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지음 | -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
토마스 만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토니오 크뢰거: 자신의 운명적 예술성과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민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
한스 한젠:토니오가 어린시절부터 동경하던 인물. 강하고 활기차며 당당한 전형적인 시민의 모습
잉에보르크 홀름: 토니오가 어린 시절 사랑하던 여인. 아름다운 금발의 푸른 눈을 한 전형적인 시민의 모습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화가이며, 토니오의 애인. 토니오의 정신적 방황을 이해하며 격려해준다.
동경
겨울비가 오는 오후, 토니오 크뢰거와 한스 한젠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토니오는 한스가 자신과 한 약속을 잊어버린 것에 화가 나 있었지만 한스가 그의 팔짱을 끼며 사과하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한스의 사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한스를 사랑하고 있었고, 한스가 그에게 주는 고통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선 한스가 미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스는 모든 면에서 그와는 달랐다. 한스는 우등생이었으며 운동실력도 탁월해서, 승마와 체조, 수영도 잘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한테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토니오는 그런 한스를 보면서 동경했다. 그는 한스를 보며 ‘너처럼 그렇게 파란 눈을 하고 온 세상 사람들과 정상적이고 행복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늘 생각했다.
“난 요즘 놀라운 것을 읽었어, 아주 굉장한 거야.” 토니오가 말했다. “실러의 『돈카를로스』인데 한스 너도 읽어봐. 내가 빌려줄게, 네가 원한다면.” “아니야 그만둬, 토니오. 그런 책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난 계속 승마에 관한 책이나 읽을래. 거기엔 근사한 사진들이 정말 많거든.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온갖 자세들을 다 볼 수 있어.” “그것도 좋긴 한데… 그러나 『돈카를로스』는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거야. 그 작품은 아주 아름다운 대목에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쾅 하고 소리나게 친단 말야.” “쾅이라구? 왜?” “거기에는 후작에게 속은 왕이 우는 대목이 나와. 그러나 후작은 왕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속인거거든. 그런데 그때 밀실에서 왕이 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거야.” “폐하께서 우셨다고?” “궁중의 신하들이 아주 당황해해. 왜냐하면 왕은 평소에 굉장히 완고하고 엄격했거든. 그러나 나는 왕이 우는 이유를 알 수 있어. 왕은 항상 외롭고 아무에게서도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마침내 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마저 그를 배반하니…….“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왕을 배반하지?” 한스의 질문에 토니오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가 드디어 자신의 말에 관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응, 그건…….” “저기 에르빈 이머탈이 온다!” 갑자기 한스가 말했다.
토니오는 다시 굳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머탈이 그들의 대화를 방해한 것을 물론, 분명 한스는 이머탈과,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승마에 대해 이야기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스와 이머탈은 승마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이머탈이 토니오에게 말했다. “크뢰거, 넌 승마 교습을 안 받니?” “응…….” “크뢰거, 너도 네 아버지한테 부탁드려서 교습을 받지 그래?” 한스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토니오는 한스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성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널 크뢰거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네 이름이 정말 이상하기 때문이야. 미안하지만 네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한스는 토니오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금방 변명을 했다.
“그래, 어리석은 이름이지. 나도 하인리히나, 빌헬름 같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면 좋겠어. 그러나 내게 세례명을 주신 외삼촌 이름이 안토니오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내 어머니는 저 아래 남미에서 오셨거든.” 이렇게 말하고는 그들이 승마에 대해 계속 얘기 할 수 있도록 토니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스는 이머탈의 말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예 『돈카를로스』 따위는 전혀 그의 관심을 끌어들일 수 없어 보였다. 토니오는 울고 싶은 충동이 코끝으로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또한 그는 자꾸만 떨리는 턱을 억지로 고정시키려고 무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됐다.
