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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

쥘 르나르 지음 | -
홍당무

쥘 르나르 지음



암탉

르삑 부인은 닭장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3남매 중 맏인 훼릭스에게 문을 닫으라고 시켰다. 겁 많고 게으른 훼릭스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자 에르네스띤느에게 시켰다. 누나도 마찬가지로 무서워서 싫다며 독서에 빠져 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은 빨간 머리카락에 온통 주근깨 투성이인 막내아들홍당무에게 시킨다. 기다렸다는 듯 형과 누나가 홍당무는 힘이 세고 용감하다고 부추긴다. 이런 부추김에 홍당무는 용감해진다.

칭찬을 듣고도 하지 않는다면 수치가 될 것 같았다. 홍당무는 혼자서 두려움을 참고 어둠 속에서 닭장 문을 닫았다. 팔 다리에 날개라도 달린 듯 마구 달려 따뜻하고 환한 집안으로 들어오자, 진흙과 비를 맞아 더럽혀진 누더기 옷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기분이었다. 빙긋 웃으며 장한 듯한 얼굴로 칭찬해 줄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형인 훼릭스도 누나인 에르네스띤느도 조용히 책만 읽고 있었다. 르삑 부인은 늘 하는 말투로 홍당무에게 말했다. “홍당무야, 이젠 밤마다 네가 닭장 문을 닫으러 가거라.”



자고새

르삑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냥 보따리를 쏟아 놓았다. 자고새 두 마리가 있었다. 3남매에게는 저마다 맡은 일이 있다. 훼릭스는 사냥감의 숫자를 석판에 기록하고, 누나는 껍질을 벗기거나 털을 뽑는다. 한편 홍당무는 사냥감의 마지막 숨을 끊어버리는 일을 맡고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아이라는 평판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홍당무는 형과 누나가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이 채근했다. “괜히 하기 싫은 척하지마. 속으론 좋으면서 뭘.”

자고새 두 마리는 몸을 비틀면서 완강히 버티었다. 홍당무는 무릎 사이에 자고새를 꼭 끼워 누르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려는 듯 위쪽을 쳐다보면서 더욱 힘껏 졸랐다. 이번에는 자고새들의 두 발을 붙잡고 새의 머리를 구두의 콧등으로 냅다 후려친다. 노련한 사냥꾼인 르삑 씨도 가슴이 섬뜩해져서 방에서 나갔다. 홍당무는 죽은 자고새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새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르삑 부인은 꼼꼼하게 뒤져보더니 진작 뺏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형 훼릭스가 말했다. “확실히 딴 때보다 잘 안 됐어.”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 있다. 홍당무는 바닥에 주저앉아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때 자고 있던 개 삐람므가 으르렁댔다. 개는 계속해서 더욱 세차게 짖어댄다. 르삑 씨네 식구들은 화가 나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모두들 개를 한번씩 차고 때리건만 개는 엉금엉금 기며 막무가내이다. 한편 홍당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을 둘러보러 나갔다. 아마도 뜨내기가 얼쩡거리거나 좀 도둑이 담장을 넘으려 기웃거리는지도 모른다. 홍당무는 어두컴컴하고 긴 복도를 걸어갔다. 두 팔을 문 쪽으로 뻗어서 와지끈 소리를 내며 빗장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을 열지는 않았다. 전 같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뛰어나가,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발까지 꽝꽝 굴러가며 오히려 상대편을 서늘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꾀를 부린다. 부모님은 홍당무가 용감하게 바깥을 구석구석 살피면서 충실한 경비원처럼 집 주위를 돌아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약아빠져서 문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또 한번 가냘픈 손으로 무거운 빗장을 흔들어댄다. 이런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두들 그가 멀리까지 돌아보고 왔으며 자기의 의무를 다한 걸로 생각하겠지! 그는 식구들을 안심시키려고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홍당무가 없는 동안에 삐람므가 짖기를 그쳤으므로 마음을 놓아 르삑 네 가족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홍당무는 늘 하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개가 잠꼬대를 한 거야!”



