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장 자크 루소 지음 |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
장 자크 루소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나: 장 자크 루소. 노년에 자연에 귀의해 소박하게 살면서 홀로 산책하거나 식물채집하길 좋아 하는 고독한 산책자.
첫 번째 산책과 두 번째 산책
이제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졌다. 내게는 더 이상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사회도 없다. 누구보다도 붙임성 좋고, 애정이 넘치던 사람이 만장일치로 추방된 것이다. … 그렇다면 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에서 초탈해진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이것이 내가 탐구해야할 유일한 과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탐구에 앞서, 지금의 내 처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이는 그들을 떠나 내 자신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선행 작업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내게 너무도 가혹했다. 사람들은 침을 뱉는 것으로 나에 대한 인사를 대신하고, 나를 비방하고 멸시했다. 그들로 인해 받은 정신적 고통은 너무도 커서 정신착란 증세까지 생겼다. 위선과 거짓이 많은 세상에서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인 나는 필연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악화될 상황도 없다. 나는 체념에 익숙해졌고, 모든 것을 체념했기에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한때 나는 미래에 희망을 걸기도 했다. 후세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제대로 평가해줄 것이라고 기대했고 또 그런 희망에서『대화록』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희망조차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 내가 기대하고 희망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오직 내 안에서 위안과 평화를 얻을 뿐이다. 이제 나는 여생을 자신에게만 전념하며 보내고 싶다. 이를테면, 내 자신을 연구하고 나에 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데에 말이다. 내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내면을 성찰하면서 참된 마음의 질서와 가치를 세워갈 것이다. 그러면서 불행했던 지난날에 대한 기억들과 나를 박해하던 사람들을 모두 잊어버리리라.
날마다 산책하면서 명상한 시간들은 너무도 감미로웠다. 하지만 이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려 너무도 안타까웠는데. 이제 그러한 명상들을 글로 옮겨 영원히 남기고자 한다. 이 글은 일정한 형식도 없는, 단순히 나의 몽상들을 적은 일기다. 따라서 이 글 속에는 나 자신에 관한 질문이 많다. 고독 속에서 깊이 성찰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자신에게 몰입하는 법이지 않든가. 이 글은 몽테뉴 『수상록』의 시도와 비슷하긴 한데,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의도로 씌어졌다고 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나를 위한 글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나는 내 안에 일어나는 몽상들을 기록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읽어보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에 다다른 내게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항변을 하는 것보다 내면의 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나는 아무런 걸림 없이 자유로운 가운데 산책하면서 내 안에서 저절로 떠오른 몽상들을 충실히 옮기려고 한다. 적어도 산책하는 시간만큼은 전적으로 혼자 고독하게 명상할 수 있는, ‘오롯이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제는 나의 상상력도 쇠퇴하여 예전처럼 명상하는 가운데 영감을 받는다거나 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앞으로 내가 하는 몽상들은 새로운 것을 떠올리는 것들이라기보다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고백록』의 속편으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세 번째 산책과 네 번째 산책
나는 끊임없이 배우며 늙어간다. 인생에서 청년기가 지혜를 배우는 시기라면, 노년기는 그러한 지혜를 몸소 실천하는 시기다. 경험은 언제나 교훈을 준다. 그러나 하지 않아도 될 경험까지 한다는 것은 우리의 발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도 행복보다는 불행을 맛보게 해주었기에, 이곳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경지에 결코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인생의 진리를 말하는 현학적인 철학자들, 그들이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깨우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더 박식하고 잘나 보이기 위함이다.
그런 그들과는 달리, 천성적으로 논쟁하기를 싫어하고 그럴 재간도 없던 나는, 진정한 진리라는 것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포장된 말이 아니라 내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자신을 찾는 과정 속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알기 위해 학문을 탐구했다. 진정한 진리는 머리와 이성으로만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침묵을 통해 더욱 다져져야 한다. 내가 평생을 두고 삶의 원칙으로 삼아온 것도 ‘불멸의 본성(영혼)과 이 세계의 구조, 그리고 이 세계를 지배하는 물리적 질서 사이의 조화’였다. 이성적인 논리가 아니라 내적인 숙고와 깊은 성찰을 통해 인간의 내면 세계(정신적 세계)와 외부 세계(물질적 세계)를 포괄하는 원리를 발견했다. 이러한 숙고와 그것을 통해 얻은 결론은 나를 기다리던 운명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도록, 그리고 그 운명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늘이 내게 암시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과도 같은 통찰을 하기까지 나 역시 보통사람들처럼 숱한 시행착오와 실수를 범했다. 일례로, 나는 16살 때, 이탈리아의 토리노 지방에서 어느 귀부인집 하인으로 일하면서 리본이 탐이 나 훔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그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 거짓말로 마리옹이라는 하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그녀는 나 때문에 호된 매질을 당했고, 이 일로 나는 평생 동안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후 두 번 다시는 선의든 악의든 어떤 종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이같은 경험을 통해, 나는 진실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유용성이나 공동의 선, 혹은 공정성에 근거를 둔 진실은 진정한 진실이 아니다. 오직 개개인의 양심에 바탕을 둘 때 비로소 언제나 합당한 진실이 된다. 다시 말해, 양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때에서야 비로소 진리를 위해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과 이성의 동의’를 통해 나는 인내와 온화함, 체념, 완벽함, 공평무사한 정의 등의 진리들을 터득했다. 이러한 것들은 죽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죽어서도 함께 가져갈 재산’이다. 인생이 저무는 황혼기에 접어든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처럼 평생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위해 남은 여생을 보내는 일이며, 내적으로 향상되고 보다 덕망 있는 모습으로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진정 행복할 것이다.
