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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즐거움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 문학테라피
인간, 즐거움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문학테라피 / 2013년 7월 / 189쪽 / 13,800원





인간, 즐거움



파랑, 그 푸르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해요. 사월의 신선한 아침에 맞이하는 그 푸르름 말입니다. 그 푸르름에는 벨벳의 보드라움과 눈물의 반짝임이 들어 있지요. 나는 당신에게 이 푸르름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네요. 그 편지지는 안트베르펜이나 로테르담의 보석상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고이 싸놓은 종이를 떠올리게 할 겁니다. 마치 작은 요정의 운명이 담긴 투명한 소금 알갱이나, 갓난아이의 눈물, 웨딩드레스처럼 새하얀 종이 말입니다.

우리의 복잡한 생각은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 하늘을 뿌옇게 만들곤 하지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더니 푸르른 하늘이 온전히 내 손안에 들어왔네요. 오늘 낮의 가장 찬란한 모습을 당신에게 전하지 못한 채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군요.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네요. 나도 당신처럼 세상을 바라봅니다. 어쩜, 당신과 나의 눈에 들어온 세상은 꼭 같은 모습이네요. 이 세상은 한낱 전쟁터에 지나지 않지요. 온 사방에 검은 옷을 입은 기병들이 득실대고 영혼 깊은 곳에서는 칼날이 부딪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요. 연못 앞을 지나는데 수초로 뒤덮인 연못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중요한 건 바로 이거죠. 우리가 모든 생명의 온화함을 엉망으로 훼손시켜도 생명은 연못의 수초처럼 도리어 더 풍성한 모습을 하고 되돌아옵니다.

전쟁터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지루할 뿐이지요. 그러나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기둥 사이를 날아 작은 초목 안으로 달아나던 새의 날갯짓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도 작아서 말하면 깨져버릴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날개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유리처럼 깨져버리는 나비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요. 새는 궁궐의 기둥 사이를 사뿐히 옮겨 다니는 하인처럼 나무 사이를 날아다녔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말이지요. 새는 한 편의 시처럼 반짝이는 옷을 수수하게 걸치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내가 말하려 했던 것에 가까이 다가섰네요. 작고 보잘것없는 듯하지만 창백한 우리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어젖히는 이것, 오늘 내가 본 것, 결코 멈춰 서는 법이 없는 삶 말입니다. 이러한 삶은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삶은 우리의 마음속에 세워진 기둥 사이를 빠져 달아나는 새처럼 눈앞에서 달아나지요. 우리는 삶의 맞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삶은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어리석은 우리를 은혜로이 보살핍니다.

연못은 하늘 아래 활짝 피어나고 하늘은 연못 앞에서 곱게 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는 예언적 날갯짓을 하며 숲을 천천히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지요. 잠깐 동안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지금 이 편지가 전쟁터 같은 세상을 사는 당신의 눈에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정작 무모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나는 우리가 ‘화창한 날’, ‘푸르른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그저 흘려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말 안에는 신비로움이 묻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줄기 빛이 서늘하고 예리한 칼날처럼 우리의 닫혀 있던 마음을 열어젖힙니다. 비로소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별 아래에 파묻힙니다. 그리고 이따금 그것을 감지하고 고개를 듭니다. 아주 잠깐 동안 말이죠. 이게 바로 우리가 ‘푸르른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곳이 천국인지도 모른 채 천국으로 들어서는 한 사람을 떠올려봅니다. 그 사람은 걱정거리와 해야 할 일을 가득 안고 있는 매우 바쁜 사람이며, 칼날이 부딪는 소리가 그를 따라다닙니다. 참으로 흔히 일어나는 전쟁이지요. 그러다 일순간 연못 위에 하얀빛이 비치고 반짝이는 날개를 가진 새 한 마리가 세상의 높고 삭막한 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뜻밖의 일이 일어난 겁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 시간이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영원불멸한다는 것을 느끼고 안다.”라는 스피노자의 사상에는 자동차 뒷좌석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온화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마음속 커다란 방 안에 붉은 왕좌에 앉은 ‘태양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 가끔 탐욕스런 왕이 왕좌에서 내려와 온화한 아이의 모습으로 잠시 길거리에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하늘의 푸르름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일이지요.

