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
토마스 만 지음 | -
트리스탄
토마스 만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레안더 박사: 아인프리트 요양원의 원장
클뢰터얀 부인: 기관지가 안 좋아서 요양하러 온 사람
슈피넬: 괴짜인 작가
「아인프리트」 요양원에 클뢰티얀 씨 부부가 방문하다
여기는 「아인프리트」 요양원이다. 길게 쭉 뻗은 본채와 옆에 딸린 곁채로 이루어져 있는 일직선의 흰색 요양원 건물은 널찍한 정원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레안더 박사가 요양원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레안더 박사의 풍모는 학문을 하느라 차가워지고 딱딱해진 인상을 주면서도 차분하고 사려 깊은 염세주의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요양원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서 하는 오스털로 양은 주방이나 비품 창고의 일부터 요양원의 식단을 입맛이 당기면서 맛깔스럽게 차려 내는 것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성으로 요양원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이 요양원은 주로 폐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폐병 환자들뿐만 아니라 시의원 부인인 슈파츠 여사처럼 위장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장에 이상이 있는 사람, 마비성 환자들, 류머티즘을 앓는 사람들, 그리고 온갖 증세를 보이는 신경증 환자들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일종의 광물이나 보석 이름을 연상케 하는 이름을 가진 별난 작가가 이곳에서 아까운 세월을 축내고 있었다.
이만큼 「아인프리트」 요양원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데는 의학적인 면에서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외 또 다른 한 가지. 새로운 손님들이 도착할 때나 요양원을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레안더 박사와 오스털로 양은 온갖 격식을 다해 손님을 대접한다는 점이다.
1월 초 어느날 「클뢰터얀 상사」를 경영하는 대상인 클뢰터얀 씨가 부인을 「아인프리프」 요양원으로 데려왔다. 수위가 종을 울리자 오스털로 양이 먼 길을 찾아온 일행을 일 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맞이했다. 얼마 안 있어 레안더 박사는 새로운 손님을 맞기 위해 서둘러 응접실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가 고개를 숙여 통성명을 하자 어느새 싸늘했던 방 안 공기가 훈훈하게 바뀌어 갔다.
그 젊은 부인은 아름다움과 고상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다소 지쳐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눈동자 여기저기에 원래의 색깔이 약간 퇴색한 듯한 기미가 엿보였다. 좁은 콧뿌리의 양쪽에 닿아 있는 눈의 안쪽 구석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이따금씩 잔기침을 하곤 했었다.
레안더 박사는 그녀가 몹시 피곤해하자 여장을 풀 수 있도록 방을 안내해 주었다. 새로 입원한 이 여성 환자는 이 「아인프리트」 요양원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효과에 익숙해 있는 클뢰터얀 씨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바치는 온갖 흠모를 흡족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 당뇨병을 앓고 있던 장군은 언젠가 처음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불평을 그치게 되었고, 얼굴이 비친 남자들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면 미소를 지으며 다리의 경련을 억제하려고 애쓰게 되었으며, 시의원 부인 슈파츠 여사는 마치 클뢰터얀 씨 집안의 부인네라도 된 듯한 인상을 주기까지 했다.
