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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데케루 2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 고전문학


테레즈 데케루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제7장


베르나르는 어둠 속에서 테레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건장한 체격을 과시하며 빈혈 진단을 믿을 수 없어 했고, 파울러 용액 치료법으로 식욕을 되찾는 것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한테는 아무 문제 없어! 내 체격에 빈혈이라니 말이 돼?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라더군. 역시 겉만 봐선 모르는 거야. 이제 치료 받아야 하는데… 파울러 요법이라는 거야. 비소 성분이 들어있지. 식욕만 되찾으면 그만이야.”

테레즈는 처음에는 짜증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베르나르가 아닌 다른 세계, 즉 장 아제베도가 말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아실현의 세계’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장은 안에게 정중한 이별 편지를 쓰기로 동의했다. 베르나르는 그 소식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아제베도 같은 부류가 안 드 라 트라브와의 결혼을 마다할 리 없다며, 그저 승산이 없으니 발을 빼는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놈은 가망이 없다는 걸 아는 거야. 그런 족속들은 질 게 뻔한 게임은 안 하거든. 당신은 아직도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군.”

장이 떠난 후 테레즈에게 남은 것은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기억뿐이었다. 장은 이곳 랑드 지방의 사람들이 두꺼운 얼음장 밑에 갇힌 영혼들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테레즈에게서 진실에 대한 갈증을 보았지만, 그녀가 이 숨 막히는 침묵을 뚫고 나올 수 있을지 의심했다. 장이 떠나자 아르즐루즈의 침묵은 다시금 테레즈를 덮쳐왔다. 베르나르가 난롯가에서 파울러 용액의 방울을 세며 “이게 바로 건강이지”라고 만족스러워할 때, 테레즈는 끝없는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질식감을 느꼈다.

장 아제베도는 파리로 떠나며 안에게 아주 차갑고 단호한 이별 편지를 남겼다. 안은 그 편지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안을 미치게 만든 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고 자신의 사랑을 지지해 줄 거라고 믿었던 올케 테레즈가 사실은 시댁 식구들과 한패가 되어 장을 떠나보내는 데 일조했다는 진실을 눈치챈 것이었다.

절망과 배신감에 미쳐버린 안은 부모님의 감시를 따돌리고 몰래 밤 기차를 타고 돌아와 그날 밤 칠흑같이 어두운 랑드 지방의 소나무 숲과 진흙탕 길을 밤새도록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지만 이 부르주아 가문 사람들은 안의 안전보다 딸이 밤에 타지에서 온 남자 때문에 가출했다는 스캔들이 동네에 퍼질까 봐 끔찍하게 두려워하며 비밀리에 그녀를 찾아 헤맸다. 다음 날, 흙투성이에 옷이 다 찢어지고 넋이 나간 퀭한 눈으로 돌아온 안은 테레즈를 비난했다.

“언니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어. 해방된 척하지만 결혼하더니 금세 ‘가문’의 일원이 되어버렸군. 날 구한답시고 배신한 거지? 설명 따윈 필요 없어.”

안은 장을 만나겠다며 빗속을 뚫고 빌메자의 빈집으로 달려갔다. 테레즈는 그 뒤를 쫓았다.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다 지쳐 쓰러진 안을 테레즈가 일으켜 세웠을 때, 안은 내일 파리로 가서 그를 찾겠다며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베르나르가 여동생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어 2층 방에 가두고 빗장을 질렀다.

테레즈는 그때 그 장면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탈진한 여동생을 짐승 다루듯 끌고 간 그 남자가, 이제 곧 테레즈 자신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한 치도 망설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테레즈가 준비하고 있는 그 어떤 절박한 변명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판결을 내렸다. 테레즈의 운명은 영원히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제8장


안 드 라 트라브가 패배감을 안고 돌아온 후, 테레즈는 출산 직전까지 아르즐루즈의 적막 속에 머물렀다. 장 아제베도에게 보낸 편지는 끝내 답장이 없었다. 그는 아마 임신한 시골 여자 따위는 잊었으리라. 테레즈는 그가 찬양하던 책들을 보르도에서 구해 읽으며 그의 세계에 닿으려 애썼지만, 그 난해한 문장들은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만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시댁 식구들은 테레즈를 단지 대를 이을 아이를 담고 있는 ‘성스러운 그릇’으로만 대우했다.