나는 책장에 푸르른 기운이 서린 책만을 좋아합니다. 어둠을 이미 경험한 푸르름 말입니다.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는 것도 바로 어둠 속에서 나온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뿌리치기 힘든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이 미소를 얻기까지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하늘의 이 푸르름은 마치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간 소박한 영혼을 당신에게 되돌려 주려고 신이 숨겨둔 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장엄한 푸르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줄 것이고 눈시울을 붉게 만들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축복을 내리는 자



진주 장식이 달린 헐렁한 셔츠를 입은 왕자가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만 그가 온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그는 창가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깜빡 잊었어도 그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 듯했다. 겸손하고 의연한 그는 축복을 내리는 자였다. 그의 빛나는 영혼으로 인해 방 안에 어떤 성스러운 향기가 감돌았다. 설령 내가 눈을 감았더라도 그가 온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바로 미모사의 가지였다.

젊은 시절 내 책들은 그저 저절로 쓰인 것이었다. 정작 나는 그 책의 주인이 아니었다. 달과 풀, 태양처럼 빛나는 연인의 얼굴, 삶과 죽음이 결합된 것 이상의 삶, 이 모든 것들이 내 책을 써 내려갔다. 그것들은 말로만 겨우 ‘내’ 책이었다.

그러다 내게 삼십 년간의 유폐 신세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왔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연인의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 눈부심으로부터 수백여 통의 편지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적어 내려간 말들은 어린아이의 손에서 돌아가고 있는 오색날개가 달린 작은 팔랑개비와 같았다.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내 뺨에 태양의 손길이 닿는 것도 느껴졌다.

단 한 번의 봄이 일생의 모든 봄과 같았고, 단 한순간의 삶이 온전히 살아낸 삶과 같았다. 사랑이란 누군가 당신에게 강물처럼, 별처럼 혹은 인동초 꽃처럼 말을 건네는 순간과도 같다. 어제도 오늘도 날 향기로 취하게 하고선 땅속으로 사라졌다가 어느새 이름을 알게 된 인동초 꽃처럼.

푸르른 하늘의 옷장에 걸린 사랑하는 연인들의 하얀 드레스 한 벌.



죽음의 세탁물에서 꺼내 영원에 말린 하얀 드레스.



내 가슴에 단단한 돌이 박히듯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몇 달간은 숨이 막힌 듯하다. 충격에 휩싸여 한 발짝 물러서 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고 먼발치에서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그 와중에도 이상스레 가장 덜 부조리하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꽃이다. 꽃은 온갖 색깔의 외침과도 같다. 우습게도 가장 작은 데이지 꽃이 우리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애쓴다. 꽃은 자신의 색깔로 이야기한다.

그대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는 꽃 중독자가 되었다. 집 안 곳곳을 꽃으로 도배하기 시작한다. 그대의 죽음으로 나와 단절되었던 세상은 어둠 속의 검은 공처럼 천천히 돌아갔지만 그 속에 꽃의 생기 있는 오만함이 있었고 단조로운 허무함에 맞서는 노랑, 하양, 빨강, 파랑, 분홍의 반박이 있었다.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은 도기 항아리에 담긴 장미꽃 다발의 강렬한 힘을 알고 있다. 나의 가슴에 박혀 있던 단단한 돌이 떨어져 나가고 어린아이가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듯이 나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세상은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삶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오로지 세상만 좋아한다. 결국 세상은 자신의 자리를 모두 되찾는다.

