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미들마치 2

조지 엘리엇 지음 | 고전문학


미들마치

조지 엘리엇 지음





제6부 미망인과 아내



윌과 도러시아의 작별


도러시아는 프레시트 홀을 떠나 다시 고독한 로윅 저택으로 돌아왔다. 윌 래디슬로를 다시 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채 마음에 묻어두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 거짓말처럼 윌이 그녀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으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침묵에 잠겼다. 먼저 정적을 깨뜨린 것은 윌이었다. “이 고장을 영영 떠나기 전에, 부인께 작별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이제 시와 예술이라는 신기루 대신, 법정 변호사 일을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간다고 덧붙였다.

“그것이 훨씬 더 당당하고 떳떳한 길이겠지요. 로마에서 뵈었을 때는 당신이 오직 시와 예술만을 탐닉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세상의 무거운 일들도 진지하게 마주할 줄 아는군요.” 도러시아는 그를 향해 환한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 해 동안 저 먼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기 전까지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이군요.” 윌이 씁쓸하게 말을 받자 도러시아는 대답 대신 창밖의 무성한 장미 덤불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윌이 떠나 있을 그 수많은 쓸쓸한 여름날이 저 덤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아요. 다만 굳건히 견디셔야 합니다. 아마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테니까요.” “맙소사!” 윌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커소번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도러시아 주변을 맴돈다는 세상의 추악한 오해만큼은 결코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껏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을 불행이라 여긴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괴물이 인간이 삶에서 가장 소중히 아끼는 것마저 가차 없이 빼앗아 간다면 참으로 끔찍해지겠죠.” “슬픔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더군요. 우리의 손을 묶고, 가장 말하고 싶을 때 오히려 입을 다물게 만드니까요.”

하녀가 들어와 제임스 체텀 경이 도착했다고 고하자 윌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제 정말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커소번 부인. 아마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하겠네요.”

윌이 방을 나가자, 도러시아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체텀 경에게 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실리아는 잘 지내고 있나요?”

이 이별은 그녀에게 삶의 모든 인연이 끊겨나가는 듯한 상실감을 남겼다. 난생처음 그녀는 서재에 걸려 있던 윌의 작은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떼어내 손바닥에 뉘고는 자신의 뺨을 가만히 갖다 대었다. 방금 스쳐 지나간 그 지독한 감정이 ‘사랑’이었음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인생이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고만 느꼈다.

그날 밤, 도러시아가 동생 실리아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키티. 난 평생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내 남은 재산으로 황량한 땅을 얻어서 물을 빼고, 아주 작은 마을을 만들고 싶어. 모든 이가 정직하게 일하고, 모든 것이 평화롭게 돌아가는 그런 아름다운 곳 말이야.”

케일럽의 정직한 노동과 프레드의 성숙


도러시아는 정직한 자산 관리인 케일럽 가스에게 로윅 영지의 총괄 업무를 전적으로 맡겼다. 마침 마을에 철도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자, 유산 한 푼 받지 못해 비뚤어진 솔로몬 피더스톤이 순박한 시골 일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어느 아침, 폭도로 변한 일꾼들이 갈퀴를 든 채 철도 측량원들에게 달려들었고, 케일럽의 어린 조수를 밀쳐 쓰러뜨렸다. 마침 말을 타고 그 길을 지나던 프레드 빈시가 분노하여 말채찍을 사납게 휘두르며 폭도들을 흩어놓았다. “이 미련한 놈들, 대체 무슨 짓거리냐! 당장 멈추지 않으면 죄다 치안판사 앞에 처넣을 줄 알아라!”

폭도들의 난동으로 하루 일과를 완전히 망쳐버린 케일럽이 프레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얘야, 오늘 당장 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일이 있냐?” 프레드는 대답 대신 말에서 내려 측량용 쇠사슬을 묵묵히 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케일럽이 목소리를 낮추어 진중하게 말했다.

“내 평생 깨달은 두 가지만 가슴에 명확히 새기렴. 첫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온 영혼을 다해 사랑하고, 딴 데로 눈을 돌려 놀 궁리만 하지 말 것. 둘째는 정직한 노동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 것. 나는 그것이 영국의 수상이든, 지붕을 잇는 가난한 일꾼이든, 자신이 맡은 소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떠드는 인간이라면 단돈 두 푼어치의 가치도 두지 않는단다.”

