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말테 라우리츠 브릭게: 28세. 몰락한 덴마크 귀족 가문의 후예. 대도시 파리에서 작가의 꿈을 일구며 가난과 고독과 투쟁. 이 수기는 그의 내적 투쟁과 발전의 기록이다.
아버지: 궁정 수렵 관리로서, 분명하고 강인한 성품을 지녔다.
어머니: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섬세하고 모호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성격. 어머니의 기억을 통해 말테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깨닫는다.
아벨로네: 말테의 이모. 말테가 학생시절에 사랑했던 이상적 여인상
병과 죽음의 도시
사람들은 살겠다고 이 도시로 모여드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죽으러 오는 것 같다.
나는 거리로 나갔다.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만삭이 된 임산부가 벽을 따라 힘겹게 걷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병원, 병원들. 늦여름 거리에서 풍기는 온갖 냄새들 속에 불안이 깃들여 있다. 유모차에 실린 어린아이는 불안으로 가득한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잔다.
도시는 휴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밤새도록 끊임없이 들려오는 전차 소리,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창문을 열어놓고는 도저히 잠들 수 없다. 그러나 때로는 소음보다 더 무서운 정적의 순간도 있다. 도시의 무지막지한 소음 뒤에는 무서운 결말 직전의 숨막힐 듯한 끔찍한 고요가 가라앉아 있다.
파리에 온지 삼 주 째. 나는 이미 나 자신도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변했으니 나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편지를 쓸 수 없다. 이제부터 혼자서 삶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병원들은 나에게 두려움을 자극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디외 병원에는 지금 559개의 침대가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와 똑같은 방식으로 숨을 거둔다.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품을 찍어내듯 병원이 죽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온 삶의 결실로서 고유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오늘날 불가능해졌다.
죽음이 고유함을 잃었다면, 그것은 삶이 고유함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예전에는 열매가 씨를 갖고 있듯이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을 갖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작은 죽음을, 어른은 큰 죽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특유한 침착함과 조용한 품위를 지닐 수 있었다.
나는 궁정 시종이셨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한다. 울스고르의 영지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너무도 느리게 죽어가셨다. 삶을 끈질게 붙잡으려 하셨다. 할아버지가 평생 강하게 사셨던 것처럼,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수종(水腫,살갗에 림프액이나 장액이 괴어 붓는 병)은 엄청난 위력으로 할아버지를 괴롭혔다. 밤낮 고통으로 신음하는 할아버지는 어느 한 곳에도 머물지 못하고 하인들을 시켜 온 집안을 계속 옮겨다니게 했다. 그래서 가족과 하인들, 심지어 짐승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겪어야 했다.
할아버지다운 죽음이었다. 할아버지가 평생 다 보여주지 못했던 교만과 의지, 지배력의 여분이 모두 터져 나와서 그 막바지에 폭군처럼 군림했던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대처하기로 결심했다.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뿐이다. 나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밤에도 자지 않고 글을 쓰기로 했다. 보는 법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돌이켜 본다. 스물 여덟 해를 사는 동안 내가 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쓴 거라고는 유치한 글 나부랭이에다 어설픈 희곡뿐이다. 시도 썼다. 그러나 젊어서 쓰는 시는 훌륭한 시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와 사람들, 온갖 물건들을 보아야 한다. 또 보는 것에 그치는 것 아니라, 숱한 경험과 추억들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이 되고 표정이 되고, 내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벌이 꿀을 모으듯 여러 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깊이와 향기가 모였을 때 어느 기적적인 순간에 비로소 한 행의 시구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빈민 아파트 5층 조그만 방에 앉아 있는 나, 말테 라우리츠 브릭게. 몰락한 덴마크 귀족 가문의 후손. 이 세상 그 누구도 여기 있는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내가 이 세계의 현상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상의 표면 아래 있는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이 초라한 방구석에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우스운 일 아닌가!
그러나 나는 생각하고, 또 쓸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이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기에.