무서운 꿈

낮에도 내내 나쁜 점 투성이인 홍당무였지만, 밤엔 밤대로 코를 고는 나쁜 버릇이 있다. 심술을 부리려고 일부러 코를 고는 것인지도 모른다. 큰 방에는 2개의 침대가 놓여 있다. 하나는 르삑 씨의 것이고, 또 하나는 홍당무가 어머니와 나란히 벽 쪽에 누워 자게 된다. 자기 전에 코를 골지 않기 위하여 숨쉬기 연습을 해본다. 그런데도 잠이 들자마자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곤다. 습관이란 어쩔 수 없다. 그러자 당장 르삑 부인은 엉덩이의 가장 살이 많은 부분을 피가 맺힐 만큼 손톱을 세워 꼬집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수단을 쓰고 있다. 홍당무의 비명에 르삑 씨가 놀라 잠에서 깬다. 르삑 부인은 홍당무가 무서운 꿈을 꾸어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녀는 유모처럼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흥얼거린다. 인도의 자장가 같다. 홍당무는 덮쳐올 어머니의 손톱을 피하려고,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고는 큰 침대 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어머니 옆의 벽 쪽에 누워서.



좀 지저분한 이야기라 죄송합니다만

다른 아이들 같으면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벌써 영세를 받았을 나이인데도, 홍당무는 아직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르삑 부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뿐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침대로 수프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아주 야릇한 수프로, 르삑 부인은 수프에다 그것을 약간 풀어 넣었던 것이다. 뭐, 아주 약간 뿐이다. 베갯머리에는 형과 누나가 얄궂은 얼굴로 홍당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호만 하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릴 기세다. 르삑 부인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아들의 입에 수프를 넣어준다. 천천히 마지막 수저를 들어서 입을 벌리고 있는 홍당무의 목구멍까지 수프를 집어넣었다. 자꾸 강제로 먹여 놓고 나서 홍당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이! 너는 똥을 먹었어. 그것도 간밤에 싼 제 것을.” “그럴 줄 알고 있었어.” 홍당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얼굴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건 예사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예사롭게 대하게 되면, 우스운 것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토끼

“이젠 네 몫의 메론은 없다. 게다가 날 닮아서 메론을 싫어하지?” 좋고 싫은 것도, 이런 식으로 강제적이다. 주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섣불리 먹기라도 하는 때에는 호되게 당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홍당무는 잘 참는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곳에서 괴상한 일로 자신을 흐뭇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디저트로 나온 메론이 남자 르삑 부인은 홍당무에게 찌꺼기를 토끼에게 갖다 주라고 시켰다. 토끼장으로 들어서자 토끼들이 홍당무를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자, 좀 기다려. 사이좋게 나눠 먹자구나.”

풀과 양배추들이 뒤범벅이 되어 쌓여져 있는 그 위에 홍당무는 털썩 주저앉았다. 토끼들에게는 메론 씨를 털어주고, 자기는 국물을 쭉쭉 빨았다. 발효하기 전의 포도 물 못지 않았다. 그런 다음 가족들이 먹다가 남긴 껍질에 붙은 살을, 말하자면 아직 입 안에서 녹일 수 있는 것은 조금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리고 파란 껍질은 쪼그리고 앉은 토끼들에게 주었다. 토끼장의 문은 닫혀 있다. 모두 낮잠 잘 시간에 햇빛이 토끼장 지붕 틈으로 새어 들어와 그 밑을 시원한 그늘로 만들고 있다.



곡괭이

형 훼릭스와 홍당무가 곡괭이로 밭을 일구고 있다. 형의 것은 대장간에서 주문한 쇠로 된 것이지만, 홍당무의 것은 손수 만든 나무 곡괭이다. 그러다가 돌연 홍당무가 이마 한가운데를 곡괭이로 얻어맞았다. 그런데도 형을 침대로 옮겨 살며시 눕혀야만 했다. 형이 동생의 피를 보고 까무러쳤기 때문이다. 온 식구가 그리로 몰려와서, 걱정스러운 듯 한숨짓고 있다. 홍당무는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다. 홍당무의 이마에 헝겊을 감고 있는데, 벌써 빨갛게 피가 물들어 있었다. 누나는 버터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팠지만 홍당무는 울지 않았다. 왜냐면 그래 봤자 별수 없다고 모두가 말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형이 눈을 떴다. 형은 단지 무서웠을 뿐이지 아무 일도 없었다. 얼굴에 차차 핏기가 돌아오자, 걱정과 불안이 모두의 마음에서 사라져갔다. “밤낮 이렇다니까.” 르삑 부인이 홍당무에게 말했다. “왜 조심하지 않았니, 이 바보야?”



