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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 고전문학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제1부 첫인상 - 네더필드와 메리턴



재산깨나 있는 독신남과 베넷 부부의 입씨름, 네더필드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온 세상이 인정하는 보편적인 진리다. 이 진리를 신앙처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베넷 부인은, 인근의 대저택 네더필드 파크를 빌려 입주한 찰스 빙리라는 부유한 청년의 소식에 몹시 들떠 있었다. 연 수입이 사오천 파운드에 달하는 미혼 남성이 이웃으로 왔다는 소식은, 딸만 다섯을 둔 그녀에게는 딸 중 하나를 신부로 밀어 넣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베넷 부인은 남편을 들볶으며 어서 네더필드로 가 첫인사를 트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러나 서재에 틀어박혀 빈정거리기를 즐기는 베넷 씨는 짐짓 무심한 척 아내의 애간장을 태웠다.“당신과 아이들이나 다녀오구려. 아니면 애들끼리만 보내든지. 당신 미모도 딸들 못잖게 빼어나니, 어쩌면 빙리 씨가 당신을 제일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잖소.” 부인이 신경이 닳아 끊어질 지경이라며 가슴을 쥐어뜯자, 베넷 씨는 시치미를 뚝 뗐다. “그 신경으로 말하자면 내 오랜 벗이지. 당신이 그 신경을 애지중지하며 들먹인 게 벌써 이십 년이 넘었소.”

이십삼 년을 함께 살고도 부인은 끝내 남편의 속을 헤아리지 못했다. 영민함과 냉소, 침묵과 변덕이 기묘하게 섞인 남편의 내면은 그녀의 얕은 식견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반면 베넷 부인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지적 호기심은 얕고 감정 기복은 심했으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늘 신경 탓을 했다. 딸들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는 것이 평생의 과업이었고, 이웃집 마실과 가십거리가 유일한 낙이었다.

그런데 온갖 핑계를 대며 발을 빼던 베넷 씨는 사실 누구보다 먼저 은밀히 빙리를 찾아가 인사를 마친 뒤였다. 며칠 뒤 저녁, 리본을 손질하던 둘째 딸을 보며 그가 넌지시 운을 뗐다. “빙리 씨가 그 모자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구나, 리지.” 베넷 부인이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찾아뵙지도 않을 양반의 취향을 우리가 무슨 수로 알겠어요!” 엘리자베스가 거들었다. “잊으셨어요, 어머니. 메리턴 무도회에서 롱 부인이 빙리 씨를 소개해 주기로 하셨잖아요.” 그러자 부인은 롱 부인이 제 조카딸 둘을 먼저 들이밀 욕심에 결코 소개해 주지 않을 거라며 투덜거렸다. 베넷 씨가 짐짓 맞장구쳤다. “그렇다면 당신이 빙리 씨를 롱 부인에게 소개해 주면 되겠군.”

부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빙리 씨라면 이제 진절머리가 나요!” 하고 짜증을 내자, 베넷 씨가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쉬며 폭탄선언을 던졌다. “그것참 안됐군. 진작 말하지 그랬소. 오늘 아침에 알았더라면 굳이 찾아가지 않았을 텐데. 기왕 인사를 텄으니 이젠 모른 척 발을 뺄 수도 없게 되었구려.”

순간 거실에 경악과 정적이 흘렀다. 어안이 벙벙해진 부인은 이내 환희에 차 소리를 질렀다. “역시 당신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요! 딸들을 끔찍이 아끼시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요!” 남편은 아내의 요란스러운 찬사에 진력이 난 듯 서재로 피신했고, 남겨진 부인은 딸들에게 아버지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막내 리디아가 당차게 끼어들었다. “무도회에 가면 빙리 씨는 틀림없이 나하고 먼저 춤출 거예요. 막내라도 키는 내가 제일 크니까요!”

메리턴 무도회의 환희와 다아시의 오만한 모욕


마침내 메리턴의 무도회장에서 열린 무도회 날, 빙리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은 빙리와 두 누이(허스트 부인, 캐럴라인 빙리), 매형 허스트, 그리고 친구 피츠윌리엄 다아시였다. 빙리는 훤칠한 외모에 다정하고 격식 없는 태도로 단숨에 좌중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무도회장의 모든 시선을 단숨에 빼앗은 이는 다아시였다. 큰 키와 귀족적인 이목구비, 당당한 풍채를 지닌 그는 연 수입이 만 파운드에 이르는 대지주라는 소문이 오 분 만에 퍼지며 모든 이의 찬탄을 받았다.

