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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지음 | -
베니스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

토마스 만 지음



어느날 갑자기

구스타프 아센바하, 쉰 번째 생일에 국가로부터 귀족칭호까지 받은 존경받는 작가.



어느 봄날 오후 뮌헨 교외로 산책을 나갔던 아센바하는 북부 묘지 근방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전차를 기다리다가 문득 건너편 시체안치소 건물의 계단 입구에 서 있는 밀짚모자의 사내를 보게 되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이 지방 사람은 아니었다. 무심코 사내를 관찰하던 아센바하는 상대의 매서운 눈초리와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아센바하는 뭔가 불안감 같은 것이 마음속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것은 머나먼 나라에 대한 동경, 방랑에의 그리움이었다. 그는 아득한 이국을 머릿속에 그렸다. 짙은 안개에 뒤덮인 하늘과 초목이 우거진 열대의 늪지대, 무성한 양치 식물의 덤불, 마치 뒤엉킨 어두운 욕망과도 같은 원시의 풍경, 그리고 대나무 우거진 수풀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의 눈빛을...

아센바하는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시계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작품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사명감에 늘 부대꼈다. 여름이면 산골에 있는 별장에서 보냈지만 그 역시 의무에서 해방된 시간은 아니었다. 뮌헨과 산골 별장에서의 생활, 끝없는 작업에의 몰두, 이것이 그의 삶 전부였다. 그런 아센바하의 마음에 지금 도피의 충동이 일어난 것이다. 머나먼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충동, 부담을 벗고 모든 것을 망각하고 싶은 충동이.

문필가로서 감정의 나태함 같은 것을 엄격히 자제해 온 그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불꽃과 같은 감정의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겐 어떤 분기점이 필요했다. 먼 나라의 공기를 쐬고 새로운 피를 주입 받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까지 갈 것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휴양지에서 삼 사 주일 낮잠이나 자고 빈둥거리면 될 것 같았다.

전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센바하는 여행을 떠나기로 단단히 다짐했다. 차에 오르면서 돌아다보니 그에게 여행의 동경을 일깨워주었던 밀짚모자의 이방 사나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 온 오 월 초순의 일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구스타프 아센바하는 지체 있는 가문에서 사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대개 장교와 법관, 행정관 등으로 엄격한 규율에 제약받은 삶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보헤미아 지방 어느 악장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로 인해 이 가문에 새로운 피가 섞여들었다. 아센바하는 어머니의 피를 받아 외모에서 이국적인 색채를 띄었다.

어린 나이에도 성숙하고 기품 있는 몸가짐을 보였던 아센바하는 작가로서 사회에서 성공하고 명성을 얻고 싶었다. 재능을 타고난 작가는 아니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오늘의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아센바하는 청년 시절에도 자신에게 안일과 나태함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했던 것은 육체적으로 연약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소년 아센바하는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생활의 모토를 “끝까지 해보자”로 정하고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을 규율로 다스렸으며, 냉수마찰로 아침을 시작해서 규칙적으로 글쓰기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작가 자신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뚫고 나가는 영웅적인 의지의 인간상이 그려졌다.

아센바하는 일찍이 작가로서 명성과 품위를 얻었고 사회적으로도 정신적 지도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작품에는 어딘가 관료적이고 교훈적인 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국정 교과서에도 실리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아센바하는 젊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아내의 죽음으로 결혼생활의 행복은 몇 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하나 있던 딸마저 출가해서 지금 그는 뮌헨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아들 같은 것은 얻어보지 못했다.



운명적인 만남

여행의 충동이 일어난 후 아센바하는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로 인해 두 주 후에나 뮌헨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트리에스트로 가서 하루를 머물고 이튿날 포올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먼저 여장을 푼 곳은 아드리아 해의 어느 섬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서 아센바하는 다시 떠나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아센바하는 별 이유 없이 예전에 갔던 적이 있는 베니스를 택했다.

베니스로 가는 배에 올랐을 때 아센바하는 갑판에서 젊은 한 무리가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빨간 넥타이를 하고 파나마 모자에다 최신 유행의 크림색 양복을 입은 사나이가 유난히 수선을 떠는 게 눈에 띄었는데, 이 사내를 자세히 살피다가 아센바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노인이었던 것이다. 눈과 입 언저리의 잔주름은 두꺼운 화장으로 가렸고, 머리는 가발이었다. 콧수염도 염색을 한 데다 누런 이빨은 값싼 의치임에 분명했다. 아센바하는 소름이 끼쳤다. 도대체 이 늙은이는 왜 이렇게 청년처럼 가장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젊은이들은 이 노인이 가짜라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불쾌한 기분으로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고 바람도 습했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는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한숨 자고 나니 베니스에 거반 닿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차츰 육지가 눈에 들어올 때 아센바하는 아까 보았던 가짜 청년이 궁금했다. 노인은 술에 골아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주정을 해대고 있었다. 그 꼴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추했다.