엽총

르삑 씨가 사냥을 떠나는 두 아들에게 말했다. “엽총은 두 사람에 한 자루만 있으면 돼. 사이좋은 형제는 뭐든지 같이 쓰는 거다.” 형은 번갈아 쓰겠다고 다짐했다. 홍당무는 믿지 않았다. 르삑 씨가 자루에서 총을 꺼내 누가 가지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형은 홍당무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르삑 씨는 엽총을 홍당무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형이 홍당무에게 빈손으로 돌아올 일은 없겠느냐고 물었다. 홍당무는 자신 있다고 대답했다.

새떼를 발견하고 홍당무가 살그머니 다가가자 형은 거리가 멀다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홍당무가 믿으려하지 않자 형은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느닷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새들은 깜짝 놀라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작은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는 휘어져서 새는 흔들거리고 있다.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움직이고 배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홍당무가 말했다.“됐다. 저 놈 같으면 쏠 수 있어. 확실해.”



그러자 형이 홍당무의 총을 뺐으며 말했다. “비켜 봐, 정말 이 놈은 근사한데, 이건 꼭 맞을 거야. 빨리 총을 이리 줘.” 총을 뺏겨 빈털터리가 된 홍당무는 하품을 하고 있다. 새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마치 요술 같았다. 홍당무는 아까까지 총을 소중하게 가슴에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을 빼앗은 형은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되돌아왔다. 형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잡았으니, 내일은 네가 잡아.” “또 내일이라고? 언제나 전날에는 그렇게 약속을 했잖아. 좋아, 그보다도 다른 새를 찾아야지. 이번에는 내가 쏘아볼게.” “안 돼. 벌써 늦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자.”

두 사냥꾼은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가끔 농부를 만났는데 모두들 말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설마 아버지를 쏜 것은 아니겠지?” 홍당무는 기분이 좋아져서 아까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둘은 으스대며 돌아왔다. 르삑 씨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자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홍당무야, 아직도 총을 메고 있구나. 그럼, 네가 죽 가지고 있었니?” “네, 대부분….”



술잔

홍당무는 이제부터 식사 때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로 했다. 2, 3일 동안에 마시는 버릇을 없애 버렸으므로 집안 식구나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사연인즉 이렇다. 어느 날 르삑 부인이 포도주를 따라주자 홍당무는 목이 마르지 않아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은 다른 사람이 먹을 게 많아졌다며 좋아했다. 이튿날도 홍당무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그러자 모두들 놀라고 말았다. 르삑 씨가 말했다.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낙타도 타지 않고 혼자서 사막을 헤멜 때 말이다.” 형과 누나는 홍당무가 언제부터 다시 마시게 될 것인가 내기를 했다. 그러자 홍당무는 두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졌다. 르삑 부인은 여전히 술잔을 내놓지 않았고, 홍당무도 잔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비꼬는 칭찬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도 무관심하게 들어 넘길 따름이었다.

한편 홍당무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는 동안에 고통스러워지겠지 하고 걱정했는데, 고집이나 인내로 꼭 지켜 나가기만 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쓰라린 괴로움을 스스로 떠맡아서 모험을 해볼 작정으로 시작했었는데, 괴롭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몸도 오히려 좋아졌을 정도였다. 목마른 것뿐만 아니라, 배고픈 것도 견뎌 보이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밥 같은 건 먹지 않고 공기로만 어떻게 살아갈 수 없을까. 벌써 술잔 같은 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벌써 오래 전부터 술잔은 필요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하녀 오노리느가 그 속에다 촛대를 닦는 붉은 가루약을 가득 담고 말았다.



