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집
찰스 디킨스 지음 | 고전문학
황폐한 집
찰스 디킨스 지음
제1부 안개 속의 형평법원
안개의 형평법원과 끝나지 않는 잔다이스 소송런던. 11월의 끈적한 진창과 묵직한 안개가 온 도시의 숨통을 짓누르고 있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진흙탕 위로는 마치 거대한 메갈로사우루스가 쿵쾅거리며 걸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태초의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잿빛 안개는 템스강의 물결 위로도, 난롯가에 웅크린 늙은 그리니치 연금수급자의 쉰 목구멍 속으로도 사정없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음산한 안개의 가장 깊숙한 진앙지, 링컨스 인 홀의 어둑한 한복판에 형평법원 대법관이 짙은 장막에 둘러싸인 채 옥좌처럼 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끝없이 끌려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말려 온 유령 같은 소송이 하나 도사리고 있었다. 이름하여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수십 년간 얽히고설킨 서류 뭉치와 판례의 늪에 빠진 나머지, 이제는 살아 숨 쉬는 그 어떤 인간도 이 소송의 본래 시비가 무엇이었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이 저주받은 소송의 굴레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백발이 성성해져 죽어 나갔으며, 절망의 밑바닥에 내던져진 늙은 톰 잔다이스는 코벤트 가든의 커피하우스에서 제 머리통을 권총으로 쏘아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소송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끝없는 탐욕과 무력의 궤도를 맴돌 뿐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 대법관은 이 끔찍한 거미줄에 걸려든 두 가련한 젊은 피후견인을 이튿날 접견실로 불러 거취를 매듭짓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오후, 대귀족 레스터 데들록 경의 아내인 호노리아 데들록 부인이 대륙으로 떠나기 직전 런던 저택의 화려한 응접실로 돌아왔다. 부인은 권태에 찬 목소리로 “지루해 죽을 지경”이라 읊조렸다. 눈부신 미모와 오만한 자존심으로 사교계의 최정점에 군림했으나, 그 화려함의 대가로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차갑게 얼어붙은 무관심과 지독한 환멸뿐이었다.
그늘진 그녀의 곁으로 데들록 가문의 오랜 법률 자문 변호사인 털킹혼 씨가 음산하게 발을 들였다. 영국 귀족 가문들의 치명적인 가문 비사들을 말 없이 삼켜버리는 녹슨 금고 같은 사내였다. 그가 탁자에 놓인 형평법원의 새 진술서 뭉치를 무미건조한 어조로 읽어 내려갔다. “형평법원. 존 잔다이스와…….”
바로 그때, 무심히 서류를 흘겨보던 부인이 돌연 꿰뚫을 듯한 시선으로 불쑥 물었다. “저 글씨는…… 대체 누가 베껴 쓴 건가요?” 찰나의 침묵 뒤, 부인의 핏기 잃은 입술 사이로 파리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현기증이…… 마치 죽음의 현기증 같아요. 종을 울려 하녀를 부르고, 나를 방으로 데려가 줘요!” 평생 아내가 단 한 번도 흐트러지거나 기절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던 레스터 데들록 경은, 그저 변덕스럽고 눅눅한 런던 날씨 탓이려니 여기며 허둥댈 뿐이었다.
* * *
여기서부터는 나, 에스더 서머슨이 내 보잘것없는 몫의 이야기를 서투르게 적어 내려가려 한다. 어린 시절 나를 맡아 길러 주신 대모님은 언제나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차갑고 엄격하셨으며, 내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외로움에 겨웠던 어느 생일날 저녁, 나는 대모님의 무릎 곁에서 눈물을 떨구며 조심스레 여쭈었다. “대모님, 저는 어쩌다 어머니를 잃어버리게 된 건가요?” 대모님은 돌처럼 굳은 얼굴로 냉혹하게 쐐기를 박았다. “에스더, 네 어머니는 너의 지울 수 없는 수치이고, 너는 그분의 영원한 수치였단다.” 그러고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기억에서 영영 지워버리라 매몰차게 타이르셨다. 나는 쫓겨나듯 다락방으로 올라가, 유일한 벗이었던 헝겊 인형 돌리의 차가운 뺨에 눈물범벅이 된 내 뺨을 비비며 흐느끼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두 해 남짓 흘렀을 무렵, 대모님께서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쓸쓸한 장례식이 끝난 바로 이튿날, 온통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점잖은 신사가 나를 찾아와 명함을 건넸다. “내 이름은 켄지라오. 링컨스 인에 자리한 켄지와 카보이 법률사무소의 변호사지요.” 그는 존 잔다이스라는 ‘지극히 자비로우나 다소 기이한 성품’의 은인이 나를 번듯한 기숙학교에 보내 주기로 후원을 약속했다는 꿈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리딩의 평화로운 그린리프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더없이 따스하고 복된 여섯 해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쌀쌀한 11월 아침, 잔다이스 씨로부터 런던으로 상경하여 그의 젊은 피후견인을 위한 말동무이자 길잡이가 되어 달라는 간곡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안개 자욱한 대법관 접견실로 안내된 나는, 그 어두침침한 방 한구석에서 햇살 같은 황금빛 머리칼에 온화하고 푸른 눈망울을 지닌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와 마주했다.