그대의 부재 속에 꽃이 기어이 내게 건넸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혹은 우리가 몸으로 부딪치며 느끼는 것보다 백만 배는 더 아름답다고. 창가에 서서 개머루를 바라본다. 생생한 바람이 초원 위로 지나간다. 꽃은 영원의 하늘에서 맨 먼저 떨어지는 빗방울이다.

나는 영원의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채 푸르른 공기를 삼킨다. 그리고 글을 쓴다. 이것이 대답 없는 것에 대한 나의 답장이며 시간의 잎사귀 사이에서 퍼덕이는 날갯짓이다. 그대가 더 이상 여기에 없어 그대에게 미모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해도 미모사는 내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또렷이 들려준다. 우리를 사로잡은 우아한 것은 모조리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거쳐 온 것이라고.



삶의 신성한 삼 요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얼마 전 부인을 잃은 남자는 더 이상 책을 손에 쥐지 못한다.

“난 책으로 인해 내 고통이 망각되길 원치 않네.”

난 그 말이 이렇게 들린다.

“단 일 초라도 책을 포함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인해 그녀로부터 멀어지고 싶지 않네. 그리고 깊은 허망 속에서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갈가리 찢기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걸 방해 받고 싶지 않네.”

그가 말하는 동안 정원에 있는 유도화가 눈(雪)으로 변한다. 해가 지고 꽃들은 어둠과 싸움을 시작한다. 내 친구의 얼굴은 장밋빛 아래에서 타오른다. 어둠 속에서 부인을 찾아보지만 결국 그 안에는 자신만 있을 뿐이다. 나는 그가 글에 경계심을 가지는 것이 이해가 된다.

우리가 사랑하면서 느끼는 고통 역시 사랑이며, 그 고통은 말도 안 되는 위로로 사랑이 어둠 속으로 밀려들어 가듯 우리의 사랑이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준다.

또 다른 꽃들은 정원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낮 동안 꽃들이 내뿜는 푸르름에 내 눈이 멀어버린 듯했다. 그랬던 꽃들이 어둠이 내려앉자마자 져버리고 꽃잎에는 핏빛이 서린다. 그 와중에도 유도화는 홀로 버텨낸다. 다른 꽃들이 우리를 떠나는 순간에도 유도화에 내려앉은 초자연적인 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죽음의 은총으로 혼령이 된 사람을 담은 상자 수백 개가 매일 이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불타오른다. 죽은 혼령은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꽃의 침묵과 같다. 두 눈은 끝끝내 땅속에 묻지 못한다. 낮은 담장 위를 타고 올라가는 등나무는 황홀경에 빠진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언젠가 내가 2미터 깊이의 침묵 아래에 자리하는 순간 나는 이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꽃과 빛, 푸르름을 말하는 내게 세상은 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빈정댄다. 하지만 13세기, 일본의 현인 도원(道元) 선사는 “우주 삼라만상이 꽃의 감성과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유도화와 거대한 어둠 사단이 벌이는 전설적인 결투를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의 『쉬레나』 속에서 또다시 만난다. 태양 아래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의 결투를 보는 듯하다. 공주가 자신의 심부(深部)에 들어가 불을 찾는다. 금박을 두른 그녀의 외침은 편한 잠에서 갑작스레 빠져나와 삶의 한없는 고통을 되짚으려는 17세기 어느 죽은 여인의 울부짖음이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스럽고, 항상 죽어가기를.”



이 외침에 난 아연해지고 어느덧 충만해진다. 이 울부짖음으로 내게는 평온함이 찾아온다. 시간이 늦었다. 『쉬레나』를 연달아 두 번이나 읽었다. 우리는 단 한 편의 시만 손에 쥔 채 죽음의 강물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은 신성한 삼 요소이다. 시는 몹시 뜨거운 돌로 만들어진 침묵의 원이며 세상은 별에 닿을 듯한 차가움이다. 새벽 두 시 즈음 공주는 죽고 나는 공주의 외침에 사로잡힌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스럽고, 항상 죽어가기를.”



