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 고전문학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제1부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 여름 바닷가의 태양은 내게 한없이 관대했고, 모든 것은 달콤하기만 했다.
그 눈부신 계절, 바닷가의 햇살 아래에서 모든 것은 경쾌하고도 무절제한 행복으로 감싸였다. 아버지와의 자유로운 동행, 그리고 나를 매혹시키는 어른들의 사랑 놀음은 그해 여름 해안가의 모래처럼 부드러웠지만, 예기치 못한 불안을 품고 있었다. 나는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망설이다가 여기에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였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 자신이 줄곧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졌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켰다.
아침이면 부둣가를 거닐고, 오후엔 파라솔 아래에 책을 펼쳐놓은 채 해변을 뛰놀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우리는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해 질 녘의 붉은빛이 바다를 채우면, 나는 문득 낯선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이게 행복이라면, 혹은 어떤 꿈이라면, 그리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 같아.’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미묘한 불안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또래 소녀들이 느끼는 것과 조금 다른 종류의 감정, 자유와 방종 사이를 오가는 오묘한 위태로움 말이다.
“아버지, 저기 보세요. 저 바다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요.” 나는 열일곱 살의 가벼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발끝까지 설렘이 번지는 걸 느꼈다. 파도 소리는 마치 우리 가족의 배경음악처럼 자연스레 깔렸다. 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세실. 이곳에 온 걸 후회하지 않을 거다. 바닷바람과 태양이라면 네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을 테니.”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레이몽. 그는 내가 존경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끼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늘 매력적인 여성에게 둘러싸여 있고, 오늘처럼 태양이 뜨거운 날이면 언제나 인생을 즐기는 법을 찾았다. 아버지 곁에는 이번에도 새로운 동반자가 있었다. 엘자. 불과 몇 주 전부터 함께 지내기 시작한, 건강하고 싱그러운 금발의 여인이었다.
“세실, 여기서 지내는 동안엔 걱정 근처에도 가지 말자.” 엘자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난 그녀에게 익숙한 애칭이라도 불러주고 싶었지만, 사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밝은 태도와 환한 웃음이 싫지 않았다.
아버지와 엘자는 가끔 아이처럼 장난을 치며 서로에게 애정을 표시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싫지 않고, 되레 웃음이 났다. 어머니가 일찍 떠난 이후, 아버지는 다양한 여성들과 사귀었지만, 나는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저 “내 곁에는 자유로운, 바람처럼 쉽게 떠나고 돌아오는 아버지가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자유분방한 기질을 마음 깊숙이 닮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결점은, 열 몇 살밖에 안 되는 인생 경험을 가진 나에게는 즐거워야 할 사랑의 온갖 유희가 깊은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느 기간 동안 환멸적인 냉소를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오스카 와일드의 간결한 표현을 좋아했고 종종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풀이하곤 했었다. “죄악은 근대 사회에 있어서 유일한 색채다.” 나는 이 구절을 실행에 옮겨 본 사람처럼 하루하루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그 문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내 나이와 경험을 고려할 때 사랑은 충격적이기보다는 눈부신 것이어야 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내게 은근히 말을 건넸다. “세실, 사실 내가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오래된 친구인데… 네가 싫어하지 않았으면 해.”
나는 그가 언급하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했다. 아버지가 말하는 ‘오래된 친구’라면 아마도 안느, 세련되고 지적인, 아버지에게는 사업적 조언자이자 때로는 정신적 동반자 같은 여인이었다. 또한 죽은 엄마의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내심 그녀가 오면 이 무더운 바다 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았다. “안느 이모가 오신다면, 잘 지낼 수 있겠죠. 엘자는 어떨지 모르지만요.” 내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났다. 아버지도 알아차리고 가볍게 웃었다. “뭐, 둘 다 어른이니까 잘 지내겠지. 하지만 긴장도 좀 될 거야. 안느는… 너도 알다시피 결코 가벼운 여자는 아니니까.”
엘자는 이 대화를 다 듣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내게 다가와 물었다. “세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흐뭇하게 웃고 있니?” 나는 웃음을 꾹 참고 말해 주었다. “우리 집에 새 손님이 오실 거예요. 아마 아주 우아한 분일걸요.” 엘자는 별다른 대꾸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해변을 향해 뛰어갔다. 그 자유로운 몸짓에는 “누가 오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엿보였다. 그녀는 내게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없이 자유롭고, 순수한 쾌락을 갈망하는 존재.
