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무시무시한 힘 2
C. S. 루이스 지음 | 고전문학
저 무시무시한 힘
C. S. 루이스 우주 3부작 3
C. S. 루이스 지음
10장 정복된 도시
1.지독한 불면에 시달리는 마크에게, 그가 신봉하던 유물론은 밤이 가져다주는 근원적인 공포를 조금도 막아주지 못했다. 이른 아침, 그는 부소장 위더의 방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곳에는 치안대장 하드캐슬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위더는 평소와 달리 자못 살갑고 다정한 태도로 마크를 맞이했다. 그때 하드캐슬이 불쑥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스터독, 자네 지갑을 잃어버렸지?” 그녀는 마크의 지갑이 살해당한 힝기스트 경의 시신 곁 풀밭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완벽한 살인 용의자로 몰리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마크가 동료 펠럼에게 장난삼아 보냈던 편지의 사본까지 쥐고 있었다. 편지에는 ‘눈보라 빌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저주 섞인 문구가 적혀 있었고, 마크의 알리바이 역시 힝기스트와 함께 나가는 것은 목격되었으나 돌아오는 것을 본 이가 없어 지극히 허술했다.
위더는 ‘법적 문제’니 뭐니 하는 특유의 장황하고 모호한 화법으로 말을 돌리며, 국가의 경찰이 아니라 자신들의 연구소 경찰이 먼저 지갑을 찾아낸 것이 얼마나 큰 천운인지 끝없이 에두르며 강조했다. 사건을 깨끗이 묻어줄 테니 벨베리에 뼈를 묻고, 당장 아내를 이곳으로 부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마크가 차라리 국가 경찰을 찾아가 조사를 받겠다고 반발하자, 하드캐슬은 담배 연기를 뱉으며 단호하게 못 박았다. “자네가 진짜 경찰 손에 들어가는 순간, 자네 인생은 그걸로 끝이야.”
직장에서 해고당할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위협은, 이제 단두대에서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실존적인 공포로 바뀌었다. 위더는 마크에게 당분간 벨베리 요새 밖으로 코빼기도 내밀지 말라고 명령하며, 아내를 데려오면 외로운 하드캐슬 양의 아주 좋은 말동무가 될 것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갑자기 노인의 품위 있던 얼굴이 굶주린 짐승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 여자를 당장 데려와! 알아들었나? ‘머리’께서는 지금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으시네!”
2.마크는 제인에게 이 위험을 알리기 위해 문을 나서자마자 연구소 진입로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하지만 이미 전 세계적인 권력을 쥐기 시작한 N.I.C.E.의 발톱 아래에서 그가 달아날 안전한 도피처 따윈 영국에도, 미국에도, 러시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두운 숲길에 이르렀을 때, 어제 마주쳤던 것처럼 기괴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위더 부소장의 키 큰 그림자가 다시 한번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분노가 폭발하면서도 공포를 느낀 마크가 그 유령 같은 머리를 향해 주먹을 거칠게 휘둘렀으나, 허공을 가를 뿐 손끝에 부딪히는 실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극도의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환각인지, 혹은 위더라는 집착이 강한 인격이 벨베리 건물과 숲에 새겨놓은 일종의 유령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림자는 이내 안개처럼 무심히 사라졌다.
그는 무작정 코트햄프턴 마을을 향해 걸었다. 도로 위에는 온갖 가재도구를 가득 실은 수레와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광기 어린 N.I.C.E.의 폭정을 피해 에지스토 시를 탈출하는 비참한 피란민들의 행렬이었으나, 평생 전쟁의 참상을 겪어본 적 없던 철부지 지식인 마크는 그 비극적인 풍경의 뜻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길가 선술집에 들르자, 사내들이 숨을 죽이고 수군수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 하루에만 무고한 시민 이백 명이 체포되었고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N.I.C.E.를 향한 시민들의 분노나 피해자들을 향한 동정의 여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마크 자신이 그동안 벨베리 잉크실에서 진실을 왜곡해 작성했던 선동 기사들이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대중의 눈과 귀를 완벽하게 멀게 한 결과였다.
