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들마치 1
조지 엘리엇 지음 | 고전문학
미들마치
조지 엘리엇 지음
서곡인간이라는 신비로운 존재가 시간의 변덕 속에서 어떻게 빚어지는지 알고 싶은 이라면, 한 번쯤 성녀 테레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을 것이다. 어느 이른 아침, 어린 남동생의 가냘픈 손을 잡고 무어인의 땅을 향해 순교의 길을 나섰던 작은 소녀. 아빌라의 성벽을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던 두 아이는 새끼 사슴처럼 위태롭고 연약해 보였지만, 그 작은 가슴속에는 이미 우주만큼 거대한 이상이 세차게 고동치고 있었다.
비록 삼촌들이라는 ‘가정 내의 현실’에 가로막혀 걸음을 돌려야 했을지라도, 열정으로 가득 찬 그 천성은 평생 서사시 같은 삶을 갈망했다. 그리고 내면에서 격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은, 끝내 수도원 개혁이라는 자신만의 위대한 역사적 서사시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300년 전 에스파냐의 뜨거운 땅을 밟았던 그 여인이 인류의 마지막 테레사는 아니었다. 그 뒤로도 역사에는 수많은 테레사가 태어났으나, 슬프게도 그들은 자신의 열정을 온전히 쏟아부을 ‘위대한 행위의 무대’를 끝내 만나지 못했다. 거대한 영혼이 옹색하고 편협한 시대의 기회와 어긋날 때, 그 고결함은 잔인한 비극으로 변모한다. 시대를 초월해 숭고하게 살아보려던 그 처절한 몸부림은, 평범한 속물들의 눈에는 그저 대책 없는 변덕이나 분별없는 만용으로 비칠 뿐이었다.
탁한 갈색 연못의 오리 새끼들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백조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거북하게 자라나 끝내 제 날개를 펼칠 눈부신 물줄기를 만나지 못한 삶. 그런 안타까운 영혼의 어긋남은 도처에 존재한다. 여기, 그렇게 위대한 날개를 품고 태어났으나 영광스러운 성전은커녕 현실의 늪에 가로막혀 단 하나의 벽돌도 세우지 못한 채 스러져간, 어느 가련한 백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1부 브룩 양
어머니의 보석과 두 자매브룩 양은 검소한 옷차림이 오히려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언니인 도러시아 브룩은 영혼의 영원한 문제 앞에서 옷치레에 마음 쓰는 걸 정신 나간 짓으로 여겼다. 동생 실리아는 같은 신앙을 가졌어도 거창하게 굴지 않는 상식이 있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두 자매는 노총각 외삼촌 브룩 씨와 살았는데, 상속녀로 점쳐지기도 했다. 도러시아가 그리는 결혼은 남달랐다. 남편이 아버지 같아서 히브리어까지 가르쳐 줄 사람이라야 했다.
설계도를 보던 언니에게 실리아가 입을 뗐다. “언니, 바쁘지 않으면 오늘 엄마 보석을 꺼내 나눠 가지면 어때?” 함을 열자 보석들이 환한 꽃밭처럼 펼쳐졌다. 자수정 목걸이와 진주 십자가가 가장 고왔다. 도러시아는 목걸이를 동생 목에 걸어 주었다. “자, 실리아! 십자가는 네 검은 옷에 매.” “오, 도도, 십자가는 언니가 가져.” “절대 안 돼. 십자가를 노리개로 다는 건 나로선 도저히 못 할 일이야.” “그럼 내가 다는 것도 못된 짓이라고 보겠네.” 실리아가 불안한 듯 말했다. “아니야.” 도러시아가 동생의 뺨을 쓸어 주었다. “영혼에도 저마다 낯빛이 있는 거야. 하나한테 어울리는 게 다른 하나한텐 안 어울리기도 하지.” 햇살이 비추자 도러시아가 에메랄드 반지와 팔찌를 빛에 비춰 보며 탄성을 질렀다. “정말 아름답다. 색이 향기처럼 사람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아. 하늘에서 떨어진 조각들 같아.” 언니가 약한 모습을 보인 것에 놀란 실리아가 말했다. “그 반지랑 팔찌는 언니가 꼭 가져.” “그래, 이건 내가 가질게.” 도러시아는 문득 손을 떨구며 어조를 바꿨다. “이것만 갖고 나머지는 다 치워 줘.” “모임에 갈 때 그것들을 할 거야?” 실리아가 물었다. “글쎄,” 그녀가 다소 오만하게 말했다. “내가 어느 수준까지 타락하게 될지는 알 수 없구나.” 실리아는 기분이 상했다. 자신이 언니의 심기를 거슬렀음을 알아챈 그녀는 보석들을 넣어 들고 나갔다.