몇 주 전부터 「아인프리트」 요양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떤 작가는 클뢰터얀 부인을 복도에서 마주치는 순간 바로 안색이 달라지더니 걸음을 멈추고는 그녀가 사라진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 자리에 붙박인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요양원에서 묵고 있는 모든 손님들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클뢰터얀 부인의 내력을 소상히 알게 됐다. 그녀가 브레멘 태생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할 때면 발음을 애교 있게 비트는 버릇이 있다는 것, 그리고 브레멘에서 두 해 전에 부유한 상인인 클뢰터얀씨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까지도 알려지게 됐다. 그러고서 그녀는 클뢰터얀씨를 따라 발트 해 연안에 자리잡은 그의 고향 도시로 옮겨갔고, 열 달쯤 전에 극히 힘들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놀랄 만큼 생기가 넘치고 훌륭하게 자라서 장차 클뢰터얀씨의 상속자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 고통스런 출산을 겪고부터 그녀는 다시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아이를 낳기 전에도 과연 기력이 넘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산욕을 치르느라 너무나 지치고 완전히 탈진한 상태여서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기침을 하면서 약간의 피를 토해 내었다. 물론 하찮아 보일 만큼 적은 양의 피였다. 똑같은 증세는 얼마 후에 재발되었고 그리하여 집안의 주치의인 힌츠페터 박사가 그녀를 보살피게 되었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엄마를 찾아댔고 점차 클뢰터얀 부인의 병세는 악화되어 갔다. 결국 힌츠페터는 온화한 기후 조건을 갖춘 요양원에서 머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소견을 밝혔다. 그래서 그들은 이 「아인프리트」 요양원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작가 슈피넬과 클뢰터얀 부인이 만나다
새로운 사람이 온 후 처음으로 요양객 일동이 참석하는 첫 식사 때의 일이었다. 몇 주 전부터 「아인프리트」 요양원에 묵고 있는 작가 슈피넬이 여지없이 그날도 남들보다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좌중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기 자리, 즉 클뢰터얀 부인이 앉아 있는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를 하면서 클뢰터얀씨가 그에게 「아인프리트」 요양원의 시설이라든가 날씨에 관해 몇 마디 질문을 하자 그 옆에 있던 그의 부인도 애교 섞인 말투로 두어 마디 거들었다. 슈피넬씨는 이들의 말에 정중하게 답해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제법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마치 혀가 이 사이에 걸리기라도 한듯 말을 더듬거리며 질질 끌며 말했다.
식사가 끝나고 휴게실로 자리를 옮기자 레안더 박사는 특히 새 손님들에게 식사가 괜찮았냐고 물었고, 클뢰터얀씨의 부인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에 관해서 물어왔다. “저분 성함이 뭐라고 했죠? 슈피넬리씨던가요? 성함을 제대로 듣지 못했거든요.” “슈피넬리가 아니라 슈피넬입니다. 부인. 저 양반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라 렘베르크 출신에 불과하지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만…….” “뭐라고 했죠? 작가나 뭐 그런 거라구요?” “예, 잘 모르긴 하지만, 아마 글을 쓴다지요… 제가 알기로는 책을 한 권 냈는데, 소설 비슷한 책인 모양입니다.” “그것 참 재미있군요!” 클뢰터얀 부부는 이 말을 끝으로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레안더 박사도 휴게실을 나가려고 하자 그때 슈피넬 씨가 그를 붙잡으며 같은 질문을 해왔다. “그 부부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했거든요.” “클뢰터얀이오.” 레안더 박사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는 다시 나가려고 하자 슈피넬은 다시 그를 붙잡았다. “남편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클뢰터얀이란 말이오!” 박사는 짜증 섞인 말투로 한마디 내뱉고는 자기 갈 길로 가 버렸다.
괴짜작가 슈피넬
클뢰터얀씨는 「아인프리트」 요양원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아내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나서 일 주일이 지나자 그녀가 극진한 대우를 받고 좋은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아내를 보살피는 일에 버금가는 중요한 일들, 그러니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를 돌보고 역시 날로 번창하는 사업을 관리하는 일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 일들 때문에 그는 부인이 최선의 보살핌을 받도록 남겨두고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그의 부인도 「아인프리트」 요양원에 빨리 적응해 나갔다. 요양객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슈파츠 여사와 작가 슈피넬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슈피넬은 처음부터 그녀를 극진히 예우했다. 심지어 어떤 시중이라도 들어줄 태세여서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는 여지껏 누구하고도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클뢰터얀 부인은 슈피넬씨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가 정말 괴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그가 이런 질문을 해왔다. “부인, 실례지만 성함을 여쭤 봐도 될까요? 원래 이름 말입니다.” “제 이름은 클뢰터얀이잖아요. 슈피넬 씨!” “음…그건 저도 알지요. 아니, 저는 그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낫겠군요. 그러니까 당신의 본래 이름. 결혼하기 전의 이름 말입니다. 부인, 당신을 ‘클뢰터얀 부인’이라고 부르는 자는 채찍을 맞아도 싸다는 걸 당신 자신도 당당하게 인정하실 테지요.”