텅 빈 버스를 타고 들어선 에지스토 시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주인을 잃은 빈집들과 두꺼운 판자로 입구를 임시로 막아버린 상점들, 그리고 사방에 붙은 N.I.C.E.의 상징인 ‘벼락을 쥔 벌거벗은 남자’의 기괴한 표지판이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 골목마다 곤봉을 든 연구소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고, 벽면에는 피버스톤 경이 서명한 서슬 퍼런 비상계엄 규정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는 차갑게 비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빵조각과 상해서 시큼하게 엉겨 붙은 우유, 그리고 뜯지도 않은 편지들이 나뒹굴었다. 문득 식탁 한구석에서 딤블 부인 앞으로 온 편지 봉투를 발견한 마크는, 제 상황이 이렇게 꼬인 것이 모두 제인을 숨겨준 딤블 부부 탓이라 원망하며 그를 찾아가 따지기로 결심했다.
중간에 N.I.C.E.의 소유로 넘어가 버린 ‘브리스톨’ 술집에 들른 그는 독한 위스키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술기운이 돌자 그의 나약한 마음에 또다시 비겁한 변화가 찾아왔다. 술집을 나설 때의 마크는 이미 아내 제인을 벨베리로 불러들이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지 모른다며 합리화하는, 완벽한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3.노섬벌랜드 대학에서 마크를 마주한 딤블 박사는, 눈앞의 젊은이가 과거의 총기를 잃고 대단히 살이 쪘으며 천박하게 타락해버렸음을 직감했다. 마크가 다짜고짜 제인의 행방을 묻자, 딤블 박사는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자네가 진정으로 그 사람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 행방을 묻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딤블은 지난 폭동의 밤, N.I.C.E.의 괴한들이 제인을 강제로 체포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치안대장 하드캐슬이 직접 제인의 어깨에 불붙은 시가를 지지는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마크는 전혀 모르고 있던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 순간, 마크는 평생 처음으로 도덕적이고 올곧은 딤블 박사의 거룩한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추악하고 비겁한 진짜 모습을 똑똑히 대면하게 되었다.
딤블 박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N.I.C.E.가 저지른 참혹한 죄목들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정직한 과학자 힝기스트와 콤프턴을 잔인하게 살해, 메리 프레스콧을 강간 살해, 영문도 모른 채 감옥으로 끌려가 비인간적인 ‘교정 치료’를 받고 있는 불쌍한 죄수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이천 가구의 피란민들과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 노인들까지. “자네가 저 사악한 악의 중심부에 그토록 가까이 서 있다면, 나는 내 집 개 한 마리라도 결코 자네 손에는 넘겨주지 않을 걸세!”
마크가 당황하여 자신은 그저 신문 기사를 썼을 뿐이라며 비겁하게 둘러대자, 딤블 박사는 단 한 곳의 정론지를 제외하고 온 나라의 언론을 통째로 장악해 대중을 속인 N.I.C.E.의 죄악을 들어 불호령을 내렸다. 마크는 평생 살아가며 소소한 악의나 시기는 겪어보았어도, 인간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이토록 거룩하고 참된 분노는 처음으로 마주해 가슴이 얼어붙었다. 게다가 딤블 박사는 단두대에서 잘린 알카산의 머리가 벨베리의 진짜 대가리 노릇을 하고 있다는 최고 수준의 비밀까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딤블 박사는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 마크에게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네가 진심으로 그 지옥 같은 N.I.C.E.를 떠나 새사람이 되겠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 돕겠네. 다만, 결단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내려야 하네.”