프레드는 굳은 결심을 한 듯, 만약 자신이 억지로 목사가 된다면 메리가 평생 자신을 경멸하며 받아주지 않을 것이 뻔하니, 야외에서 하는 고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배우겠다고 고백했다. 케일럽은 청년의 진심을 읽고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내일 아침 아홉 시 정각에 내 사무소로 오렴.”

그날 저녁, 케일럽은 아내 수전에게 프레드를 조수로 고용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철부지 애를 내 밑에 받아서 진짜 번듯한 사람으로 만들어 볼게.” 가스 부인은 한숨을 쉬며, 사실은 페어브러더 목사 역시 메리를 마음 깊이 연모하고 있는데 프레드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케일럽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 젊은 청년의 영혼이 지금 내 손안에 들어왔어.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만이 지금 내게 주어진 가장 성스러운 의무야, 수전.”

이튿날 케일럽은 프레드가 갈겨쓴 엉망진창인 글씨체에 어이가 없었으나, 그의 진심을 보아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프레드가 더는 성직자가 되지 않고 정직한 노동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집안에 알리자, 속물적인 아버지 빈시 씨는 집안의 명예가 떨어졌다며 한탄하면서도 끝내 아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사무소 일을 마치고 목사관으로 향하던 프레드는 잠시 가스의 집에 들렀다. 가스 부인이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뼈아픈 충고를 건넸다.

“넌 정말 이기적이고 큰 실수를 저질렀어. 페어브러더 목사에게 너의 청혼을 메리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비겁하게 부탁한 것 말이야. 젊은 사람들은 늘 제 눈앞의 소원밖에 보지 못하지. 그 철없는 욕심이 타인에게 얼마나 거대한 희생을 치르게 만드는지는 전혀 모른 채 말이야.” “그 말씀은… 페어브러더 목사님이 진심으로 메리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말씀인가요?” 프레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너야말로 그분의 고결한 희생에 가장 경건하게 감사해야 할 사람이지.”

프레드의 가볍고 철없던 마음에 생전 처음으로 묵직한 도덕적 멍이 들었다. 이후 정원에서 페어브러더 목사가 메리의 단정한 글씨를 다정하게 칭찬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프레드의 마음속에는 겉잡을 수 없는 질투가 치밀어 올랐다. 목사가 자리를 뜨자마자 프레드는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다 소용없는 짓이야, 메리. 너는 결국 저 고결하고 번듯한 페어브러더 목사님과 결혼하겠지.”

“너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바보구나.” 메리가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부드럽게 응시하며 활짝 웃었다. “내 평생 나라는 존재에게 이토록 순수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매달린 남자는 오직 너 하나뿐이었어. 그러니 다시는 바보같이 그런 나약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마.”

로저먼드의 치명적인 고집과 깊어가는 부부의 늪


하녀의 손길에 닦이는 거울이나 잘 닦인 강철판 표면은 사방으로 무수히 미세한 흠집이 나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촛불 하나를 빛의 중심으로 놓아 보라. 보라! 그 흠집들이 촛불을 둘러싼 아름다운 동심원으로 정렬되는 듯 보일 것이다. 이것은 에고이즘에 관한 하나의 우화다.

그 무렵, 허영심에 찌든 로저먼드는 남편이 지독하게 경멸하는 그의 사촌 리드게이트 대위가 저택을 방문하자 은근히 우쭐해하며 과시욕을 채웠다. 그녀는 대위가 내준 화려한 회색 사냥말을 타고 멋대로 승마를 즐겼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남편에게 동의를 구하는 척 부드럽게 기만했다. “이번에는 무사히 돌아왔으니 천만다행이지만, 앞으로 다시는 그 거친 말을 타서는 안 돼요, 로지. 아무리 유순해 보이는 말이라 할지라도 사고는 늘 예고 없이 우리를 파멸시키니까.” “하지만 가만히 숨어 있는 집 안에서도 사고는 얼마든지 날 수 있는 법이잖아요.”