그러자 그녀는 어찌나 웃어댔던지 눈썹 위의 파란 실핏줄이 불안해 보일 만큼 도드라져 나와, 워낙 섬세하고 달콤하던 표정에 긴장과 조바심의 기색이 드리우면서 매우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아니에요! 그만 하세요. 슈피넬씨! 채찍이라니요? ‘클뢰터얀’이라는 이름이 당신한테는 그렇게 끔찍스러운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에크호프’는 어떤가요?” “아, 그래요? ‘에크호프’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군요! 근데 부친 성함만 얘기하셨군요. 모친께서는… 당신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 주세요. 피곤하시면 관두시구요.” “저는 브레멘 출신입니다. 저는 합각머리 지붕이 얹혀진 회색 집에서 태어났지요. 오래된 상인의 집이었는데, 마룻바닥이 울리고 복도에는 흰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어요.” “그럼 부친께서 장사를 하셨군요?” “그래요. 하지만 장사 말고 정작 본업은 예술가였는지도 몰라요. 바이올린을 하셨는데… 저는 옆에서 피아노 연주를 같이 하기도 했죠… 그래요. 집에서 보낸 시절은 모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특히 정원이 생각나요. 집 뒤에는 뜨락이 있었죠. 여름철이면 그곳에서 몇 시간씩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곤 했답니다. 우리는 분수 주위에 작은 야외용 의자를 놓고 모두가 빙 둘러앉곤 했지요.” “멋지군요.” "슈피넬 씨, 제 얘기가 뭐가 멋진가요?” “아, 바로 이겁니다. 당신을 빼고 여섯 명이라고 하셨죠? 당신은 그 여섯 명 가운데 포함되지 않고, 말하면 여왕처럼 돋보였다고나 할까요. 눈에 전혀 띄지 않는 듯하지만 작은 황금의 왕관이 당신의 머리 위에 얹혀져서 의미심장하게 반짝이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아니에요. 당치 않은 말씀이에요. 왕관이라니요.” “그럼 당신이 남편을 처음 만난 장소도 바로 거기겠군요?” “그래요. 거기서 그이를 알게 되었죠. 짐작하실 테지만 그 사람은 사업상의 볼일로 아버지를 찾아온 참이었죠. 그 다음날 그는 저녁 식사에 초대됐고, 그로부터 사흘 뒤에 저에게 청혼을 해왔답니다. … 하지만 아버지는 반대하셨죠. 근데…….” “근데요?” “근데 제가 결혼을 원했어요.” “아, 네. 그렇게 해서 아버님을, 그분의 바이올린을 떠난 셈이군요. 그 오래된 집도, 수풀이 우거진 정원도, 분수도, 여섯 명의 친구도 버리고 클리터얀씨와 함께 떠나갔군요…….”
클뢰터얀 부인은 슈피넬씨과 나누었던 대화를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했다. 아무런 내용도 없는 대화였지만, 그 대화의 밑바닥에는 그녀 자신에 관한 생각을 은근히 부추기는 요소들이 더러 잠복해 있었다. 그런 요소들이 그녀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쳤던 걸일까. 그녀는 더 허약해졌고 종종 신열이 오르곤 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2월 말 어느 쌀쌀한 날이었다. 이전까지의 그 어느 날보다 날씨가 청명했던 이날 아인프리트 요양원은 온통 들떠 있었다. 심장에 문제가 있는 남자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고, 당뇨병을 앓는 장군은 젊은이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다름이 아니라 모두 함께 외출을 나갈 계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안더 박사가 환자들의 기분 전환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요양원에 남아 있어야 했다. 중환자들은 물론이고, 오스털로 양은 그 중환자를 돌봐야 했고 클뢰터얀 부인은 그냥 남아 있는 게 몸에 오히려 좋을 것 같았다. 슈피넬 씨는 작업을 한다며 남아 있겠다고 했다. 슈파츠 부인은 차멀미가 심하니까 젊은 여자 친구의 말벗이나 돼주겠다며 남아 있기를 자초했다.
점심식사를 다 하고 나자 요양원 식구들은 밀물이 빠지듯 확 빠져나갔다. 그러자 아인프리트 요양원은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클뢰터얀 부인과 그녀의 나이 든 친구는 짧은 산책을 한 뒤 휴게실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둘은 벽난로 가에 자리를 잡았다. 슈파츠 여사는 자수용 캔버스 위에 꽃을 수놓았고, 클뢰터얀 부인도 바늘 수를 놓다가 일감을 무릎에 내려놓고는 앉아 있던 안락의자의 팔걸이 너머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몽상에 빠져들었다.