이머탈이 시내로 가야 한다며 그들을 떠났고, 그들도 한젠 가의 저택에 다다랐다. 토니오는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한스가 말했다. “참, 다음번에는 나도 『돈카를로스』를 읽어볼게! 밀실에서 우는 왕자 얘기는 틀림없이 재밌을 거야.” 이내 토니오의 마음이 밝아졌다. 한스가 『돈카를로스』를 읽는다면, 그들 둘은 이머탈이나 다른 누구도 감히 끼여들 수 없는 어떤 공동의 화제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한스도 토니오처럼 시를 쓰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토니오는 고개를 저었다. ‘한스는 지금 그대로 있어야 한다. 모두가 사랑하고, 토니오가 사랑하는 바로 그 밝고 씩씩한 한스 그대로야 한다.’ 토니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파른 골목길을 걸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열 여섯 살이 된 토니오 크뢰거가 명랑한 잉에보르크 홀름에게 반한 것은 후스테데 영사 부인의 널찍하게 치워놓은 응접실에서였다. 그날 저녁 그 응접실에서는 일류 가정의 자제들만을 위한 무용 교습이 있었다. 그들의 선생은 크나크였는데 토니오는 그의 동작을 보면서 이상한 원숭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잉에는 무아지경의 미소를 흘리며 크나크 선생의 동작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그는 자주 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시 따위나 쓰는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멸할 것이다.’ 알 수 없는 질투와 그리움이 가슴속에 밀려왔다. 자신은 그녀로부터 소외되고 그녀에게 영원히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아프고도 절박한 고통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보며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그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여자들만이 추는 춤에 그가 얼떨결에 끼여들었던 것이다. 주위에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크나크 선생이 ‘크뢰거 양’ 하며 비난하자 모두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모두 춤동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휴식시간, 토니오는 남몰래 복도를 나와 창 앞에 섰다. ‘왜 나는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토니오는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엔 잉에가 있기 때문에 그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와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등뒤에서 날지도 모르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녀가 올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그를 비웃지 않았던가. 그가 유명해져서 그가 쓰는 모든 작품들이 인쇄되는 날이 올지라도 잉에는 아무런 감명도 받지 않을 것이다.’ 토니오는 가슴이 고통스럽게 죄어옴을 느꼈다. 길 잃은 시민
그가 작은 고향 도시를 떠나기 전에 이미 그 도시가 그를 붙잡고 있던 끈들은 소리 없이 풀려 있었다. 크뢰거 가의 어른인 그의 할머니가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버지, 사색적이고 키가 큰 그 신사도 죽었다. 크뢰거 가의 큰 저택은 그 근엄한 역사와 함께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되었으며, 회사는 파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그녀의 남편이 죽은 지 일 년 만에 음악가와 결혼했다. 그리고 푸른 하늘이 있는 먼 나라로 떠났다. 토니오는 이런 어머니의 처신을 약간 방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에게 그것을 못하게 말릴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가? 시 따위이나 쓰면서 장차 뭐가 될 거냐는 질문에 대답조차 변변히 못하는 주제에.
그는 고향을 떠났다. 햇볕을 받아 자기 예술이 보다 더 풍요롭고 성숙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남국으로 갔다. 아마도 그를 그쪽으로 끌어당긴 것은 어머니의 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죽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리곤 그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그 고통은 아마도 아버지의 유산이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 등단하자 관계자들 사이에서 많은 박수갈채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한때는 선생님들이 꾸짖으면서 부르던 그의 이름은 순식간에 탁월한 것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생활을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일하지 않았다. 그는 생활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단지 창조자로서만 간주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토니오는 어느날 그의 여자친구인 화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를 방문했다. 그녀는 작업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앉아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잠시 후 그녀는 손을 씻고 찻잔을 들고 그에게 왔다. 토니오가 말했다. “이따금 나는 독자들한테서 칭찬과 감사가 담긴 편지를 받는 답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나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나는 그들을 동정합니다. 만약 그 독자들이 여기 무대 뒤를 한번 들여다본다면 얼마나 실망할까요. 그 순간 독자들은 올바르고 건전하고 착실한 사람들은 결코 글을 쓰거나 연극을 하거나 작곡을 하는 일 같은 것은 절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물론 나는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감탄을 내자신의 창조적 재능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런 감탄을 나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데에 활용하면서 인간의 역을 연기해 내는 원숭이 같은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못하면서 인간적인 것을 표현해 내느라고 나는 가끔 죽도록 피곤합니다.” “토니오, 당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열정을 가지고 당신의 천직에 헌신하고 있는지 제가 모르고 있다면 몰라도 그런 당치도 않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천직이니 소명이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문학이란 것은 소명이 아니라, 일종의 저주입니다. 언제부터 이 저주가 느껴지기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일찍부터, 아주 일찍부터 입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낙인 같은 것이 찍혀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 평범하고도 정상적인 사람들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갈등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반어, 불신, 반항, 인식, 그리고 감정의 심연이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해서, 당신은 고독해지고 그때부터 더 이상 서로 간에 이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당신이 수천 명 가운데 섞여 있어도 당신의 이마에 찍혀 있는 그 낙인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고, 그 낙인을 금방 알아본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술이 시민으로서의 직업이 아니라 미리 운명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직업일 수밖에 없는 한 예술가, 그런 진정한 예술가를 많은 군중 속에서 판별해 내는 데에는 그다지 날카로운 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건 당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인가요? 그렇지만 꼭 그런 식으로 판단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요.” “당신은 내가 너무 세심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리자베타! 내가 한 사람의 인간적인 친구,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들 속에서 친구 하나를 간절히 갖고 싶어한다면 믿어주시겠습니까? 나는 가끔 강단에 나가 어느 홀 안에서 내 말을 들으러 온 사람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한테 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구의 찬사와 감사가 내게로 밀려들고 있는가, 나의 예술이 이 자리에서 누구와 이상적인 결합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서 남몰래 강당 안을 살펴보는 나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찾는 사람들은 그 속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술의 세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보려고 애쓰는 삶의 모습보다 더 초라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고 예술이란 월계수에서 한 잎, 단 하나의 이파리쯤은 따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안 될 말입니다. 이 점은 꼭 집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제 말씀이 다 끝났나요?” 리자베타가 말했다.
