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 고전문학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제1부 낸터킷, 출항 전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 물보라 여관의 낯선 동침자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몇 해 전, 주머니에는 돈 한 푼 없고 뭍에서는 마음 붙일 곳 하나 없던 시절, 나는 배를 타고 세상의 넓은 바다나 둘러보자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우울을 떨쳐내고 피를 다시 돌게 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입가가 씁쓸하게 일그러지고 영혼에 축축한 11월의 진눈깨비가 내릴 때, 나도 모르게 관을 파는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될 때면 비로소 바다로 나갈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은 내게 권총과 총알을 대신하는 구원이었다. 고대 로마의 카토는 칼끝 위에 제 몸을 던졌다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배에 오를 뿐이다.

바다에 나갈 때 나는 늘 평범한 선원으로, 돛대 앞 갑판에서 일하는 뱃사람으로 나선다. 선장이나 요리사 같은 자리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넘긴다. 게다가 선원으로 일하면 품삯을 주지 않는가. 돈을 내는 것과 받는 것 사이에는 세상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상선이 아니라 고래잡이배를 타기로 했는지, 그것은 나를 늘 은밀히 조종하는 운명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거대한 고래라는 존재 자체가 내 호기심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멀고 거친 바다,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고래잡이의 온갖 위험들. 나는 본디 아득히 먼 세계를 끝없이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경이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렸고, 내 영혼 깊은 곳으로 끝없는 고래의 행렬이 밀려들었으며, 그 한가운데 눈 덮인 산 같은 거대한 유령 하나가 우뚝 솟아올랐다.

나는 셔츠 두어 장을 낡은 가방에 쑤셔 넣고 옛 맨해튼을 떠나 뉴베드퍼드에 닿았다. 12월의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낸터킷으로 가는 배는 이미 떠나 월요일까지는 갈 방도가 없었다. 나는 낸터킷 배를 타고 떠나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그 섬에는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거칠고 호방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듯 춥고 음울하고 캄캄한 밤, 나는 아는 이 하나 없는 거리에 가방을 메고 우두커니 섰다. “어디서 묵든, 이슈메일아, 값부터 물어보고 너무 까다롭게 굴지는 마라.”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일렀다. ‘교차한 작살’ 여관도 ‘황새치’ 여관도 지나치게 비싸고 흥청거리는 듯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물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가장 싼 여관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마침내 부두 근처에 흐릿한 불빛 하나가 보였다. 삐걱거리는 간판에는 흰 물보라 그림과 함께 글씨가 쓰여 있었다. ‘물보라 여관 - 피터 코핀.’ 코핀이라니, 관(棺)이라는 뜻에 물보라까지 더해지니 어딘가 불길했다. 하지만 낸터킷에서는 흔한 이름이라고 여겨졌다. 다 쓰러져 가는 작은 목조 건물은 황량한 길모퉁이에 한쪽이 마비된 양 서글프게 기울어져 있었다. 값싼 잠자리로는 안성맞춤이겠다 싶었다.

주인에게 방을 청하자 객실이 꽉 차 남은 침대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주인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작살잡이와 담요를 같이 쓰는 게 괜찮다면 잘 수는 있을 것 같은데요? 고래잡이를 나갈 거라면 그런 데 익숙해지는 편이 좋아요.” 나는 그 작살잡이가 몹시 험악한 자만 아니라면, 이 추운 밤에 거리를 헤매느니 기꺼이 담요 반쪽이라도 빌려 쓰겠다고 대답했다.

