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지음 | 푸른숲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지음
푸른숲 / 2008년 9월 / 255쪽 / 9,800원
첫 만남
내가 첫 소설을 낸 것은 아주 젊었을 때였다. 운이 좋았는지 그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알고 지내려고 했다. 나를 초대해준 선배 작가들의 집을 찾아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런 곳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그 즈음 로즈 워터포드는 누구보다도 나에게 잘 대해주었는데,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만난 것도 그녀의 집에서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제법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어서 우리는 금방 친근감을 느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서른일곱 살로 키가 꽤 컸으며, 보기 좋게 통통했다. 미인은 아니지만 상냥해 보이는 갈색 눈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단출한 점심 모임에 나를 자주 불렀고, 이따금은 성대한 저녁 만찬에도 초대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부인은 나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싶어 했고, 나는 고민거리를 귀담아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릭랜드를 만나게 되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저녁 모임에 다른 손님 대신 자리를 좀 메워 줄 수 없겠느냐는 쪽지를 보내왔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부인이 나를 소개하자 스트릭랜드는 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순전히 사교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고,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나는 마음 놓고 스트릭랜드를 관찰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주식 중개인이라는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덩치가 컸다. 왜 그를 가냘프고 보잘것없는 외모를 가진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어깨가 떡 벌어진 데다 아주 건장했다. 마흔 정도 되어 보였는데,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준수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이목구비가 자못 커서 실제보다 못나 보였다. 말끔히 면도한 커다란 얼굴이 벌거벗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붉은 빛이 도는 머리카락은 아주 짧게 잘랐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인상이었다. 스트릭랜드는 그저 선량하고 따분하고 정직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성품을 칭찬할 수는 있어도 굳이 시간을 내어 사귀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마흔 살의 가출
사교의 계절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 대부분이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트릭랜드 가족은 노퍽 해안으로 떠난다고 했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가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그 해 가을 런던에 돌아와서 듣게 된 소식에 나는 깜짝 놀랐다. 런던에 도착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나는 길에서 우연히 워터포드를 만났다. “찰스 스트릭랜드 씨 만나보신 적 있죠? 그 사람이 부인을 버리고 달아났대요. 놀랍지 않아요?” 그녀의 눈이 심술궂은 장난기로 반짝 빛났다. 그녀는 그 말만 툭 던지듯 해 놓고는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시골에서 런던으로 돌아오기 전에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한번 찾아가겠다고 했고, 그날이 마침 약속한 날이었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스트릭랜드 부인의 뜻을 물으러 간 하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실내가 어두웠지만 나는 부인의 얼굴이 울어서 잔뜩 부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형부인 맥앤드루 대령이 불도 지피지 않은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문제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마음을 가다듬느라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말하고 거리로 나섰다.
며칠 뒤 스트릭랜드 부인에게서 전갈이 왔다. 그 집으로 찾아가보니 그녀는 혼자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이 버림받은 그녀의 처지를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셨죠? 그럼 파리로 가서 그이를 좀 만나 주세요. 형부가 직접 가겠다지만 오히려 일을 망칠 거예요. 그렇다고 딱히 부탁드릴 만한 사람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헤어 나오기가 힘들 것 같았다. 차라리 런던에 돌아오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순간 부인이 안쓰럽게 여겨졌다. 부인은 무엇보다 그가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이 보낸 편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에이미 보시오. 집에는 별일 없을 것이오. 앤에게 당신이 말한 대로 일러두었으니, 돌아오면 당신과 아이들 식사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없소. 당신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었소.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작정이오. 이 편지는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부치겠소.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오. 이 결정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오. - 찰스 스트릭랜드
자세한 설명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파리로 가는 도중, 나는 내가 맡은 임무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눈앞에서 스트릭랜드 부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따져 볼 수 있었다. 그녀만큼이나 내 마음도 무척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 여행에는 어쩐지 모험적인 구석이 있어서 파리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들떴다.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저녁, 나는 호텔의 종업원에게 스트릭랜드가 묵고 있다는 ‘벨쥬’라는 호텔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뜻밖에도 그는 그런 호텔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아주 고급스러운 곳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전화번호부를 샅샅이 뒤져보았더니 같은 이름의 호텔은 변두리 므완느 거리에 딱 하나 있었다. 빈민들을 상대로 일용품을 파는 허름한 구멍가게들이 잔뜩 들어찬 므완느 거리 중간쯤에 벨쥬 호텔이 있었다. 낡고 더러운 건물이었다. 스트릭랜드가 가족을 팽개치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저버리면서 도피처로 선택한 곳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거짓말에 속은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종업원을 찾아 물었다. “여기 혹시 스트릭랜드라는 분이 묵고 있나요?” “6층 32호입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에 놀라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인도 함께 계신가요?” “아니요. 