베니스에 내린 아센바하는 휴양지인 리도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기선정류소까지 갈 작정으로 곤돌라에 몸을 실었다. 검은 곤돌라는 죽음의 자리를 연상시켰다. 관처럼 검은 칠을 하고 검은 천을 두른 의자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호사스런 좌석이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들자 아센바하는 곤돌라가 기선정류소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기선정류소로 가라고 사공에게 외쳤을 때 그는 처음으로 밀짚모자를 삐뚜로 눌러쓴 잔인한 인상의 사공을 보았다.

“리도로 가시는 거 아닙니까요?”



알아서 모시겠다는 듯한 사공의 태도가 거슬려 아센바하는 방향을 돌릴 것을 요구했지만 사공은 막무가내였다. 아센바하는 이 바다 한가운데서 저 잔인한 인상의 사나이에게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은근히 두렵기도 하여 항의를 포기하고 말았다. 리도에 도착한 후 아센바하는 사공에게 삯을 주려고 잔돈을 바꾸어 선창으로 돌아와 보니 사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에겐 면허증이 없는데 경찰의 순찰을 피해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래서 아센바하는 뜻하지 않게 공짜로 리도까지 오게 되었다.

호텔에 들어와 여장을 푼 방은 바다를 향하고 있어 전망이 좋았다. 아센바하는 창을 열고 흐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센바하는 호텔 휴게실로 내려갔다. 여러 나라에서 온 가지각색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가정교사처럼 보이는 부인과 함께 앉아 있는 폴란드 아이들의 모습이 유독 아센바하의 시선을 끌었다. 소녀 셋과 막내로 보이는 열 네 살 가량의 사내아이였다. 무엇보다도 아센바하는 이 소년의 빛나는 아름다움에 경탄했다. 창백한 얼굴, 품위 있는 용모, 죽 뻗은 콧날, 그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조각상과 같이 아름다웠다. 게다가 누이들 셋은 수녀 같이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소년의 차림새에는 자유분방함이 깃들여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자 이 아이들의 어머니가 나타나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때 소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센바하의 시선이 소년의 것과 마주쳤는데 그 순간 아센바하는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음날도 날씨는 좋지 않았다. 흙빛 하늘과 잿빛 바다, 거기에 썩은 냄새까지 밀려오는 듯했다. 불쾌해진 아센바하는 어차피 짐도 다 풀지 않은 터이니 곧바로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몇 년 전에도 베니스에 왔다가 날씨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돌아간 좋지 않은 경험이 있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가서 아센바하는 아름다운 폴란드 소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꽤 가까운 거리에서 소년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눈썹에는 기품이 서려 있고 귀를 덮은 고수머리는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센바하는 소년의 거룩하리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혼을 빼앗긴 듯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아센바하는 이렇게 결심했다. 바다와 해안은 나를 환영하지 않지만, 네가 머물고 있는 한 나도 여기 있겠어!

아센바하는 바닷가로 나가 방갈로 하나를 세내어 그 앞에 의자를 펼쳐놓고 쉬었다. 많은 사람들이 근심 없는 얼굴로 마음껏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시선은 먼 바다를 향했다. 자주 접할 순 없었지만 그는 바다를 사랑했다.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완전한 세계였다. 그 완전함에 의지하여 휴식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는 바다를 동경했다. 이런 상념에 잡혀 있을 때 호텔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소년이 그의 앞을 불쑥 지나갔다.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던 아이들은 소년이 다가가자 이름을 부르며 환영하였다. 그때 아센바하는 소년의 이름이 탓지오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에게 온 편지들에 회신을 보내고 원고를 쓰는 일에 손을 대어보지만 아센바하는 계속해서 그 아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소년은 아이들과 어울려 잘 놀고 있는데 그 중에 야슈라는 이름의 덩치 큰 소년이 탓지오와 가장 친한 것 같았다. 모래성이 완성되자 탓지오는 야슈와 어깨동무를 하며 물가를 걸어갔다. 아센바하는 야슈가 아름다운 소년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탓지오는 물로 들어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방갈로 쪽에서 폴란드 인 가족의 일행인 부인들이 아이가 걱정되는 듯 “탓지우-” “탓지우-” 하며 이름을 길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달콤하기도 하고 야생적인 느낌도 있는 그런 울림이었다. 물에서 나와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달려오는 아이는 마치 하늘과 바다의 심연에서 솟아오른 젊은 신처럼 아름다웠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센바하는 태고의 신화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듯 황홀해졌다. 그는 눈을 감고 이 곳에 계속 머물러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정오가 지나 객실로 올라간 아센바하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회색 머리털에다 지쳐서 예민해진 얼굴이었다. 그는 문득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명성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와 점심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탓지오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 속에서 아센바하는 탓지오를 아주 가까이 뜯어볼 수 있었다. 사지를 묶어놓는 그 아름다움에 다시 탄복하면서, 한편으로는 탓지오의 치아가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것도 관찰할 수 있었다. ‘오래 살 것 같지 않은데’, 이렇게 아이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왠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퍼졌다.