과거와 현재
내가 열 두 세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우르네클로스터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 데리고 가셨다. 연금술과 시체 해부에 몰두하는 퇴역 장교인 숙부, 어머니의 먼 친척인 마틸데 브라에 양, 그리고 내 나이 또래의 에릭이 그곳에 묵고 있었다. 나는 누구와도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그저 개를 데리고 숲과 들을 쏘다니면서 소일하며 지냈다. 저녁 일곱 시에는 모든 식구가 모여 식사를 했는데, 어두컴컴한 식당에 앉아 있으면 바깥 세상과 동떨어져 신비한 공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어느날 저녁 마틸데 양이 식당에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마틸데는 어디 아픈가요?”라고 묻자 외할아버지는 “아니, 크리스티네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구나.” 라고 대답하셨다. 긴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를 먹을 무렵이었다. 어두운 식당의 한쪽 문이 열리고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더니 우리가 앉아 있는 옆을 초연히 지나서 반대편 문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몹시 놀란 기색으로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담담하게, “크리스티네 브라에야. 여기 있을 자격이 있는 애지.” 라고 대답하셨다. 그 대답에 파랗게 질린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놀라 방으로 뛰어 올라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마틸데 양이 찾아와 나를 위로하면서, 아까 본 여자는 오래 전에 둘째 아기를 낳다 죽은 가엾은 크리스티네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와 내가 우르네클로스터에 8~9주일을 머무는 동안 크리스티네의 유령은 그 후로도 세 번 더 나타났다.
오늘 나는 국립도서관에 앉아 더없이 조용하고 예의바른 분위기 속에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가난뱅이인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아직 내 셔츠 깃은 더럽혀지지 않았고 내의도 깨끗하다. 하지만 거리에 나가면 내 실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운명이 내뱉은 타액과 같은 인생의 낙오자들, 걸인들, 행상 노파, 그들은 내가 자기네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간파하고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나는 두렵다.
결국 나도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원 뜰에는 가난과 병에 찌든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들 사이에 끼여 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 담당의사가 나왔기에 곧 내 차례이겠거니 했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야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의사는 빨리 빨리 간결하게 말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증상을 되도록 잘 말하려고 애를 썼지만 의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사는 나에게 다시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복도에 나오니 약 냄새, 사람 냄새로 공기는 더 탁했다. 창문을 좀 열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간호사는 창을 여는 건 금지 사항이라고 하였고, 복도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금지된 일이니 꼼짝말고 앉아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나는 빈 자리로 가 앉았다. 내 양옆에는 눈이 튀어나오고 잇몸이 썩고 있는 소녀와 시체처럼 꼼짝 않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으니 묘하게도 마치 내가 항상 머물러야 할 그 자리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마음속에서 무언가 엄청난 것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였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어제는 열이 내렸다. 국립도서관에 가는 길에 나는 카페 앞을 쓸고 있는 종업원들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발에 무엇이 걸린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좀 의아한 느낌이 들어 사내를 쫓아가 확인해 보았지만 바닥에는 발에 걸릴 만한 장애물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그를 계속 따라갔다. 몇 분 후 그 사내는 갑자기 껑충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외투의 깃을 붙잡고 바르게 접어 젖히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사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내는 짚고 가던 지팡이를 등뒤로 가로질러 쥐고 터져 나오는 그것을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내부에 있던 발작 증상은 그의 몸을 뚫고 폭발하고 말았다. 지팡이는 내동댕이쳐졌고, 사내는 날아가려는 사람처럼 양팔을 쭉 벌렸다. 그리고 그의 몸은 끄덕거리고 구부러지고 뒤로 젖혀지다가 마침내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팡테옹에서 성녀의 그림을 보았다. 성녀의 고즈넉한 모습, 지붕과 문, 멀리 보이는 도시, 달빛 비치는 원경이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동안 나는 변화된 현실과 나 자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돌이켜볼 수 없었다. 그렇다, 인생의 모든 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시인 보들레르처럼, 나 또한 선택도 거부도 하지 않고 현실의 모든 면을 포용해야 할 것이다. 설령 아무리 추한 현실이라 해도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기대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공기 하나하나마다 스며 있는 공포. 어느 곳으로 도망쳐도 그 무서운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위안이 될까? 아니, 빛이 없는 어둠 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안전할지 모른다. 아무 것도 식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아예 어둠과 하나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굳게 잠근 문. 사방을 휘감은 정적. 어렸을 때 그렇게 무서웠던 밤을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는 어머니가 계셨다. 공포에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는 달려와 불을 밝혀주고 “엄마야, 무서워하지 마” 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당신은 당신을 찾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셨습니다. 아이 앞에서 모든 공포를 가로막아 주신 것은 바로 당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어머니는 섬세하고 연약한 분이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딱딱한 것은 전혀 드시질 못했다. 나중엔 바늘에 대한 불안으로 시달리셨다. 어딘가에 바늘이 떨어져 있어 찔릴까 봐 두려워 하셨다. 하지만 죽은 잉게보르크에 대해 말씀하실 때만큼은 불안을 잊으셨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잉게보르크의 추억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것은 소녀의 장례식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가족들이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우편배달부가 올 시간이었다. 우편물을 받아 갖고 오는 것은 늘 잉게보르크의 일이었지만, 그 애가 오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그 애가 ‘정말’ 나타났다. 개의 눈에 뭐가 보였는지 아이를 마중하러 뛰어간 것이다. 잉게보르크가 올 때 늘 그랬던 것처럼 개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의 주위를 즐겁게 빙글빙글 뛰며 낑낑거리기도 했다. 개의 행동을 보던 모든 사람은 그 순간 잉게보르크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그 애가 정말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개는 공중으로 펄쩍 한번 뛰어오르더니, 땅에 툭 떨어진 채 꼼짝하지 않았다. 죽은 것이었다.