실리아가 보석을 넣어 나간 후 도러시아가 불렀다. “키티, 이리 와서 내 설계도 좀 봐.” 실리아가 종이 위로 몸을 숙이자 도러시아는 동생의 팔에 뺨을 댔다. 실리아는 그 뜻을 알고 용서했다. 실리아는 늘 언니를 향한 비판과 경외 속에서 멍에를 지고 살았다. 그래도 멍에를 진다고 제 나름의 속생각마저 없었을까.
티프턴 그레인지의 만찬 자리. 브룩 씨가 한담을 늘어놓는 동안, 도러시아는 거북하면서도 맞은편 손님에게 마음이 쏠렸다. 쇠빛 머리의 커소번 씨는 불그레한 구레나룻의 제임스 체텀 경과는 딴판이었다. 그때 농장을 직접 맡아 보겠다던 체텀 경이 그녀에게 의견을 물었다.
“모두를 먹여 살리는 땅에서 어떻게 더 많은 걸 거둘까, 그걸 궁리하는 데 돈을 쓰는 게 나아요. 그저 그 위를 달리겠다고 개와 말을 기르는 것보다요. 모두를 위해 실험하다 가난해진다고 죄가 되진 않지요.” 어린 숙녀답지 않은 기세였다. 커소번 씨가 그제야 새삼 그녀를 보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옛 문헌 읽는 것에 시력을 다 써 버려서, 저녁이면 책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할 정도예요. 저는 제 안의 샘에서 너무 깊이 길어 먹고, 죽은 자들과 너무 가까이 삽니다. 제 정신은 폐허 속을 떠돌며 옛 세상을 다시 세워 보려는 유령 같지요.”
그 또렷한 말투에 도러시아는 사로잡혔다. 등불이나 받쳐 드는 처지로라도 그 위대한 일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때 제임스 경이 또 말을 붙였다. “브룩 양은 승마를 좋아하시지요. 숙녀용으로 잘 길들인 밤색 말을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지만, 저는 이제 말을 타지 않기로 했어요.” 커소번 씨에게만 귀 기울이고 싶은 도러시아는 그가 자꾸 끼어드는 게 언짢아 퉁명스레 잘랐다. 그러자 제임스 경이 실리아를 돌아보았다. “언니는 자기를 괴롭히는 데 마음을 쏟고 있네요?” “그런 것 같아요.” 실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언니는 뭔가 포기하는 걸 좋아해요.” 도러시아는 제임스 경을 실리아의 짝으로만 여겨, 그 눈길이 자신을 향한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응접실에 둘만 남자 실리아가 말했다. “커소번 씨는 정말 못생겼어!” “키티! 내가 본 가장 기품 있는 분이야. 로크의 초상을 놀랍도록 닮았어.” “로크도 저렇게 털 난 흰 사마귀가 두 개나 있었어?” “커소번 씨에게는 위대한 영혼이 깃들어 있어. 그분에게서 보이는 모든 게 그분의 책과 들어맞아.”
티 테이블에서 제임스 경이 또 곁에 앉았다. 도러시아는 앞만 본 채 잘생긴 소년 같은 냉담함으로 말했다. “보세요, 우리는 생각이 한참 다르네요. 저는 완벽한 기수가 되지 않기로 정했으니, 경이 그리시는 숙녀상에는 결코 들어맞지 못할 거예요.” 승마를 하지 않기로 한 동기를 묻는 제임스 경 곁에 어느새 찻잔을 든 커소번 씨가 다가와 있었다. “동기를 너무 캐어물어선 안 됩니다.” 그가 차분하게 끼어들었다. “동기란 말로 내뱉는 순간 나약해지기 쉽지요. 그 향기가 탁한 공기와 섞여 버리니까요. 움트는 낟알은 빛에서 떼어 놓아야 하는 법이지요.”
도러시아는 기쁨에 낯을 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학식이 자신의 믿음을 고스란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제임스 경은 질투하지 않았다. 청혼하려는 처녀가 메마른 늙은 책벌레를 성직자 우러르듯 하는 것 말고 달리 볼 리 없다고 여겼다.
이튿날 아침 커소번 씨는 자신의 필생의 작업에 관해 들려주었다. 온갖 신화가 본디 하나였던 계시된 전통이 흩어지고 변질된 흔적임을 밝히려는 일이었다. 도러시아는 그 이야기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분은 나와 같은 생각을 품고 계셔. 내 작은 웅덩이에 견주면, 그분의 경험은 드넓은 호수야.’
커소번이 로윅으로 떠난 뒤 도러시아는 숲을 거닐었다. 그가 자기를 아내로 삼으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러면 나는 모든 걸 배우게 될 거야. 그분의 위대한 일을 더 잘 돕는 게 내 의무가 되겠지. 그건 파스칼과 결혼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 로윅 사람들을 좋은 집에 살게 할 수 있다면!’