밤이 깊도록 작살잡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은 자꾸만 알 수 없는 소리로 내 속을 긁어놓았다. 그 사내가 오늘 밤 머리를 팔러 나갔는데 잘 팔리지 않아 늦는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머리를 판다고요?” 내가 펄쩍 뛰며 묻자, 주인은 그 작살잡이가 남태평양에서 방부 처리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들을 잔뜩 사가지고 와서 다 팔고 딱 하나가 남았는데, 내일이 일요일이라 오늘 밤 기어이 팔아치우려는 모양이라고 했다. 죽은 우상 숭배자의 머리를 내다 파는 식인종 같은 사내라니, 필시 위험천만한 자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위층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추위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옷을 벗어 불을 끈 뒤 침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선잠이 들 무렵, 복도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리더니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맙소사, 저 사람이 그 지독한 머리 장수로구나.” 사내는 등불과 그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손에 들고 들어와, 침대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방 한구석에 등불을 내려놓았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맙소사, 저게 얼굴이라니! 검붉은 살갗에 거뭇한 네모 자국이 얼룩덜룩 새겨져 있었다. 처음에는 다쳐서 생긴 흉터인 줄 알았으나, 이내 그것이 식인종의 문신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람이란 어떤 살갗을 둘렀든 정직할 수 있다. 살갗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라고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사내가 모자를 벗자 이마에 비틀어 묶은 작은 머리카락 뭉치 말고는 머리카락이 전혀 없어 마치 곰팡이 슨 해골 같았다. 그는 가방에서 등 굽은 검은 목각 우상을 꺼냈다. 벽난로 가림판을 떼어내고 그 작은 우상을 세운 뒤, 대팻밥에 비스킷을 얹어 불을 붙이고는 알 수 없는 노랫가락을 웅얼대며 제사를 올렸다. 손가락을 데어가며 비스킷을 꺼내 우상에게 바쳤으나 우상이 까딱할 리 없었다. 마침내 그는 우상을 도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괴이한 행동에 내 불안감은 점점 커졌고, 사내가 곧 나와 같은 침대로 들어올 낌새를 보이자 당장 이 침묵을 깨야겠다고 마음억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 순간, 사내는 손도끼를 집어 들더니 도끼 자루를 입에 물고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뿜어냈다. 다음 순간 불이 훅 꺼졌고, 이 야만적인 식인종은 손도끼를 입에 문 채 내가 누운 침대로 뛰어들었다. 내가 비명을 지르자, 그도 놀라 끙 소리를 내며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는 벽 쪽으로 바짝 달라붙으며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불부터 켜게 해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거친 소리로 보아 내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누구냐, 이 악마 같은 놈?” 마침내 그가 말했다. “말 안 하면, 죽는다.” 그러면서 불붙은 손도끼를 어둠 속에서 내 머리 위로 휘둘러댔다. 뜨거운 담뱃재가 사방으로 흩날려 침구에 불이 붙을 것만 같았다.

퀴퀘그와 튼 우정, 그리고 매플 신부의 요나 설교


“주인장, 제발, 피터 코핀! 천사들이여, 날 좀 살려줘요!” 내가 고래고래 외치자, 다행히 그 순간 주인이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겁낼 것 없어요.” 주인이 히죽거렸다. “퀴퀘그는 손님 머리카락 하나 안 건드려요.” “왜 저 작살잡이가 식인종이라는 걸 진작 말 안 했습니까!” 내가 소리쳤다. 주인은 그가 거리에서 사람 머리를 팔러 다닌다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어서 자기나 하라고 했다.

주인이 자초지종을 일러주자 퀴퀘그는 손도끼로 침대를 가리키며 들어오라고, 다리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는 듯 한쪽으로 비켜 누웠다. 온통 문신투성이이긴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깔끔하고 잘생긴 식인종이었다. 내가 대체 왜 그리 호들갑을 떨었나 싶었다. 이자도 나와 똑같은 인간일진대, 그가 나를 두려워할 까닭 또한 내가 그를 두려워할 까닭만큼이나 있지 않은가. 술에 취한 기독교인보다는 멀쩡한 식인종과 자는 편이 낫다. 나는 담배만 끄게 한 뒤 그와 나란히 누웠다. 그러고는 평생 그토록 달게 자본 적이 없었다.

