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게트 지음 | -
▣ 독서 나침반Ⅰ - 개관한없이 지루한데 결코 자리를 뜰 수 없는 연극,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저 깊은 인간의 심연을 곧바로 느끼게 하는 연극, 근원적인 비애와 경련적인 웃음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연극…. 1953년 거의 폐관 직전 상태에 있던 파리의 한 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의 첫 반응은 그렇게 막연하고 야릇했다. 그럼에도 조만간 이 낯선 체험에 대한 조용한 열광이 세계로 번져나갈 것이고, 차후 베케트는 '반(反)연극', '신(新)연극', '부조리 연극' 등으로 명명될 20세기 연극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 명칭이 암시하듯 그때 사람들은 전통의 거부와 혁신, 그리고 '부조리'의 인식에서 이 연극을 이해하는 단서를 구했다.
'부조리'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서구의 총체적 위기상황 속에서 '실존적 인간'을 응시하려는 철학적 성찰과 함께 싹텄다. 무엇보다도 이성(理性)과의 부조화를 뜻하는 그것은, 근대사회의 기반이 되어 왔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 위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며 이 세계도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의미체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철학적 주제를 제기한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 이후, 철학자이기보다는 철저한 예술가였던 부조리 '작가'들을 사로잡은 문제는 어떻게 부조리를 진정 부조리답게 보여주느냐는 것이었다. 부조리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논하고 보여 준다면 그건 이미 부조리가 아니지 않을까? 이런 물음에서 촉발된 베케트의 도전은 '혼돈에 적합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부조리 그 자체로 빚어진 이 형식은 당연히 전통적 형식을 파괴한다. 즉 이성의 명령으로 짜인 모든 '고전적' 규범과 기법들을 거부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과론적 서사구조의 해체일 것이다. 기승전결식으로 정형화된 '이야기'의 선적 구조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의도된' 의미에 맞춰 '조리 있게' 구성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그런 서사적 연결을 유도하는 모든 요소가 극단적으로 파편화된다. 이 작품 속에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공간의 이동도 없다. 의미를 생성하는 어떤 지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단지 '지금-여기'라는 텅 빈 상황으로 제시되는 그 시공은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끔찍한' 세계이다. 거기서 등장인물은 마치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대 위로 내던져져 뭔가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와도 같다. 이 할 일 없는 세계 속에서는 할 일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할 일, 즉 '역할'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올 것인가? 과연 그럴 희망은 있는가?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순환구조를 통해 끝없이 유예되는 기다림 속에서 끝없이 피폐해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 전례를 찾기 힘든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은 우리를 어떤 역설적인 악몽 속으로 이끌어 가는 듯하다. '희망'과 '의미'의 기치를 걸고 인간을 오히려 병들게 만드는 거짓 진리들에 강력히 저항하는 악몽! (이인성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 독서나침반 Ⅱ『고도를 기다리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기다림'을 들 수 있다. 연극은 어느 한적한 시골길,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만이 서 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길이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림이 시작된 듯하다. 그래서 지금(무대 위의 현재)은 고도라는 인물이 딱히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조차 분명치가 않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지칠대로 지쳐 있는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 본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하는 것이다.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과 춤추기…. 지루함과 초조,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들의 광대놀음, 그 모든 노력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루해가 다 지날 무렵, 그들의 기다림에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이다. 고도가 오늘밤에는 오지 못하며 내일은 꼭 오겠다고 했다는 전갈만을 남기고 소년이 사라지면서 1막이 끝난다. 그리고 2막의 그 다음날도 거의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된다.
