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보가 사람들 7: 1914년 여름 1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 고전문학
티보가 사람들 7: 1914년 여름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제1장제네바 대성당 인근 건물의 꼭대기 층, 한때는 주방이었던 그 비좁은 화실 안으로 6월의 무자비한 태양 광선이 유리창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호수도 알프스도 보이지 않는 그 무더운 공간 속에서, 옥스퍼드 출신의 영국인 화가 패터슨은 상체를 드러낸 채 땀을 흘리며 작업에 몰두했다. 북유럽 사내 특유의 하얀 피부 아래로 근육이 미세하게 실룩거렸고, 그는 마치 까치처럼 강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시선으로 모델인 자크의 이마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모델 노릇을 하느라 목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자크는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할 기사 작업을 떠올리며 원망 섞인 눈길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가난 탓에 모델을 고용할 돈이 없어 정물화에만 매달리던 친구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포즈를 취해주기 시작한 것이 벌써 아홉째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패터슨은 자크가 가져온 담배 세 대를 순식간에 피워버리고는, 전날부터 굶주린 속을 달래며 오직 캔버스 위의 빛에만 집착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찌그러진 물감 튜브를 보며 화방 주인 게랭에게 진 빚을 걱정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오직 표현의 난제들로 가득했다.
긴장이 극도에 달한 순간, 패터슨은 도약하려는 다이버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돌연 펜싱 선수처럼 팔을 내뻗어 캔버스의 한 지점에 정확한 터치를 가했다. 그러고는 성난 고양이처럼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나더니,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눈썹과 관자놀이, 그리고 이마에 돋아난 머리카락에 깃든 힘이 정말 대단해, 친구!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야….” 패터슨은 팔레트와 붓을 내팽개치고 매트리스 위로 몸을 던졌다. “오늘 아침은 여기까지 하지!” 비로소 구속에서 풀려난 자크가 몸을 흔들며 다가와 캔버스를 살폈다. “내가 좀 봐도 될까? 오, 세상에! 오늘은 진도가 정말 많이 나갔는걸!”
자크는 비스듬히 앉은 모습으로 캔버스 위에 구현되어 있었다. 초상화는 무릎 부근에서 멈추었고, 왼쪽 어깨는 원근법에 따라 뒤로 물러난 반면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는 힘차게 앞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허벅지 위에 넓게 펼쳐진 근육질의 손은 캔버스 하단에서 선명하고 생동감 넘치는 빛의 얼룩을 만들어냈다. 머리는 강렬한 빛을 받고 있었으나, 무거운 머리카락과 이마의 무게에 이끌린 듯 어깨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빛은 왼쪽에서 쏟아져 얼굴의 절반을 어둠 속에 가두었지만, 고개의 기울기 덕분에 이마 전체는 밝게 빛났다. 붉은 광택이 도는 어두운 머리칼이 이마를 가로지르며 살결의 광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패터슨은 풀처럼 뻣뻣하고 빽빽하게 돋아난 머리카락의 질감을 탁월하게 묘사해냈다. 벌어진 흰 칼라 위로 억센 턱이 놓였고, 입매에 서린 비애의 주름은 입술의 불분명한 윤곽을 보완하며 얼굴에 사나운 엄격함과 고귀함을 부여했다. 고뇌 어린 눈썹 아래, 명암 속에 숨은 시선은 솔직하고 의지가 넘쳤으나 실제 자크와는 달리 지나치게 대담하고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패터슨은 이마와 어깨, 턱뼈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중한 힘은 포착해냈으나, 자크의 유동적인 시선 속에 번갈아 나타나는 사색과 슬픔, 그리고 대담함의 미묘한 결을 포착하는 데에는 절망하고 있었다.
