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완의 사랑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 -
스완의 사랑(Un amour de Swann)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스완: 유대인 부르주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지만 다소 경박하다. 탐미적인 성향이라 예술작품을 감상하기를 좋아하나 깊은 정신세계를 탐구할 지적 능력은 부족하다.
오데트: 고급 창녀. 사교 모임을 쫓아다니며 부와 명예를 가진 남자들을 유혹한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솔직하고 대담하다. 순진한 면도 있긴 하나 유행을 좇아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을 즐긴다.
베르뒤랭 부부: ‘작은 중심’이라는 사교 모임을 만들어 그곳에 모인 회원들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전형적인 속물들이다. 귀족들의 지적이고 화려한 사교생활을 흉내내면서도 콤플렉스가 있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그들을 혐오한다.
사랑의 시작 ― 스완, 오데트를 만나다
스완이 처음으로 오데트를 만나게 된 것은 옛 친구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 친구는 오데트를 매혹적인 여인이라며 그녀와 함께라면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을 건넨다. 그러나 스완이 보기에 오데트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왠지 모르게 관심이 끌리지 않는, 아무런 욕망도 불러일으키기도 않고 오히려 육체에 대한 혐오를 일으키는’, 게다가 그의 마음에 들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옆얼굴, 너무도 약해 부서질 것 같은 피부, 튀어나온 광대뼈, 너무도 초췌한 모습’을 한 여자다.
그러던 어느날, 스완은 오데트의 안내로 베르뒤랭가의 사교모임에 참석해, 그곳에서 귀족들의 사치와 교양을 흉내내면서도 그들을 혐오하고 자기들만의 ‘작은 공동체’를 만든 부르주아들을 알게 된다. 사교 모임이 끝난 후 그때까지는 아무런 감정 없이 오데트를 집까지 바래다준다. 그러나 오데트가 돌아간 후 스완은 그녀가 했던 말들을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다음 번 만날 때까지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려면 무척 고통스러울 거예요.” 스완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부탁하던 그녀의 수줍어하면서도 걱정하는 모습과, 그 순간 두려워하면서 탄원하듯 뚫어지게 바라보며, 검은 빌로드 리본으로 단 인조 팬지꽃다발 아래서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을 떠올렸다.
베르뒤랭가의 사교 모임에서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좀처럼 그녀의 집에 들르지 않던 스완은 어느날 그녀의 집을 찾아가 차 대접을 받는다. 스완은 그녀의 집이 풍기는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와 그녀의 다정다감함에 매료되어 오데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점점 커져감을 느낀다. 그는 차를 대접하는 오데트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정성을 가득 담아 따르는 손길, 그녀가 따라준 차를 마시며 과연 그녀에게서처럼 스완에게도 그 차가 뭔가 귀중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사랑도 시간과 지속이라는 보증을 통해 정당화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랑은 점점 더 깊어가는데
오데트의 집을 두 번째 방문하면서, 스완이 그녀에 대해 품은 사랑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확실해진다. 그는 그녀를 주시했다. 그러자 프레스코화의 한 단면이 그녀의 얼굴과 몸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오데트와 함께 있을 때나, 혼자 남아 그녀를 생각할 때나 항상 이 벽화의 일부를 찾고 있었다.
스완은 오데트와 만나는 기쁨을 자신이 지닌 심미적 교양 안에서 정당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며, 오데트에게 예술작품이 지니는 고귀한 가치마저 부여한다. ‘피렌체풍의 작품’이란 말이 스완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마치 그 말은 하나의 작위와도 같아서 현실의 여인을 오데트라는 여인상(像)으로 변모시켰다. 자신의 사랑을 예술작품과 동일시하게 된 스완은 베르뒤랭가의 사교 모임에서 들었던 뱅퇴이유의 피아노곡을, 게다가 오데트가 ‘우리의 곡’이라 표현했던 그 소악절을 자신의 사랑이 음악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뱅퇴이유의 음악은 사랑에서 맛보는 감동과 애수어린 기쁨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뱅퇴이유의 소악절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매혹에 대한 갈망’을 스완의 내부로부터 깨어나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스완이 오데트에 대해 품은 사랑의 감정이었다.