다섯 번째 산책과 여섯 번째 산책
나는 내 존재를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시키고 싶다. 내가 살았던 곳들 중 가장 행복했던 곳을 들라면 나는 단연코 스위스 비엔 호숫가에 있는 성 베드로 섬을 꼽겠다. 나는 야생적이고 낭만적인 이 섬에서 칩거하며, 세상을 아주 등진 채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성 베드로 섬에는 사람들이라고는 징세관 부부와 함께 사는 일꾼들이 전부였다.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이 나 있질 않아 여행객도 거의 찾질 않았기에, 고요한 가운데 명상하기를 즐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보낸 두 달이 내게는 2년, 아니 200년, 심지어 영원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 섬에서 맛본 행복은 어떤 것이었던가? 유유자적한 가운데 한가롭고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이었다. 나는 산과 들로 자유롭게 다니며 좋아하는 식물채집을 맘껏 했고, 발길 닿는 대로 산책하며 섬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해가 저물면 우리 부부를 포함한 몇 안 되는 섬 주민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식탁 앞에 빙 둘러앉아 식사를 함께 하며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웠다. 간혹 식사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또 나를 반기기라도 하듯 볕이 좋은 날에는 나는 오래 앉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직 식탁에 있는 동안 살그머니 빠져나와 배에 몸을 싣고 잔잔한 호수 한가운데로 향했다. 배 안에 길게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물결이 흐르는 대로 몇 시간이고 이리저리 떠다니곤 했다. 어렴풋하지만 감미로운 몽상에 잠겨, 뚜렷한 대상도 없지만 그래도 지속적인 몽상 속으로. 그것은 인생의 즐거움이라 부르는 것들 중에서 가장 달콤하다고 하는 모든 것보다도 훨씬 좋은 것이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맛보는 행복은 어떠한가? 나는 지상에 지속되는 행복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맛보는 행복들이란 모두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일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시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채워야 할 어떤 공허감 없는, ‘만족스럽고 완전하며 충만한 행복’이어야 한다. 내가 성 베드로 섬에서 맛보았던 행복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배 안에 누워, 혹은 파도 일렁이는 호숫가나 졸졸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몽상에 잠겨 있을 때, 홀로 ‘신처럼 충분한 존재’가 되어 오직 나 자신만을 느끼며 행복감에 잠겼다.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나는 천성이 착하고 동정심도 많은 편이라 남을 돕기를 좋아한다. 세인들은 나를 두고 친자식들을 모두 고아원으로 보낸 몰인정한 아버지라 비난하지만, 선행에 있어서라면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 자유를 기준으로 할 때 비로소 나의 행동들도 제대로, 선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 자유란 원하는 것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것을 하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선한 일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악한 일 또한 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위험하고 불필요한 사람이라 여겨 사회에서 배척했지만, 내가 만일 타고난 성품 그대로, 자연 속에서 자유롭고 고독하게 살았다면 선한 일만 했을 것이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산책
맹세코 장-자크가 즐거움을 찾는 곳은 그런 곳이 아니다. 찬란히 빛나는 꽃들, 목초지의 갖가지 빛깔들, 시원한 그늘, 시냇물, 작은 숲과 초목들이여, 내게로 와 그처럼 끔찍한 대상들로 더럽혀진 내 상상력을 정화시켜다오.
나는 식물채집에 각별한 취미를 갖고 있다. 식물채집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즐길 수 있는 즐거운 소일거리이다. 게다가, 광물이나 동물과 비교해볼 때 식물은 내 성향과도 꼭 들어맞는다. 광물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되고 힘든 실험은 물론 많은 돈과 시간을 소비해야 하고, 심지어 건강에도 해롭다. 동물은 해부하고 가두고 관찰해야 하는데 내 노쇠한 체력과 성격상 그 일은 도저히 맞지 않는다.