혼자 계십니다.” 의아한 눈으로 지켜보는 종업원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층계는 어두웠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드디어 6층 32호의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스트릭랜드가 나타났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소?” 그가 물었다. 허름하고 지저분했지만 더없이 편안한 모습이었다. “부인을 대신해서 왔습니다.” “마침 한잔하려던 참인데, 같이 나갑시다. 압생트가 어떻소?” 우리는 클리시 거리로 갔다. 도시의 온갖 가난뱅이들이 가득 메운 길은 활력이 넘쳐흘렀다. 우리는 식당을 찾아 들어가 앉았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그는 내 표정을 보면서 유쾌하게 웃어댔다. “골치 아픈 일을 떠맡았군. 이봐요. 빨리 끝내고 기분 좋게 저녁이나 듭시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부인께서 무척 슬퍼하고 계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질 거요.” 그의 냉정한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걱정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럼 왜 부인을 떠났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소.”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미쳐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모한 모험을 시도하는 건 아닙니까?” “나는 어쨌든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문제가 되지 않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동을 받았다. 그는 강한 힘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악마에게라도 홀린 것일까. 하지만 표정은 말할 수 없이 평온해 보였다.
파리의 화가
그 일이 있고 나서 오 년가량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한동안 파리에 가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파리에 가자마자 조그만 아파트를 얻고, 더크 스트로브를 만나러 나갔다. 그는 로마에서 알게 된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였는데, 그림 솜씨는 형편없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서툴렀지만, 그림을 보는 안목은 탁월했다. 미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거웠고 비평은 날카로웠다.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스트로브만큼 정확한 눈을 가진 사람도 드물었다. “자네 혹시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화가를 만나 본 적 있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나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설마 자네가 그 사람을 알고 있단 말은 아니겠지? 아주 대단한 화가지. 내 눈은 정확하네. 그 사람은 천재야. 지금부터 백년 후에야 인정받겠지만 말일세. 훗날 사람들이 자네나 나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건 전적으로 찰스 스트릭랜드와 알고 지낸 덕분일걸.”
이튿날 저녁, 나는 스트로브와 함께 스트릭랜드가 잘 다닌다는 카페를 찾았다. 나 혼자였다면 분명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을 거의 다 가리다시피 한 덥수룩한 붉은 수염과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칼은 상당히 낯설었다. 그는 오 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다 겪은 것 같았다. 그는 편안한 삶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꾀죄죄한 단칸방에 살면서 비참해 하지 않았고, 음식은 배고픔을 달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정신적인 삶만을 추구했다. 가진 돈이 다 떨어졌을 때는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지만 그림을 팔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강하게 들었다. 그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고, 그에게 현실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난 오 년을 돌아보았을 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부인을 처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던 때의 기쁨이 떠오르지 않나요?” “난 과거를 생각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뿐이오.” 나는 이 대답을 곱씹어 보았다. 어렴풋하게나마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험한 관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스트로브는 혼자서 보낼 스트릭랜드가 안쓰럽게 여겨진 듯했다. 우리는 그를 만나기 위해 클리시 거리의 카페에 들렀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와 가끔씩 체스를 두던 프랑스 화가에게 물어보니, 스트릭랜드가 앓아누운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그의 단골 빵집에 들러 그의 집을 찾았다. 그의 집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려보니 열려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고 스트로브가 내 뒤를 따랐다.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성냥을 켜고 비좁은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스트릭랜드는 자기 몸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침대에 불편하게 누워 있었다.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몸에 열이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스트릭랜드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성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트릭랜드의 집을 나와 스트로브의 화실에 도착하니 그의 아내 블란치가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스트로브가 그녀에게 다가가 두 손을 붙들고 말했다. “여보, 부탁이 하나 있소. 스트릭랜드가 큰 병이 났소. 죽을지도 모르겠어.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우리 집으로 데려왔으면 하는데.” “싫어요. 그가 죽는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야.”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난 그 사람이 싫어요. 그 사람을 절대로 우리 집에 들여놓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을 굳이 데려오겠다고 하면, 내가 이 집에서 나가겠어요. 부탁이에요. 스트릭랜드만은 데려오지 말아요. 그 사람이 무서워요. 우리에게 큰 해를 끼칠 것 같아요. 끝이 좋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단 말이에요.” 그녀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때 스트로브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도 언젠가 딱한 처지에 빠진 적이 있었잖소. 그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지. 그러한 도움이 얼마나 고마운지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 거요. 이번에는 당신이 누군가를 도우면 좋지 않을까?” 그녀는 흠칫하더니 물끄러미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데려오세요. 정성껏 보살피겠어요.”