줄거리도 극적인 사건도 없는 이 너무나도 단순하고 기이한 무대에 관객들은 당황하면서도 배우들의 황당한 대사와 동작을 통해 시종 신선한 즐거움을 경험한다. 고도가 누구인지 그가 과연 언제 나타날는지는 관극 후에 생각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한다. 기다림으로 시작되는 1막이 다시 2막의 기다림으로 끝나는 이 무대는 어쩌면 3막이 있다 해도 기다림의 상황은 다시 이어질 거라고. 막이 아무리 길게 이어져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관객은 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니 연극이 끝난 뒤에도 고도라는 인물만은 의식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인물의 대사는 전편을 통해 마치 교향곡처럼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 간헐적으로 기다림에 이유와 활기를 부여한다. 그래서 기다림은 다시 이어진다. 기다리면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말은 동작을 유발하고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것이 말해질 때 비로소 구원이 된다. 이 혼돈과 불모의 세계에서 나날이 함몰되어 가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다림을 죽이기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들은 기다림에서 오는 고통과 절망을 자살로 해결하지는 않는다. 목을 맬 수 있는 나무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들은 시도하지 않는다. 다시 지껄임으로써 기다림을 유지하고 내일을 기약한다. 두 어릿광대는 서로를 독려한다. "뭐든 말해봐", "지금 찾고 있는 거야", "기다리면서 뭘 하지?", "말을 하니까 시간이 잘 간다"……
그들 앞을 지나가는 낯선 두 나그네도 말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한다. 포조는 사사건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가 경청할 것을 강요하며, 팔려가는 늙은 노예도 갑작스러운 장광설로 자신의 존재를 선언한다. 쉼표도 없이 3페이지나 이어지는 그 기상천외한 사고의 발설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 비로소 중단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상대방을 향한 화자이자 배우이며 포조와 럭키가 등장했을 때는 연출자이자 관객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상대방에게서 이야기를 도발하고 듣고 교환한다. 이야기는 그들에게 삶의 도구이며 위안이다. 나아가 살아 있음을 확인해 주며 그 끝은 죽음이다.
베게트의 연극을 부조리 연극이라고 최초로 이름 붙인 마틴 에슬린은 베게트를 <유쾌한 허무주의자>라고 일컫는다. 베게트의 연극에는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건 못하건 간에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음을 누구나 느낀다. 실제로 그는 <삶을 지배하는 것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나는 고통 받고 있으므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즉 인간의 고통을 말한다. 그는 작중 인물들이 겪는 치명적인 몰락과 고통을 통해서 데카르트적인 인간 존재의 인식에 접근하는 것이다. 빈곤과 궁핍, 고통은 인간 존재의 핵심에 다가가기 위해 베게트가 장치해 놓은 글쓰기의 통로이다. 자신을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 신의 은총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 구원의 손길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지치고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베게트는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준다.
그는 『고도』에서 어릿광대들을 통해 이 냉혹하고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를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의 이유도 모르는 채 기다림과 싸운다. 그래서 그들의 짓거리는 논리도 줄거리도 없이 지리멸렬하다. 그 지리멸렬한 대사와 동작에 관객들은 웃는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인물들의 무기력과 궁핍, 무의미가 우리를 웃게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매달리고 영향 받는 인물들 -구두 하나 벗는데도 끙끙대야 한다든지 주머니 속에 때 묻은 순무 한 토막을 넣고 다니는 것, 포조의 과장된 허풍, 팔려가는 늙은 노예의 갑작스러운 장광설, 시간이라고는 알 수 없는 곳에서 시계를 잃어버린 사건- 이 모든 하찮은 것들에 매달리면서 싸우는 동작이 비애와 함께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 독특한 웃음은 베게트의 작품 속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유머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비극은 농담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베게트의 작품들은 역설적으로 희극 속의 비극이라는 쪽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마틴 에슬린이 말하는 그의 <유쾌한 허무주의>가 비극 속의 희극을, 동시에 희극 속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도』에서 전개된 주제는 오랫동안 그의 작품 세계의 근간이 된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는 점점 더 어둠, 침묵, 부재 등을 부각시키기 위한 빛, 소리, 극히 세부적인 상황들이 펼쳐져 상연이 어려워진다. <연극> <왔다갔다> 등의 작품들에서 베게트는 인간의 존재를 극히 가늘고 작은 것으로 축소시켜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가 앉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와 같은 실험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시킬 수 없음을, 그 어떤 허약한 인간도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의 후기 작품들과 비교할 때 『고도』는 더 이상 전위극이나 실험극이 아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동의하는 현대의 고전이다.(오증자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
▣ 독서나침반 Ⅲ이 작품을 무대, 배우, 관객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려 시도한 한 관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막이 오르면, 시골길 저녁,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황량하다는 것을 빼고는 별로 특징이 없다. 이 장소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무대는 '특정한 어디'를 나타내지 않는다. 어느 공간이라도 상관없다. 삶이 영위되는 공간이라는 가장 단순한 의미로 축소된 공간인 것이다. 여기서는 시간도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다. 의미 있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며, 그래서 정지된 공간이 더 크게 인식된다. 말과 행동은 시간을 채우기 위한 반사에 더 가깝다. 그래서인지 대본에는 '침묵'이라는 지시어가 유난히 많다. 이 모든 상황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무대는 사건의 전개를 위한 보조도구가 아니다. 무대는 상황 자체이다. 다른 연극이나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대개의 작품들은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줄거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무대 장치를 선보인다. 휘황찬란하며 역동적으로 바뀌는 무대장치에 감탄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도』에서 무대는 그런 도구가 아니다.