“에이다 양, 이쪽은 그대를 돌보아 줄 에스더 서머슨 양입니다.” 에이다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즉시 다가와 내 뺨에 따스하게 입을 맞추었고, 우리는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던 다정한 자매처럼 금세 정담을 나누었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훤칠하게 잘생기고 유쾌한 청년은 에이다의 먼 사촌인 리처드 카스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였으며, 기이하게도 바로 그날 그 음울한 법정에서 난생처음 얼굴을 마주한 사이였다.
우리 셋이 법원의 축축하고 음산한 회랑으로 걸어 나오자, 다 낡아빠진 보닛을 뒤집어쓰고 깃털 달린 바구니를 든 왜소한 노파 하나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오, 잔다이스 사건의 피후견인들이시군요! 참으로 영광입니다.” 곁에 서 있던 리처드가 그녀가 듣지 못하리라 여기고 “정신이 나갔군” 하고 낮게 중얼거리자, 노파는 귀신같이 그 말을 낚아채며 잽싸게 맞받아쳤다. “맞아요! 미쳤지요, 젊은이! 아주 완벽하게 미쳤답니다.”
그녀는 자신 역시 먼 옛날 한때는 저 법정의 피후견인이었으며, 젊음과 찬란한 희망과 눈부신 아름다움을 모두 지니고 있었으나, 그 어떤 축복도 이 끔찍한 형평법원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했다고 씁쓸하게 털어놓았다. 계단을 내려오다 뒤를 돌아보자, 잿빛 안개 속에서 노파는 뼈마디만 남은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끝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젊음. 그리고 희망. 그리고 아름다움…… 그리고 형평법원!”
그날 밤 우리는 젤리비 부인의 저택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인은 아프리카 니제르강 유역의 ‘보리오불라가’라는 오지에 영국의 잉여 빈민층을 이주시키고, 원주민들에게 커피 재배와 문명을 가르치는 거대한 자선 사업에 온 생애를 바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부인의 그 원대한 눈망울은 수천 마일 떨어진 아프리카의 지평선 말고는 제 발밑의 현실을 단 한 치도 내려다보지 못하는 듯했다. 난간 없는 계단 위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지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부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우리를 맞이했다.
“서머슨 양, 그토록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서 어째서 여태 아프리카의 원주민 구호 사업에 마음을 쏟지 않으셨는지 참으로 의아하군요.” 나는 난감함에 어찌 답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이마에 시커먼 흙과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가련한 막내 피피가 울먹이며 들어서자, 부인은 “저리 가라, 못된 피피! 방해하지 말고 썩 나가!” 하며 아이를 쫓아내고는 다시 책상 위 아프리카 서류 더미 속으로 시선을 던져버렸다. 나는 방치된 채 훌쩍이는 그 가엾은 어린것을 조용히 품에 안아 올렸고, 지치고 굶주렸던 아이는 이내 내 심장의 온기에 얼굴을 묻은 채 색색 단잠에 빠져들었다.
필적을 보고 무너지는 데들록 부인자정 무렵, 우리는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위층 침실로 올라갔다. 어수선하고 기묘하기 짝이 없는 집안이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집이야. 잔다이스 사촌께서는 대체 무슨 연유로 우리를 이런 난장판 속에 밀어 넣으셨을까?” 에이다가 지친 기색으로 속삭였다. 내가 에이다에게 후견인이신 잔다이스 씨가 평소 어떤 분이냐고 묻자, 그녀 역시 그분을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오직 리처드만이 대략 다섯 해 전쯤 스치듯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기운차고 혈색이 좋지만, 어딘가 무뚝뚝하고 별난 구석이 있는 신사”였다고 기억을 더듬어 전해주었다.
