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크리스토프
로맹 롤랑 지음 | -
장 크리스토프(Jean Christophe)
로맹 롤랑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장 크리스토프: 타고난 재능을 가진 음악가. 음악과 삶에 대한 강렬한 열정의 소유자.
멜키올: 크리스토프의 아버지. 아들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했지만 아들을 사랑했다.
루이자 :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준다.
장 미셸 노인 : 크리스토프의 할아버지. 크리스토프에게 음악의 길을 열어준다.
앙투아네트 : 크리스토프를 우연히 만난 뒤 그를 사랑하지만 끝내 고백하지 못한다.
올리비에 : 앙투와네트의 남동생. 크리스토프와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된다.
그라치아 : 소녀 시절 크리스토프를 남몰래 사랑하고 훗날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새벽
라인강이 물소리를 크게 내면서 집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 낮 동안의 밝은 빛이 사라진 밤, 갓 태어난 아기가 요람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기가 칭얼거리자 장 미셸 노인이 램프에 불을 켜고 살며시 요람에 다가갔다. “어허, 이놈 참 밉게도 생겼구나. 그런데 네 남편은 도대체 이런 때에 어디를 돌아다니는 거냐?” “극장에 갔어요. 음악회 연습이 있거든요.” “극장은 벌써 문을 닫았다. 내가 지금 그 앞을 지나서 오는 길이야. 그 녀석 또 거짓말을 했구나. 어쩌다 내가 그런 주정뱅이를 아들로 두었을까!” “제 잘못이에요. 그이는 저 같은 여자하고 결혼해서는 안되었던 거예요.”
미셸 노인의 아들 멜키올이 당시 어느 저택의 하녀로 있던 루이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크라프트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크라프트가는 재산은 없었지만, 라인강가에 자리잡은 이 작은 읍내에서는 대대로 뛰어난 음악가를 배출하는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다. 멜키올은 젊은 나이에 벌써 궁정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렇지만 멜키올이 왜 가난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미인도 아닌 루이자와 결혼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멜키올은 자신의 처사를 후회하여 술집을 드나드는 주정뱅이가 되었고, 따라서 그의 음악적 재능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아기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때 성당의 종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고 은은하게 울려왔다. 그러자 울던 아기는 울음을 뚝 그쳤다. 절묘한 종소리는 풍요하게 흐르는 젖과도 같이 아기의 몸 속에 흘러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장 크리스토프는 태어났을 때부터 소리에 민감한 아기였다.
세월이 흘러 크리스토프의 마음도 몸도 점점 성장해가고 있었다. 어머니 루이자는 하찮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섯 살이 된 크리스토프는 어느날 어머니에게서 좋은 옷을 한 벌 받았다. 그는 그 옷을 입은 채로 어머니가 일하는 저택에 갔다. 저택으로부터 두 아이의 놀이상대가 되어주라는 분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프를 보자 남자아이가 앞을 가로막고 서서 크리스토프의 윗도리를 잡고 말했다. “야, 이건 내 옷이야.” “가난뱅이 아이야.” 여자아이가 깔보듯 말했다. 두 아이는 크리스토프를 곯려주려고 의자를 포개 높은 장애물을 만들어 크리스토프에게 뛰어넘어보라고 했다. 장애물로 돌진하던 크리스토프는 넘어져 손이 까지고 바지와 윗도리 여기저기가 찢어졌다. 일어나려는 크리스토프에게 두 아이는 발길질을 해대고 등 위에 올라타 얼굴을 짓눌렀다. 크리스토프는 너무 화가 나 위에 올라탄 두 아이를 굴러떨어지게 했다. 결국 크리스토프는 귀부인에게 모진 매를 맞았고 루이자도 다짜고짜 아들의 뺨을 때렸다. 아버지 멜키올마저 집에 돌아온 크리스토프를 때리고 루이자와 심하게 다투었다. 크리스토프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도, 인생에 대한 희망도 느낄 수 없었다. 아직 어린 그로서는 어머니가 겪는 고생이나 아들의 반대편에 서야 하는 괴로움을 알 수 없었다.