이튿날 새벽, 눈을 떠보니 퀴퀘그의 팔이 더없이 다정하게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의 아내라도 된 것 같았다. 그의 팔은 온갖 빛깔로 문신이 새겨져 있어 누비이불의 조각보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나는 신랑 같은 그의 포옹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그는 잠든 채로도 죽음 말고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듯 나를 꼭 끌어안았다. 한참을 버둥거리며 흔들어 깨우자 그는 끙 소리를 내며 팔을 거두더니, 물에서 막 뛰쳐나온 개처럼 온몸을 털고 일어나 앉아 눈을 비비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옷을 입는 모습은 참으로 진기했다. 키 큰 비버 가죽 모자부터 머리에 얹더니, 바지도 입지 않은 채 장화를 들고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끙끙대며 신었다. 면도를 할 때는 침대 모서리에 세워둔 작살을 뽑아 들고는 날을 장화에 쓱쓱 갈아 그것으로 뺨을 벅벅 긁어댔다. 그리고 마침내 작살을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의기양양하게 방을 나섰다.

아래층 식당은 고래잡이들로 가득했다.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고래를 망설임 없이 죽이는 자들이건만, 막상 식탁에 둘러앉아서는 양 떼 속의 양처럼 수줍어하며 서로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퀴퀘그만은 고드름처럼 태연히 상석에 앉아, 작살을 식탁 너머로 불쑥 뻗어 비프스테이크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뉴베드퍼드 거리에는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그렇다, 이 모든 당당한 저택과 꽃나무 우거진 정원들은 대서양과 태평양, 인도양에서 온 것들이었다. 하나하나 모두가 작살에 꽂혀 바다 밑바닥에서 이곳까지 끌어올려진 것들이었다.

첫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하늘은 어느새 진눈깨비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곰가죽 외투를 여미고 매서운 폭풍을 뚫으며 고래잡이 예배당으로 향했다. 예배당 안에는 선원들과 그 아내들, 과부들이 저마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마치 슬픔이라는 고도에 갇혀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다는 듯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강단 양옆 벽에는 검은 테를 두른 대리석 비석들이 박혀 있었다. 파타고니아 앞바다에 빠져 죽은 열여덟 소년, 고래에 끌려가 영영 자취를 감춘 보트의 선원들, 일본 연안에서 향유고래에게 목숨을 잃은 선장. 무덤조차 없이 스러져 간 이들을 기리는 차디찬 비문이었다.

문득 곁을 돌아보니 퀴퀘그가 서 있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그는 이 음산한 비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엄숙한 광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낸터킷 항해를 앞둔 나는 그 비석들에서 먼저 떠난 고래잡이 선원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엿보았다. ‘이슈메일, 너도 결국 이들과 같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마음은 다시 유쾌해졌다. 내 육신이야 가져갈 테면 가져가라지,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니니까.

이윽고 폭풍우에 흠뻑 젖은 한 노인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한때 선원이자 작살잡이로 거친 바다를 누비다 평생을 목회에 바친 매플 신부였다. 강단은 오직 수직 사다리로만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는데, 신부는 뱃사람답게 손을 번갈아 사용하며 능숙하게 올라가더니 사다리를 한 칸씩 끌어올려 거두어들이고는 작은 요새 같은 홀에 들어섰다. 강단 뒤쪽 벽에는 검은 바위 해안에서 폭풍과 사투를 벌이는 배와, 먹구름을 뚫고 한 줄기 빛을 내려보내는 천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신부는 흩어져 앉은 사람들에게 가운데 앞쪽으로 모여 앉으라며 우렁차게 외쳤다. “우현 통로! 좌현으로 붙어요! 한가운데로!” 그러고는 고래의 갈빗대와 공포가 자신을 지옥 밑바닥으로 끌어내렸으나,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부르짖자 고래가 더는 자신을 가두어 두지 못했다는 내용의 찬송을 불렀다. 이어 그는 요나의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요나의 죄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가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쉬운 것이 없습니다. 시키시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어렵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불복해야 합니다.”

신부는 하느님의 명령을 등지고 다시스로 도망쳤던 요나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죄책감에 짓눌려 부둣가를 어슬렁거리던 요나의 눈빛을 거친 선원들은 단번에 간파했다. 맹렬한 폭풍우로 배가 부서져 나갈 위기 속에서도 요나는 선창 밑바닥에 숨어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선장이 달려가 그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잠자는 자여, 어찌 이리 태평한가! 어서 일어나라!” 재앙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제비를 뽑자, 끝내 요나가 지목되었다. 그가 고백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빚으신 하늘의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요나는 이 폭풍이 자기 탓임을 밝히며 자신을 깊은 바다로 던지라고 말한다. 선원들이 그를 닻처럼 번쩍 들어 거친 바다로 내던지자, 사납게 포효하던 파도는 마침내 기름을 붓기라도 한 듯 잠잠해졌다.