세상은 이 외침에 깃든 영감을 알지 못한다. 삶의 등잔불을 켜는 것을 죽음을 아는 자다.





삶의 손길



배짱 두둑한 두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와 세상을 평정한다.



어느 흑백영화에서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과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가 바흐의 콘체르토를 연주하고 있다. 두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가 너무도 강렬해서 두 사람이 연주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오이스트라흐는 엄마가 갓난아이의 숨소리를 살피는 것보다 더 상기된 채로 자신의 악기 소리를 듣고 있다. 천국에 고용된 두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주워 저 멀리 던져 버리듯 세상을 들어 올린다.

두 사람의 새하얀 손이 악기의 새까만 목 위로 날아다닌다. 메뉴인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는다. 그리고 침묵의 지배자가 있는 저 위를 향해 기품 있는 얼굴을 들어 올린다. 현을 짚는 손은 한 마리 우아한 백조의 부리를 연상시키고, 그가 어루만지는 현 위로 활이 세차게 튀어 오른다.

나는 바흐가 광인(狂人)이었음을 알고 있다. 나는 바흐를 이해할 수 있다. 바흐는 불안증에 시달려 미치광이가 되었다. 바흐의 음악은 어린아이가 엄마의 두 팔 한가운데에 안착할 거라 굳게 믿고 아직 완전하지 못한 다리로 돌진하듯 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불안한 손에 떠밀려 깊은 수렁으로 달려가던 아이는 때마침 길목에 있던 고요한 엄마의 품에 안긴다.

두 음악가를 찬미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이 하나 있다. 아버지는 눈을 맞으며 밖에 서 있다. 차가워진 손을 데우려고 두 손을 비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손이 크나큰 믿음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싸고 있다. 아버지는 이 동작으로 지금은 당신처럼 세상을 떠난 두 명인(名人)을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의 넓은 길을 건널 수 있을 만큼의 따스함과 충만한 불이 느껴진다. 밤은 붉은 장미의 내부처럼 어둡다. 조르주 드 라투르(Georges de La Tour)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야등을 밝힌 마들렌 성당 안에 놓은 초의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별과 별 사이를 갈라놓은 공백보다 더 큰 공백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리 잡은 것이 보인다. 각자 일하고, 또 일하고, 자기 이익을 좇아 일한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짓밟히고 만다. 바흐는 불안에 사로잡혀 머리맡에 변치 않는 것을 데려다 놓은 아이와 같다.

문득 담배를 입에 물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깨끗해진 유리잔 세 개를 손에 들고서는 매번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 세게 쥐지 마라, 깨지니까.”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저 찬장 어디엔가 깊숙이 숨어있는 꽃무늬 접시를 찾아내 그 접시가 뜨겁고 레몬 향 나는 물줄기를 맞으며 되살아나게만 해주면 된다. 그저 마음 없는 형체에 불과한 그릇이라는 물건이 설거지를 통해 태초의 아침이 내뿜는 찬란함을 다시금 얻게 되는 것이다.

저 멀리 텔레비전이 고요함과 사색의 숭고한 목을 무감각하게 내려치는 사형집행인처럼 자신의 음울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광고가 연이어 요란하게 울리면 침울한 기적이 세상 위로 쏟아져 내린다. 침울한 기적의 예언자는 미묘한 미소를 띤 젊고 반들반들한 피조물이다. 우리는 그런 허황된 꿈을 좇을 만큼 지독히 불행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먹고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 등 뒤에서는 이윤에 목이 마른 마네킹들이 전파에 나와 지옥 같은 식탁을 차리고 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는 세상의 종말보다 더 끔찍하다. 햇빛을 굴절시켜서는 안 되는 법이다. 더러워진 그릇은 하루에 두 번 다시 태어난다. 그릇이 일상의 불가사의한 진부함 속에서 조류가 흐르듯 파동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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