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시스 잠 시집
프랑시스 잠 지음 | 스타북스
프랑시스 잠 시집
프랑시스 잠 지음
스타북스 / 2017년 2월 / 224쪽 / 12,000원
시인은 말했다… 시인은 말했다, 그가 젊었을 때는
한 그루 장미가 장미꽃을 피우듯이 시를 꽃피웠다고.
그녀를 생각하면, 내 마음속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이 솟는 듯하다.
신께서 백합 위에 교회 향기 얹어 주고
버찌 볼엔 산호 빛깔 칠해 주듯이,
신을 믿는 마음으로 나는 그녀 얼굴에
이름할 수 없을 향기와 색깔을 발라 주고 싶다.
마른 잎 두드리는 빗방울 하나마른 잎 두드리는 빗방울 하나,
느릿느릿, 오래도록, 그 빗방울은 늘 한 장소에서
두드리고 다시 또 일념으로 두드린다…….
초췌한 이 마음을 두드리는 그대 눈물 한 방울,
느릿느릿, 오래도록, 그 괴로움은 늘 한 장소에서
시간처럼 집요하게 소리 울린다.
하지만 그 잎과 마음에는 밑 빠진 공허가 안에 들어 있기에,
나뭇잎은 빗방울을 끝없이 받아 내고 견딜 것이다.
마음도 송곳 같은 그대를 끝없이 받아 내고 견딜 것이다.
집은 장미와 말벌로 가득하리집은 장미와 말벌로 가득하리.
오후에는 저녁기도의 종소리 들려오고,
투명한 보석 빛깔 포도송이는
길게 늘어진 그늘 아래 햇볕 받아 잠든 듯하리.
거기서 너를 한없이 사랑하리! 나는 너에게
스물넷의 마음과 빈정대는 정신과 나의 자존심을,
흰 장미 송이 같은 시(時)를 모두 바치리.
하지만 나는 너를 인지할 수 없다, 너는 거가 없구나.
아는 것은 다만, 네가 살아서
나처럼 초원에 있게 된다면,
시린 개울가 꿀벌이 난무하는 짙은 녹음 아래서
우린 서로 웃음 띠며 입 맞추리라는 것뿐.
그러면 사방에선 햇살의 따가움만 느껴져 울려오리.
그러면 우리 서로 웃음을 멈추고서
남이 하지 못할 사랑을 말하려고 서로 입을 뒤섞으리.
그러면 나는 네 붉은 입술에서
황금 포도알과 붉은 장미와 말벌의 달콤함을 맛보게 되리.
광 속, 울퉁불퉁하고
- 앙드레 지드에게.광 속, 울퉁불퉁하고 단단히 다져진 땅 위에
진흙 묻고 금 간 참나무 마디들에서 꺾인
가지들을 싣고 달구지가 자고 있었다.
요란하게 붕붕대며 돌아가던 탈곡기는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는 황소들 가운데서 멈춰 서 있고,
잡동사니 조그만 조각들이 땅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때 광의 대들보 위에 있던 둥지에서,
하느님의 닭인 제비 새끼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두 소작인이 느리지만 능숙하게 다른 이들 어깨 위에
뛰어올라, 모서리를 궁글게 높인 양철 조각 하나를
못으로 천장에 붙였다. 거기에 그들은 밀짚을 채우고
떨어진 새끼 제비들을 올려놓았다.
그때 어미 제비가 겁먹은 듯, 하늘 위로
길게 선들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어미 제비는 둥지로 돌아왔다.
나는 쇠스랑과 번들거리는 보습 옆에 앉아 있었는데,
다사로운 슬픔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건 마치 내 영혼 깊숙이
재 가루가 약간 흩날리는 햇빛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너무나도 예뻐 소녀들에게 주고 싶은
새끼 돼지 여덟 마리가 나타났다.
겨우 삼 주나 될까 한 새끼돼지들이었다.
그것들은 염소들처럼 등을 곧추세우고 서로 싸우는 것이었다.
그 조그만 발들이 티격태격했다.
주름지고 축 늘어진 젖통에 빳빳한 털을 한
어미돼지가 진흙투성이로 땅에 주둥이를 쑤셔 박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여름 날, 나에겐
우리 가난한 삶이 그의 모든
존엄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앉아 있는 등 없는 의자 옆으로
슬프고 말없는, 아름다운 농부들이
어둡고 신선한 그늘 속으로 수레를 밀며 지나갔을 때,
난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의…
- 아르튀르 샤세리오에게.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의
슬픈 고가(古家)를 나는 방문했다.
조그만 마차로 간 그 여로는 쓸쓸했으나,
햇빛에 젖어 꿀처럼 다사로웠다.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우리가 따라가는 밭 옆으로 비둘기들이 날고 있었다.
늙은 말은 무척 지쳐 있었고,
내 마음은 언짢았다.
내가 찾아가고 있는 그 옛날의 사물들처럼 늙은 말.