리드게이트가 그녀의 궤변을 따지려 들자, 로저먼드는 특유의 여우 같은 태도로 도리어 남편을 달래며 향후 승마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자기 판단에 맡기라는 약속만을 교묘하게 받아냈다. 결국 자만심에 빠져 다시 말을 타고 숲으로 나간 그녀는, 마침 벌목되던 나무의 거대한 굉음에 놀란 사냥말이 날뛰는 바람에 땅으로 추락했고, 그 충격으로 복중의 아이를 잃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 참혹한 유산이 자신의 경솔한 승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불운일 뿐이라며 차가운 얼굴로 우겼다. 거세게 맞서 싸우지 않으면서도 아득바득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해 버리는 이 기괴한 고집 앞에서, 리드게이트는 거대한 무력감을 느끼며 절망했다.

부부를 집어삼킨 더 무서운 근심은 숨 막히는 ‘빚’이었다. 로저먼드의 사치와 허영 탓에 한 해 살림 비용이 남편 수입의 두 배를 훌쩍 넘어섰고, 당장 이웃 도시 브래싱에서만 380파운드라는 거액의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리드게이트는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아내에게 감추어둔 재정 파탄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당신 가슴에 깊은 상처를 줄 비극적인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로지. 현재 내 재정 형편이 파산 직전이라는 건 당신도 진작 짐작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제가 지금 무얼 할 수 있는데요?” 더없이 냉소적이고 무심한 그녀의 그 한마디는, 아내를 위로하려 다시 피어나던 리드게이트의 모든 다정함 위로 잔인한 얼음물처럼 내려앉았다. 당장 채무를 갚기 위해 저택의 고급 가구들을 담보로 잡혀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친정아버지에게 구걸하자고 조르기만 했다. 리드게이트가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그녀는 독기를 품은 채 물러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구질구질한 미들마치를 영영 떠나면 안 되나요? 당장 화려한 런던으로 가든지, 아니면 제 귀족 집안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더럼 근처로 이사해 주세요.” “돈 한 푼 없는 파산자 상태로는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어요, 로저먼드!” 리드게이트가 마침내 발끈하여 소리쳤다. “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은 제발 내 판단에 전적으로 따르란 말이야!”

로저먼드는 속으로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무능한 의사 놈과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남편을 저주했다. 리드게이트가 당장 사채업자 도버에게 돌려주어야 할 은붙이 목록을 작성해 내밀자, 그녀는 보석함에서 자수정 목걸이까지 꺼내 거칠게 얹어놓았다. “이게 당신이 결혼할 때 생색내며 준 보석의 전부예요. 당신 마음대로 다 돌려주든 팔아치우든 하세요. 저는 내일부터 친정아버지 댁으로 가버리겠어요.”

자신을 이 차가운 파멸의 저택에 홀로 남겨두지 말아 달라는 남편의 간절한 애원 끝에, 그녀는 마지못해 저택에 남기로 동의했다. 리드게이트가 가련한 아내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자, 우리 힘을 합쳐 이 순간을 견뎌내 봅시다. 금방 지나갈 시련일 뿐이에요. 나를 사랑한다면 제발 키스해 줘요.” 로저먼드는 죽은 시체처럼 희미하게 입맞춤을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겉으로는 위태로운 화해를 이룬 듯했으나, 리드게이트는 저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고결한 삶과 의학적 신념을 모조리 파괴해야 할 잔인한 앞날을 직감하며 깊은 두려움에 떨었다.

유언장의 독소 조항과 드러난 추악한 핏줄


죽은 커소번이 자신의 유언장에 윌 래디슬로를 향한 기괴하고 옹졸한 보복 조항을 적어두었다는 추악한 소문이 마침내 로저먼드의 귀에까지 흘러들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절대로 입을 다물라는 엄중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권태롭고 심술궂은 성정의 로저먼드는 윌이 홀로 저택을 방문했을 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다.

“맙소사! 지금 대체 무슨 천박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윌의 얼굴이 순식간에 귀 끝까지 새빨갛게 분노로 달아올랐다. 진실을 전해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 모자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더는 그 더러운 입으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것은 고결한 커소번 부인에게도, 그리고 제 명예에도 씻을 수 없는 최악의 모욕입니다.” “난 조만간 두 분의 아름다운 결혼 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다릴게요.” “절대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당신 같은 속물들이 원하는 그런 추악한 소식은 영영 듣지 못할 것입니다!” 윌은 잔인한 저주를 내뱉은 채 저택을 박차고 떠났다.