한밤중이 훌쩍 지난 시각, 방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젤리비 부인의 장녀 캐디가 파리한 안색으로 찾아들었다. “아프리카 따위, 차라리 흔적도 없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캐디는 온종일 잉크투성이가 된 제 손과 부끄러운 집안 꼴, 그리고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기 자신을 뼈저리게 한탄하며 내 발치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내 드레스 자락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파묻은 채 서럽게 흐느꼈다. “선생님께서 저를 가르쳐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너무도 비참하고 비루한데, 선생님이 참을 수 없이 좋아요…….” 온종일 어머니의 서기 노릇에 혹사당해 기진맥진한 가련한 소녀는, 내 무릎 위에 무거운 머리를 기댄 채 그렇게 날이 밝도록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캐디의 인도를 받아 안개 자욱한 런던의 미로 같은 골목길로 나섰다. 그런데 길모퉁이에서 어제의 그 낡은 보닛을 쓴 작은 노파가 불쑥 나타나더니,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한사코 제 거처를 구경하고 가라고 우리를 이끌었다. 그녀가 멈춰 선 곳은 ‘크룩, 넝마와 병 창고’라는 낡은 간판이 걸린 어두컴컴한 가게 앞이었다. 온갖 녹슨 쇠붙이와 곰팡내 나는 양피지, 깨진 유리병과 누더기 등 온 세상의 버려진 쓰레기를 모조리 사들이되, 결코 단 한 조각도 세상에 내다 팔지 않는 지옥의 수전노 소굴 같은 곳이었다.
노파가 키가 작고 털이 곤두선 시든 주인 크룩을 가리키며 귓속말을 건넸다. “이 동네 사람들은 저 영감을 ‘대법관’, 이 난잡한 넝마 가게를 ‘형평법원’이라 부른답니다.” 크룩이 이빨 빠진 입으로 낄낄 웃으며 말했다. “내 손아귀에 한 번 들어온 물건은 그게 무엇이든 영영 바깥빛을 보지 못하지. 그래서 그런 짓궂은 별명이 붙었다오.” 그가 목을 울려 부르자, 맹수처럼 거대한 잿빛 고양이 ‘레이디 제인’이 눈을 번뜩이며 그의 어깨 위로 사납게 뛰어올랐다.
크룩은 우리가 그 악명 높은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사건의 새로운 피후견인들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자, 흠칫 놀라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늙은 톰 잔다이스의 최후를 들려주었다. “그 양반은 평생 그 저주받은 소송의 불길에 영혼이 바짝 말라가다가, 바로 거기 아가씨가 발을 디디고 선 그 모퉁이에서 제 머리통을 짓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입버릇처럼 침을 튀기며 경고하곤 했어. 형평법원 문턱에는 개라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고. 그곳은 인간을 지극히 느린 맷돌에 올려 갈아 마시고, 한 방울씩 피를 말려 익사시키며, 모래 한 톨씩 영혼을 갉아먹어 기어이 미치게 만드는 곳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크룩에게 위스키를 사 오라며 길 건너 술집으로 심부름을 보냈는데, 문을 열고 나가기 무섭게 탕 하는 총성이 허공을 갈랐고, 길거리 사람들이 일제히 “톰 잔다이스다!” 하고 비명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에이다와 리처드의 낯빛에서 일순 핏기가 가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벌이지도 않은 이 거대한 유령 같은 소송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비극과 절망의 피를 머금고 있는지 깨닫고 새삼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노파의 거처는 가파른 계단을 한참 기어올라간 꼭대기 다락방에 있었다. 먼지 앉은 창가에는 스무 개가 넘는 새장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이 가엾은 날짐승들은 훗날 저 법정에서 내게 마침내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지는 날, 자유롭게 허공으로 날려 보내주려고 애지중지 거두어 키웠답니다. 하지만 형평법원의 기나긴 절차에 비하면 새들의 목숨은 너무도 덧없이 짧아서…… 한 마리씩, 차례로 숨이 끊어져 버렸지요.”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노파는 이층의 칠흑같이 어두운 방문을 가리키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저 방의 세입자는 법원 서류를 베껴 쓰는 필사가인데, 쥐 죽은 듯 기척이 없지요. 온 동네 아이들은 저 사내가 오래전에 악마에게 제 영혼을 팔아넘겼다고 수군댄답니다.”