그때 앞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슈피넬씨가 들어왔다. “방해가 됐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는 피아노 앞에 놓여 있는 회전의자에 앉더니 한쪽 팔을 피아노의 덮개 위에 걸쳐놓았다. “저…부탁이 있는데요? 오늘 한번 피아노 연주를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네? 그건 안 돼요. 우리 집의 주치의와 레안더 박사 모두 특별히 그건 못하게 했어요, 슈피넬씨.” “그럼 더 이상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몸에 해로울까 봐 두려우시다면… 근데 부인, 당신의 손가락 아래에서 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그 아름다움은 말없이 죽은 채로 내버려두세요.… 한 가지만 더 아셨으면 좋겠네요. 일찍이 부친께서 당신 곁에서 당신을 울리던 바로 그 곡조를 바이올린으로 켜시던 때처럼 당신이 여기에 앉아 연주하신다면, 당신의 머리에서 황금 왕관이 반짝이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왕관이요?” “네.” “…그렇다면 딱 한 곡 만이에요. 아시겠죠? 당신도 그것으로 그만 만족하셔야 돼요.”
그리고서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자수거리를 치우고는 피아노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몇 권의 제본된 악보집이 놓여 있던 회전의자에 자리를 잡고는 촛불을 가지런히 세워놓고 악보를 뒤적였다. 그녀는 쇼팽의 야상곡 제 9번 2악장 내림 마단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연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연주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도 재미가 붙었는지 그녀의 연주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때 슈피넬씨는 회전의자 위에 검정색 마분지로 장정된 악보집에 눈길이 쏠렸다. 그는 그 악보집 가운데 한 권을 희고 커다란 두 손으로 정열적으로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느닷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 댔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지? 이게 무슨 곡인지 아십니까? 여기에 있는 이 곡이? 제가 들고 있는 이 곡이?” "그게 뭐죠?“ 그러자 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표지를 가리켰다. 그는 완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악보집을 내려놓고는 입술을 떨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어떻게 그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이리 줘 보세요.”
그녀는 악보를 악보대 위에 올려놓더니 자리에 앉은 다음 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첫 페이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곡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것이었다. 클뢰터얀 부인과 슈피넬씨는 정신없이 그 곡에 매료되어갔다. 그때 어렴풋이 방울 소리가 들려 왔다. “눈썰매 소리군요. 요양원 사람들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내뱉고는 휴게실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갔다. 자기 방으로 도착한 슈피넬씨는 편지지가 잔뜩 놓여진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정돈되지 않은 글씨로 촘촘히 편지를 써내려갔다.
느닷없는 죽음
그날 이후부터 클뢰터얀 부인의 병세는 눈에 띄게 악화되어 갔다. 레안더 박사는 그녀를 진찰하는 동안 표정이 차갑게 굳어 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박사는 클뢰터얀씨에게 이쪽으로 빨리 와달라는 편지를 띄우자 며칠 안 있어 클뢰터얀씨는 이 요양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무슨 일이지요?” “지금은 부인 곁에 계시는 게 바람직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한편 작가 슈피넬씨는 자기 방 창문을 통해서 클뢰터얀씨의 마차와 그의 아들 안톤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클뢰터얀씨였다. 그의 손에는 깨끗하게 씌어진 커다란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클뢰터얀씨가 말을 건네자 슈피넬씨는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어리석은 짓이었군요.” “어리석은 짓이지요! 내 입장에서 보면 이런 글 나부랭이는 한 마디도 언급할 가치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어떤 문제에 관해, 그러니까 아내의 병세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깨우쳐주지 못할 바에야 이런 종이조각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집사람 머리에 허황된 망상을 심어주고 싶어 안달하고 있다면 당신은 뭔가 헛짚은 겁니다. 당신이 ‘보세요, 그녀는 죽어가고 있단 말입니다!’라고 한 말이 과연 맞는지는 반드시 확인해 봐야겠지만 당신은 얼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