그후 크리스토프의 집은 살림을 해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그 사이 크리스토프를 둘러싼 답답하고 괴로운 생활 속에서도 한줄기 빛 같은 희망이 생겼다. 장 미셸 노인이 낡은 피아노 한 대를 선사해준 것이다. 피아노 곁을 떠날 줄 모르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멜키올은 본격적으로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는 아버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멜키올의 생각은 다른 데 있었다. 멜키올은 아들의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아들을 이용해 풍족한 생활을 누려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때문에 견딜 수가 없는 데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은 이후 그는 일부러 틀리게 쳐서 아버지를 실망시키려 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마구 때리는 아버지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음악이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다. 아버지가 무섭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크리스토프에게 한 말이 큰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예술을 위해서라면, 얼마간의 고통은 당연히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란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크리스토프를 유명한 작곡가 허슬러에게 소개시켰다. 허슬러는 천진스러운 크리스토프에게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커서 훌륭한 음악가가 되거든 베를린으로 나를 찾아오너라. 내가 도와줄 테니.” 레오펠트 대공의 음악회에서 크리스토프는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작곡한 자신의 곡을 연주했다. 대공은 크리스토프를 쓰다듬으며 ‘제2의 모차르트’라고 극찬했다. 대공은 궁정 전속 피아니스트로 크리스토프를 임명했다.
아침
크리스토프는 열한 살이 되었다. 그 사이, 음악 공부를 계속하여 악기라면 무엇이든 연주할 수 있었고 궁정 악단의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 힘으로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술버릇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집안 살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미셸 노인이 죽고 나서 멜키올의 방종은 극에 달했다. 어느날, 크리스토프는 소중한 피아노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도둑놈! 어머니와 내것, 할아버지 물건을 훔쳐 팔아먹는 도둑놈! 피아노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크리스토프는 증오에 찬 눈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고물상에 있다.” 멜키올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크리스토프에게 넘겨주었다. “크리스토프야, 제발 나를 경멸하지 말아다오.” “전 아버지를 경멸하지 않아요! 단지 슬플 뿐이에요.”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멜키올은 돈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않을 것 같아 자신의 급료를 크리스토프에게 지불해달라고 대공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멜키올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직무를 게을리하여 끝내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제 집안 식구들의 부양은 열네 살인 크리스토프 혼자 떠맡게 되었다.
추밀고문관의 미망인 요제피아 폰 케리히 부인이 딸과 함께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크리스토프는 딸 미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둘은 서로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케리히 부인은 크리스토프를 친아들처럼 보살펴주었지만 두 사람의 행동을 눈치채고는 언짢아져서 일부러 미나 앞에서 비꼬는 말투로 크리스토프를 비웃었다. 미나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했지만 그 이후로 미나가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눈은 전처럼 관대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가 재미있어 웃으면 웃음소리가 너무 크다고 나무랐으며 그의 말씨나 옷차림에 대해서도 넌지시 충고해주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미나의 마음속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부활절이 되어 미나는 어머니와 함께 친척집에 잠시 여행을 가기로 한다. 출발 전날,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영원한 맹세’를 되풀이하고 매일 편지를 쓰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처음 며칠 동안 크리스토프는 미나의 편지를 받고는 방안에 틀어박혀 그녀만을 위한 작품을 완성했다. 그런데 이주일도 전에 편지를 보냈건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편지를 썼다. 그후 미나의 짤막한 답장이 왔다.
나는 잘 있어요. 바빠서 편지 쓸 시간이 없어요. 앞으로는 가능한 한 편지를 보내지 말아주세요.