다음 날, 우리는 스트릭랜드를 데려왔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잠자코 우리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는 꼬박 한 달 반을 앓았다. 몇 시간 더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둘 것 같던 순간도 있었다. 스트로브는 모든 일을 팽개치고 환자를 간호하는 데에만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의 아내 블란치였다. 스트릭랜드를 데려오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모습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환자의 몸까지 씻겨주고 밤새도록 환자 곁을 지키며 그녀는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그 일을 맡았다. 스트로브는 아내의 태도를 무척 뿌듯해했다. 다만 아내와 스트릭랜드 사이의 어색한 관계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는다니까.” 스트릭랜드의 건강이 훨씬 좋아졌을 무렵이었다. 나는 스트로브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스트릭랜드가 스트로브 부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스트릭랜드는 눈길을 돌려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인은 계속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는 미묘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아내의 배신
몇 주가 흘렀다. 밤 열 시가 다 되었을 무렵,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문 앞에 스트로브가 서 있었다. 말쑥하던 평소의 차림과 다르게 행색이 매우 보잘것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오늘 오후에 스트릭랜드에게 화실을 비워 달라고 했어. 잠깐 웃더니 짐을 싸더라고.” 스트로브는 말을 멈추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아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지 뭔가. 그 작자는 말없이 짐을 꾸리더니 우리 부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휘파람까지 불고. 그때 난데없이 블란치가 ‘여보, 나도 스트릭랜드 씨와 함께 가겠어요. 당신과는 더 이상 못 살겠어요’라고 하지 않겠나?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더라고.”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의심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스트로브는 아내를 안으려고 다가갔지만 그녀가 한사코 밀어냈다는 것이다. “제발 나를 조용히 보내줘요. 더크. 모르겠어요? 나는 스트릭랜드 씨를 사랑해요. 저분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요구했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스트로브는 마음속에 새겨 넣기라도 하듯 한참 동안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일어나 모자를 집어 들었다. “내가 나가도록 하지. 당신이 그 끔찍한 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도저히 못 참겠소. 그냥 여기에서 살아요. 따지고 보면 당신 집이기도 하니까. 여기에서라면 최악의 고생은 면하겠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뚜벅뚜벅 걸어 나와 버렸다.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블란치 스트로브의 행동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애초부터 그녀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녀가 스트릭랜드를 강하게 거부했던 것은 처음부터 그에게 끌리는 데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스트릭랜드가 그들의 집에 오는 것을 극심하게 반대했던 것은 어쩌면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존재가 두려웠을 터이다. 문득 그녀가 이 일의 끝이 불행할 것이라고 말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스트릭랜드가 블란치와 사랑에 빠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과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사랑에는 다정한 마음이 필요하지만 스트릭랜드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가 무엇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 하는 한심한 상태를 견뎌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속박을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트릭랜드는 복잡한 인간이었다. 사랑을 하기에 그는 너무 위대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