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지음 | 고전문학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지음
제1부 게이츠헤드 - 외숙모의 집
붉은 방의 감금과 발작그날은 산책이 도무지 불가능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음울한 구름과 살을 에는 비를 몰고 왔다. 추운 오후의 긴 산책도, 곱은 손발로 돌아와 하녀 베시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도 싫던 나는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엘리자와 존, 조지애나는 응접실에서 소파에 기댄 어머니 곁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나만은 그 무리에서 빠졌다. 외숙모는 내가 좀 더 상냥하고 아이다운 아이가 되려 애쓴다는 걸 베시에게 듣기 전에는, 행복한 아이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에 나를 끼워줄 수 없다고 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베시가 그러던가요?” 내가 묻자 외숙모는 쏘아붙였다. “제인, 나는 따지고 캐묻는 아이는 안 좋아해. 가서 앉아 있어. 상냥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입 다물고.”
나는 옆방인 아침 식사실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그림 많은 책 한 권을 골라 창가 자리에 올라가 붉은 커튼을 거의 닫고 앉으니, 이중으로 숨은 셈이었다. 외딴 바위, 난파선, 구름 사이로 비치는 차가운 달빛을 그린 뷰익의 그림 하나하나가 어린 내게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나는 나름대로 행복했다. 다만 누가 끼어드는 것만이 두려웠는데, 그 일은 너무 빨리 닥쳤다. 문이 열리고 존 리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야! 우울한 아가씨!” 방이 빈 줄 알고 그는 누이들을 불러댔다. 하지만 엘리자가 들여다보고 곧장 일러바쳤다. “분명히 창가 자리에 있을 거야, 잭.” 나는 끌려나올까 봐 곧장 나갔다.
존 리드는 열네 살, 나보다 네 살 위였다. 그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때렸고, 그가 가까이 오면 온몸이 그를 두려워했다. 하인들은 어린 주인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내 편을 들지 않았고, 외숙모는 그 일에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었다.
습관처럼 그의 의자 앞으로 다가가자, 그는 별안간 세게 나를 후려쳤다. 비틀거리는 내게 그가 말했다. “아까 엄마한테 건방지게 대꾸한 죄, 커튼 뒤에 숨은 죄다 이 쥐새끼야!” 뭘 하고 있었느냐기에 “책 읽고 있었어”라고 하자, “책 내놔” 하고 받아들더니 쏘아붙였다. “넌 우리 책을 가질 자격이 없어. 넌 식객이야, 엄마가 그랬어. 돈도 없고 네 아버지가 한 푼도 안 남겼으니, 너는 빌어먹어야 마땅하지 우리 같은 신사의 자식들과 살 게 아니야. 가서 문 옆에 서.” 그가 책을 던질 자세를 잡기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비켰지만, 책은 내 머리를 맞혔고 나는 쓰러져 문에 머리를 부딪쳐 살이 베였다. 공포가 정점을 지나자 다른 감정이 솟구쳤다.
“못되고 잔인한 녀석!” 나는 외쳤다. “넌 살인자 같아, 노예 부리는 자 같아, 로마 황제들 같아!” 골드스미스의 로마사를 읽고 네로와 칼리굴라를 떠올리던 생각을, 입 밖에 낼 줄은 몰랐다. “뭐! 뭐라고!” 그가 곤두박질치듯 달려들어 내 머리채와 어깨를 움켜쥐었다. 머리에서 흐른 핏방울이 목덜미로 흘러내렸고, 그 따끔한 고통이 잠시 두려움을 눌러 나는 미친 듯이 맞섰다. 그가 “쥐새끼! 쥐새끼!” 하고 고함치자 외숙모가 베시와 하녀 애벗을 데리고 달려왔다. “어쩌면 저렇게 발광을 부리며 존 도련님께 덤벼드나!” 외숙모가 명령했다. “저 애를 붉은 방으로 데려가 가둬라.” 네 개의 손이 나를 위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나는 끌려가는 내내 저항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애벗이 “은인의 아들을, 어린 주인을 때리다니!” 하고 꾸짖자 나는 받아쳤다. “주인이라니, 그가 어떻게 내 주인이야? 내가 하인이야?” 그들은 나를 의자에 밀어 앉히고 가만있지 않으면 묶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묶이는 게 수치스러워 나는 두 손으로 의자를 붙들었다.
두 사람은 내가 외숙모께 신세 지고 있으며 쫓겨나면 빈민원에 가야 한다는 것, 리드 집안 아이들과 동등하다 여기지 말고 겸손하게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다. 늘 듣던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애벗은 회개하지 않으면 굴뚝으로 나쁜 것이 내려와 잡아갈지 모른다는 말까지 남기고 문을 잠그고 나가버렸다.