스완은 사랑에 빠지게되면서, 자신을 예술가로 여겼던 젊은시절처럼 모든 사물에서도 매력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옛날과 같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매력을 느끼는 대상은 오직 오데트뿐이었다. 그는 지난날 가볍고 경박한 생활로 인해 사라져버린 영감이 그 안에서 다시 깨어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오랜 시간 동안 회복중인 자신의 영혼과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미묘한 기쁨을 맛보면서, 조금씩 본연의 자신으로, 그러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자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애증의 교차
사실, 오데트는 경박하고 지적이지도 않은 여자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스완과는 맞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를 스완은 상상과 짐작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스완 역시 오데트의 변덕스럽고 불성실한 행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불안한 외줄타기 같은 그녀와의 관계를 고집한다.
그러나 스완의 삶을 지배하던 권태와 무감각, 단조로움, 우울 등의 감정들이 사랑에도 하나 둘 개입하기 시작한다. 실제, 스완은 사랑을 하면서도 자주 권태를 느꼈다. 오데트와의 어렵지 않은 만남이 잦아지면서 그에게는 걱정이 생겼다. 두 사람이 단둘이 있을 때 느껴지는, 조금은 평범하고 단조로우며 틀에 박힌 굳어진 분위기, 또 언젠가는 그녀도 자신에게 사랑을 털어놓을 날이 오리라는 ‘소설 같은 희망’, 그가 그녀를 계속 사랑할 수 있었던 그 희망이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증오심과 질투심이 기폭제가 돼 오데트를 향한 연정은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 스완의 마음의 병은 화학작용을 통해 사랑과 질투를 만들어낸 후, 오데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다시 만들어냈다. 그녀는 다시 매력적이고 마음씨 착한 오데트가 되었다. 오히려 그는 오데트를 심하게 생각한 것에 양심의 가책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가까이 와주길 바랐고, 또 무엇보다도 그녀를 기쁘게 만들어 얼굴에서 미소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그런 스완과는 달리, 오데트는 처음과는 사뭇 달라져 점점 그를 멀리한다. 이런 사실을 눈치챈 스완은 자기의 생각이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의 외면이라는 ‘상처’ 쪽으로 지나치게 가까이 갔다고 느껴지면, 너무 괴로워질까봐 두려워 재빨리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리고는 멍한 말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데트가 나를 더 사랑해줄 때도 있었지.’
하지만 말만 그럴 뿐 그런 때를 결코 회상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사랑하는 여인의 변심 못지않게,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과 몰이해도 스완을 괴롭히고 슬프게 만들었다. 그들은 스완의 사랑도 잘 모르면서, 그리고 설사 안다고 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장난치듯 혹은 정신나간 사람을 대하듯 개탄하기만 했다. 스완은 더이상 오데트와 함께할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며 혼자 다른 세상에 유배된 사람처럼 절망감에 빠진다.
드러나는 사랑의 실체
사실, 스완이 오데트에 대해 품은 사랑의 감정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제 오데트의 모습 또한 그리 대단한 것도 못되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놀라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그녀란 말인가.’ 마치 고통스러워하던 병이 눈앞에 나타나자, 도저히 자신이 앓던 병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것처럼. ‘그녀란 말인가’ 라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과 죽음이 서로 뒤섞인, 그 모습이 하도 희미해 그 실체가 사라질까 두려워 우리가 더욱 의문을 품는, 한마디로 인간 내면에 내재된 신비 같은 것이었다.
결국에는 사랑의 대상도, 사랑하는 주체도, 그리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와 같은 사랑이 그가 품어온 사랑의 실체였다. 분명, 객관적으로 보면 스완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병을 앓았던 것이다. 이미 끝나버린 사랑에 집착하는 스완의 모습은 불치의 상사병에 걸린 환자와도 같아 측은해보이기까지 하다.