배우에 대해 생각해보면, 무대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줄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들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며, 세계에 맹목적으로 던져진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 삶이 무의미하다면 죽기라도 하고 싶은데 죽을 수도 없다. 실제로 그들의 대화 속에서 그들이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을 수 없었음이 드러난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숙명이 아니라 삶이 숙명인 것이다. 미미하더라도 약간의 생명의 온기라도 남아 있는 인간이라면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게트에게 있어 산다는 것의 극단적인 형태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게트에게 말은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존재함의 증거이다. 실제로 배우들의 대화는 매우 파편적이며 거의 아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살아있음을 지속하기 위해 자꾸만 말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 말은 입을 통해 생성되자마자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말이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보니 관계 또한 소통적 관계가 아니다. 작품 속에는 2개의 관계가 존재한다. 블라디미르-에스트라공의 수평적 관계, 포조-럭키의 수직적 관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두 관계 모두 의미 있는 관계가 아니다. 블리디미르-에스트라공 관계는 억지스런 친화 관계이다. 즉 서로를 지겨워하면서 그냥 붙어 있는 사이이다. 포조-럭키의 관계는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는지 알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헤어지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관객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다른 작품들은 보통 주인공과 독자의 동일시 효과를 의도한다는 점을 먼저 떠올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배우들의 무의미한 대사와 의도적인 침묵으로 인해 관객은 연극 속으로의 몰입을 저지당하고 역설적으로 자신이 관객임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배우들은 관객들더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시체들은 어디서 온 걸까? 이 해골들 말이지?" 아마도 살아있음과 인간적 진실이 혼돈임을 상징하는 표현인 것 같다. 베게트는 혼돈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삶을 지속해나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배우들에 대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객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연극의 허구성을 관객들이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베게트는 이 과정을 통해 보다 높은 수준의 참여를 관객과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고도'는 누구이며 무엇인가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에서의 초연 때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가 베게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거다." 베게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고도를 영어의 God와 프랑스어의 Dieu를 하나로 압축한 합성어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다고 한다. 즉 고도를 기독교의 신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 외에도 고도를 자유로, 죽음으로, 희망으로 해석하는 견해들도 있다.
▣ 고도를 기다리며
제1막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녁.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아서 구두를 벗으려고 한다. 기를 쓰며 두 손으로 한쪽 구두를 잡아당긴다. 끙끙거린다. 힘이 빠져 그만둔다. 숨을 헐떡이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같은 동작이 되풀이된다. 블라디미르 등장.
에스트라공: (다시 단념하며) 안 되겠는데!
블라디미르: (두 다리를 벌리고 종종 걸음으로 다가서며) 그럴지도 모르지. (걸음을 멈추고) 그런 생 각을 떨쳐 버리려고 오랫동안 속으로 타일러왔지. <블라디미르, 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하면서 말야. 그래서 싸움을 다시 계속해 왔단 말이야.
머릿속으로 싸움을 그려보며 생각에 잠긴다. 에스트라공에게.
블라디미르: 아니, 또 너로구나!
에스트라공: 그래서?
블라디미르: 다시 만나니 반갑다. 아주 떠나버린 줄 알았는데.
에스트라공: 나도 그래.
블라디미르: 우리가 다시 만난 걸 어떻게 축하한다?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나, 껴안아줄게.
에스트라공에게 손을 내민다.
에스트라공: (짜증스럽게)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침묵.
블라디미르: (기분이 상해서 냉정하게) 나으리께서는 어디서 밤을 지내셨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