잉게보르크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어머니에게 ‘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고 유모는 내 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을 탄 기사를 그리다가 빨간색 색연필이 필요해서 집으려는데 그것이 데구루루 굴러 탁자 밑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나는 억지로 의자에서 내려와야 했다. 어둠침침한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자 조금 전까지 불빛과 선명한 색상에 익숙해 있던 내 눈은 아무 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손으로 더듬거렸지만 색연필은 잡히지 않았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눈은 차차 어둠에 익숙해져서 내 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움직이는 손이 물 속에서 조용히 헤엄치는 동물처럼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난 무서움에 소스라쳤다. 저 벽에서 내 손보다 더 큼지막한 손 하나가 기어 나오는 것 아닌가! 나는 정신없이 탁자 밑에서 빠져 나와 의자 위로 기어올라갔다. 부들부들 떠는 나를 보고 놀란 유모가 읽던 책을 내던지고 달려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공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무렵에 벌써 인생은 자기 혼자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할 기묘한 경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열병을 앓았다.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는 왜 소리를 지르는지 이유를 물으셨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느 밤에는 증상이 몹시 심각하여 유모가 하인들을 시켜 황태자가 개최한 무도회에 가신 부모님을 모셔온 적이 있었다. 그 밤 우아한 야회복 차림으로 내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오신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조용히 울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맥을 짚어보신 후, 나를 보지도 않으시고 쓸데없이 부르러 보냈다며 중얼거리셨다.
또 이런 기묘한 경험도 했었다. 우리 집 위층에는 사용하지 않는 객실이 있었는데 나는 그 방에 몰래 들어가 장롱들을 하나씩 열고 그 속에 가득한 가지각색 옷들을 하나씩 입어보곤 했다. 거울 앞에서 색다른 내 모습을 비춰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처음 열어 본 장롱 안에는 가장무도회의 복장들이 있었다. 나는 그 옷들을 입으면서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가면까지 쓰고 거울을 보니 완벽하게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실수로 탁자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탁자 위에 있던 것들이 요란하게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당황한 나는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갑갑해진 가면을 벗어보려고 했지만 얼굴에 꼭 끼어 도무지 벗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거울을 보니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니라 이상스럽게 헝클어진 복장의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이리저리 부딪히며 방을 뛰쳐나왔다. 엉엉 울면서 사람들에게 가면을 벗겨달라고 애원했으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도 모른 채 내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고 깔깔 웃기만 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 외할머니는 뵌 적이 없지만 친할머니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모든 일에 철저하고 단호했던 할머니는 뭐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구별할 능력이 없었던 어머니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키 크고 까다로운 이 노부인은 어린아이를 싫어했고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의 사교생활도 멀리한 채 울스고르의 시골에서 조용히 보냈다. 뭔가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소망을 몇 겹의 껍질로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신 적이 별로 없었지만 한번 크게 할머니와 부딪힌 적이 있었다. 중요한 손님들과 함께 식사하던 자리였는데, 할머니는 식탁에 잘못해서 엎지른 포도주 얼룩을 심하게 비꼬면서 쉴새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할아버지가 은근히 할머니를 저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포도주가 잔을 채우고 넘쳐 식탁 위로 흘러도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술을 부었다. 이 어이없는 광경에 모든 사람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 다행히 어머니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긴장된 분위기가 풀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