사실, 스완의 사랑은, 의사들이, 특히 몇몇 증상들에 있어서는 가장 대담한 외과의사조차도 환자의 악습을 없애거나 병을 제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혹은 가능한 일인지 의문시할 정도에까지 와 있었다. 물론, 스완 자신도 그의 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가 측정하려고 하면, 이내 사랑은 줄어들어, 거의 무(無)로까지 축소되는 듯했다.
스완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야만 다시 되살아나는 사랑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안겨다준 오데트에 대해 더없는 소중함과 애착을 갖는다. 오데트와 베르뒤랭가의 사람들에게서 따돌림을 받게 된 스완은 혼자 남겨진다. 그러나 여전히 오데트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스완은 혼자 남겨진 것을 자신이 오데트의 애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행복감마저 느낀다. 더욱이, 질투와 증오를 맛보고 불행의 긴 터널로 인도한 오데트가 미워지기는커녕, 이제는 오히려 고뇌가 깊어질수록, 그녀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스완은 그녀의 존재 자체가 병을 치유할 진통제나 해독제로 받아들여져, 더 악화된 질병을 돌연 발견한 것처럼, 그녀를 더욱 보살펴주고 싶어했다.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홀로 남은 스완은 어느날 생 퇴베르트의 사교 모임에서 그에게는 너무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뱅퇴이유의 곡을 다시 듣게 된다. 그것은 지난날 오데트와 사랑을 나누며 ‘우리들의 곡’이라 명명했던 곡이 아닌가! 스완은 행복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그때, 스완은 한 불행한 사나이, 되살아난 행복을 앞에 두고도 옴짝달싹 못하는, 그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한 남자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불연듯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가 누군지 알게 되자, 연민의 정이 가시는 동시에 그녀에게 사랑받았던 또 다른 자신을 질투했다. 이제 스완은 괴로움 속에서 자신에게는 회한어린 지난날의 추억과 사랑한다는 막연한 생각만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오데트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와 함께 행복에 대한 자신의 희망도 사라졌음을 이해했다.
스완에게 뱅퇴이유의 음악은 현실 속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의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스완은 그런 음악을 만들어낸 작곡가 뱅퇴이유를 떠올려보았다. 어떤 고뇌의 심연에서 그처럼 신과도 같은 창조력을 키웠는지, 어떻게 고뇌를 그처럼 탁월한 음악으로 승화시켜냈는지 생각해보면서 그와 자기자신을 동일선상에 놓아본다. 스완은 그의 음악을 들으며, 현실보다 더욱 뛰어난 어떤 세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세계를 발견한 듯한 착각에 우수어린 기쁨, 일종의 심미적 쾌감을 맛보았다. 삶의 풍요로운 창작물을 찬미하는 탐미적 정신을 지니고 있었지만, 스완은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따위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오데트와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데트의 사랑이 안겨다준 고통과 기쁨 사이에, 중심을 잡기조차 어려웠던 그로서는, 일종의 필연적인 연쇄고리가 있다는 것을 막연히 짐작하기만 했을 뿐, 이내 생각이 멈추고 말아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덧없는 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난 스완은 그의 사랑이 이미 끝나버렸다는 것을, 덧없이 변하는 현실 속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덧없는 죽음의 세계로, 허무한 공간 속으로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미래는 곧 우리 영혼의 현실이다. 결국, 뱅퇴이유의 음악은 영혼의 가장 특별하고 분화된 장식들 중 하나인 것이다. 아마도 허무야말로 가장 참된 것인지도, 우리가 꾸는 온갖 꿈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러한 음악도, 참되다는 그런 개념들도 똑같이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함께할 성스러운 포로들을 인질로 잡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함께라면 죽음도 덜 괴롭고, 덜 불명예스럽고, 또 아마도 있을 법한 뭔가가 되지 않겠는가.”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스완의 사랑』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제1부 『스완네 집 쪽으로』의 제2편에 해당하는 대하 소설의 일부다. 하지만 하나의 독립된 단편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독자적으로 완결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특이하게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소설 전체를 이끄는 화자가 1인칭 ‘나(마르셀)’ 인데 비해, 『스완의 사랑』만은 3인칭 화자가 객관적인 시각에서 스완과 그 주변 인물들의 안팎을 들려준다.