매플 신부는 벅찬 가슴을 들썩이며 외쳤다. “동지들이여, 요나의 기도에서 무거운 가르침을 얻으세요. 그는 곧장 구원해 달라 울부짖지 않았습니다. 제 벌이 마땅함을 알고, 구원은 하느님께 맡긴 채 다만 그분의 거룩한 성전을 향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용서를 보채는 게 아니라 벌을 감사히 받는 겁니다.” 그러더니 신부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한층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지들이여, 하느님은 그대들에게 한 손을 얹으셨으나 내게는 두 손을 다 누르고 계십니다. 나는 그대들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요나를 고래 뱃속까지 따라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마침내 마른 땅에 그를 토해 내게 하셨다. “두 번째로 주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멍들고 두들겨 맞은 요나는 마침내 그 명을 따랐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느냐, 동지들이여? 거짓의 얼굴에 대고 진리를 전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설교는 화와 복을 선언하는 외침으로 끝을 맺었다. “복음의 의무를 저버리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 거짓이 눈앞의 구원일지라도 진실하려 하지 않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 그러더니 신부는 천상의 벅찬 환희를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모든 화와 고통의 오른편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으니, 그 기쁨의 정상은 절망의 심연보다 아득히 높으리. 하느님 외에 그 어떤 법도 권력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늘의 참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지극한 기쁨이 임하리라.”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 “오 아버지여, 이제 온전히 제 숨을 거둡니다”라고 속삭일 수 있는 자의 영원한 평안을 노래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신도들이 예배당을 모두 떠나 홀로 남을 때까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퀴퀘그의 고향 이야기와 낸터킷으로 가는 길


물보라 여관으로 돌아오니 퀴퀘그가 난롯가에 홀로 앉아 작은 검은 우상을 들여다보며 잭나이프로 코를 다듬고 있었다. 기괴한 문신으로 얼굴을 뒤덮은 야만인이었지만, 그 깊고 검은 눈에는 천 마리 악마 앞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정직한 혼이 서려 있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굽실거린 적 없는 당당한 기개였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의 두상은 워싱턴 장군을 쏙 빼닮아 있었다. 식인종으로 자라난 조지 워싱턴을 보는 듯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마음이 이 순박한 야만인 덕분에 차츰 풀려 가는 것을 느꼈다. 기독교인들의 친절이란 겉치레뿐인 예절에 불과하니, 차라리 이 이교도 벗과 마음을 나누어 보리라 생각했다. 나는 벤치를 그의 곁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말을 붙였다. 그가 토마호크 담뱃대를 권해 왔고, 우리는 거친 파이프를 정답게 주거니 받거니 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의 가슴에 남아 있던 얼음을 녹여 주었다.

담배가 다 타들어 가자 그는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고 허리를 끌어안으며, 이제 우리는 부부나 다름없는 둘도 없는 벗이라 선언했다. 필요하다면 나를 위해 기꺼이 목숨도 내놓겠다며, 은화 30달러를 절반으로 뚝 잘라 내 주머니에 털어 넣어 주었다. 그날 밤 나는 그의 우상 앞에 비스킷을 바치는 의식까지 함께했다. 이웃을 내 몸같이 대하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밤새도록 제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남서쪽 아득히 먼 섬 로코보코 출신이었는데, 그곳은 어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섬이었다. 진짜 장소란 본디 그런 법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 부족의 추장이자 왕이었으니, 퀴퀘그의 핏줄에도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독교 세상을 직접 보고 싶다는 야심에 불타던 그는, 자신을 태워 주지 않으려던 배가 지나갈 해협에 카누를 숨겨 두고 기다렸다. 그러다 번개처럼 뛰어올라 갑판 고리에 매달렸고, 몸이 산산조각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놓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