그렇다고 내가 이 만남을 계획한 건 아니야. 여기엔 아들을 만나러 왔을 뿐이야. 일주일에 한 번 여기서 보트 강습을 받아.” 그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청년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아이 하나가 모퉁이를 돌아 걸어왔다. 열 다섯 치고는 큰 키에 다부진 몸이었다. 금발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코가 눈에 띄게 긴 편이었다. 눈이 가운데로 약간 몰려 있는 것도 특징적이었다. 파비안은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이도 어디선가 만난 듯했기 때문이었다. “왔어요, 엄마?” 아이는 짧은 인사를 건네며 파비안을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비르기트가 약간 주저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파비안.”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비르기트를 바라봤다. 비르기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 전화번호를 적었다. “언제 한 번 전화 주겠니? 우리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파비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젖어 있던 그의 두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의 파비안
껌을 씹고 있는 어린 파비안의 얼굴에는 강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제가 어떻게 불러드렸으면 좋겠어요? 아빠? 아버지? 아니면 아저씨라고 부를까요?” “그냥 파비안 아저씨라고 부르렴.” 나이 든 파비안은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아이가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르기트는 어린 파비안이 별 볼일 없는 사내와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태어난 산물이라는 것을, 또 그 사내는 자신이 아버지가 됐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영원히 말해주지 않을 것임을 아들에게 끊임없이 주지시켜 온 것이다. 어린 파비안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강인하고 독립적인 면모를 보면서 자랐다. “‘우리에게 관심도 없는 그저 그런 사내’와 함께 너를 키우느니 차라리 경제적인 지원을 포기하겠다.”라고 늘 말해왔던 것이다. 그러면 여덟 살 난 아들은 어머니에게 묻곤 했다. “아빠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라면 왜 내 이름을 아빠 이름과 똑같이 지었어요?” “그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지.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다만 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너를 공유하고 싶지 않을 뿐이란다.”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 이 설명은 너무나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전 경고’도 없이 공원 벤치에 앉아 엉엉 울고 있는 낯선 남자와 마주치고, 그로부터 채 사흘도 지나지 않은 지금 ‘아버지’와 친해질 시간을 가져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린 파비안은 분노와 당혹감, 심장이 쿵쾅거릴 만큼의 흥분과 그저 두려운 마음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파비안은 서로를 처음 알게 됐던 그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제 파비안은 아이의 어머니 비르기트를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어느 술집에서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재회한 순간, 태어나기 전부터 그녀가 자신의 여자로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던 그녀를 바보같이 놓쳐 버린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비르기트도 목에 뭔가 커다란 것이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때 다시 한번 더 전화를 걸지 않았던 걸까? 왜 강한 척, 독립적인 여성인 척 행동했던 것일까?’ 그녀의 그 잘난 원칙 때문에 아들이 놓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를 다시 만나자마자 그녀는 그녀뿐 아니라 아들에 대한 이 남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도 느껴졌다. 그는 어린 파비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분명 두려움이 컸을 텐데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헤어질 무렵 그녀가 말했다. “맞아, 잘못은 우리 둘 다 저질렀어. 이제 더 이상은 그러지 말자.” 그리고 지금, 아버지 파비안의 옆에는 아들 파비안이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그 날은 햇빛이 환히 빛나는, 티셔츠만 걸쳐도 좋을 일요일이었고 시간은 이른 오후였다. 아버지 파비안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안에 든 티켓 두 장을 만지작거리다 아들에게 물었다. “음악 좋아하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한테 시립 공원에서 하는 야외 콘서트 티켓이 있는데, 곧 시작할 거야. 우리, 거기 가볼까?” 아들은 아버지를 흘긋 쳐다보더니 “좋아요.”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들의 대답에 당황하는 한편, 기뻐하고 있었다. 시립공원에 도착해 표 검사를 마친 두 파비안은 음료 판매대를 향해 걸어갔다. 두 파비안은 음료 판매대 앞의 기다란 줄에 합류했다. 여자 판매원은 아버지가 아닌 아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는 콜라 하나 주시고요, 아버지는….” 거기까지 말한 아들은 몸을 돌려 아버지를 찬찬히 살펴봤다. “아버지껜 원기회복 드링크제 한 병 주세요.” 아버지 파비안이 껄껄 웃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무대 앞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정말 저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침묵을 깨고 아들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힘주어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네 엄마가 임신 중이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겠지! 