8월 말, 윌은 벌스트로드 부인이 경매에서 탐내던 골동품 그림의 가치를 평가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라처 씨 댁의 야외 경매장에 머물고 있었다. 천막 그늘에서 목을 축이던 그에게, 멀리서부터 줄곧 음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감시하던 거구의 사내가 다가왔다. 과거의 유령, 존 래플스였다. “실례하겠네, 젊은 래디슬로 씨. 혹시 자네 모친의 성함이 ‘사라 던커크’가 아니었나?” 윌은 불길한 예감에 한 발 물러서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렇소만, 내 어머니의 이름이 당신 같은 부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거리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은 래플스는 지저분한 취기에 너스레를 떨며 진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자네 외가인 던커크 집안이 과거 런던에서 아주 고상한 척하며 도둑놈들의 장물을 취급하던 전당포로 먹고살았거든. 아주 더러운 장물아비 집안이었단 말이지. 한데 불쌍한 사라 양은 그 추악한 진실을 까맣게 몰랐어. 그런데 아치 던컨이 자기를 상대도 안 해준다고 심술이 나서 그 사실을 폭로해 버렸고, 결국 가출해 버렸어.” 그는 천천히 음흉하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우리, 독한 술이나 한잔하며 깊은 대화를 나눌까?” “아니, 이만 가보겠소.” 윌은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는 어두운 골목길로 광기 어린 질주를 하여 간신히 추악한 노인을 떨쳐냈다.

차가운 별빛이 쏟아지는 로윅의 밤길을 홀로 걸으며, 윌은 마치 자신의 온몸에 시커먼 진흙을 뒤집어쓴 듯한 극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내 핏줄의 과거가 아무리 부정한 진흙탕 속을 굴렀다 한들, 내 영혼이 저 위선적인 미들마치의 속물들보다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멋대로들 의심하고 비웃으라지. 내가 저들의 비루함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고결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그 고고한 도러시아마저 똑똑히 알게 해줄 것이다.

벌스트로드의 더러운 돈, 윌의 거절


지독한 재정 업무를 마치고 브래싱에서 돌아온 은행가 벌스트로드에게, 그의 아내 해리엇이 전날 밤 ‘존 래플스’라는 기괴한 사내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벌스트로드는 심장이 내려앉았으나, 과거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준 가엾은 주정뱅이일 뿐이라며 태연하게 둘러댔다.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차가운 식초로 머리를 정성스럽게 적셔주자, 평소 오만하던 벌스트로드가 이례적으로 나약한 목소리를 냈다. “당신은 참으로 착하고 고결한 아내야, 해리엇.” 아내는 그저 남편이 과로로 큰 병이 나려나 보다 걱정했을 뿐, 남편이 숨겨온 잔인한 과거의 전말에 대해서는 단 한 조각도 알지 못했다.

실제로 래플스라는 악마에게는 종교적 협박도, 거액의 회유도 통하지 않았다. 벌스트로드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법적인 처벌이 아니었다. 독실한 신앙인으로 공고히 쌓아 올린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사실은 그 신앙을 철저히 더럽힌 사기꾼이자 장물아비였다는 사실이 이웃들과 사랑하는 아내 앞에 낱낱이 파헤쳐 지는 파멸의 순간이었다.

과거 고아 출신이었던 젊은 회계사 벌스트로드는 던커크의 전당포에 취직한 후, 그곳의 막대한 재산이 도둑들의 장물 거래로 축적된 피 묻은 돈임을 알면서도 ‘이것 또한 신의 축복’이라며 위선적인 기도로 자신을 속였다. 이후 던커크 부인의 외동딸 사라 양이 가출하자 그녀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녀의 생존 사실을 확인하고도 거액의 입막음 비용을 치르고 진실을 은폐했다. 외동딸이 죽었다고 속여 가문의 막대한 유산을 통째로 집어삼킨 뒤, 그 10만 파운드의 피 묻은 돈을 들고 미들마치로 찾아와 가장 독실한 부호 은행가로 가장해 온 것이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