하지만 무도회가 중반으로 접어들자 다아시를 향한 평판은 곤두박질쳤다. 그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일행 외에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시골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깔보는 오만함을 드러냈다. 빙리가 열정적으로 모든 곡에 맞춰 춤을 추며 무도회가 너무 일찍 끝나는 것을 아쉬워한 반면, 다아시는 제 일행인 두 부인하고만 마지못해 한 번씩 춘 뒤 내내 방 안을 서성이며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춤 상대를 찾지 못해 두 곡 동안 벽가에 앉아 쉬던 중, 빙리가 다아시에게 다가와 춤을 권하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이봐, 다아시, 자네도 춤을 좀 추게.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꼴이 보기 민망하네.” 다아시가 싸늘하게 거절했다. “안 출래. 잘 아는 사이가 아니면 춤추기 싫은 거 알잖아. 자네 누이들은 이미 짝이 있고, 이 방엔 같이 서는 게 벌칙처럼 느껴지지 않을 여자가 한 명도 없어.” 빙리가 제 파트너인 맏딸 제인 베넷을 칭찬하며, 그 뒤편에 앉은 엘리자베스 베넷을 가리켰다. “저기 자네 바로 뒤에 앉은 아가씨를 보게. 아주 매력적이고 사랑스럽지 않나.”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슬쩍 돌아보더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차갑게 시선을 돌리며 내뱉었다.

“그저 봐줄 만은 하군. 하지만 내 마음을 동하게 할 만큼 빼어나진 않아. 다른 남자들에게 외면당해 버려진 아가씨를 위로해 줄 기분이 아니거든. 어서 자네 짝에게나 가보게.” 순간 엘리자베스의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가 났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인간 군상을 관찰하고 비웃는 데 남다른 재능과 유머를 지닌 그녀는, 상처를 곱씹는 대신 친구들에게 다아시의 거만한 험담을 익살스러운 일화로 떠벌리며 통쾌하게 웃어넘겼다.

엇갈리는 시선과 샬럿 루커스의 현실론


집으로 돌아온 베넷 부인은 밤늦도록 책을 읽던 남편을 붙들고 수다를 늘어놓았다. 제인이 무도회에서 얼마나 많은 칭송을 받았는지와, 빙리가 제인에게만 두 번이나 춤을 청했다는 사실을 늘어놓으며 기염을 토했다. 베넷 씨가 질색하며 말을 잘랐다. “그 친구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렇게 많이 추지 말았어야지! 제발 춤 파트너 이야기는 그만하시오. 차라리 첫 곡에서 발목이나 삐끗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어 부인은 다아시의 무례함을 과장 섞어 성토했다. “어찌나 거만하고 콧대가 높은지! 그래도 리지가 그 작자 눈에 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에요. 시골 사람을 파리 보듯 쳐다보는 꼴이라니, 난 그 인간이 정말 끔찍하게 싫어요!”

방으로 돌아와 단둘이 남게 되자, 엘리자베스는 제인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제인이 빙리의 싹싹한 매너와 잘생긴 외모를 조심스레 칭찬하자, 엘리자베스는 애정 어린 핀잔을 건넸다.“언니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점만 보잖아. 살면서 언니가 남을 흉보거나 악의를 품는 걸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언니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는 정말 흠잡을 데 없는 신사일 거야.”

이후 롱본의 베넷 일가는 네더필드를 방문했고, 정식 답방이 오가며 교류가 이어졌다. 제인의 온화한 품성은 빙리의 오만한 누이들에게도 호감을 샀으나, 엘리자베스는 그 자매들이 겉으로는 상냥한 척하면서도 시골 사람들과 자신의 가족을 은근히 멸시하는 기색을 꿰뚫어 보고 결코 마음을 주지 않았다.

빙리가 제인을 깊이 연모하고 있음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제인 역시 그에게 깊이 빠져들고 있었으나, 타고난 신중함과 온화한 성품 탓에 격렬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차분한 미소 뒤에 숨겼다. 엘리자베스는 언니의 그런 정숙함이 세상 사람들의 경박한 입방아로부터 사랑을 지켜줄 방패가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현명하고 현실적인 친구 샬럿 루커스는 엘리자베스의 안일한 생각을 단호히 꼬집었다. “감정을 지나치게 숨기면 도리어 손해를 봐. 열에 아홉은 여자가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조금 더 과장해서 호감을 내보이는 편이 안전해. 빙리 씨가 언니를 좋아하는 건 확실하지만, 언니가 적극적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으면 그 호감은 그저 좋아하는 단계에서 멈추고 말 거야.”

