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제니 그랑데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 -
으제니 그랑데(Eugénie Grandet)
발자크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그랑데: 소뮈르의 갑부. 오로지 돈에만 관심 있는 구두쇠다.
으제니 그랑데: 그랑데의 딸. 사촌과의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
샤를 그랑데: 으제니의 사촌. 소뮈르로 와서 으제니를 사랑하게 된다.
크뤼쇼 드 봉퐁: 소뮈르의 재판소장. 봉퐁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이름 뒤에 봉퐁을 결부시켰다. 데 그라생: 은행가. 그랑데의 탐욕적 목적에 이용당한다.
소뮈르의 부자, 그랑데씨
소뮈르읍의 한산하고 어두침침한 거리에 오랜 세월로 닳아빠져 폐허 같은 목조 가옥들 가운데 귀족저택이 우뚝 서 있다. 그랑데씨의 집이다. 통을 파는 통장수였던 그랑데씨는 부유한 재목상의 딸과 결혼했다. 프랑스 공화국이 성립된 후 그의 아버지는 뇌물을 바쳐 비옥한 포도밭과 소작지를 손에 넣었다. 그랑데씨는 소뮈르 관구 행정원에 임명되었다가 읍장까지 지내게 되지만 공화주의자라는 이유로 나폴레옹에 의해 사임되었다. 그러나 그의 포도원은 최상급의 포도주를 생산했고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게다가 장모, 장모의 부친, 외할머니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소뮈르군 내에서 최고의 부자였다.
그는 탐욕에 열정적인 사람으로 돈을 모으는 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는 돈 문제에 관한 한 호랑이처럼 오랫동안 노리다 덤벼들고 한줌의 재화를 집어삼킨 다음에는 뱀처럼 편안히 누워 소화시켰다. 그는 소뮈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부자였을 뿐만 아니라, 모아둔 돈은 웬만해서는 쓰지 않는 구두쇠로 소문이 났다. 이런 그에게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는데, 으제니 그랑데라고 했다.
그랑데씨의 주변에는 공증인 크뤼쇼와 은행가 데 그라생이 있다. 그런데 크뤼쇼의 조카인 초심 재판소 소장 크뤼쇼 드 봉퐁은 으제니의 결혼 상대자가 되고 싶어했다. 또한 데 그라생 부인도 아들 아돌프를 으제니와 결혼시키고자 했다. 때문에 크뤼쇼 집안과 데 그라생 집안은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했다.
1819년 11월 중순 으제니의 23세 생일날이 되었다. 그랑데는 경사스런 날에 자기가 하던 관습대로 으제니에게 진귀한 금화 한닢을 주었다. 초저녁 무렵 공증인 크뤼쇼, 신부 크뤼쇼, 크뤼쇼 드 봉퐁은 데 그라생 집안보다 앞서 도착하도록 서둘렀다. 재판소장은 으제니에게 희귀한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했다. 이어 도착한 데 그라생 집안의 아돌프는 뚜껑 위에 E․G라고 고딕체로 도금 새겨진 재봉상자를 바쳤다. 으제니는 얼굴을 붉히면서 좋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아무데서도 못 보았어요.” “아돌프가 파리에서 가져왔어요. 그걸 고른 것도 아돌프예요.” 데 그라생 부인이 으제니의 귀에 속삭였다. ‘두고 봐라, 간악한 년. 너든 네 남편이든 언제든지 소송만 하면 절대 이기지 못하게 해줄 테다.’ 재판소장은 마음속으로 지껄였다.
이들을 보면서 그랑데는 마음속으로 ‘모두 내 돈 때문에 모였군. 내 딸은 어느 놈에게도 주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크뤼쇼 집안과 데 그라생 집안의 경쟁과 견제가 계속되던 생일 잔치날, 여행가방들을 든 낯선 사나이가 찾아왔다.
파리에서 온 사촌
그 낯선 사나이는 파리에 사는 기욤 그랑데의 아들, 즉 으제니의 사촌인 샤를 그랑데였다. 그는 23세의 멋쟁이 청년으로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파리의 유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샤를의 아버지는 아들을 소뮈르로 보내는 사연을 편지로 적어 그랑데에게 보냈다.