그때 제임스 경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훌륭한 오두막 도면을 자기 영지에 실행하고 싶다고 했다. “할 만한 일이고말고요!” 도러시아가 짜증을 잊고 기운차게 말했다. “돼지우리 같은 데 소작인을 살게 하는 우리 모두는 매를 맞으며 쫓겨나도 싸요.” 제임스 경은 브룩 양의 호감을 사고 있다는 흐뭇함을 챙겨 갔다.
며칠 뒤 커소번 씨가 다시 왔고, 도러시아는 첫인상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다만 그가 오두막 일엔 통 관심이 없어, 제임스 경이 개량을 맡아 주는 게 도리어 고마웠다. 오두막 부지를 둘러보고 오는 마차에서, 도러시아가 제임스 경을 그저 미래의 매제로만 본다고 하자 실리아가 바로잡았다. “잘못 알고 있어, 도도. 탠트립이 그러는데, 제임스 경이 브룩 댁 큰따님과 결혼하기로 돼 있다고 했대.”
그 말이 어찌나 아프게 밀려들었던지 눈물이 솟구쳤다. 제임스 경이 자기를 연인으로 점찍었다니 역겨웠다. “그분이 어떻게 그런 걸 기대해? 오두막 일 말고는 그분 말에 동의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래도 그 뒤로 언니가 그렇게 좋아했잖아. 그러니 언니가 자길 좋아한다고 믿게 된 거야.” “좋아한다니, 실리아! 어쩜 그런 끔찍한 말을 골라 쓰니!”
평소 용기가 없던 실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언니는 늘 아무도 못 보는 걸 보면서, 정작 빤한 건 못 봐. 그게 언니 방식이야, 도도.” 도러시아는 매라도 맞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집에 도착하자 외삼촌은 조카의 눈물을 그저 또 지나친 신앙심 탓이려니 했다. 그가 초기 교회 소책자를 가져왔다고 하자, 전류라도 흐른 듯 도러시아의 몸이 절망에서 기대로 떨렸다. 거기엔 커소번 씨가 적은 글이 있었고, 그녀는 황량한 길 끝에 만난 꽃향기처럼 그것을 빨아들였다.
난롯가에 앉은 브룩 씨가 로윅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람한테는 길동무가 필요해. 길동무가 말이다.” “그분의 길동무가 된다면 누구에게나 큰 영광이지요.” 도러시아가 힘주어 말했다. “그 사람이 좋으냐, 응?” 브룩 씨는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실은 그가 너를 아주 높이 사더라. 네가 아직 성년이 아니라서 나한테 먼저 청을 넣었지. 한마디로, 너한테 청혼해도 좋겠냐고 허락을 구한 거다.”
“고마워요, 외삼촌. 그분이 청혼하시면 받아들이겠어요. 제가 본 어떤 남자보다 그분을 우러르고 존경해요.” 브룩 씨는 잠시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 “아? 글쎄다. 어떤 면에선 좋은 혼처지. 하지만 체텀도 좋은 혼처고, 우린 땅이 맞붙어 있지 않으냐.” 그는 커소번이 스물일곱 살이나 위인 데다 건강도 좋지 못하다고 말했다. “저는 제임스 체텀 경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요. 판단력에서나 학식에서나 저보다 위에 있는 남편을 바래요.” “마음을 단단히 굳혔구나. 실은 너한테 온 편지가 한 통 있단다.” 그가 편지를 건네며 덧붙였다. “서두를 것 없다. 천천히 생각해 보렴.”
커소번 씨의 편지였다. 그 나이엔 보기 어려운 사색의 깊이를 그녀에게서 발견했다고, 메마른 문체로 적혀 있었다.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섭리가 베푼 가장 큰 선물로 여기겠습니다. 그 보답으로 여태 허비하지 않은 애정과 한 생애의 헌신을 바치겠습니다.>
도러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읽다가 무릎을 꿇고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꼈다. 그것을 사랑의 고백으로 따져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더 충만한 삶이, 우러러볼 정신의 빛이 눈앞에 열린다는 사실에 영혼이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커소번의 청혼과 약혼저녁을 먹고 나서 그녀는 손이 떨려 답장을 세 번이나 고쳐 썼다. <커소번 씨께. 저를 사랑해 주시고 아내가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행복과 하나가 되는 것보다 더 바랄 게 없어요. 진심을 담아, 도러시아 브룩 올림.>
밤늦게 편지를 건네자 외삼촌이 물었다. “충분히 생각은 해 봤니, 얘야?”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어요. 저를 망설이게 할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아! 그럼 체텀은 가망이 없는 거냐? 그 사람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데?” “그분은 제 마음에 드는 데가 하나도 없어요.” 도러시아가 격하게 말했다가 뉘우치며 덧붙였다. “남편으로서 말이에요. 친절한 분이긴 해요.”