붉은 방은 게이츠헤드에서 가장 위엄 있으면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 방이었다. 외숙부 리드 씨가 구 년 전 바로 이 방에서 숨을 거두었고, 여기 안치되었다가 관이 실려 나갔다. 나는 대리석 벽난로 곁 낮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울 속, 하얀 얼굴에 겁먹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작고 낯선 형상이 마치 진짜 유령 같았다. 존의 횡포, 누이들의 무관심, 외숙모의 증오가 흐린 우물 속 검은 앙금처럼 떠올랐다. 나는 왜 늘 고통받고 비난받아야 하는가? 비둘기 목을 비틀고 어머니에게 함부로 구는 존조차 외숙모의 귀염둥이인데, 나만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못되고 음흉한 아이라 불렸다. “부당해! 부당해!” 내 이성이 외쳤다.
빛이 사그라들자 나는 점점 돌처럼 차가워졌고 용기도 가라앉았다. 부모 없는 나를 친자식처럼 키우겠다고 외숙모에게 약속을 받아낸 외숙부 리드 씨가 살아 계셨다면 나를 다정히 대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무덤에서 불안해하는 죽은 이가 핍박받는 이를 위해 되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나는 흐느낌을 삼켰다.
그때 벽에 한 줄기 빛이 어른거렸다. 지금이라면 누가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든 등불 빛이라 짐작하겠지만, 공포에 사로잡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다른 세계에서 오는 환영의 전조로 여겼다. 심장이 마구 뛰고 귓속이 날갯짓 소리로 가득 차 견딜 수 없어진 나는 문으로 달려가 자물쇠를 흔들었다. 베시와 애벗이 달려 들어오자 “날 데려가 줘! 아이 방으로 보내줘!” 하고 빌었다.
하지만 외숙모가 옷자락을 사납게 끌며 복도를 따라왔다. “베시 손 놔, 얘야. 이런 수작으로는 못 빠져나가. 나는 속임수가 정말 싫어. 한 시간 더 여기 있어야 하고, 잠자코 있어야만 그때 풀어주겠어.” “외숙모!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애원했지만, “조용히 해! 이 발광은 정말 역겨워” 하는 말만 돌아왔다. 외숙모는 미친 듯 흐느끼는 나를 도로 밀어넣고 문을 잠갔다. 곧 나는 발작을 일으켰고, 의식을 잃으며 모든 것이 끝났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내 침대에 누워 있었고, 검은 창살이 가로지른 듯 보이던 붉은 불빛은 아이 방의 난롯불이었다. 베시가 침대 발치에 서 있었고, 베개 곁 의자에는 한 신사가 앉아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게이츠헤드 사람도 외숙모의 친척도 아닌 낯선 이가 방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말할 수 없이 안도했다. 약제사 로이드 씨였다. 그는 미소 지으며 “곧 괜찮아질 거다” 하고는 이튿날 다시 오겠다며 떠났다.
로이드 씨는 나에게 학교에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가씨들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고 프랑스어 책을 번역한다는 베시의 이야기, 게이츠헤드를 아주 떠나 새 삶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끌렸다. “정말 학교에 가고 싶어요.” 로이드 씨는 일어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아이한텐 공기와 환경을 바꿔주는 게 필요해. 신경이 좋지 않아.” 그는 외숙모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중 일로 미루어 보아 나를 학교에 보내라고 권한 듯했다.
외숙모에게 맞선 첫 반항과 승리그날 밤, 내가 잠든 줄 알고 베시와 이야기하던 애벗의 말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부모에 대해 알게 됐다. 아버지는 가난한 목사였고, 어머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외할아버지 리드는 그 일에 노해서 어머니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의절했다.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다 발진 티푸스에 걸렸고, 어머니도 옮아 둘 다 한 달 안에 세상을 떠났다. 애벗은 “저런 두꺼비 같은 애를 누가 가엾어해”라며 조지아나만 예뻐했다.