형님, 이 편지가 형님 손에 들어갈 때까지 저는 파산의 치욕을 견디며 생존해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무일푼이 되었고 백만 프랑의 빚을 갚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저는 아들과 다정하게 작별했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의 형님이여, 샤를에게 가족이라곤 없습니다. 제 죽음에 임하여 샤를을 형님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잠시라도 산소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멀리 떠나기를, 인도로 가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소서.
그랑데는 예전에 자신을 무시하던 동생이 죽기 전에 아들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샤를을 조카로 대접하기를 꺼렸다. 한편 으제니는 한눈에 이 파리의 사촌에게 매혹되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 난 후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공을 들여 틀어올렸다. 그리고 자주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보고는 스스로를 비판했다. ‘나는 오빠에게 견줄 만큼 그다지 예쁘지 않구나!’
키가 크고 튼튼한 으제니는 보통사람들 마음에 들 만한 매력은 없었지만, 아직도 어린애 같은 순수함, 순결하고 고결한 매력이 있었다. 으제니는 오빠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절약가인 아버지 앞에서는 커피에 크림이나 설탕을 넣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샤를이 도착한 다음날 그랑데가 으제니와 산책하고 있을 때 공증인 크뤼쇼가 인사를 했다. “파리에서 사위님이 오셨죠. 온 소뮈르가 그 얘기로 떠들썩합니다. 곧 결혼계약서를 작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말이오. 내 딸년을 사촌 오라비에게 주느니 차라리 르와르강에다 던져버리겠습니다.”
이 대답에 으제니는 정신이 아찔했다. 가슴 속에 움트기 시작한 사랑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떨어져 짓밟혔다. 돌아올 때는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집 가까이에서 그녀는 아버지보다 앞섰다. 공증인 크뤼쇼는 신문을 펼쳐들었다. “저런, 이 기사를 읽어보십쇼.” 크뤼쇼가 신문을 그랑데 눈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파리의 가장 신망 있는 거상의 하나인 그랑데씨는 어제 평상시대로 증권거래소에 출두한 후에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 주식 중매인과 공증인 로갱의 파산은 그를 파멸시켰다.” “알고 있었소.” 그랑데는 태연하게 말했다.
집에 돌아온 그랑데는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으제니는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처음 사랑한 사람의 불행이 가슴을 결박하는 것처럼 죄어왔다. 그녀는 울었다. “으제니야, 그놈 때문에 운다는 것은 그만둬라. 곧 인도로 떠날 거야. 두 번 다시 서로 얼굴을 못 볼 테니까.”
그랑데는 평소처럼 침착한 태도로 집을 나섰다. 그랑데 부인은 딸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으제니는 아버지에게 매맞을 각오를 하고 불행한 사촌을 위해 최상의 아침을 준비했다. “염려 마라, 으제니야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내가 모두 떠맡을 테니.” 그랑데 부인이 말했다. 으제니는 새삼 엄마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느꼈다.
샤를이 일어나 늦은 아침을 들고 있는데 그랑데가 점심을 먹으러 들어왔다. “조카에게 잔치를 베풀었구나.” 모두들 그랑데의 눈치를 살폈다. 식사가 끝나자 그랑데는 샤를을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 아버지의 파산과 자살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샤를은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가 침대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저녁 때 네덜란드 상인들을 만나고 난 뒤, 그랑데는 기쁜 얼굴로 돌아왔다. 판매 이익은 엄청났다.“그러면 아버지, 샤를을 구할 수 있겠네요?” 으제니가 물었다. “나도 샤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할 거야. 함부로 입을 놀리진 마라.” 그랑데는 조카의 신음소리는 들은 체 만 체, 동생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는 신문 위에다 자신의 투자액을 계산했다. “여보, 모두 상복을 입어야겠죠?” 그랑데 부인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돈 쓸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군. 상은 마음에 있는 거지 의복에 있는 것이 아냐. 내겐 상장 하나면 충분해.” 으제니는 말문이 막혀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다.
사랑의 맹세
그날 밤 으제니는 여러번 눈을 뜨고 샤를에게로 귀를 귀울였다. 새벽에 무서운 절규가 들렸다. 으제니는 옷을 입고 조용히 샤를에게로 갔다. 샤를은 안락의자에 앉아 자고 있었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으제니가 앞에 있는 것을 알았다. “미안해, 으제니.” “오빠, 여기에는 오빠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어. 뭔가 필요한 것이 있을 것 같아 왔어요. 누워야지, 그렇게 앉아 있으면 피곤할 텐데.” 으제니는 오빠의 방에 들어온 것이 기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오빠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오빠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몰라.’ 자기 방에 돌아왔을 때는 거의 설 수도 없을 정도로 온몸이 떨렸다.
