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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 고전문학


위대한 개츠비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제1부 웨스트 에그의 여름



이스트 에그에서의 만찬 - 톰·데이지·조던


지금보다 더 어리고 여렸던 시절, 아버지는 내게 한 가지 충고를 해주셨고, 나는 그 말을 줄곧 마음에 품고 곱씹어 왔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어질 때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너만큼 좋은 환경을 누리며 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라.” 아버지는 그 이상 구구절절 덧붙이지 않으셨지만, 우리 부자 사이에는 말보다 깊은 교감이 흐르고 있었기에 나는 그 속에 담긴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타인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유보적인 태도를 몸에 익히게 되었다. 또한 그 버릇 덕에 기이하고 비밀스러운 영혼들이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동시에 적잖은 따분한 인간들의 끈질긴 먹잇감이 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에도 엄연히 한계는 있는 법이다. 지난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온 세상이 제복을 갖춰 입고 도덕적 ‘차렷 자세’를 영원히 유지하기를 바랐다. 남들의 은밀한 마음속을 엿보는 그 소란스러운 기행은 이제 신물 날 정도로 사양하고 싶었다. 오직 이 책에 제 이름을 아낌없이 빌려준 사내, 개츠비만은 예외로 하고. 그에게는 만 마일 밖의 미세한 지진조차 포착해 내는 정밀한 기계처럼, 삶이 건네는 약속에 경이로울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희망을 향한 비범한 천부적 재능이자, 일찍이 그 어떤 인간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영 마주치지 못할 낭만적인 결의였다. 결국 개츠비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한동안 인간에 대한 내 온전한 관심을 닫아걸게 만든 것은, 그가 품었던 순결한 꿈의 자락 뒤편을 끈질기게 맴돌던 그 더러운 먼지들이었다.

우리 캐러웨이 가문은 중서부의 한 유서 깊은 도시에서 삼대째 가업을 일구며 살아온 유복한 집안이었다. 나는 1915년에 뉴헤이븐 대학을 졸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참화라 불린 ‘대전’의 참전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고향에 정착하지 못한 채 걷잡을 수 없이 들떠 있었다. 한때 세상의 따스한 심장이었던 중서부는 어느새 거대한 우주의 누더기 같은 변방으로 느껴졌고, 결국 나는 동부로 떠나 채권업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일 년 치 생활비를 대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1922년 봄, 나는 아예 동부에 뼈를 묻을 작정으로 대륙을 건너왔다.

내가 둥지를 튼 곳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손꼽히게 기이한 지형을 지닌 고장이었다. 뉴욕 동쪽의 롱아일랜드 해협을 향해 두 덩이의 거대한 달걀 모양 반도가 나란히 솟아 있었는데, 나는 그중 덜 세련되고 벼락부자들이 모여 사는 웨스트 에그에 터를 잡았다. 내가 세 든 집은 철마다 수천 달러씩을 호가하는 어마어마한 대저택들 사이에 낀, 한 달에 겨우 팔십 달러짜리 볼품없는 판잣집이었다. 내 오른편에 우뚝 솟은 저택은 노르망디의 어느 고풍스러운 시청 건물을 그대로 본떠 지은 웅장한 건물로, 뾰족한 탑과 대리석 수영장, 그리고 사십 에이커가 넘는 드넓은 잔디밭을 거느리고 있었다. 바로 그곳이 개츠비의 저택이었다. 아니, 당시에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으니, 그런 기묘한 이름을 지닌 어느 신사의 저택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해 여름의 이야기는, 내가 만(灣)을 건너 유서 깊은 부촌인 이스트 에그로 차를 몰아 톰 뷰캐넌 부부와 저녁을 함께했던 바로 그날 저녁부터 시작된다. 데이지는 내 육촌 누이뻘이었고, 톰은 대학 시절부터 이름을 날리던 동창이었다. 승마복을 빼입은 톰이 두 다리를 거만하게 벌린 채 저택 현관에 서서 나를 맞았다. 대학 시절보다 한층 더 억세고 단단해진 서른 살의 사내. 굳게 다문 입매와 오만한 태도, 잔뜩 앞으로 쏠려 공격성을 뿜어내는 두 눈까지, 그의 건장한 체구 전체에서 숨길 수 없는 잔인함이 배어 나왔다. 그는 내 팔을 억센 손으로 거칠게 잡아끌며 광활한 정원과 물결치는 해변, 모터보트를 손짓으로 훑어 보여주었다. “여긴 제법 괜찮은 곳이지.” 그러더니 나를 저택 안으로 거칠게 이끌었다.