엘리자베스가 반박했다. “하지만 언니는 타고난 성품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있어. 나조차 알아챌 정도인데 빙리 씨가 모른다면 그가 바보지.” 샬럿은 고개를 저으며 뼈아픈 현실을 짚었다. “두 사람은 늘 북적이는 모임에서 수박 겉핥기로만 만나고 있어. 상대를 단단히 붙잡아 결혼을 확정 짓고 난 뒤에야, 마음껏 사랑에 빠질 여유가 생기는 법이야.” “네 계산은 오직 ‘조건 좋은 결혼’ 자체가 목적일 때나 통하는 전략이야. 제인 언니는 그런 속셈으로 남자를 대하지 않아. 두 사람이 안 지 고작 보름밖에 되지 않았잖아.”

샬럿은 물러서지 않고 서늘한 결혼관을 피력했다. “함께 저녁을 보낸 게 벌써 네 번이야. 네 번의 저녁이면 한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고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결혼 생활의 행복이란 온전히 운에 달린 문제야.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의 결점은 차라리 미리 모르는 편이 속 편한 법이니까.”

엘리자베스는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친구의 냉소적인 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샬럿, 네 말이 재미있긴 하지만 그건 옳지 않아. 너 자신도 그게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걸 잘 알 테고, 너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타협하지 않을걸.”

루커스 저택의 모임과 다아시의 은밀한 매혹


빙리가 언니 제인에게 쏟는 다정한 관심을 살피느라, 엘리자베스는 정작 빙리의 오만한 친구 다아시의 눈길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에 다아시는 그녀를 미인이라 여기지 않았고, 메리턴 무도회에서처럼 어떻게든 결점만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얼굴 이목구비에 변변한 구석이 없다고 단정 짓기 무섭게, 그녀의 짙은 두 눈동자에 서린 총명하고 장난기 어린 빛이 얼굴 전체를 유난히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게다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는 태도에도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자존심을 꺾으며 인정해야 했다. 반면 엘리자베스에게 다아시란 여전히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함께 춤출 가치도 없다며 자신을 면박 준 불쾌한 사내일 뿐이었다.

윌리엄 루커스 경의 저택에서 열린 모임에서, 다아시가 자꾸만 자기 곁을 맴돌며 대화에 귀를 기울이자 엘리자베스는 친구 샬럿에게 의아함을 털어놓았다. “다아시 씨가 자꾸 내 말을 엿듣는 건 무슨 속셈일까? 내가 먼저 날카롭게 쏘아붙이지 않으면 곧 저 사람이 무서워질 것 같아.” 마침 다아시가 다가오자 샬럿이 짓궂게 부추겼고, 엘리자베스는 몸을 돌려 당차게 물었다. “다아시 씨, 아까 제가 포스터 대령께 메리턴 무도회를 열어달라고 졸랐을 때, 제법 그럴듯한 말솜씨로 설득하지 않았나요?” “아주 기운차셨지요. 하지만 숙녀분들은 무도회라는 화제만 나오면 으레 생기가 넘치는 법이니까요.” “저희를 너무 가혹하게 평가하시는군요.”

샬럿이 노래를 청하자 엘리자베스는 다아시를 흘긋 바라보며 가볍게 응수했다. “다들 아실 옛말이 있지요. ‘죽이라도 식힐 숨은 아껴 두라’고요. 저는 제 숨을 쓸데없는 입씨름 대신 노래에 보태겠습니다.”

그녀의 피아노 솜씨와 노랫소리는 완벽하진 않았지만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한두 곡이 끝나자, 베넷가에서 유일하게 미모가 떨어져 그 결핍을 악착같은 재주 연마로 메우려 하던 셋째 메리가 안달하며 피아노 자리를 넘겨받았다. 메리가 긴 협주곡 끝에 흥겨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민요 가락으로 넘어가자, 어린 동생들과 몇몇 장교들이 응접실 한구석에서 신나게 춤판을 벌였다.

다아시는 지적인 대화도 없이 소란스럽게 흘러가는 시골 모임을 차가운 침묵 속에 지켜보았다. 그때 흥에 취한 윌리엄 경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젊은이들에게 춤만큼 멋진 놀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아시 씨! 역시 춤이야말로 문명사회의 으뜸가는 즐거움이지요.” “그렇겠지요. 어떤 미개 사회라도 춤은 추는 법이니까요.” 다아시의 냉소에도 윌리엄 경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마침 곁을 지나가던 엘리자베스의 손을 덥석 잡아 다아시에게 이끌었다. “엘리자 양, 왜 춤을 안 추고 계시오? 다아시 씨, 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더없이 완벽한 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놀랍게도 다아시는 거절하지 않고 정중히 몸을 숙였으나, 당황한 엘리자베스는 화들짝 손을 빼내며 물러섰다. “정말이지 춤출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짝을 구하려고 이쪽으로 온 줄로는 부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다아시가 다시 한번 정중하게 함께 출 영광을 청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다아시 씨는 참으로 예의가 바르시군요.”