스완과 오데트, 그리고 베르뒤랭가 사람들
작품의 남녀 주인공 스완과 오데트는 별로 잘 생기지 않은 외모에 성격이나 사고도 평범한,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부족함을 지닌 인물들이다. 소심한 성격의 스완은 부유한 부르주아로, 하는 일없이 사교모임을 쫓아다닌다.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탐미적 성향을 지니고 있으나 스스로 그것을 표현할 예술적 재능은 없다. 고매한 정신세계를 지향하고 막연히 갈망하기도 하지만 뭔가를 깊이 있게 사고하는 능력도 모자라 이내 포기하고 마는 성격이다. 오데트는 경박하고 저속한 면을 지닌 고급창녀로 고상하고 화려한 사교생활을 영위하고자 부와 명예를 지닌 남자들을 그 수단으로 이용한다. 물론, 스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스완의 사랑』이 포함된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다 보면, 오데트가 스완의 부인이 되어 알베르틴느라는 딸까지 낳은 것을 볼 수 있다. 자세히 언급돼 있지는 않지만 이 두 사람의 결혼에는 스완의 부를 이용해 화려한 생활을 누리고자 한 오데트의 의도가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남녀 주인공을 배경처럼 에워싸고 있는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베르뒤랭가에 드나드는 부르주아들은 귀족들의 화려한 사교생활을 동경하고 그들의 고상함을 따라하려 하지만 깊이 없는 겉모습만의 흉내일 뿐, 자신들이 지닌 물질적 풍요를 과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귀족을 질색하고 싫어하면서도 그들을 흉내내 고상한 취미인 양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시대적 문제나 사상들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삶이란 속 빈 강정처럼 공허하고 허세와 위선만이 가득한 것이다. 사교모임에서 나누는 대화라는 것도 진심어린 교감을 위한 것이 아닌, 극히 미미한 자신의 지적 수준과 부를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다.
기존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소설
이 작품의 줄거리라고 해봤자 그 내용만 두고 본다면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덧없이 끝나는 진부한 사랑이야기에 불과하다. 뭔가 대단한 줄거리, 극적인 반전과 다양한 사건전개를 기대하고 읽다 보면 이내 실망하고 말 것이다. 또한, 작가의 문체 역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문장들의 연속이어서 단조로운 줄거리에 실망한 독자의 눈을 더욱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첫인상을 지나 조금 더 깊이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프루스트가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새롭지도 않은 사랑이야기를 통해 진정 들려주려고 했던 것은 극적인 사건 전개나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아니다. 프루스트는 삶 속에서 실제로 체험한 모든 감정과 경험들을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나열하면서 한 인간이 처한 운명과 진정한 삶의 가치들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스완네 집 쪽으로』를 출간하려고 출판사를 찾았다가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은 뒤, 프루스트는 결국 자비를 들여 출간했다. 사실, 프루스트도 ‘고전적인 소설과는 전혀 닮지 않은 책을 독자들이 받아들여주도록 할 만한 의향이 있는 출판사를 찾는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의 소설이 기존의 전통적 소설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통 소설의 주인공들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졌던 것에 비해,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이야기는 그 두 사람간의 극적인 사건전개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완의 의식 안에서 시작되고 전개되다 위기를 맞고 이내 소멸해버리고 만다. 사랑의 발단은 오데트를 만나 차츰 사랑의 감정이 싹트면서 비롯되지만, 이후 사랑이 전개되는 공간은 스완의 내면일 뿐, 외부세계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 소설이 사랑의 감정에 휩싸여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스완의 의식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