천장이 높고 화려한 복도를 지나 은은한 장밋빛으로 가득 찬 거실로 들어섰다. 방 양쪽 끝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어,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얇은 커튼이 하얀 깃발처럼 공중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방 안에서 유일하게 미동도 없이 멈춰 있는 것은 거대한 소파뿐이었는데, 그 위에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두 젊은 여자가 마치 닻을 내린 풍선처럼 둥실 떠 있는 듯 보였다. 톰이 뒤편의 테라스 창문을 쾅 닫자 바람이 일시에 잦아들었고, 커튼과 양탄자, 그리고 소파 위의 두 여자가 깃털처럼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둘 중 더 젊은 쪽은 생전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녀는 턱 끝에 위태로운 무언가를 얹어 균형이라도 잡고 있는 양,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한쪽인 데이지는 일어서려는 시늉을 하다가 특유의 기막히게 매혹적인 웃음을 터뜨렸고, 나 역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너무 행복해서 몸이 마-마비될 지경이야!” 그녀는 내 손을 잠시 부여잡고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다고 속삭이는 듯한, 그녀만의 마법 같은 몸짓이었다. 데이지는 턱을 치켜들고 있던 여자의 성이 ‘베이커’라고 귓속말처럼 나직하게 일러주었다.

데이지는 낮게 떨리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내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귀를 기울여 한 음 한 음 홀린 듯 따라가게 되는 목소리,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세상에서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불멸의 음표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시카고를 지나오며 열댓 명의 지인들이 그녀에게 간곡한 안부를 전해달라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날 그리워해?” 그녀가 황홀경에 빠진 듯 외쳤다. “온 도시가 비탄에 잠겼지. 차란 차는 죄다 왼쪽 뒷바퀴를 상복의 리본처럼 새까맣게 칠하고 다니더군.” “어머, 근사해라! 톰, 우리 내일 당장 시카고로 돌아가자!” 그러더니 데이지는 엉뚱하게 말을 돌렸다. “닉, 너도 우리 아기를 꼭 봐야 해.”

방 안을 초조한 걸음으로 서성이던 톰이 내 어깨를 묵직하게 짚었다. “닉, 자네 무슨 일을 한다고?” “채권업을 해.” “어디 회사에서?” 내가 회사의 이름을 대자 톰은 코웃음을 치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들어본 적 없는 곳인데.” 슬그머니 자존심이 상한 내가 쏘아붙였다. “곧 듣게 될 거야. 자네가 동부에 계속 머무른다면 말이지.” “오, 난 평생 동부에 있을 거야, 걱정 마.” 톰은 데이지를 흘끗 노려보더니 다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이 뉴욕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산다면 그건 빌어먹을 멍청이지.”

바로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베이커 양이 “그럼요!” 하고 불쑥 끼어들어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내가 방에 들어선 이후 그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녀는 권태로운 하품을 하더니 날렵한 몸짓으로 일어섰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가슴이 작고, 사관생도처럼 어깨를 꼿꼿하게 뒤로 젖힌 당당한 자태의 여자였다. 햇빛에 그을려 나른해진 잿빛 눈동자가 무심한 호기심으로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어디선가 그녀의 얼굴을, 혹은 신문 사진을 본 적이 있다는 기시감이 뇌리를 스쳤다.