베르나르는 그 끔찍한 억양으로 간섭하곤 했다. “수프 좀 더 들어. 생선은 먹지 마라. 오늘은 너무 많이 걸었어.” 그는 아내가 아닌 태아의 안위를 걱정했고, 테레즈는 자신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지워진 채 그저 가문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된 기분을 느꼈다.

12월의 폭우가 쏟아지자 가족은 생 클레르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 역시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클라라 고모만이 궂은 날씨를 뚫고 찾아와 테레즈가 처녀 시절 좋아했던 간식들을 챙겨주었다. 식사 자리에서 마주친 안은 생기를 잃고 무너져 있었다. 드길렘과의 결혼 이야기가 오가도 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장의 판단대로 그녀는 너무나 쉽게 길들여졌다. 베르나르는 다시 식전주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광장을 오가는 젊은 사제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 사람은 우리랑 안 맞아. 신심이 부족해.” 테레즈는 고립된 채 책에 파묻혀 지내는 그 사제에게서 자신과 닮은 비극적인 고독을 감지했다. 어쩌면 그라면 내 영혼의 혼란을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에게 다가가는 것은 곧 ‘개종’이라는 소란을 일으킬 터였기에, 테레즈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 테레즈는 삶이 진정으로 견딜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아무런 불화도 없었고 그녀는 시부모에게 베르나르보다 더 순종적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그들과 테레즈 사이에는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이 전무했다. 같은 단어를 써도 서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테레즈가 어쩌다 진심을 말하면, 시어머니는 “못 들은 척해라. 쟤는 원래 엉뚱한 소릴 하잖니”라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침묵과 오해 속에서, 죽음을 향한 길은 이미 열리고 있었다.

테레즈가 딸 마리를 자신과 닮았다고 하는 말에 질색하는 것을 시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테레즈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그 작은 살덩어리와 어떤 공통점도 갖기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모성애가 부족하다며 수군거렸지만, 안 드 라 트라브만은 아이를 돌보며 다시 생기를 찾았다. 안은 테레즈가 질투할까 봐 조심스러워했으나, 정작 테레즈는 딸에게서조차, 아니 세상 모든 것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인간도 사물도 신기루처럼 희미했지만, 오직 하나 베르나르만이 끔찍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의 비대한 몸집, 콧소리 섞인 목소리, 독선적인 말투만이 선명했다. 성체 축일 행렬이 지나갈 때도 테레즈는 덧문 틈으로 남편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쫓았다. 텅 빈 거리에서 고독해 보이는 사제 뒤로, 베르나르는 언제나처럼 의무를 다한다는 거만한 태도로 걷고 있었다.

가뭄이 이어지자 베르나르는 산불 공포에 시달렸다. “바람이 북쪽에서 불었으면 발리작의 소나무들은 끝장이었을 거야.” 테레즈는 차라리 숲이 불타오르는 환상을 품기도 했지만, 그녀의 증오는 소나무를 향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생각은 곧 지워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저지른 행위를 직면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날은 마노 지역에 큰 불이 난 날이었다. 점심 식사 중에 화재 소식으로 소란스러운 틈을 타, 베르나르는 하인 발리옹의 보고를 들으며 무심코 파울러 비소 용액을 물에 탔다. 그는 자신이 평소의 두 배를 따르는 것도 모른 채 약을 단숨에 삼켰다. 더위와 권태에 절어 있던 테레즈는 그 광경을 빤히 보고도 입을 다물었다. 가족들이 모두 자리를 뜬 식탁에서 그녀는 무심하게 아몬드를 까먹었다. 이윽고 돌아온 베르나르가 물었다. “내가 약을 먹었던가?”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다시 잔에 약을 따르기 시작했다. 테레즈는 그때도 침묵했다. 그 순간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페드메 의사가 구토와 복통에 시달리는 베르나르를 진찰할 때도 테레즈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낮에 있었던 일을 실수인 척 털어놓을 기회는 충분했다. “불이 나서 정신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이가 약을 두 번 먹은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점심 식사 때의 우연한 방관은 이제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의식적인 행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의사가 떠난 뒤 잠든 남편을 내려다보며 테레즈는 생각했다. ‘그것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어. 맹장염이나 위장염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이틀 뒤 베르나르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녀는 확신했다. ‘그것 때문이 분명해.’