그날 밤, 아버지와 함께 창문을 열어놓고 달빛을 받으며 와인을 마셨다. 나는 무심코 혼잣말을 뱉었다. “정말 낙원에 온 기분이에요. 전 여기서 한없이 머무르고 싶어요.” 아버지는 무언가 감상에 젖은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아직 어리면서 이미 인생의 달콤함을 훤히 들여다보는군. 그런데 세실, 달콤한 것 뒤엔 늘 책임이 따라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책임이라니, 지금의 나에게 그런 것이 무슨 의미일까. 열일곱 살, 여름휴가, 모래사장… 이 모든 것은 그저 가볍고 눈부시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아버지 말대로, 그 가벼움은 어쩌면 나중을 위한 경고였을지도 몰랐다. 지금껏 한 번도 진지한 고민 따위는 해보지 않았지만, 사람이란 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변화의 문턱에 서게 되는 법이니까.
“아버지, 전 책임 따위보다는 지금이 더 중요해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즐거우니까요.” 나는 바다의 짠 내음을 맡으며 부드러운 바람을 느꼈다. “그런데… 가끔 아주 작은 찰나에, 기분이 이상해져요. 불안처럼 스쳐 가는 느낌이 있어요.” 아버지는 내 두 손을 가만히 잡았다. “네게도 그런 감정이 찾아온다면, 그건 어른으로 가는 첫걸음일 거야, 세실.”
그렇게 시작된 여름이었다. 내게 모든 것을 허락해줄 것만 같았던 자유와 태양, 아버지의 끊임없는 애정, 그리고 엘자의 가벼운 웃음소리. 하지만 곧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것이고, 그 사람은 이 달콤한 조화를 다소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여름의 끝자락에, 지금 느끼는 이 즐거움이 순식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불안이 “슬픔”이란 이름으로 내게 다가올 거라는 예감이 살짝 피어올랐다.
나는 아침 햇살에 반쯤 감긴 눈을 뜨며, 반가움보다는 어딘가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아버지, 안느 이모가 오늘 도착하시겠죠?” 아버지 레이몽이 창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세실. 오늘 낮에 도착하실 거다. 안느를 잘 맞아 줘야지.” 아버지는 흡족한 듯이 말했지만, 나는 그의 표정에 긴장 같은 것이 어렴풋이 깃들어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엘자와는 전혀 다른, 우아하고 지적인 안느가 이 집에 들어서면, 우리만의 경쾌한 자유분방함이 어긋나지는 않을까 하는 예감이었다.
엘자는 거실 한복판에서 밀짚모자를 돌리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씨익 웃었다. “세실, 안느 이모라니. 왠지 무척 점잖고 예의 바른 분 같은데, 그렇지만 생각보다 재밌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장난스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안심이 되었다. 엘자는 보기에 따라 철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쾌활함 덕에 이 집안이 늘 가볍고 환하게 빛났다. “그래, 벌써부터 걱정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겠지.”
한편, 아버지는 나를 살짝 불러 다정하게 물었다. “세실, 이번에 안느가 너 공부 계획도 챙겨주고 싶어 할 거야. 넌 아직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나이니까.” 나는 그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버지, 지금은 여름인데요? 여긴 바닷가 별장이라고요.” 아버지는 웃으면서도 은근히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안느가 너한테 좋은 영향을 줄 거야. 넌 아직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딸.” 나는 속으로 투덜댔다. ‘좋은 영향이라는 게 대체 뭘까? 내 마음을 옥죄는 것은 아닐까?’
정오가 조금 지날 무렵, 안느가 현관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녀는 말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와 엘자를 차례로 안아 주었다. 내게는 눈웃음과 함께 가볍게 뺨을 맞대는 인사를 건넸다. 나는 순간, 그녀가 풍기는 세련된 향수 냄새에 살짝 기가 눌렸다. 엘자가 바닷가의 열기 같은 싱그러운 향이라면, 안느는 마치 서늘하면서도 깊은 숲의 공기를 머금은 것 같았다.
서로 안부를 나눈 뒤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안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레이몽, 당신과 세실 그리고 엘자가 이렇게 함께 지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잠깐 이 휴가를 함께 보내고 싶어졌어. 방해하진 않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그러자 아버지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방해라니, 안느. 당신이야말로 환영받는 손님이지. 특히 세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했어.” 나는 아버지의 말장난에 반박할 틈도 없이 그냥 웃음으로 넘겼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안느와 함께 집 뒤쪽의 작은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엘자와 아버지는 잠시 다른 용무가 있는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안느는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을 살짝 쓸어 넘기며, 내게 조곤조곤 질문을 던졌다. “세실, 여긴 어떠니? 매일 해수욕만 하진 않겠지?” 나는 조금의 반항심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안느 이모가 오시기 전까진 별걱정 없었어요. 아버지랑 엘자랑 신나게 놀았죠. 지금 이 기분도, 굉장히 좋아요.”