가게 문턱을 막 빠져나가려는데, 냄새나는 크룩 영감이 불쑥 내 팔을 움켜쥐더니 벽에 백석탄으로 글자를 거꾸로, 맨 끝자리에서부터 괴이하게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하게 한 글자씩 써 내려가다 소매로 문질러 지우기를 거듭하며, 마침내 ‘잔다이스’를, 뒤이어 ‘황폐한 집’이라는 단어를 완성해 냈다. “나는 글자 따위는 한 자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눈에 박힌 형상을 통째로 기억해 베끼는 귀신같은 재주가 있지.” 그 소름 끼치는 집착과 흉흉한 거동에 간담이 서늘해지던 찰나, 마침 밖에서 리처드가 내 이름을 다급히 불러준 덕에 나는 그 끈적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쪽 교외를 향해 덜컹거리며 달리던 길 위에서, 마주 오던 우편 짐마차 한 대가 우리 마차를 멈춰 세웠다. 마부가 낡은 모자 안감에서 꼬깃꼬깃한 쪽지 한 장을 꺼내어 건넸다.
‘지나간 날들의 어둡고 씁쓸한 일들은 모두 흙 속에 묻어두고, 마치 오래된 정다운 옛 벗처럼 기쁘게 만납시다. - 존 잔다이스.’
어둠이 짙게 깔려 밤이 깊어갈 무렵, 마차가 마침내 하트퍼드셔의 세인트올번스 근교에 접어들었다. 마부가 채찍을 들어 어둠 속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불빛이 보이는 곳이 바로 ‘황폐한 집’입니다!” 활짝 열린 육중한 현관문 틈으로 눈부시도록 따스한 등불 빛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우리는 마차에서 발을 내렸다.
“에이다, 그리고 에스더, 참으로 잘 왔어요! 릭, 자네 손이 짐짝으로 가득하지만 않았어도 두 손을 번쩍 잡아주었을 텐데!” 맑고 우렁차며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목소리의 신사가 걸어 나와, 한 팔로는 에이다를, 다른 한 팔로는 나를 다정하게 품에 안으며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의 인자하고 건강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나는,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기억에 숨을 들이켰다. 육 년 전, 대모님을 여의고 울며 리딩 기숙학교로 향하던 차디찬 역마차 안에서 내게 따스한 온기를 건네주었던 바로 그 다정한 신사였던 것이다!
젤리비 부인의 집안 꼴이 어떠했느냐는 물음에, 나는 조심스레 망설이다 마음속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가정이라는 가장 가까운 의무를 저버린 채, 먼 곳의 거창한 다른 의무로 그것을 덮거나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정곡을 찔렀군! 완벽하게 꿰뚫어 보았어!” 그가 호쾌한 탄성을 터뜨렸다. 리처드가 곁에서 어린 젤리비 아이들이 방치되어 온몸이 멍투성이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마디 거들자, 그는 문득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부인은…… 부인은 본래 더없이 선한 뜻을 품은 여인이오. 어허, 그런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오는군. 동풍이 불 때면 내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서늘해지곤 하거든.” 사람에 대한 험담이나 비판을 견디지 못해 내뱉는 그의 그 투덜거림마저 어찌나 사랑스럽고 순수한지, 우리는 순식간에 그분을 깊이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폐한 집’이라는 쓸쓸한 이름과 달리, 그곳은 방에서 방으로 앙증맞은 계단을 오르내리고 방마다 따스한 모닥불과 촛불이 은은하게 타오르는, 제멋대로 지어졌으나 세상 그 어디보다 아늑하고 포근한 사랑의 미로였다.
잔다이스 씨는 집안에 특별한 손님이 한 분 머물고 계신다고 소개했다. “나이는 나와 엇비슷하게 먹었지만, 세상 물정이나 셈에는 갓난아이보다도 서투른, 그야말로 완벽하게 순진무구한 아이라고 할 수 있지. 이름은 해럴드 스킴폴. 슬하에 딸아이가 여럿이지만 제 손으로 아이들을 돌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도리어 세상의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자신이니까.”
응접실 아래층에서 마주한 스킴폴 씨는 유난히 큰 머리통에 감미롭고 나긋나긋한 음성을 지닌 왜소한 체구의 신사였다. 그는 마치 제 삶의 곤경과 빚을 남의 이야기인 양 유쾌하게 떠벌리며, 자신은 시간의 관념도, 화폐라는 추악한 쇳덩이의 가치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영혼이라고 명랑하게 노래했다. “나는 세상의 그 어떤 물질도 탐내지 않아요. 소유라는 족쇄는 내게 무의미합니다. 저 하늘의 나비가 한 점 걸림 없이 자유롭듯, 인간 사회가 하물며 미물인 나비에게 베푸는 그 소박한 자유를 나 같은 예술가에게 거절하진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