오후에는 베니스로 들어갔다. 그러나 도시의 탁한 공기로 인해 아센바하의 기분은 몹시 언짢아졌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 기름 냄새, 사람들의 향수 냄새, 운하에서 피어오르는 악취까지 숨통이 멎을 지경이었다. 밀리고 부대끼는 인파에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열풍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하고 열도 좀 오르는 듯 했다. 아센바하는 이렇게 건강에 좋지 않은 날씨에 베니스에 머무는 것은 엄청나게 해로운 일이라고 판단했다. 베니스가 아니라 다른 곳에도 바다를 즐길 수 있는 해안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는 마음을 다시 바꾸어 베니스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지배인에게 내일 체크아웃 하겠다고 통고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아센바하의 마음에는 떠나기로 한 전날의 결심이 성급한 것은 아니었나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기에 다시 바꿀 수는 없었다.

아센바하는 아침 일찍 자기를 태우러 온 택시기사에게 짐만 먼저 보냈다. 시간 여유는 빠듯했지만 그래도 아침식사를 하면서 탓지오를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탓지오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던지고는 호텔을 나섰다. 운하를 통과하며 베니스를 다시 찬찬히 바라보자니 아센바하는 자신의 성급한 결정이 절실하게 후회가 되었고 알 수 없는 고통에 가슴이 메었다. 왠지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베니스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서운함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후회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에서 내려 기차시간까지 역에 닿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다급하게 역구내로 뛰어 들어간 아센바하는 우선 호텔에서 나온 직원을 찾아 짐이 제대로 부쳐졌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호텔 직원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고 아센바하는 자기 짐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탁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황당한 실수라니!



그런데 그 순간 아센바하의 마음속에는 믿기 어려운 환희가 피어올랐다. 호텔 직원은 짐을 찾아보겠다고 허둥대었으나 짐을 실은 기차는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아센바하는 짐을 찾기 전에는 절대로 떠날 수 없으니 짐이 되돌아올 때까지 리도의 호텔로 돌아가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아센바하는 다시 리도로 오는 배를 타게 되었다. 이 우연은 무엇을 뜻하는가! 리도를 떠나올 때 느꼈던 서운함은 사라지고 자신이 맞이한 불운에 대한 기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는 만사가 잘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벅찼다.

호텔로 돌아온 아센바하는 되돌아온 것이 일단 만족스럽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도대체 자신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열린 창가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저 아래서 그 아름다운 소년 탓지오가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탓지오, 그래 네가 여기 있었지!” 그는 비로소 자신이 떠나려고 했을 때 괴로웠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탓지오 때문이었다는 것을!



낙원의 나날

극히 ‘적절했던’ 불운에 의해 리도로 돌아온 아센바하는 비로소 남국의 바닷가가 주는 매력, 베니스라는 도시가 주는 친밀한 기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안일과 향락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베니스라는 도시와 리도의 해안만큼은 그의 의욕을 무디게 하고 마냥 행복하게 했다. 아침나절에는 바닷가에 나가 남국 바다의 푸름을 바라보며 즐기고 밤에는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즐거움은 무엇보다도 탓지오에게 있었다. 신경 쓸 일도 없이 그는 소년의 우아한 모습을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었다. 그는 만족과 희열로 충만했고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다.

수영복을 입은 채 모래장난을 하는 탓지오, 물에서 헤엄치는 탓지오,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달려가는 탓지오, 어디 하나 결함이 없는 젊음에 찬 소년의 육체...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목소리조차 아센바하의 귀에는 음악처럼 들렸다. 아센바하는 탓지오에게서 인간의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에 점점 깊이 도취되었다. 아울러 창작의욕도 활활 불붙기 시작했다.

어느날 아침에는 아름다운 소년을 뒤따라간 적도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에게 가까이 다다랐을 때 아센바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말 거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게 안일의 나날을 보내면서 아센바하의 마음에는 은근한 걱정도 피어올랐는데, 그것은 저 폴란드인 가족이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족이 온지 얼마 안되었다는 호텔 이발사의 말을 듣고 안심할 수 있었다.

아센바하의 일과는 탓지오와 함께 시작하여 탓지오와 함께 끝났다. 오전엔 바닷가에서, 또 오후엔 시내에서 공원 벤치에 앉아 탓지오를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아센바하와 탓지오 사이에는 일종의 필연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 같기도 했다. 탓지오도 아센바하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것일까? 아침에 소년이 바닷가에 나오면 특별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 꼭 아센바하의 앞으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아센바하는 일부러 딴전을 피우며 소년을 보지 않는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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