크리스토프는 어이가 없었다. 어느날 크리스토프는 할아버지의 친구에게서 미나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크리스토프는 케리히 부인 저택으로 뛰어갔으나 미나의 차가운 눈빛만을 느낄 뿐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케리히 부인에게 미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케리히 부인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그에게 재산이 없다는 것, 미나와 취미가 맞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간의 신분 차이를 이유로 들어 거절했다. 크리스토프는 깊이 상처를 입고 자살을 결심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냇물에 빠져 죽은 멜키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했던 자책감에 괴로워하며 아버지의 시체 위에 쓰러져 하염없이 울었다.
청년
크리스토프는 다시 인내심 있게 음악에 열중했다. 두 동생들은 직업을 구해서 집을 나갔고 어머니와 크리스토프는 아담한 3층집에 세를 들었다. 그 집 주인은 할아버지의 친구인 오일러씨였는데 그의 손녀 로자는 귀찮을 만큼 크리스토프 곁을 따라다녔다. 오일러 일가는 젊은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는 크리스토프와 로자를 결혼시킬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오히려 오일러 일가가 경멸하는 자비네 프레리히라는 스무 살 미망인에게 마음이 끌렸다. 자비네와 대화하면 항상 편안하고 그녀 곁에 가면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던 어느날 자비네는 크리스토프가 연주 여행을 떠난 사이에 갑자기 감기에 걸려 불쌍한 어린 딸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일러 집안 사람들은 크리스토프의 마음이 다시 로자에게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그는 이번에는 아더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행실이 나쁜 아더와도 헤어지고 오일러의 집에서도 쫓겨났다. 그때부터 그는 술을 마셨다. 어느날 그는 술집에서 나오다가 근처 가게의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아버지 멜키올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반항
크리스토프는 독일 음악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 ‘멘델스존에게는 알맹이가 없어, 그저 쓸쓸한 생각밖에 없다. 베버에게는 메마른 마음과 머리만의 감동밖에는 없고, 슈베르트는 깊이가 없는 감수성에 빠져 있다. 위대한 세바스찬 바흐에게는 어딘가 바람이 통하지 않아서 곰팡내가 나는 데가 있으며, 소박한 슈만에게는 독일 음악이 지니는 허위의 전형이 있다. 바그너도 허위의 이상주의에서 벗어날 것이 없다.’
크리스토프는 자기의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작품에 대해서는 상대가 전문적인 음악가든 음악 애호가든 솔직하게 말했다. 음악가 동료들은 자제심 없이 마구 지껄이는 크리스토프를 비웃었다. 기회만 있으면 그의 작품을 깎아내렸고, 들어보기도 전에 비평했다.
이즈음 프랑스의 극단이 순회공연을 왔다. 공연물은 프랑스어로 번역한 『햄릿』이었다. 친구 만하임이 입장원 두 장을 주었으나, 어머니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으므로 크리스토프는 혼자 극장에 갔다. 그런데 극장 앞에서 입장권이 없어 서운한 표정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그는 한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입장권이 한 장 남아 있는데 함께 가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녀는 크리스토프의 친절한 제의와 솔직한 태도에 끌려서 동행하기로 했다. 공연 중에 크리스토프는 오필리어 역을 맡은 여배우에게 매혹되어 옆자리의 여자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막간이 되어서야 그 여자에게 말을 붙였다.“당신은 외국 분이군요? 어느 나라 분인가요?” “프랑스예요.” “여기 오셔서 프랑스어를 들으시니 기분이 좋으시죠?” “네 무척이요.”
막이 차례차례로 진행되면서 여배우의 슬픈 노래에 감동받은 크리스토프는 극이 끝나자 자기도 모르게 극장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이름도 모르는 옆 좌석의 여자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집으로 오는 도중의 역에서 그는 반대쪽 기차 창가에 『햄릿』을 함께 구경했던 프랑스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나누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언제까지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를 태운 기차는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날 크리스토프는 만하임을 만났다. “너는 대단한 녀석이야. 프랑스 여자와 연극 구경을 하다니! 그녀는 그류네바움가의 가정교사였는데 너 때문에 그류네바움네 사람들이 노발대발해서 그녀를 내쫓아버렸어.“ 크리스토프는 비통한 생각에 그 여자의 행방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그녀를 자기의 희생자라 부르며 결코 잊으려 하지 않았다.