내가 식물학에 애착을 갖는 것은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 생각들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의 사슬이 내 상상 속에서 그것을 만족시켜주는 온갖 사고들을 불러낸다. 초원, 물, 숲, 고독, 특히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휴식과 평화, 이 모든 것들은 그런 사슬로 인해 내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그 사슬은 박해, 증오, 멸시, 모욕 등 내 친절과 애정에 대한 사람들의 보답 때문에 겪었던 온갖 고통을 잊게 해준다. 그 사슬은 그 옛날 내가 함께 살았던 소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살던 그 평화로운 곳들로 나를 데려다준다.
식물학은 나처럼 ‘한가롭고도 게으른 은둔자에게 어울리는 연구’다.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지닌 나에게 한가롭고 고요한 가운데 열정을 만끽하고 그러면서도 행복하고 감미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으로 식물만한 것은 없다. 게다가, 박해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 그리고 고독을 느낄수록 그런 자신을 위로해준 것은 오직 자연뿐이지 않든가!
나는 어떤 누구보다도 심한 역경과 불행의 깊은 심연을 맛보았고,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분노와 격분 속에 정신착란까지 맛보았다. 하지만 역경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돌아가도록 이끈다.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처한 상황을 응시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불행이 일어났는지. … 오랜 번민과 절망을 겪은 후 마침내 나는 평온과 행복을 되찾았다. 이제껏 온 힘을 다해 붙잡고자 애썼던 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오직 나 자신만을 응시하자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내 영혼을 성찰함으로써, 밖으로 향했던 마음을 안으로 향하게 하면서 비로소 영혼의 평화와 지복에 가까운 행복을 되찾았다. 다시 말해, 내가 원래 속했던 자연으로 되돌아가자 비로소 편견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누구의 방해 없이 식물을 채집하거나 산책하면서 고독한 몽상에 잠겨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살피는 일이다. 몽상을 통해 저절로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를 조용히 관조하며 자신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 영혼이 상상의 나래를 펴고 마치 우주를 떠도는 것 같은, 지상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을 맛보곤 한다. 그런 지극한 행복의 순간에 나는 비로소 바깥 세상의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느낀다. 생각은 피곤하고 우울하게 만들지만, 몽상은 휴식과 즐거움을 주고 지고의 순수한 행복을 맛보게 한다. 이는 자연과 더불어 살며 한가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아홉 번째와 열 번째 산책
나는 나 혼자 있을 때에만 비로소 나 자신이 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명상에 잠길 필요가 있다.
지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도,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오늘 사랑했다고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행복이란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영원히 불변하는 어떤 상태’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이승에서 맛보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선, 행복한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눈빛과 태도, 말씨, 행동에서 그것을 읽어야 한다.
속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다는 외면상의 사실만을 두고 나를 몰인정한 아버지라 비난한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내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능력이 안 되는 아이들의 어머니나 외가에 맡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아원 교육은 아이들에게 가장 해가 덜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좋아하며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 행복하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불쾌한 행동과 표정들, 고통스럽게 나를 짓누르는 낯선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빛과 냉소와 악담들. 차라리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때의 무관심이 그리울 정도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증오와 냉소만을 본다. 이런 내가 고독을 즐긴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나! 사람들과는 달리, 자연은 항상 내게 미소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내가 자연의 품안에서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바랑 부인과의 만남을 빼놓고 이 지상에서의 행복을 얘기할 수 있을까?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빼놓고 이승의 행복을 논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당시 나는 17살이었고, 부인은 28살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내게 있어 예정된 운명이었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허한 내 마음을 채워주었고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그녀 안에서, 그녀를 위해서만 살았다. 그녀와 함께 보냈던 짧은 시간들은 내가 순수하게 전적으로 나 자신이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이승에서 산 시간은 70년이었지만, 진정 내가 살았던 시간은 그 중 단 7년뿐이라고. 나는 그녀를 통해 ‘내 영혼의 양식인 확장지향적이고 상냥한 감정들과, 고독과 명상에 대한 취미’를 키웠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 자신이 책 속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떠오르는 몽상들을 기록한 일정한 형식이 없는 일기다. 루소는 인생의 마지막 해를 에름놈빌의 아름다운 숲에서 보냈다. 죽음을 앞에 둔 루소는 이생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지나온 시간들을 덤덤한 마음으로 정리하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죽음과 동시에 미완으로 끝나긴 했지만 모두 10편으로 이루어진 산책은 그가 죽기 2년 전부터 틈틈이 써내려간 것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표현상으로도 다듬어지지 않은 단편적 회상들과 성찰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산책은 1776년 5월에, 두 번째 산책은 1776년 12월에서 1777년 1월에, 세 번째부터 일곱 번째 산책은 1777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여덟 번째부터 아홉 번째 산책은 1778년 봄에,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된 마지막 열 번째 산책은 죽기 석 달 전인 1778년 4월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