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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지음 | 청미래
1장 낭만적 운명론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 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런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이유는 우리가 서로에게 딱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똑같은 어금니에 충치가 있다든지, 둘 다 클라리넷을 분 적이 있다든지, 우리의 책꽂이에 똑같은 버전의 안나카레리나가 있다는 사소한 사실들이 우리가 서로에게 운명지어 졌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사인처럼 느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모든 상황의 우연적 성격을 보지 못하고 사소한 일들을 목적이 있는 사건으로 변질시키는 연금술을 부렸고, 우리 삶에 억지스러울 정도의 인과관계를 부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신비주의적인 또는 문학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죄를 지었다.



우리는 혼돈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떤 일들은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우연이라는 공포를 완화하고, 그럼으로써 삶이라는 혼란에 일관된 목적성과 방향을 부여한다. 어떤 사건을 운명에서 정해진 일로 읽으려는 경향 배후에는 우리 삶이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두려움, 우리의 삶은 우리가 부여한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두려움 그럼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줄 신은 없다는 불안이 있다.



낭만적 운명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랑에 대한 요구가 선행하고 그 다음에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짝의 선택은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내 실수는 사랑을 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필연이 아니라 그녀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나는 이렇게 우리 사랑 이야기의 발단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했는데 이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증명해준다. -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2장 이상화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처럼 타인의 흠을 찾아내기는 쉬우나 그것은 또한 무익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 되다시피 한 맥 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갑자기 느끼게 된다. 그녀가 문장을 끝맺는 법이 없다는 것이, 약간 불안해하는 것이, 귀걸이의 취향이 아주 세련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어색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결론은 피할 수가 없었다. 완전한 이상화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감정적 미성숙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은 지루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능한 모든 자아들 속으로 들어가 볼 준비, 그녀의 모든 기억을 목록으로 차곡차곡 분류할 준비,그녀의 모든 사랑, 공포, 증오에 대해서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과 몸 안에 흘러 다녔을 모든 것이 갑자기 매혹으로 다가왔다.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 버린다. 왜 이런 것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내 욕망의 비논리성과 유치함이 믿음에 대한 요구를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3장 이면의 의미

확실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구애라는 땅에 들어가 얼쩡거리지 말아야 한다. 구애자는 판결을 기다리는 범죄자처럼 떨면서 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나를 바라는 것일까, 바라지 않는 것일까?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이야기는 전화를 거는 사람의 손에 놓여 있다. 전화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그 이야기의 전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따라가기만 할 뿐이다. 순수와 공모의 중간에 걸려 있는 그녀의 모든 행동에는 나를 미치게 만드는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바란다는 것을 알까? 그녀도 나를 바랄까? 그녀의 문장 끄트머리에서, 그녀의 웃음의 입꼬리에서 유혹의 흔적을 찾아낸 것 같은데 맞나? 아니면 나의 욕망이 순수의 얼굴에 투사된 것뿐일까? 서로 이끌리고 있다는 기호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내가 기호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읽을 수 있는 기호들이 더 많이 나타났다. 그녀의 몸의 모든 움직임에서 욕망의 증거로 해석할 수 있는 기호들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나를 이런 탐정으로 만든 것, 나를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로 만든 것은 욕망이었다. 내가 오래 희망을 품을수록, 내가 바라는 사람은 더 고귀해지고, 완벽해지고, 희망을 품을만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말 중에 불분명한 부분에 집착했다. 나는 듣기보다는 해석을 했다. 그녀가 말하는“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일까? 내가 그녀의 냉소주의를 쫓아내 줄 남자일까? 그녀는 우리를 배제한 채 추상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혹시 추상적인 것이 그녀가 원했던 전부는 아닐까? 그녀는 자신이 하는 말 그대로의 의미만 전달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머뭇머뭇 가장 비비꼬인 방식으로 방향과 범위를 잡아 나갔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사람들은 사랑에서 무엇을 찾는 걸까?” 이“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당사자의 개입 거부를 미묘하게 언어적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이런 의식들을 게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주 진지하고 유용했다. 우리는 일반적인 단어들을 이용하는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단어에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했고, 암호화된 의미와 일반적 의미 사이의 긴장을 이용하고 있었다.



암호 메세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하여 덜 냉소적이어야 한다” = “나에 대한 당신의 냉소를 그만 둬라”