진심이야.” 아들의 눈빛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들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스피커에서 찢어지듯 ‘웅’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자, 이제 아일랜드 악사들의 연주는 충분히 즐겼으니 뭘 좀 먹으러 가야죠? 마르크스라는 클럽이 있어요. 오늘 저녁 친구들이 그곳 무대에 서거든요. 극도로 대비되는 두 가지 장르를 즐겨보자고요.” 아들 파비안은 자신이 왜 아버지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는 잠깐 얼굴만 본 뒤에 최대한 빨리 도망친 다음, 콘서트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맘껏 늘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풀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들은 불현듯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생각에 자신도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 파비안은 실은 겉으로는 여유 있는 척 보이려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신경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이 비단 그곳의 분위기만은 아니었다. 파비안은 그때까지도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거짓말처럼 벌써부터 아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는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저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지상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공원 콘서트에서 이미 맥주 두 잔을 마셨고,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레드와인을 0.25 리터 마셨으며, 지금 또다시 맥주를, 정확히 말해 두 잔째 들이켠 파비안은 약간 현기증이 일었다. “아저씨가 파비안 아버지죠?”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나이는 아들과 동갑 정도로 보였고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있었으며 고양이처럼 푸르고 예쁜 눈을 지닌 아이였다.
아들 파비안이 땀에 젖어 공연장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로비 한쪽에서 키라와 아버지가 바닥에 앉아 킥킥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네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 아저씬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으시대.” “그래, 그렇다면….” 아들 파비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느닷없는 말을 던졌다. “너는 정말 멋진 녀석이야! 네가 있어서 참 좋구나!” 파비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노친네가 술에 취한 거야, 틀림없어!’ 그럼에도 아들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애정 표현이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파비안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아버지 파비안이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감추지도 않은 채 소년처럼 환히 웃으며 팔을 벌리는 순간, 아들 파비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품에 안겨 들었다. 한 시간 뒤 아들 파비안은 현관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복도에 서서 안도와 비난이 섞인 표정으로 말없이 노려보고 손으로는 손목시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계단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버지 파비안을 발견했다. “들어와요, 아빠.” 아들이 말했다. 아들이 지금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아들의 어깨 너머로 아버지 파비안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애견별곡
슈테판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성공을 기원했다. 오늘도 공원 벤치에 앉아 그 검은 머리의 여인이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표정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숨이 멎어버릴 정도로 매력적인 검은 머리의 여인은 일주일에 세 번, 늘 비슷한 시간에 개를 데리고 알스터 호숫가를 산책했다. 그녀가 보였다! 세상에, 대체 어떻게 인간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슈테판은 오래 전부터 어떻게 하면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왔다. 눈길을 마주쳐야지! 슈테판의 눈은 검은 머리의 눈길을 찾아 헤맸지만 그녀는 슈테판의 눈을 보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때 그녀의 개가 미친 듯이 줄을 당기며 비둘기를 향해 깨갱깨갱 짖어댔기 때문이다. 슈테판은 원래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 데다, 저렇게 성질 나쁜 조그만 개들은 더더욱 싫어했다. 그러다가, 검은 머리가 드디어 슈테판을 바라봤을 때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뱃속에 가스가 심하게 찬 것이 아니라면 즉시 진통제를 먹어야만 할 것 같은, 슈테판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몸을 홱 돌리고는 몇 초만에 사라져갔고, 슈테판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제기랄!” 슈테판은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갖고야 마는 성미였다. 일단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나면 슈테판은 마치 편집광같이 굴었다. 그리고 현재 슈테판의 목표는 검은 머리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