그후 얼마 안 있어 크리스토프는 그리스 비극을 개작한 『이피게네이아』를 작곡했으나 공연은 완전히 실패했고 그는 악평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공박하는 글을 써서 신문사로 가지고 갔지만 게재를 거부당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신문사에 그 논문을 가져갔다. 다음날 논문은 발표되었으나 신문은 동지 크리스토프가 앞으로 그 회사에 협력해주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일찍부터 산책을 나가 신문을 보지 못한 크리스토프는 궁정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대공은 험악한 얼굴로 곧장 그에게 다가왔다. “너 같은 악당에게 모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아!” “저는 전하를 모욕한 적이 없습니다.”“무엇이라고! 이 염치없는 신문은 매일같이 나를 모욕하고 있어. 나에게 더러운 욕설을 마구 써대고 있단 말이야!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앞으로 나를 적대하는 신문에 투고하는 것은 절대로 금하겠다.” “전하, 저는 다만 음악에 관해서 썼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신문에 기고하든 그건 저의 권리입니다. 저는 전하의 노예가 아닙니다. 저는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쓰고 싶은 것은 씁니다.” “나가!” 드디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대공은 호통쳤다. 반항의 최후의 종점이었다. 이제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가 고생하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의 번개처럼 허슬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밤 그는 베를린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그는 허슬러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저는. 크리스토프 크라프트라고 합니다. 전에 한 번.” “기억에 없는데.” 크리스토프는 실망하여 돌아가려다 용기를 내 자기의 작품을 좀 들어봐달라고 부탁했다. 허슬러는 마지못해 허락은 해주었지만 곡이 끝나자 경멸하듯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시시한 작품뿐이군.” 크리스토프는 악보를 챙겨나왔다.
광장의 시장
이제 이 고장에서도 독일에서도 살아갈 수 없게 된 크리스토프는 프랑스로 출발했다. 그런데 그날 뜻하지 않게 군인들과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크리스토프는 그들을 때려눕혔다. 그는 도망쳐야 했기에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파리에 도착해서 친구 콘의 소개로 예술가 친구들을 만났지만 이들의 토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파리의 문학도 연극도 크리스토프에게는 환멸밖에는 안겨주지 않았다. 그는 부호의 딸인 코레트 스토뱅의 가정교사 자리를 얻었다. 스토뱅가에는 코레트 외에 열서너 살쯤 되는 사촌 그라치아 폰탱이 어머니가 죽은 뒤로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라치아는 파티에서 듣는 사람은 상관없이 긴 곡을 끝까지 연주하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코레트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으므로 그라치아에게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변덕스러운 코레트 때문에 불행했고 이 크리스토프의 불행으로 그라치아 또한 불행했다.
그 무렵 그는 음악회에서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가 청중들의 야유와 욕설을 들었다. 화가 난 크리스토프는 연주를 중단하고 「마르블루가 싸움터를 나가다」를 경멸하는 태도로 연주했다. 그리고는 어깨를 쭉 펴면서 “여러분에게는 이것이 안성맞춤이오!”라고 한마디 던지고는 나가버렸다. 그는 적의에 찬 이 도시에서 고독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크리스토프는 코레트를 단념하기로 결심하고 스토뱅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라치아는 크리스토프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처지를 슬퍼하여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크리스토프를 잊지 못해 그에게 격려 편지를 썼으나 그 편지는 도중에 길을 잃고 끝내 배달되지 못했다. 크리스토프는 멀리서 가만히 자기를 지켜보는 이 소박한 애정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