백 년 전에 이미 죽은 그 마을의 우리 조상들.
후회 없는 눈의, 소박하고 부드러운 그 조상들.
일요일에 그들은 제일 근사한 흰 셔츠를
입고 미사에 갔었겠지.
그들이 옛날 이 먼 마을에서 살았다는 것을
나는 전해 들었었다.
그래 쐐기풀에 덮여 있는
그들의 무덤이 있을 이 고향 땅을
나는 알아볼 수 있을지 길을 떠난 것이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내 무릎 위에서
내 두 손 사이에 자고 있던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나를 태워 온 농부는
햇볕을 받고 있는 마을 광장의
얼음같이 서늘한 그늘로 몸을 피했다.
과거같이 오래된 탑 옆, 허물어져 버린 듯한
낡은 종루는 정오를 알리고 있었다.
내가 물은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이들은…… 생각이 안 나오…….
오래전, 그래요, 아주 오래전……
여든 살 먹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며칠 전에 죽었지요. 아마 그분들에 대해서는
그 할머니가 말해 줄 수 있었을 거요.
그래, 나는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문전을 돌아다녔다―.
옛날 우리 고조할아버지의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공증인도 찾았고,
본당 신부님도 찾았으나 신부님마저 알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버려진 정원들의 다 삭은 정문들 앞을 지나갔는데,
굵다란 철책을 통해 이젠 사람 없는 집들 옆으로, 묘지의 관문(棺文)처럼
오랜 먼지로 닫힌 문들 옆으로,
붉은 접시꽃들이 푸른 잔디 가운데 보였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 청사 위의 새 깃발들,
공화국을 뜻하는 모양인 금빛 글자들,
그 바보 같은 것들은 보려고 들지 않고 지나쳤다.
그렇고 말고, 내 마음속엔 옛 유물들만이 있었고,
고손(高孫)인 나는 나를 낳아 주신
사랑하는 조상들을 추억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아주 오래되고 아주 훌륭한
어느 집의 장려한 철책 문으로 들어갔다.
마음씨 좋은 미소의 노부인과,
지팡이 짚은 허리 굽은 노신사와,
그 훌륭하고 고귀한 시적(詩的) 집안의 아들과,
철책 옆의 덤불 나무들을 보았다.
노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아, 잠 씨! 이 가문의 한 분이군요.
그래요, 옛날, 잠 씨네들은 이 마을에서 살았죠.
나이 많은 공증인이 한 분 있었는데,
아들들이 모험을 찾아 떠나들 가 버렸죠…….
우리 집안이 허물어져 가는 잠 씨네 집을 샀답니다.
그들은 부엌에서 녹슨 열쇠를 가지고
오래된 서글픈 성당에 맞닿게 세워진,
장식 못을 박은 서글픈 대문으로 나를 안내했다.
아마 그것 역시 녹이 몽땅 슨 쇠망치로 못을 박았을 그 문으로.
벽에 붙은 서글픈 창들 역시 주검과 세월의 먼지로 닫혀 있었다.
그들은 잘 안 열리는 그 문을 삐걱대며 열었고,
나는 삭은 서글픈 층계를 올라갔다.
바로 그리로 그들도 오르내렸으리라,
이젠 아마 천국에서 쉬고 있을 우리 조상들.
집 안에는 부서진 석고상 위에, 벽 위에,
그리고 마치 화염인 양 긴 세월이 그을어 놓은 문들 위에,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여 모두가 시커멓게,
그건 또한 초상(初喪)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길 보아요……. 이게 사무실이었답니다……사무실……사무실…….
커다란 침묵에 차 있는 허물어져 가는 그 집.
나는 하늘의 죽은 우리 조상들이
내가 찾아온 그 슬픈 집 안에서
말소리를 그치는 것을 듣는 듯했다.
다사로운 슬픔을 느끼며 나는
그 친절하고 훌륭한 집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거기를 떠나갔다.
드넓게 퍼지는 햇살 속에서,
거기에서 먼 작은 도시로 되돌아오기 위해
나는 마차에 다시 올랐다.
그래, 마차의 그 초라한 말은 슬프게도 다시 출발했다.
부드러운 농부 사이에서 잠들었고,
발 가까이에서 비둘기들이
슬프게 날아갔다.
……아이들이 모험을 찾아 떠나들 가 버렸죠.
푸른 잔디 속에 붉은 접시꽃들에 싸인
철책 문 뒤에서 그 훌륭한 노부인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시골 마을 앞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을 때,
태어난 곳에 있는 오래된 개오동나무들이 서 있는
그 조그만 역 앞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을 때,
그건 가슴 다사로운 일이었다.
내가 네 살 때의 어느 광경을 나는 다시 보는 듯했다.