“내일도 올 거지, 그렇지?” “그래야 한다면.” 자크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패터슨은 침대 위에 걸린 레인코트 주머니를 뒤지더니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미퇴르그가 경계하고 있군. 이제 주머니에 담배를 절대 남겨두지 않아!” 웃음을 터뜨릴 때면 패터슨은 5, 6년 전 청교도 가문을 등지고 옥스퍼드에서 도망쳐 스위스로 넘어왔던 그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쉽네, 친구! 일요일인데 자네에게 기꺼이 담배 한 대 권하고 싶었건만!” 그는 음식보다 담배를, 담배보다 물감 떨어지는 것을 더 견디지 못했으나, 사실 제네바에서는 그 무엇도 아주 오랫동안 부족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기존 조직들과 연계된 가난한 젊은 혁명가들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자크 같은 지식인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며 생계를 이었고, 세계 각지에서 온 인쇄공, 제도사, 시계공들은 어렵사리 번 돈을 실업 상태인 동료들과 나누었다. 대부분은 일정한 직업 없이 허드렛일을 하며 버텼고,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곧장 일을 그만두었다. 해진 옷을 입은 학생들은 과외나 도서관 사서 업무로 연명했다. 누군가의 주머니가 채워지면 빵과 소시지, 따뜻한 커피와 담배가 모두에게 돌아갔다.
같은 호기심과 확신, 사회적 열망과 희망을 공유하는 젊은이들에게 하루 한 끼의 식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패터슨은 텅 빈 위장의 자극이 뇌에 유익한 도취감을 준다고 농담조로 말하곤 했으나, 그것은 단순한 재담 이상이었다. 절제된 식생활은 그들의 정신적 고양 상태를 유지시켰고, 광장과 카페, 하숙집, 그리고 특히 지부 사무실에서 열리는 끝없는 회합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외국 혁명가들이 가져온 소식을 나누고 교리와 경험을 대조하며 장차 도래할 미래 사회의 건설을 위해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면도용 거울 앞에 선 자크가 칼라와 넥타이를 매만지자 패터슨이 중얼거렸다. “급할 것 없잖아, 친구….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려고?” 패터슨은 침대 위에 팔을 벌린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소녀처럼 가느다란 손목과 대조되는 남자의 투박한 손, 그리고 영국인 특유의 길쭉한 발이 눈에 띄었다. 유난히 적은 머리칼은 땀에 젖어 천장의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받아 오래된 은도금처럼 번뜩였다. 그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맑아 오히려 감정을 읽기 어려웠으나, 그 안에는 천진함과 고뇌가 늘 위태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할 말이 정말 많았는데, 어제 저녁에 지부 사무실에서 너무 일찍 가버리더군.” 패터슨이 나른하게 말을 건넸다. 자크는 피곤해서 그랬다며, 늘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뿐이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패터슨은 고개를 저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야, 어제는 정말 짜릿했어. 파일럿(그룹의 수장 메네스트렐의 별칭)이 결국 브아소니스를 호되게 쏘아붙였거든. 단 몇 마디였지만, 뭐랄까, 소름이 돋는 말이었지!”
패터슨의 어조에는 메네스트렐을 향한 은근한 반감이 서려 있었다. 자크는 패터슨이 메네스트렐에 대해 품고 있는 그 기묘하고도 증오 섞인 경외심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크에게 메네스트렐은 단순한 동료를 넘어선, 전적인 신뢰와 경배를 바치는 스승이었기에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물었다. “무슨 말을 했는데? 그가 뭐라고 하던가?” 패터슨은 즉답 대신 천장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웠어. 자네처럼 많은 이들이 떠난 뒤였지. 그는 브아소니스의 말을 듣지 않는 척하더니, 늘 발치에 앉아 있는 알프레다 쪽으로 몸을 숙이고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은 채 재빨리 말했네. 대강 이런 내용이었어. ‘니체는 신이라는 개념을 삭제했지. 그리고 그 자리에 인간이라는 개념을 세웠어.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단지 첫 단계일 뿐이지. 무신론은 이제 훨씬 더 멀리 나아가야 해.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삭제해야 한다는 거지.’
자크가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며 반문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가?” “기다려 보게. 브아소니스가 그럼 무엇으로 대체하느냐고 물었더니, 파일럿이 그 특유의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으며 아주 크게 선언했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이야.” 자크 역시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더위와 모델 일로 지친 그는 어서 작업실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 패터슨과 형이상학적인 논쟁을 벌일 기운이 없었다. 그는 그저 메네스트렐은 부정할 수 없이 고결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고 짧게 덧붙였다.