그날 밤 그랑데 영감의 생각은 다른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어떤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영감은 돈 한푼 안 들이면서도 죽은 동생의 명예를 구할 방법을 궁리했다. 자기는 한푼도 안 내고 우애있는 형제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으제니는 사랑하는 사촌을 마음놓고 보살펴주면서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 둔 연민의 정을 거리낌없이 그에게 쏟을 수 있었다. 마침내 온순하고 관대한 어머니 역시 사랑에 들뜬 딸의 마음을 허용해주었다. 샤를은 가장 애정어린 우아한 손길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이같은 애정과 따뜻한 동정을 강렬히 원했다. 그의 눈에 으제니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광채를 띠고 보여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마음은 하나의 생각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었고 그들의 눈은 동일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뇌로 말미암아 샤를의 용모를 감싸던 베일은 으제니의 마음을 파고드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불행, 그것이 아마 그들의 사이를 접근시켰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때에 소뮈르 읍내는 그랑데가 크뤼쇼 집 사람들에게 만찬을 베푼다는 얘기로 떠들썩했다. 그랑데 영감은 집에 온 크뤼쇼 드 봉퐁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봉퐁씨, 파산은 어떤 경우에 면하게 되는지.” “청산만 하면 청렴결백한 사람이 돼요. 방법이 있습니다. 동생분의 어음이 만일 시장에서 얼마의 할인으로 매매된다면 누구든 당신의 친구가 몰래 전부를 매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파리의 그랑데씨는 합법적으로 채무를 벗어나게 되죠. 당신께서는 귀찮은 일일 테니 제가 파리로 대신 가드리지요. 여비만 지불해주십시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데 그라생 사람들이 그랑데의 불행에 동정을 표시하고 우정을 보이러 방문한 것이다. 하지만 실은 왜 크뤼쇼 집안이 만찬에 초대되었는지를 알아낼 속셈이었다. 공증인 크뤼쇼가 은행가 데 그라생에게 말했다. “그랑데씨는 동생의 부채를 청산할 계획을 세우고 계시죠. 제 조카가 곧 파리로 가 채권자와 타협한 후 합당한 처리를 하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라생이 말했다. “친애하는 그랑데씨, 이런 것은 거스름돈, 지불, 이자 같은 상업적인 문제입니다. 나도 볼일이 있어서 파리에 가기로 되어있는데 저도 함께 도와드리죠.” “저 같으면 여비를 받기는커녕 돈을 내고서라도 하겠어요.” 그라생 부인 역시 그 위탁을 적수로부터 빼앗기 위해 거들었다.
그랑데는 데 그라생을 데리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실은 재판소장보다 당신이 더 믿음직스럽소. 파리로 가시니만큼 몇백만 프랑어치의 공채를 사주시면 좋겠는데. 그리고 내 조카녀석에 관한 형세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살펴주시오.” 그리하여 전 읍내는 우애깊은 희생의 미담으로 꽉 차게 되었다.
영감의 용의주도함은 완벽했다. 다음날 아침 그랑데는 자신의 금화를 모두 앙제르로 갖고 가서 투기자들에게 팔고, 돌아오는 길에는 국고 지불의 어음액면가를 높이고 공채를 살 금액을 가져올 준비를 했다. 아버지가 출발한 뒤 으제니는 샤를의 방으로부터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잠들어 있었는데, 책상 위에 그가 쓴 두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샤를이 살롱에서 만난 애인 아네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리운 아네트’로 시작하는 편지에 으제니는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그리운 아네트, 우리 아버지는 자살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도 내 재산도 다 없어졌습니다. 난 오늘밤 여러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프랑스를 떠날 생각입니다. 하지만 인도나 아메리카로 가서 운을 시험하는 데 필요한 백 프랑도 갖고 있지 못한 형편입니다. 그리고 아! 이백만의 부채...... 나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아네트, 나는 우리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운 아네트, 오늘로써 영원히 헤어집시다.
‘헤어지게 되는구나. 아이 좋아라.’ 으제니는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또 하나의 편지는 친구 알퐁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처분하도록 친구에게 부탁하는 편지에 으제니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자신의 금화들을 꺼내보았다. 그것이 아무리 진귀한 것이거나 귀중한 것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자신의 보물을 샤를에게 내놓았다. 그리고 샤를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부모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금상자를 으제니에게 건네주었다.