4장 진정성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그 반대일 경우에는 태평함이 요구되는 이 게임에서 진지한 욕망이 장애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완벽함을 찾고, 그 완벽함과 자신을 비교하면 열등감을 느낀다. 열등감을 느끼게 되면 직접적으로 나 자신이 아닌 인격, 우월한 존재의 요구를 찾아내고 구애의 위치 때문에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지 않고 그녀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게 된다. 내가 보기에 내 타이가 어떤가? 하고 묻지 않고 그녀가 내 타이를 어떻게 볼까? 하고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 였다.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에 관계없이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구애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능력이 약화된다. 그녀가 강한 남자를 좋아하면 나는 강인해졌고, 그녀가 윈드서핑을 좋아하면 나는 윈드서핑 선수가 되었다 나의 진짜 자아는 뚱뚱한 남자에 비유할 수 있었고 그녀가 연인에게서 원하는 것에 대한 나의 추측은 꼭 끼는 양복에 비유할 수 있었다. 옷이 뜯어질까 두려워 숨을 죽인 채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무사히 저녁시간이 지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 나는 초콜릿에 알레르기가 있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초콜릿이 좋아 그것을 후식으로 시키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초콜릿에 대한 사랑이 그녀와 맺어지는 데에 핵심적 결정적 기준이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내 욕망에 대해서 정직할 수 있을까? 불가피했던 만큼이나 수치스러웠던 나의 거짓말 때문에 나는 두 가지 종류의 거짓말의 차이에 주목하게 되었다. 피하기 위한 거짓말과 사랑 받기 위한 거짓말.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 이것은 모든 개인적 특징들을 비워버려야만 상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며,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다고 판단하는 태도이다. 구애란 연기의 한 형식으로 자연스러운 행동에서 청중에 의하여 결정되는 행동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애하는 배우는 자신의 관객이 무엇에 감동을 받을지 전혀 알 수 없다. 연기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원래대로의 행동과 비교할 때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성격의 복잡함이나 연기의 매력에 대한 의구심을 감안하면 내가 그녀를 유혹할 가능성은 정직하거나 꾸밈없이 행동한다고 해서 심각하게 감소할 리 없었다. 비 진정성은 내 인격이나 의견을 가지고 우스꽝스럽게 재주넘기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5장 정신과 육체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육체의 산물이다. 무분별하며, 직접적이며,이성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며, 희열을 동반한 육체적 욕망의 해소이다. 이와 비교하면 생각은 병, 질서를 강제하려는 병적 충동, 흐름에 굴복하지 못하는 침울한 정신의 상징과 다름없어 보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몸을 철저한 프라이버시의 영역으로 간직하던 여자가 이제 자신의 영혼의 가장 깊숙한 면을 드러내기 오래 전에 먼저 자신의 몸의 가장 깊숙한 곳을 나에게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서히 정신이 육체에게 권한을 이양할 수밖에 없는 단계, 정신이 열정에 대한 생각 이외의 모든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단계, 욕망 외에 아무것도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전통적인 이원론에서, 생각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은 스펙트럼의 양끝에 앉아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사랑을 한다. 정신은 절대 육체를 떠날 수 없으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하다. 정신이 없다면 육체는 자신과 자신의 쾌락만을 생각하게 된다. 동시성도 있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성욕을 자극하는 통로를 탐색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생각을 해야 한다. 동시성을 얻으려는 기술적이고 이성적인 노력과 오르가즘으로 표현되는 육체적 몰입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랑의 행위가 순수하게 육체만을 위한 일, 따라서 자연만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은 단지 근대적 관점일 뿐이다.

6장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머리를 조아리며 가입시켜달라고 빌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 농담은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사랑을 바라지만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면 상대가 실망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 당신이 내 전체를 보게 될까 초조해하며 당신의 사랑에 익숙해져 가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의 생각이다.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사랑이 보답 받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꿈이 공상의 영역에 남아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들은 그들의 짝이 그들에게 너무 자주 연락을 안 하거나, 품위를 존중하여 감정적으로 틈을 잘 보여주지 않는 쪽을 더 좋아한다.마르크스주의자는 역설적으로 외친다.“나에게 도전하면 너를 사랑하겠다. 나한테 제시간에 전화하지 않으면 너에게 키스해주겠다. 나와 함께 자지 않으면 너를 사모해주겠다.” 그 이유는 나라는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둘 다 똑같은 의존적 요구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그 요구 때문에 상대에게 끌렸다. 우리 내부에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상대에게 비슷한 부족상태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서양 사상에는 결국 사랑은 보답 받을 수 없는, 일방적으로 사모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오래 되고 우울한 전통이 있다. 사랑에 보답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연인들은 갈망과 짜증이라는 두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랑에는 중간이 없다. 사랑은 단순히 방향일 뿐이며, 바라는 것을 붙잡고 나면 그 이상 바랄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랑은 충족이 되면 스스로 타 사라지고,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면 욕망은 꺼진다. 어쩌면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즉, 밖에서 보기에 그녀는 멋지게 균형이 잡혀 보이고, 분명하고 지속적인 인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성교 후에는 그녀가 취약하고, 무너지기 쉽고, 분산되어 있고 궁색한 사람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있다. 자기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 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7장 틀린 음정

우리는 내 견해와 흡사해 보이는 견해를 가진 사람, 나와 사랑과 증오가 일치하기 때문에 수도 없이 “놀라운 일이야, 나도 막 똑같은 이야기를 하려던 참인데/생각인데/일을 하려고 했었는데...”라고 말하게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구두를 골랐다는 사실 때문에 불편하게도 그녀가 그녀 나름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녀의 취향이 늘 나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모순이 없을지 몰라도 그런 조화의 상태가 무한히 뻗어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의 구두를 보며 순간적으로 그녀의 어떤 면들은 알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느꼈다.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국적, 성, 계급, 직업)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형성되었다.



8장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우정의 관계에서라면 절대 심하게 말다툼을 벌이지 않을 일들이 연인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친구들 사이는 예의와 친절이라는 규약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이 갈라놓는다. 생물학적으로 낯선 상태라는 막이 적대적 충동의 분출을 막는 셈이다. 그러나 그녀와 나는 이제 안전한 섹스를 연습하는 관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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