그 도도한 거절이 도리어 신선하고 흥미로웠던 다아시에게, 질투에 찬 캐럴라인 빙리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무슨 생각에 잠기셨는지 맞혀 볼까요. 이런 따분한 시골 모임에서 저녁을 보내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곱씹고 계셨죠?” “전혀 빗나가셨습니다. 한 여인의 얼굴에 박힌 아름다운 한 쌍의 고운 눈이 주는 깊은 즐거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캐럴라인이 놀라 대체 어느 귀부인이냐고 캐묻자 다아시는 거침없이 답했다. “엘리자베스 베넷 양입니다.” “엘리자베스 베넷 양이라니요! 기가 막혀라. 언제부터 그렇게 마음에 드셨어요? 그래, 축하 인사는 언제 올리면 될까요?” “꼭 그렇게 물으실 줄 알았습니다. 숙녀분들의 상상력이란 흠모에서 사랑으로, 사랑에서 결혼으로 순식간에 건너뛰는 법이니까요.” 다아시가 무심하게 털어내듯 넘겨버리자, 캐럴라인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겨우 안도했다.

제인의 발병과 진흙탕을 건너온 엘리자베스


한편 베넷 씨의 재산은 연 이천 파운드가량의 영지뿐이었으나, 한정 상속 제도로 인해 아들이 없으면 먼 친척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마침 겨울 동안 민병대 연대가 메리턴에 주둔하자, 넷째 키티와 막내 리디아의 머릿속은 온통 화려한 제복을 입은 장교들 생각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식탁에서 딸들의 철없는 수다를 듣고 있던 베넷 씨가 쌀쌀맞게 혀를 찼다. “너희들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너희 둘은 온 고장에서 가장 어리석은 계집애들이 틀림없구나. 진작 짐작은 했다만 이젠 확신이 서는군.” 베넷 부인이 발끈했다. “어쩌면 제 자식들에게 그렇게 모진 소리를 하세요! 우리 애들은 다 영리하고 사랑스러워요.” “내 자식이 어리석다면, 적어도 아비 된 자로서 그 사실은 늘 잊지 않고 있어야지.”

그때 네더필드에서 제인 앞으로 온 초대 쪽지가 도착했다. 남자들은 장교들과 외식을 나가고 없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는 캐럴라인의 전갈이었다. 베넷 부인의 눈이 욕망으로 번뜩였다. “마차를 타고 갈까요?” 제인이 묻자 부인이 서둘러 막아섰다. “아니다, 말을 타고 가렴. 하늘을 보니 곧 비가 쏟아질 것 같구나. 그러면 비에 젖어 하룻밤을 묵고 올 수밖에 없을 게다.”

과연 제인이 말을 타고 떠나자마자 거센 폭우가 쏟아졌다. 베넷 부인은 비를 내리게 한 공이 자기 지혜 덕분인 양 으스댔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비를 흠뻑 맞은 탓에 지독한 감기 몸살로 앓아누웠다는 제인의 편지가 날아왔다. 베넷 씨가 혀를 차며 빈정거렸다. “딸이 중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그게 다 빙리 씨를 낚으려다 당신 성화에 못 이겨 그리되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겠구려.”

언니의 건강이 진심으로 염려된 엘리자베스는 마차도 없고 말을 탈 줄도 몰랐기에, 빗물이 고인 들판 삼 마일을 걸어서 가기로 결심했다. “이 진창에 무슨 생각이냐? 가 봤자 꼴이 말이 아닐 텐데!” 어머니가 말렸으나 엘리자베스는 단호했다. “언니를 보러 가기엔 충분한 차림이에요. 그거면 됐어요.” 엘리자베스는 젖은 들판을 가로지르고, 울타리를 넘고, 진흙 웅덩이를 건너뛰며 숨 가쁘게 내달렸다. 마침내 네더필드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발목은 쑤시고 뺨은 붉게 달아올랐으며 치맛단은 진흙으로 엉망이었다.

단신으로 진창을 걸어왔다는 사실에 빙리의 두 누이는 속으로 천박하다며 업신여겼으나 겉으로는 정중한 척 예의를 갖추었다. 반면 빙리는 그녀의 언니를 향한 헌신에 깊이 감동하며 다정하게 맞이했다. 다아시는 거친 보행으로 발그레하게 상기된 그녀의 눈부신 혈색에 넋을 잃으면서도, 귀족 숙녀로서 홀로 진흙탕을 뛰어온 무모한 행동 사이에서 복잡한 갈등을 느끼느라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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