회복은 더뎠고, 외숙모는 나를 더 멀리했다. 작은 골방에서 혼자 자고 혼자 먹게 했다. 어느 날 존 리드가 또 때리려 들기에 나는 곧장 맞섰다. 그가 어머니에게 달려가 일렀지만, 외숙모는 그에게 나를 상대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난간 너머로 불쑥 외쳤다. “저 애들이야말로 나랑 어울릴 자격이 없어요.” 외숙모가 회오리바람처럼 달려 올라와 나를 짓눌렀다. 그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움직였다. “리드 외삼촌이 살아 계셨다면 외숙모한테 뭐라고 하셨을까요? 외삼촌은 천국에서 외숙모가 하는 걸 다 보고 계세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요. 외숙모가 나를 하루 종일 가둬 두고 죽기를 바라는 걸 다 알고 계세요.” 외숙모는 정신을 차리더니 내 뺨을 때리고 말없이 나가 버렸다.
성탄절과 새해가 화려하게 지나갔지만 나는 모든 즐거움에서 제외되었다. 베시가 아가씨들을 단장시키고 부엌으로 가 버리면, 나는 불이 사위어 갈 때까지 혼자 앉아 있었다.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해야 하니까, 나는 낡은 인형을 잠옷에 싸안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다만 베시가 가끔 올라와 빵이나 케이크를 가져다주고 이불을 여며 주며 “잘 자요, 제인 아가씨”라고 할 때면,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 같았다.
1월 15일 아침, 베시가 나를 씻기고 머리를 빗긴 뒤 아침 식사실로 내려가라고 했다. 거의 석 달 만에 외숙모 앞으로 불려 가는 거라 나는 문 앞에서 떨며 망설였다. 문을 열자 카펫 위에 검은 기둥 같은 형체가 서 있었다. 길고 좁은 검은 몸 위에 조각한 가면 같은 험상궂은 얼굴이 얹혀 있었다. 외숙모가 말했다. “편지로 말씀드린 그 아이입니다.” 브로클허스트 씨였다. “이름이 뭐냐, 꼬마 아가씨?” “제인 에어예요.” “나쁜 아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지옥에 가요.” “어떻게 하면 지옥을 피하겠느냐?”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건강을 잘 지키고, 죽지 않으면 돼요.” 시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 대답에 그는 “네 마음이 사악하다는 증거”라고 했다.
그때 외숙모가 끼어들었다. “이 아이를 로우드에 받아 주신다면, 무엇보다 제일 나쁜 결점, 거짓말하는 버릇을 단단히 감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낯선 사람 앞에서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후벼 파였다. 그는 거짓말쟁이는 불과 유황의 못에 떨어진다며, 로우드에서 겸손을 가르치겠다고 답했다. 외숙모는 방학에도 나를 줄곧 로우드에 두겠다고 했다. 그는 거짓말하다 끔찍하게 죽은 아이 이야기가 실린 소책자를 내 손에 쥐여 주고 떠났다.
외숙모와 단둘이 남자, 방금 들은 말들이 가슴속에서 따갑게 들끓었다. “나가서 유모방으로 돌아가라.” 나는 일어섰다가 도로 외숙모 가까이 다가섰다. 말을 해야만 했다. “저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에요. 거짓말쟁이라면 외숙모를 사랑한다고 했겠죠. 하지만 저는 외숙모를 사랑하지 않아요. 존 리드 다음으로 외숙모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이 책은 거짓말하는 조지아나한테나 주세요.” 외숙모의 얼음 같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더 할 말 있나요?” 어른을 대하는 듯한 상투적인 말투에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떨며 이었다. “외숙모가 제 친척이 아니라서 기뻐요. 평생 다시는 외숙모라고 부르지 않을 거예요. 누가 외숙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고, 끔찍하게 잔인하게 굴었다고 말할 거예요.”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하니, 제인 에어?” “어떻게 감히냐고요? 그게 진실이니까요. 외숙모가 저를 빨간 방에 떠밀어 가뒀던 일을, 제가 숨이 막혀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외쳤던 일을 죽는 날까지 기억할 거예요. 사람들은 외숙모를 좋은 분으로 알지만, 외숙모는 모질고 매정해요. 거짓말쟁이는 바로 외숙모예요!”
말을 해야만 했다. 그토록 짓밟혔으니 이제는 돌아설 수밖에.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 안에서 일찍이 느껴 본 적 없는 자유와 승리의 감각이 부풀어 올랐다. 보이지 않던 사슬이 끊어진 것 같았다. 외숙모는 겁먹은 얼굴로 손을 떨며 “제인, 뭐가 문제니? 물이라도 마시겠니?”라고 했지만 나는 거부했다. 외숙모가 “곧 학교에 보내겠다”고 중얼거리며 황급히 나갔고, 나는 전쟁터의 승자로 혼자 남았다. 내가 싸운 가장 힘든 싸움이자 첫 승리였다.