테레즈는 확신하고 싶었다. 그것은 거창한 유혹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그저 확인하고 싶은 위험한 호기심 따위였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딱 한 번만, 확실히 하기 위해서야…. 그 약 때문에 그이가 아팠던 건지 알게 될 거야. 딱 한 번만, 그 이상은 안 돼.”

기차가 생 클레르 역을 지날 때 테레즈의 자아비판은 끝났다. 이미 그녀는 뛰어들었고, 검은 물이 그녀의 머리 위로 닫혀버렸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살인이었다. 베르나르의 병세가 재발했고, 테레즈는 밤낮으로 그를 간호했다. 그녀가 너무나 쇠약해 보여 무엇도 삼킬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베르나르는 도리어 그녀에게 파울러 용액 치료를 권했고, 덕분에 그녀는 페드메 의사에게서 처방전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의사는 베르나르가 토해낸 초록색 액체와, 고열 없는 격렬한 맥박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독감이라 진단할 뿐이었다.

8월의 위기를 넘긴 베르나르는 아르즐루즈로 가서 요양했다. 테레즈는 류머티즘으로 앓아누운 클라라 고모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분주히 움직였다. 그녀는 어둠과 연기 속을 질주하는 짐승처럼,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터널을 빠져나가려 애썼다.

12월 초, 베르나르가 다시 차가운 몸으로 쓰러졌다. 보르도에서 온 전문의와 페드메 의사는 처방전이 위조되었음을 발견했다. 누군가 파울러 용액과 클로로포름, 아코니틴 같은 독약들을 처방전에 덧써 넣었던 것이다. 베르나르는 급히 보르도의 요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건졌다. 홀로 아르즐루즈에 남은 테레즈는 사냥개들에게 포위된 짐승처럼 거대한 파멸이 덮쳐옴을 느꼈다.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라로크가 찾아온 목적은 단 하나, 이 끔찍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딸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종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막대한 노력을 들여 페드메 의사가 고소를 취하하도록 모든 손을 써둔 상태였다. 법적인 위협은 어떻게든 막아냈으니, 이제 세상과 경찰을 납득시킬 만한 그럴싸한 해명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병석에 누운 클라라 고모의 침상 곁에서, 라로크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딸을 다그쳤다. 그러나 테레즈는 아버지의 다급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미리 준비해 둔 거짓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길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어요. 제가 약국에 가는 길이라고 하니, 자기 처방전도 함께 부탁한다고 했어요……. 나중에 약을 찾으러 온다고 했지만 그 사람은 이름도 주소도 말하지 않았어요.”

너무나 터무니없고 얄팍한 변명에 아버지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절박하게 소리쳤다.

“제발 다른 생각을 좀 해내라, 테레즈! 신을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라도! 이 한심한 것아, 제발 다른 핑계를 대란 말이다.”