이튿날 커소번이 저녁에 들르겠다는 전갈이 왔다. 그 말에 도러시아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실리아는 언니와 그 학자 사이에 책 이야기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의심했다. “커소번 씨가 숟가락 긁는 소리는 언니 귀엔 안 들려?” 도러시아의 감정은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실리아, 네게 말해 둬야겠다. 나 커소번 씨랑 약혼했어.” 실리아의 안색이 그렇게 창백해진 적이 없었다. 인형을 내려놓고 가만히 있다가, 눈물이 맺힌 채 입을 열었다. “오, 도도, 언니가 부디 행복하면 좋겠어.” “괜찮아, 키티. 우리가 늘 같은 사람을 좋아할 순 없잖니.”
그날 저녁, 도러시아는 더없이 행복했다. 커소번과 단둘이 마주 앉아, 그에게 헌신하고 그의 위대한 목적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기쁨을 거리낌 없이 쏟아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도러시아. 여태 저는 손안에서 시들 꽃을 꺾을 마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기꺼이 그 꽃을 꺾어 당신 가슴에 꽂아 드리겠어요.” 끝머리의 싸늘한 수사조차 그에게는 진심이었고, 도러시아의 믿음이 그 빈자리를 메웠다. 그가 떠나기 전 결혼은 여섯 주 안에 치르기로 정해졌다. 집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조랑말 마차가 그레인지로 들어섰다. 문지기가 허리를 깊이 숙이는 걸 보니 캐드월레이더 부인이었다. 서재에 혼자 있던 브룩 씨는 그 이름을 듣고 흠칫했다. “로윅의 키케로께서 다녀가셨더군요. 아 참, 휘그 당으로 미들마치에 출마한다면서요. 솔직히 말해 봐요!” 그러더니 부인은 말머리를 돌렸다. “딸이나 다름없는 조카를 이 고장 제일가는 신랑감한테 시집보내려는 양반이라니. 대단한 혜안이네요. 제임스 경이 얼마나 상심하겠어요.”
“안됐지만 체텀이 내 조카랑 결혼할 가망은 없어요.” 그때 마침 실리아가 들어오자 브룩 씨는 부랴부랴 자리를 떴고, 부인은 실리아를 향해 물었다. “얘야, 네 언니가 약혼했다니 무슨 소리니?” “커소번 씨랑 결혼하기로 했어요. 위대한 영혼을 지닌 분이래요.”
부인은 곧장 프레시트 홀로 가 제임스 경에게 말했다. “크게 놀라실 소식이 있어요. 브룩 양이 약혼했대요. 그것도 커소번하고요.” 제임스 경은 채찍을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에 그렇게 짙은 혐오가 떠오른 적은 없었다. “커소번이라고요? 맙소사, 끔찍하네요. 그자는 미라나 마찬가지예요!” “그 여자는 그를 위대한 영혼이라더군요. 마른 콩이나 달가닥거리는 텅 빈 오줌보 같은 자를 말이에요.” 부인은 다시 그를 다독였다. “기운 내요. 작은 실리아가 그 애 둘을 합친 것보다 낫고 짝으로도 훨씬 나아요. 그 애가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다 보이던걸요.” 한 여자가 자기에게 호의를 품었다는 생각만으로 제임스 경의 가슴속에 작고 애틋한 정이 풀려 나왔다.
구애하는 동안 커소번은 자기 열정이 얼마나 얕은 실개천인지 알고는, 시인들이 사내의 감정을 너무 부풀린 거라고 여겼다. 어느 아침 도러시아가 청했다.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밀턴의 딸들이 그랬듯, 뜻은 몰라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읽어 드릴 순 없을까요?” “그러다 당신이 지루해질까 걱정이에요.” 커소번은 웃으며 답했지만 하루 한 시간씩 글자를 가르치는 데는 응했다. 하지만 도러시아가 그리스어 강세를 물었다가 돌아온 대답은, 여자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비밀이 있을지 모른다는 쓰라린 의심만 남겼다.
도러시아가 이미 약혼한 몸이어도 제임스 경은 그 혼사만큼은 두고 볼 수 없었다. 흥분하는 그에게 브룩 씨는 특유의 좋게 말하면 유연하고, 나쁘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하나의 문제를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편협한 정신이지. 나도 한때는 그랬었네만….” 답답해진 그는 로윅 교구의 캐드월레이더 목사에게도 도움을 청해보려 했지만, 끝내 꿈쩍도 안 했다. 혼사를 막을 길은 없었다. 제임스 경은 도러시아가 마음껏 잘못 판단할 자유를 누리게 됐다는 걸 씁쓸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