패터슨은 팔꿈치를 괴고 일어나 자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아주 끔찍한 일 아닌가?” 자크가 침묵하자 패터슨은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는 메네스트렐이 어떤 끔찍한 길을 거쳐왔기에 그토록 메마른 이성을 갖게 되었는지 의문을 표하더니, 이내 어조를 바꾸어 물었다. “자네는 그 둘을 잘 알지 않나. 알프레다가 과연 그 파일럿 곁에서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자크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은 질문에 당혹감을 느꼈다. 질문은 타당했으나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자크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모호한 태도로 대답을 회피했다. 패터슨은 자크의 침묵에 개의치 않고 저녁에 있을 자노트의 강연에 올 것인지 물었다. 자크는 《파날》 지에 보낼 원고를 마쳐야 한다며, 일이 잘 풀리면 지부 사무실에 들르겠노라 말하고 모자를 집어 들었다. 문을 열고 나서는 자크를 향해 패터슨이 다시금 알프레다의 행복에 대해 캐물었다. 자크는 찰나의 망설임 끝에 뒤를 돌아보았다. “글쎄, 모르겠군. 하지만 그녀라고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나?”
제2장오후 한 시 반이 넘은 시각이었다. 제네바는 일요일 점심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태양은 부르 드 푸르 광장 위로 수직으로 내리쬐고 있었고, 자크는 텅 빈 광장을 가로질러 빠르게 걸었다. 분수의 물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지면의 열기가 눈을 찔렀으나, 퐁텐 거리의 좁은 상점가로 접어들자 서늘한 그늘이 나타났다.
자크는 《파날 스위스》의 ‘도서 비평’란에 기고할 프리치의 신간 서평을 구상했다. 원고의 삼분의 이 가량은 이미 완성되었으나 서두는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했다. 그는 이틀 전 도서관에서 옮겨 적은 라마르틴의 문장을 떠올렸다. “두 종류의 애국심이 있다. 하나는 서로를 분열시키려는 정부에 의해 우매해진 민중이 서로를 향해 품는 증오와 편견, 저속한 반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민중이 공유하는 모든 진실과 권리로 구성된다.” 사상은 정당하고 관대했으나 문체는 1848년의 낡은 어법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것이 여전히 우리들의 언어가 아닌가?’ 자크는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파일럿의 언어만큼은 예외였다. 메네스트렐을 생각하자 자연스레 “알프레다가 과연 행복할까?”라고 묻던 패터슨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크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여성의 마음이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로잔을 떠난 뒤 거의 잊고 지냈던 소피아 카멘진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크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제네바를 찾아왔으나 결국 발길을 끊었다. 자크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특별한 애착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기묘한 존재였던 그녀를 떠나보낸 뒤 누구로도 그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자크는 발걸음을 재촉해 론강 너머 그르뉘 광장에 위치한 숙소로 향했다. 가난한 이들의 골목에 자리 잡은 호텔 ‘뒤 글로브’는 낡고 초라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낮은 문 위에는 밤마다 불을 밝히는 유리로 된 지구본이 매달려 있었다. 이곳은 매춘부를 받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사회주의 당원으로 활동해 온 베르첼리니 형제가 운영하며 혁명가들에게만 방을 내주었다. 그들은 돈이 없다고 투숙객을 쫓아내지는 않았으나, 밀고자로 의심되는 자들은 가차 없이 내보내곤 했다.
자크의 방은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비좁고 깨끗한 공간이었다. 불행히도 유일한 창문이 복도 쪽으로 나 있어 소음과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방해받지 않고 일하기 위해서는 창을 닫고 전등을 켜야만 했다. 가구라고는 좁은 침대와 옷장, 탁자와 의자가 전부였다. 탁자는 늘 잡동사니로 가득했기에, 자크는 보통 침대 위에 앉아 무릎 위에 지도책을 책상 삼아 올려놓고 글을 쓰곤 했다.
자크가 방에서 일에 몰두한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문을 두드리는 세 번의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머리칼이 엉클어진 알비노 청년 반헤드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로잔에서 자크와 함께 제네바로 넘어와 이 호텔에 머물고 있는 인물로, 자크를 여전히 예전의 필명인 볼티라고 불렀다. 반헤드는 카페 란돌트에서 모니에를 만났다며 파일럿의 전갈을 전했다. 파일럿이 다섯 시까지 집에서 기다릴 것이며, 이번 주 《파날》 지에는 자크가 쓴 기사가 실리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자크는 마감의 압박에서 벗어난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당장 손에 쥐지 못할 이십오 프랑에 대해 걱정이 되었다.