고성이 오가자, 침상에 누워 있던 클라라 고모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늙은 여인은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신음했고, 어떻게든 조카딸을 질책으로부터 보호하려 애썼다. 하지만 테레즈는 고모의 애처로운 몸짓이나 아버지의 절규에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주일학교에서 교리 문답을 기계적으로 외우는 소녀처럼, 감정이 텅 빈 목소리로 똑같은 말만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길에서 만난 남자였어요. 너무 어두워서,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제9장


마침내 생 클레르였다. 마차에서 내리는 테레즈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은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그 안에서 그녀가 공들여 쌓아 올렸던 모든 이야기는 무너져 내렸다. 준비했던 고백도, 자신을 변호할 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관심과 무기력만이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존재로부터 단절시켰다. 그것은 살아 있는 여자가 맛볼 수 있는 죽음 그 자체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웅크린 짐승 같은 농가가 들어왔다. 안이 자전거를 타며 환하게 웃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길이었다. 그녀는 말발굽 소리에 맞춰 “부질없어…. 끝이 없어…. 가망 없어….”라고 기계적으로 되뇌었다. 베르나르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두 팔을 벌려주기를, 살아 있는 육체에 기대어 울 수 있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헛된 상상이었다. 나병 환자의 상처처럼 고독이 그녀를 파고들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고,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어.”

발리옹이 고삐를 당기자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직 쇠약한 몸을 이끌고 나온 베르나르와 클라라 고모였다. 테레즈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외쳤다. “불기소 처분이에요.” 베르나르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그는 클라라 고모를 마차에 태우고 고삐를 잡았다. 귀가 어두운 고모는 상황도 모른 채 드레퓌스 사건을 들먹이며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그들이 언제나 똑같은 수작을 부린다는 둥, 그 어리석은 수다 덕분에 부부는 집으로 오는 내내 한 마디 말도 섞지 않을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고모는 테레즈에게 쉴 것을 권하며 2층으로 올라갔지만, 부부는 현관 홀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문틈으로 엿보던 고모의 눈에 비친 베르나르는 긴장한 듯 엄숙한 표정이었고, 난로 앞에서 젖은 신발을 말리는 테레즈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을 가까이서 마주하는 그 짧은 순간, 그에게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산산이 조각났다. 베르나르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는, 오직 자신 안에 갇힌 인간이었다. 낡은 마룻바닥을 삐걱거리며 서성이는 그는 오랫동안 준비한 훈계를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테레즈 역시 할 말을 찾았다.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언제나 생각지 못한 곳에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베르나르, 난 사라질 거예요. 걱정 말아요. 원한다면 당장 밤거리로 나가겠어요. 나는 숲도 어둠도 두렵지 않아요. 그것들은 나를 알고, 나도 그것들을 아니까요. 나는 새들과 멧돼지들만이 스쳐 가는 이 메마른 땅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어요. 내 추방을 받아들이겠어요. 내 딸조차 내 이름을 모르게, 가문의 눈앞에서 내가 애초에 없던 존재가 되게 해주겠어요.’

“베르나르, 내가 사라지게 해 줘요.” 테레즈의 목소리에 베르나르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막았다. “감히 의견을 내다니!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마. 당신 의무는 명령을 듣고 복종하는 것뿐이야.” 미리 준비한 원고를 꺼내 읽는 듯한 남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테레즈는 더 이상 그가 두렵지 않았다. 촌스러운 억양과 떨리는 손, 지저분한 손톱을 보며 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떠나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가문의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테레즈가 비웃으며 “너무 늦었어요! 당신은 이미 나를 위해 위증을 했으니 돌이킬 수 없어요”라고 맞서자, 그는 책상 속에 또 다른 결정적인 증거가 남아 있다고 대꾸했다. 테레즈는 전율했다. 아르즐루즈의 적막 속에서 베르나르는 자기가 오직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정의를 속였다고 거만하게 선언했다. 그는 앞으로의 감금 생활을 통보했다. 내일부터 두 사람은 데케루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되, 테레즈는 발리옹트가 가져다주는 식사를 방에서 혼자 해야 하며 숲을 제외한 다른 곳은 출입이 금지된다. 단, 세상의 눈을 속이고 불화설을 잠재우기 위해 일요일 미사와 월례 행사에는 부부가 함께 참석해야 했다.

“마리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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