“웨스트 에그에 사신다면서요?” 그녀가 약간 깔보는 듯한 어조로 툭 던졌다. “거기 내가 아는 사람이 하나 사는데.” “난 아직 아는 이웃이 하나도-” “개츠비라는 사람을 알겠네요.” “개츠비?” 곁에 있던 데이지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대체 무슨 개츠비?” 내가 그가 바로 옆집 이웃이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집사가 들어와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톰은 자신의 단단한 팔을 내 팔 밑에 우악스럽게 끼워 넣더니, 마치 체스판 위의 말을 옮기듯 나를 거실 밖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두 여자는 손을 가볍게 허리에 얹은 채 나른한 걸음으로 앞장서서, 붉게 물든 노을을 향해 활짝 열린 장밋빛 베란다로 나갔다. 식탁 위에서는 촛불 네 개가 잔잔해진 바람 속에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대체 왜 촛불을 켠 거야?” 데이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불꽃을 툭 꺼버렸다. “이 주 뒤면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夏至)야. 당신들도 일 년 중 가장 긴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결국 무심히 놓쳐버리고 말지 않아? 난 늘 그래.”

말을 잇던 데이지는 문득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시선을 멈추었다. “이것 봐, 손가락을 다쳤어.” 손가락 관절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당신이 그런 거야, 톰.” 데이지가 원망 섞인 투로 말했다.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당신 짓이야. 거칠고 덩치만 커다란 황소 같은 짐승과 결혼한 대가지.” “난 ‘덩치’라는 끔찍한 말이 정말 싫어.” 톰이 불쾌하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맞받았다. 데이지와 베이커 양은 식사 내내 번갈아 입을 열었는데, 그녀들의 서늘한 농담은 그녀들이 입은 흰 드레스처럼, 그리고 욕망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두 눈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저녁 식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톰이 갑자기 거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문명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어!” 그는 고더드라는 자가 쓴 『유색 제국의 발흥』이라는 책을 들먹이며, 지금 당장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지배 인종인 백인이 유색 인종의 파도에 완전히 집어삼켜지고 말 것이라고, 이는 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된 사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톰이 요즘 들어 부쩍 심오해졌어.” 데이지가 무심한 슬픔과 조소가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보며 속삭였다. “긴 단어가 잔뜩 들어간 어려운 책들을 밤낮으로 읽거든.” 톰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노르딕 민족이야말로 지배 계급이며, 오늘날 인류의 과학과 예술, 그리고 문명의 모든 위대한 유산을 창조해 낸 주역이라고 격앙되어 역설했다. 허황되고 맹목적인 이론에 매달려 열을 올리는 그의 육중한 모습에는, 기이하게도 가련하고 처량한 구석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데이지의 고백, 그리고 초록 불빛


집 안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전화벨이 울리고 집사가 황급히 자리를 비우자, 데이지는 그 틈을 타 은밀하게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우리 집안의 비밀 하나 알려줄게. 사실은 저 집사의 코에 얽힌 이야기야.” 한때 은그릇 닦는 일을 도맡았던 그가,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은기를 닦아대다 결국 독한 약품 때문에 코를 아주 버리고 말았다는 실없는 이야기였다.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우는 마지막 황혼의 햇살이 그녀의 눈부시게 빛나는 얼굴 위로 다정하게 머물렀다.

이윽고 집사가 굳은 표정으로 돌아와 톰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톰은 미간을 사납게 찌푸린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러자 데이지가 다시금 내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닉, 네가 내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 있으니 참 좋다. 넌 꼭 장미 같아, 완벽하게 피어난 한 송이 장미 말이야.”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장미와 손톱만큼도 닮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분위기를 모면하려 즉흥적으로 지어낸 헛소리에 불과했으나, 그녀의 가쁜 숨결 사이로 흘러나온 단어들에는 묘하게도 진심이 새어 나오는 듯한 매혹적인 온기가 감돌았다. 그러더니 데이지는 냅킨을 테이블 위에 팽개치듯 던져두고는 남편의 뒤를 쫓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베이커 양과 나는 침묵 속에서 의미 없는 시선을 어색하게 주고받았다. 내가 막 입을 떼려 하자 그녀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고 숨을 죽였다. 안쪽 방에서 억눌린 채 터져 나오는 격정의 웅얼거림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까 말씀하신 그 개츠비라는 사람이 바로 제 이웃인데-” 내가 다시 운을 떼려 하자 그녀는 가차 없이 내 말을 잘랐다. “쉿, 말하지 마요. 지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듣고 싶단 말이에요.” “무슨 일인데요?” 내가 순진하게 묻자 그녀는 오히려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모른다고요? 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줄 알았는데.” 그러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톰이 뉴욕에 여자를 하나 두고 있어요. 남의 저녁 식사 시간에 당당하게 전화를 걸어댈 만큼 염치없진 말아야 할 텐데.”