그러나 그 사나운 기쁨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복수의 맛은 향긋한 포도주 같았지만, 삼킨 뒤의 뒷맛은 독을 마신 듯 쓰고 부식되어 있었다. 나는 외투 자락으로 머리를 감싸고 인적 없는 숲으로 나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고 거듭 중얼거리던 그때, 베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인 아가씨! 어디 있어요? 점심 드세요!”
외숙모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라 나는 베시의 잔소리쯤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베시, 야단치지 마.” 그 거침없는 행동이 어쩐지 그녀를 기쁘게 한 모양이었다. “참 이상한 아이야, 제인 아가씨. 학교에 간다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시는 오늘 오후 마님과 아가씨들이 외출하니 나와 차를 마시고 짐을 함께 꾸리자고 했다. “베시, 떠날 때까지 다시는 야단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래, 약속할게요. 대신 착하게 굴고, 날 무서워하지 마요.” 그날 오후는 평화롭게 흘렀다. 나 같은 아이의 삶에도 햇살이 비치는 순간이 있었다.
제2부 로우드 - 학교
헬렌 번스와의 만남, 인내의 가르침1월 19일 새벽, 다섯 시 종이 울리기도 전에 베시가 촛불을 들고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옷을 거의 다 입은 뒤였다. 그날 나는 게이츠헤드를 떠나 로우드 학교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리드 외숙모의 방 앞을 지날 때 베시가 작별 인사는 드리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니, 베시. 어젯밤 외숙모가 내 침대로 와서, 아침에 깨우지 말라고 했어. 늘 내게 가장 좋은 친구였으니 그렇게 알고 고마워하라고 했어.”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아가씨?” “아무 말도 안 했어. 이불로 얼굴을 덮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지.” “그건 잘못한 거예요, 제인 아가씨.” “잘한 거야, 베시. 그분은 내 친구가 아니라 내 적이었어.”
마차가 문 앞에 멈췄다. 나는 입맞추며 매달리던 베시의 목에서 떼어져 마차에 실렸다. 문이 쾅 닫히고 “출발!” 소리와 함께 마차가 굴러갔다. 그렇게 나는 베시와 게이츠헤드에서 떼어져, 멀고 신비롭게만 보이던 미지의 땅으로 실려 갔다.
긴 여정의 끝, 비바람과 어둠 속에서 한 하녀가 나를 마차에서 내려 벽 안쪽 문으로 데려갔다. 불 켜진 방에서 곱은 손을 녹이고 있는데, 키 큰 부인이 촛불을 들고 들어왔다. “아이가 너무 어린데 혼자 보냈군요.” 그녀는 나를 가만히 살피더니, 자기 전에 저녁부터 먹이라고 일렀다. 갈색 옷을 똑같이 입은 여든 명 가까운 여학생이 모여 앉은 긴 교실에서 나온 저녁이라고는 귀리떡 조각뿐이었지만, 너무 지쳐서 나는 곧 잠들었다.
이튿날 새벽 종소리에 깨어 보니 살을 에는 추위였다. 한 시간 반의 기도와 성경 읽기가 끝나고 아침 식사 시간이 됐다. 그런데 김이 오르는 죽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또 죽을 태웠어! 구역질 나!” 키가 큰 아이들이 속삭였다. 굶주린 나는 한두 숟갈 떠먹다 곧 손을 멈췄다. 탄 죽은 썩은 감자만큼이나 끔찍했다. 아무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식사가 끝났다.
낮 열두 시, 처음 봤던 키 큰 부인이 학생들 앞에 섰다. 환한 대낮에 보니 훤칠하고 기품이 있었고, 짙은 갈색 머리에 인자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로우드의 사감, 템플 선생이었다. “오늘 아침 너희는 먹을 수 없는 식사를 했으니 배가 고플 거야. 모두에게 빵과 치즈를 점심으로 내주라고 했다.” 선생들이 놀란 눈으로 보자 그녀는 “내 책임으로 하는 일이에요”라고 덧붙이고 방을 나갔다. 곧 빵과 치즈가 돌고 온 학교가 기뻐했다.
정원으로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1월 끝자락의 황량한 잿빛이었다. 창백하고 마른 아이들이 베란다에 모여 있었고, 공허한 기침 소리가 자주 들렸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나는 외로움에 익숙했다. 그때 가까이서 기침 소리가 나 돌아보니, 한 소녀가 돌 벤치에 앉아 『라셀라스』라는 책에 빠져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책 재미있느냐고 물었다. 학교 이름의 뜻을 묻자, 그녀는 여기가 자선 학교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 고아라고 일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