“대답해주실 말이 있습니까?” “있을 것 같군요. 토니오, 전 당신이 오늘 말씀하신 모든 것에 어울리는 대답을 해드리지요. 이것은 당신을 그렇게도 불안하게 하고 있는 그 문제의 해답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해답은 이렇습니다. 거기 그렇게 앉아있는 당신은 그대로 한 시민입니다.” “내가요?” 토니오는 주저하며 말했다. “예, 당신은 잘못된 길에 접어든 시민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길 잃은 시민이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단호히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이제 안심하고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가을 무렵, 토니오는 리자베타에게 덴마크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어떤 코스로 가실 거죠?” “보통 가는 코스입니다.” 토니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눈에 띄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요, 리자베타. 나는 내 고향, 내 인생의 출발점을 경유해서 갈 겁니다. 13년 만이지요.” 리자베타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그게 바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에요. 토니오, 내게 편지 쓰는 거 잊지 마세요.”
이상한 귀향
기차가 좁고 어두운 반원형의 터널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우중충하던 오후가 벌써 저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토니오는 자기 짐을 찾아 그것을 호텔로 옮겨주도록 부탁해 놓고는 역사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고향 도시를 둘러보았다. 13년 전과 별로 다른 게 없었다. 다만 그저 왜소하고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걸어서 호텔로 들어갔다. 검은 예복을 입은 세련된 신사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토니오를 측정하는 듯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면서, 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어림잡아 그 나름대로 적당한 자리를 매겨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는지, 그를 중간쯤으로 대접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고풍스런 서민적 가구가 비치된 깨끗한 방을 배정받았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그가 떠났던 그때와 변함없이 회색빛을 띠고 진지하게 거기 있었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사무복을 입고, 귀에 펜을 꽂은 그의 아버지가 문득 걸어나와 그를 불러 세우고는 그의 무절제한 생활을 엄하게 꾸짖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그는 반쯤 열려진 현관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의 모습을 한 일 층을 둘러보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중간층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는 멈춰서고 말았다. 문에는 흰 팻말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검은 글자로 ‘민중 도서관’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민중 도서관이라고?’
토니오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는 민중과도, 문학과도 전혀 무관한 곳이 아니었던가.’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둘러보았다. 네 벽면은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제본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는 사서에게 양해를 구하고 책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곤 창가로 가서 그곳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아침식사를 하던 방,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방,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절실하고도 안타까운 시를 썼던 자신의 방도 모두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찡한 그리움이 그의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는 책을 꽂고 도서관을 나왔다. 더 이상 집을 둘러볼 마음이 들지 않아 곧바로 호텔로 돌아갔다.
토니오는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더 이상 여기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가방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검은 예복을 입은 신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 실례합니다만, 잠깐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이 호텔 주인인 제하 씨께서 손님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형식적인 것입니다. 저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그는 신사를 따라 현관 뒤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토니오가 알고 있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한 제하 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경찰관이 서 있었다. “뮌헨에서 왔지요?” 경찰관이 물었다. 토니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코펜하겐으로 가시지요?” “그렇습니다. 덴마크의 어느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신분증명서를 제시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증명서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관리들을 상대하기 싫어서 지금까지 한번도 여권을 발급받은 적이 없었다. “아무 증명서도 없단 말이요? 이름이 뭡니까?” 토니오는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