곧이어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묵직한 부츠 소리가 복도에 울리며 톰과 데이지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어!” 데이지가 터질 듯 팽팽한 쾌활함으로 외치며, 잔디밭에서 나이팅게일이 노래하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참으로 낭만적이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다시 안쪽에서 전화벨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고, 데이지가 입술을 깨물며 단호히 고개를 젓자 그녀가 억지로 이어가던 대화는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식탁에 불쑥 끼어든 그 불길한 다섯 번째 손님이 몰고 온 새된 다급함과 긴장을 그 누구도 마음속에서 떨쳐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꽤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을지 몰라도, 내 본능은 당장 경찰이라도 불러 이 위태로운 집안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나는 데이지의 뒤를 따라 집 앞쪽 베란다로 나갔다. 짙푸른 어둠 속 갈대 등의자에 나란히 앉자, 데이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깊게 감쌌다. 그녀의 내면에서 억누를 길 없는 거센 감정의 파도가 일렁이는 것이 역력히 보였다. “우린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지냈지, 닉. 육촌인데도 말이야. 넌 내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잖아.” “그땐 전쟁터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했었어.” “맞아, 그랬지.”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씁쓸하게 읊조렸다. “난 정말이지 너무 힘든 시간들을 보냈어, 닉. 그래서 이제는 세상 모든 게 지독하게 냉소적으로 느껴져.”

그녀는 첫딸이 태어났을 때 자신이 내뱉었던 뼈아픈 말을 들려주었다. 마취에서 깨어나 세상에 홀로 버림받은 듯한 참담한 기분 속에서, 아이가 딸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차갑게 고개를 돌려 베개를 적시며 울었다고 했다. “‘좋아.’ 내가 그렇게 말했어. ‘딸이라 차라리 다행이야. 그리고 그 애가 아주 멍청한 바보로 자랐으면 좋겠어.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여자가 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모습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바보에 불과하니까.’” 그녀는 자기는 이제 온갖 곳을 다 가보았고 세상의 모든 환멸을 겪을 만큼 겪었다고 확신에 차 말하며 싸늘한 경멸을 담아 웃었다. “나 세련됐지- 세상에, 난 정말 뼛속까지 세련됐어!” 그녀의 목소리가 끊긴 찰나, 나는 그 오만한 말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는 근본적인 거짓과 깊은 공허를 똑똑히 느꼈다.

거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니 베이커 양이 읽던 잡지를 무릎 위로 덮었다. “벌써 열 시네요. 이 착한 아가씨는 이제 자러 갈 시간이에요.” 데이지가 그녀는 내일 웨스트체스터 골프 토너먼트에 출전해야 한다고 귀띔해 주었고, 그제야 나는 그녀가 유명 골프 선수인 조던 베이커임을 온전히 알아차렸다. 신문의 스포츠 화보에서 익히 보았던 그 거만하면서도 매혹적인 턱선과 차가운 눈빛이었다.

작별을 고하고 차를 타고 떠나려는데, 데이지가 현관 계단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닉! 깜빡할 뻔했는데 정말 중요한 거야. 네가 서부에서 어떤 여자랑 약혼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순 헛소문이야. 난 약혼 같은 걸 할 만큼 부유하지 못해.” “하지만 우린 분명 세 사람한테서 똑똑히 들었는걸. 그러니 틀림없는 사실이야.” 사실 나는 그 어떤 약혼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무책임한 헛소문과 억지 결혼 압박이야말로 내가 고향을 버리고 동부로 도망쳐 온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비록 두 사람의 지대한 관심이 내심 뭉클하게 다가오기는 했으나, 차를 몰고 그 저택을 빠져나오며 나는 머릿속이 지독하게 혼란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씁쓸한 역겨움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데이지에게 일말의 자존심이 남아 있다면 당장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그 지옥 같은 집을 뛰쳐나와야 마땅해 보였지만, 정작 그녀에겐 그럴 의지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톰이 뉴욕에 천박한 정부를 두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무식하고 거친 사내가 싸구려 인종주의 책 한 권에 깊이 빠져 우울해져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훨씬 더 기이하고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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