서늘한 나뭇잎 요람들 사이에 그늘 속에서 흘러가는
맑은 물. 햇볕 속에서,
또 햇볕 속에서도 그것은 어느 어두운
그늘 속에서 그 물이 어디로, 그토록 멀리 어디로 흘러가는지
나는 궁금해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물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던
내 어린 시절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그 이후 그 시내 또한 나는 다시 보았다.
죽음의 날이 아름답고 순수하길 바라는 기도주여, 내 죽음의 날을 아름답고 순수하게 이룩하여 주소서.
문학에 대한 근심 또한 그 같은 것이나 생의 아이러니가
내 이마에 어린 커다란 피로를 떠나게 되는 날,
그날이 한껏 평화로움에 잠기게 하소서.
성대한 죽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무리와는 다르게
인형이나 아주 어린 여자아이처럼
나는 죽음을 정말 소박하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당신께선, 오 주여, 행복이란 것에도
무언가 빠져 버린 결핍된 것이 있고,
완전한 영광이나 사랑도 없고, 힘없는 꽃도
존재할 수 없음을, 또한 흰 것에는
항상 검은 것이 들어 있음을, 당신께선 아시지요…….
그래요, 오 주여, 죽는 날을 아름답고 순수하게 하여 주소서.
평화를 사랑하는 시인인 내가
훌륭하게 자라는 까만 눈의 아들과 파란 눈의 딸이 모두
내 침대맡에 둘러서 있는 걸 보고 싶은 그 죽음의 날을……
자식들이 다가와 죽는 아비를 눈물 없이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내 얼굴에 서릴 장중함이 자식들을 크고 온화한
신비로움으로 전율케 하도록, 그 신비 속에서
나의 죽음이 아이들에겐 은총으로 보이게 해 주소서.
내 아들들에게는 명예란 공허한 것,
싱그럽고 달콤한 약혼자의 입술에 참피나무 향기를
얹으시는 주님만이 시인이심을 아는 사람에게는
명예는 불안을 안겨 주는 것이라 말들 하게 하소서.
또한 아들들에게는, 세속의 사랑이란
결합된 연인들의 존재를 갈라놓는 아이러니라,
자기들 아버지도 이제껏 경애하는 ‘마나님’의 마음을
떠나 있었기에 고통을 받았다고 말들 하게 하소서…….
그리고 딸들에겐, 내 죽음의 침대 머리에서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숲의 아름다운 밝음 속을 흐르는
물처럼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말들 하게 하소서…….
하오니 주여, 내 죽음의 날을 아름답고 순수하게 하여 주소서.
라퐁텐의 우화 속 선량한 농부처럼,
나로 하여금 아들딸의 손을 손으로 꼭 잡고
마음 평정함 속에 죽을 수 있도록 마련하여 주소서.
당나귀와 함께 천당에 가기 위한 기도오 주여, 내가 당신에게로 가야만 할 때는,
축제에 싸인 듯 흥겨운 들판에 먼지가 이는 날이
되게 하소서. 이승에서도 늘 그랬듯이,
한낮에도 별이 총총한 ‘천당’으로 향하는 길을
마음에 들게 택하고 싶습니다.
나는 지팡이 짚고 한길을 따라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인 나귀들에겐,
“나는 프랑시스 잠, ‘천당’으로 가는 거지,
하느님 나라엔 지옥이 없으니까…….”라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말할 것입니다. “자 가자, 푸른 하늘의 정다운 친구들아,
갑작스럽게 귀를 움직여 빌붙은 파리와
등에와 벌을 쫓는 가엾고도 사랑스런 짐승들아.“라고.
나로 하여금 당나귀에 둘러싸여 당신 앞에 나타나게 해 주소서.
나는 이 짐승들을 너무 사랑합니다. 당나귀는 머리를
고즈넉이 숙이고, 멈출 때도 당신께서 측은해하실 만큼
작은 두 발을 가지런히 모아 안전하게 서니까요.
나는 수없이 많은 당나귀의 귀를 따라서 당도하겠습니다.
옆구리 주렁주렁 바구니 찬 당나귀들,
곡예사의 마차나 깃털 빗자루와
양철 실은 마차를 끄는 당나귀들,
등에 울퉁불퉁한 양철통을 실었거나 가죽 포대같이
퉁퉁한 암컷을 옆에 데리고 발을 저는 당나귀들.
진물이 엉긴 데로 집요하게 꼬여드는 파리 때문에
푸르죽죽 피가 나는 상처를 감싸려고 작은 바지를 입힌
당나귀들을 이끌고, 주여, 나는 당신께 당도하겠습니다.
당나귀와 더불어 당신께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주여.
웃음 짓는 처녀의 살결처럼 매끄러운
버찌가 살랑대는, 우거진 숲속의 실개천으로
평화로운 가운데 천사가 우리를 인도하게 하옵시고,
영혼들이 살아 머무는 그곳에서
당신의 신성한 시냇물 위에 몸을 기울인 내가
저 영원한 사랑의 투명함 속에 저들의 겸손하고
온화한 가난을 비출 당나귀들을 닮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