“으제니에게 무릎 꿇고 이 보물을 지켜달라고 간청하고 싶어. 설사 내가 으제니의 재산을 가져다 탕진하고 죽어버려도 이 금으로 변상할 수 있겠지. 네게만 이 초상화를 맡길 수 있어.” 샤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키스했다. 비로소 으제니에게는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공범자들은 마주보며 서로의 마음을 표현했다. “으제니, 몇 해 안에 돌아올 생각은 할 수 없어. 난 죽어버릴 수도 있어. 나와 일생을 같이할 생각은 말아줘.” “날 사랑하고 있어?” “오오! 그럼, 진심으로.” “난 기다릴 테야 샤를.” 두 연인은 작은방 옆 복도에서 가장 순수하고 달콤한 키스, 마음을 송두리째 쏟은 키스를 주고받았다. 샤를의 항해 출발 날짜가 다가왔다. 그는 으제니의 눈에서 사라졌다.
가정 비극
은행가 데 그라생이 파리로 출발한 지 한 달 후, 그랑데는 10만 리브르의 공채 등록을 손에 넣었다. 게다가 데 그라생은 기욤 그랑데의 채권자들을 소집하여 협상했다. 채권자들은 소뮈르의 그랑데가 지불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유통어음을 지불했다. 그러나 채권자들의 변덕을 간파한 그랑데는 차일피일 공증 위탁을 미루어 기욤이 죽은 지 23개월이 지나자 대부분의 상인들은 위탁을 거절하거나 빚 회수를 잊어버렸다. 4년 째 연말에는 합법적인 결손액이 12만 프랑이 됐고, 5년 반이 되어서는 조카가 인도에서 돈을 단단히 벌고 있으며 전액 지불할 것이라고 채권자들에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랑데 자신은 공채를 팔아 약 240만 프랑을 거둬들였다.
한편 소뮈르의 못마땅한 생활에 권태를 느낀 데 그라생은 파리에서 몹시 부도덕한 생활을 하며 가산을 축냈다. 데 그라생 부인은 아들 아돌프를 으제니와 결혼시키려던 계획을 단념하고 그를 파리로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불량배가 되었다고 했다. 데 그라생 부인은 그랑데에게 그랑데가 남편을 파리로 보낸 바람에 결국 패가망신했다고 그를 원망했다. “저도 끝까지 그리로 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재판소장이 대신 가길 원했으니까요.” 이리하여 그랑데는 데 그라생에게 하등의 신세도 지지 않은 것이 됐다.
샤를이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1820년 새해 아침, 그랑데는 예년처럼 으제니에게 금화 한 닢을 주었다. “으제니야,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행복해지려면 돈 없이는 안 되는 법이야. 옛다, 새 돈, 나폴레옹 금화다. 젠장, 내게는 금화 한푼이 없지 뭐냐. 금화를 갖고 있는 건 너뿐이야. 어서 네 금화를 보여주렴.” “제겐 금화가 없어요.” “금화가 없다고! 금화가 어디 있는지 말해.” “전 아버질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죄송해요. 제가 쓰고 싶은 대로 돈을 썼어요. 좋은 곳에 썼으니 안심하세요.”
그랑데는 노발대발했다. 아버지와 딸의 언쟁은 계속되었다. 그랑데 부인은 딸을 생각해주는 마음에서 묵묵히 있었다. 그날 이후 그랑데 부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수개월 동안 그랑데는 잠깐잠깐 부인을 만나보았으나 딸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노여움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그랑데 부인의 생명의 불꽃은 탄식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꺼졌다. 티끌 하나 없는 양처럼 그녀는 천국으로 갔다.
어머니가 별세한 다음날 으제니는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늙은 아버지의 마음을 여태껏 자신이 오해해온 것처럼 느꼈다. 그랑데는 선량한 눈길로 몇 시간이고 딸을 바라다보았다. 그날 저녁 그랑데는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게 된 딸에게 유산상속권을 포기해주기를 부탁한다.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으제니, 넌 내게 생명을 준 거다. 그런데 그건 이 아버지가 네게 준 것을 돌려주는 셈이니까 이젠 우리 서로 갚을 게 없는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