안느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눈빛이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무언가 단호한 결심이 엿보였다. “그래도 곧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해. 네 미래가 있으니까. 네가 아버지처럼 즉흥적이기만 하진 않았으면 해.” 그 말에 나는 목이 메는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경고 같았다. 그것은 지금 내 삶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유로운 공기를 조금씩 지워 나가겠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와 안느 그리고 엘자와 나는 별장 거실에 모여 술 한 잔씩을 나눠 마셨다. 그곳에는 처음으로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엘자가 편안한 의자에 기대어 한가롭게 웃는 사이, 안느는 조용히 스카프를 정리하며 대화를 이끌었다. “레이몽, 이곳에서 얼마나 더 지낼 생각이야?” “한두 달은 될 거야. 세실도 방학 중이고, 나도 이번엔 길게 쉬고 싶어서 말이지.”
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 엘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약간 지루해하는 듯했으나, 어쩌면 불편함을 애써 감추는 표정일지도 몰랐다. 안느가 도착한 뒤, 분명 이 집의 공기는 조금 달라졌다. 자칫하면 누구 하나가 다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시감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
밤이 깊어가자, 아버지와 안느는 차 한 잔을 더 나누며 무슨 이야기를 조용히 주고받았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2층으로 올라가며 소리치듯 인사를 했다. “저 먼저 올라갈게요. 내일 날 밝으면 해변에나 나가야지.” 엘자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지만, 안느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늦게까지 자지 마, 세실. 우리 내일 아침에 같이 공부 계획을 좀 세워 보자.”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왜 내 삶에 간섭하고 싶어 하는 걸까? 아버지를 내 편에서 멀어지게 만들려는 건 아닐까?’ 의심이 어지러운 머릿속을 휩쓸었다. 방에 들어선 뒤, 창문을 열어놓고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소리는 내게 순수한 해방감을 주었는데, 이제는 괜스레 마음을 어지럽히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햇빛이 날카롭게 쏟아지는 해안 별장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과 조바심이 찰랑거렸다. “아버지, 안느가 오늘은 저를 내버려둘 것 같지가 않아요.” 아버지 레이몽은 담담히 대답했다. “세실, 안느는 네게 호의를 갖고 있어. 다만 그 방법이 조금 엄격할 뿐이야. 그래도 안느를 너무 무서워하지는 말아라. 그녀가 너를 위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아버지는 나를 토닥이듯 달래려 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엘자가 옆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눈에 선글라스를 걸치고, 해변으로 곧장 나갈 듯한 옷차림이었다. “세실, 나랑 바닷가에 갈래? 오늘은 파도가 꽤 좋은걸.” 나는 엘자의 경쾌한 초대에 혹했지만,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안느가 들어섰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벌써 놀러 나갈 생각이니? 세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그 한마디에 나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엘자는 망설이다가, “그럼 난 먼저 갔다 올게. 세실, 천천히 와.” 하고는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안느는 내 손을 이끌고 작은 응접실로 갔다. 창밖의 잔잔한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안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세실, 너의 나이는 많은 걸 배울 시기야. 바캉스라 해서 너무 빈둥거리면 안 돼. 그리고 레이몽도 네가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난 그걸 도와주고 싶고.” 나는 반항심을 누르지 못하고 되물었다. “안느 이모, 왜 제 생활에 이렇게 관여하시는 거죠?” 안느는 고개를 살짝 젓고,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내 자유를 빼앗기는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모의 사랑과 제 자유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안느는 잠시 침묵하더니 답했다. “네 자유는 네 성장과 함께 가야 해. 그게 없으면 그냥 방종일 뿐이니까.” 마음 어딘가를 콕 찌르는 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안느의 기대에 따르면서도, 내가 원하는 자유를 지킬 방법이 있을까?’
해변에 도착하니, 엘자는 이미 물가에서 즐겁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의 환한 웃음은 예전과 다름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보는 내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갑자기 질투심이 일어났다. ‘엘자는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으니까. 어른이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도 그렇고… 나만 짓눌리는 기분이야.’
늦은 오후, 별장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와 안느는 이미 식탁에 차를 차려 두고 있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기류가 묘하게 달라 보였다. 마치 연인처럼 다정한 표정… 아니, 이미 그럴듯한 느낌이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이제 시작인 걸까? 아버지는 엘자가 있으면서도 안느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드는 걸까?’
저녁 식사 후, 엘자는 내게 은근슬쩍 속삭였다. “세실, 우리 아버지를 안느에게 뺏기는 건 아닐까? 왠지 둘이서 은근히 좋은 분위기더라.” 나는 괜히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자유로운 사람이야.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아. 게다가 우리 가족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엘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하하… 미안,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봐.” 나는 내심 ‘엘자도 진짜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잠시 함께 즐기는 상대 정도로 생각하는 걸까?’ 하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음이 복잡해진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유난히 끈적하게 느껴졌다. 여름밤의 공기가 달콤하면서도 답답하게 내 폐를 채웠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대로 안느에게 굴복하면서 내 자유를 반납해야 하나? 아버지도 안느 쪽으로 기울면, 이 바캉스의 즐거움은 온통 안느의 색깔로 바뀌어 버릴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