반헤드는 자크의 침대맡으로 다가와 집필 중이던 프리치의 신간 『국제주의』의 서평에 관해 물었다. 자크는 책의 내용과 국제주의 자체에 대한 자신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털어놓았다. “프리치는 종파주의자야. 게다가 그는 국가와 정부, 그리고 조국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들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옳은 말을 할 때조차 생각이 그르다는 인상을 주지.” 자크는 망설이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프리치 같은 이들에게 국제주의적 이상은 조국이라는 관념의 말살을 우선적으로 전제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필요하고 필연적인 일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군.”
반헤드는 인형 같은 가느다란 손을 들어 올리며 혁명이란 전 세계 노동자 계급에 의해 동시에 실현되어야 하는 국제적인 작업이기에 애국심의 제거는 필수적이라고 단호히 대답했다. 그는 19세기가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감정을 고취함으로써 국가주의의 원칙을 강화했고, 결국 민족 간의 증오를 심어 전쟁의 씨앗을 뿌렸다고 주장했다.
자크는 고집스럽게 머리를 흔드는 반헤드의 태도에 반박하는 입장을 표했다. “동감이야. 하지만 조국의 개념을 왜곡한 것은 애국자가 아니라 19세기의 민족주의자들이었어. 그들은 정당하고 무해한 감정적 애착을 공격적인 숭배와 광신으로 대체해 버렸지. 그런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프리치처럼 조국에 대한 감정 자체를 거부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의 본연적인 현실인데 말이야.”
자크는 진정한 혁명가라면 모든 유대를 끊어내고 자신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반헤드의 말에 경고를 덧붙였다. 혁명가라는 이상향에 매몰되어 자연과 현실이 부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논지였다. “인간은 기후와 기질, 그리고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조국의 문제는 결국 언어의 문제일지도 몰라. 인간은 어디에 있든 자기 나라의 단어와 문법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제네바에 모인 우리 친구들을 봐. 고향을 버렸다고 믿는 그들이 본능적으로 이탈리아인, 오스트리아인, 러시아인들끼리 모여 작은 조국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반헤드 자네 역시 벨기에 동료들과 그러고 있듯이 말이야.”
알비노 청년 반헤드는 움찔했다. 밤새의 눈동자 같은 그의 눈이 자크를 향해 책망하는 듯한 빛을 던지고는 다시 속눈썹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신체적 결함은 그의 태도에 겸손함을 더했으나, 침묵은 사고보다 견고한 그의 신념을 보호하는 방패였다. 자크도, ‘파일럿’인 메네스트렐조차도 반헤드에게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자크가 말을 이었다. “인간은 국외로 이주할 수는 있어도 자신에게서 조국 자체를 도려낼 수는 없네. 그리고 그런 애국심은 국제주의 혁명가라는 우리의 이상과 근본적으로 충돌하지 않아! 그래서 나는 프리치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이자 힘을 상징하는 것들을 공격하는 것이 무모한 일은 아닌지 의문이 드네. 미래의 인류에게서 그것을 박탈하는 것이 해로운 일은 아닐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망설이는 어조로 덧붙였다. “내 생각이 그러하지만 감히 글로 옮기지는 못하겠군. 오해를 피하려면 책 한 권을 써야 할 테니 말이야.”
그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가 문득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해. 인간에게서 조국을 없애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인간은 적응하는 존재니, 어쩌면 그런 상태조차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르지.” 반헤드가 탁자에서 물러나 자크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천사 같은 기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만큼의 보상을 얻게 될 거야!” 자크는 미소 지었다. 그는 반헤드의 그런 순수한 열정을 아꼈다. 반헤드는 작별 인사를 건네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기사를 마감해야 할 의무는 사라졌지만 자크는 오히려 활기차게 일에 매달렸다. 네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을 때 메네스트렐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갑작스러운 허기를 느꼈다. 시내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그는 서랍 깊숙이 있던 초콜릿 가루를 꺼냈다. 전날 채워둔 알코올 램프에 물을 끓여 뜨거운 초콜릿을 입을 데어가며 마신 자크는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