나팔

르삑 씨가 파리에서 돌아오며 선물을 가져왔다. 형과 누나는 밤새 기다리던 것을 받아들고 기뻐했다. 아버지는 등 뒤로 감추고 짓궂게 홍당무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나팔이냐 아니면 권총이냐?” 홍당무는 개구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나팔을 갖고 싶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홍당무는 늘 주위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 또래의 아이들은 권총이나 긴 칼 또는 전쟁놀이의 장난감이 아니면 진짜 노는 기분이 안 난다고. 따라서 아버지는 홍당무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싶은 나이가 됐기 때문에 알맞은 선물을 사 오신 것이다. 홍당무는 아버지의 기분을 확실히 알아맞혔다는 듯이 당돌하게 권총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르삑 씨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권총 쪽이 좋니! 너도 그렇게 변했구나.” 얼떨떨해진 홍당무는 즉시 바꾸어서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장난삼아 말했을 뿐이에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난 아주 싫어요. 권총 같은 건. 자, 빨리 나팔이나 주세요. 난 나팔 부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러자 르삑 부인이 야단을 쳤다.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했니? 아버지를 골탕 먹이려고 그랬지? 나팔이 좋으면서 권총이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거짓말을 한 벌로, 권총도 나팔도 주지 않겠다.”

하얀 속옷을 개켜 둔, 벽장 꼭대기 서랍 속 위에 빨간 술 세 개와 금빛 술이 있는 깃발에 싸인 홍당무의 나팔은 나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당무의 손에 닿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은 채 숨도 쉬지 못하고 마치 마지막 심판 날의 나팔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뜨

하인 오노리느 대신에 아가뜨가 왔다. 그녀 덕분으로 르삑 씨 집안의 관심은 2, 3일 동안 자신한테서 떠나 이 아가씨 쪽으로 옮겨갈 것 같다. 모두들 커다란 부엌에서 식사를 한다. 아가뜨는 팔에 냅킨을 걸고 아궁이에서 찬장으로, 찬장에서 테이블로 언제라도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조용히 걷는다는 것은 아예 이 아가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말이 너무 빠르고 웃는 소리도 너무 컸다. 무엇을 하건 지나치게 열중하는 것이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몫은 르삑 부인이 담아 준다. 형과 누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당무의 차례다. 그는 식탁 맨 끝에 앉아 있다. 홍당무는 절대로 더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마치 더는 못 먹게 되어 있는 것 같다. 한 그릇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줄까?”하고 물으면 더 받는다. 포도주는 마시지 않고 그는 좋아하지도 않는 밥으로 배를 채운다. 집안에서 단 한 사람, 밥을 좋아하는 르삑 부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형이나 누나는 훨씬 더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었다. 더 먹고 싶으면, 자기 접시를 요리 접시 쪽으로 가져가서 더 담아 온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이상할 것은 없다. 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런 것뿐이다.

아가뜨는 역시 르삑 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의 눈치 빠름을 보여 주인어른의 환심을 사서 유능한 하녀로 인정받겠다고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르삑 씨는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먹기 시작했다. 이때다 하고 찬장으로 뛰어간 그녀는 다섯 근이나 되는 칼로 자르지도 않은 바퀴 모양의 왕관 빵을 가지고 와서 냉큼 내놓았다. 주인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미리 눈치 챘다는 생각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르삑 씨는 냅킨을 접고는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모자를 쓰더니 담배를 피우러 뜰로 나갔다. 그는 식사를 끝내면 더는 먹지 않는 편이었다. 아가뜨는 다섯 근의 커다란 바퀴 모양의 빵을 안고 그 자리에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바퀴 만드는 회사의 선전용 인형과 똑같은 모습으로.



예정표

“어때, 질렸지?” 부엌에서 아가뜨와 단둘이 되자 홍당무는 곧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낙심하면 안돼. 이런 일은 늘 있는 거니까. 그런데 병을 여러 개 가지고 어딜 가는 거지?” “헛간에요. 홍당무 도련님.” “헛간으로 가는 계단이 낡아서 여자들에게는 위험하니까 내가 갈게. 그리고 전부터 헛간 볼일은 내가 맡아 하기로 했어. 아침에 나는 개장을 열어 개에게 수프를 줘. 저녁 때도 역시 내가 휘파람을 불어서 자러 오게 하고. 한눈을 파느라고 좀처럼 안 돌아올 때는 기다리고 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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