한순간 마크의 눈앞에 굳게 닫혀 있던 낙원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한 구원의 서광이 비쳤다. 하지만 지독한 우유부단함에 절여진 마크는 또다시 미적거리며 기회를 걷어찼다. “제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자네에게 줄 시간 따윈 없네, 스터독! 이것은 자네의 출세 문제가 아니라, 사악한 짐승의 길에서 벗어나 자네를 온전한 인간 가족의 품으로 되돌리는 마지막 기회란 말일세!” 결국 마크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는 비겁한 말만 남긴 채, 노학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뛰쳐나갔다. 사실 구원의 순간에 그가 간절히 바란 것은 고작 당장의 불안을 달래줄 술과 담배 한 개비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딤블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 달라 매달리고픈 나약한 마음과, 배신하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벨베리의 속삭임, 그리고 그동안 쌓아 올린 핵심부의 권력을 차마 놓지 못하겠다는 추악한 미련이 뒤엉켜 거대한 지옥을 이루었다.
차가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대학 수위실 앞, 어둠 속에서 두꺼운 우비를 입은 사내들이 손전등을 켜고 일제히 마크를 포위했다. 강한 불빛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가운데 사내들이 차갑게 선언했다. “마크 게인즈비 스터독, 자네를 윌리엄 힝기스트 경을 살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4.딤블 박사는 방금 전 떠나보낸 그 가엾고 어리석은 청년에게 자신이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서서 구원해 줄 수 없었을까 하는 깊은 자책감에 시달리며 세인트앤 저택을 향해 거칠게 차를 몰았다. 저택에 도착하자 온 식구가 숨을 죽인 채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장 랜섬은 어깨 위에 갈까마귀 한 마리를 얹고, 발치에는 곰 벌티튜드를 둔 채 거룩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적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군. 마침내 거대한 싸움의 막이 올랐네.”
맥피가 이번에도 자신이 직접 조사하러 가겠다며 거듭 자청했으나, 소장은 엄한 태도로 그를 막아섰다. 고대의 위대한 언어를 알지 못하고, 선한 신 말렐딜의 초자연적인 보호 아래 들지 못한 인간이 그곳에 가는 것은, 무시무시한 탱크 앞에 고작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던져놓는 격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사정은 이러했다. 브래그던 숲 밑바닥에 천오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마법사 멀린의 존재는 아직 다행히 벨베리의 악당들에게 발각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인이 새로 꾼 예지몽에 따르면, 그 비밀의 방은 수직으로 파고들어 간 갱도가 아니라 완만하게 위로 오르는 긴 지하 굴로 이어져 있었다. 그 굴의 지상 입구는 가시덤불 끝자락에 흩어진 돌무더기 아래 숨겨져 있었는데, 비스듬하게 세워진 받침대가 부러진 흰색 나무 대문이 유일한 표식이어서 고맙게도 N.I.C.E.의 삼엄한 통제 구역 바깥일 가능성이 대단히 컸다. 즉, 위험한 브래그던 숲 내부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도 멀린의 지하 방에 도달할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멀린은 누군가 깨우기도 전에 스스로 가사 상태에서 깨어나 있었다. 제인의 꿈속 지하 방은 비어 있었고 외부의 침입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주 오랜 옛날, 인류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되었던 고대의 ‘인간 시한폭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맞추어 시간의 감옥을 깨고 마침내 현재로 걸어 나온 것이었다. 벨베리의 사악한 과학자들이 그를 찾아내기 전에 그 고대의 드루이드를 만나는 것만이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의 기회였다. 질퍽이는 진흙 길 위에 남겨진 멀린의 발자국을 추적해 그를 찾아내야만 했다.
이 위험천만한 수색 작전에 딤블 박사가 무조건 앞장서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오직 그만이 지구상에서 고대 타락 이전에 쓰이던 ‘위대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석학이었기 때문이다. 멀린이 그 신성한 언어를 알아듣는 순간, 자신을 찾아온 이들이 벨베리의 사기꾼들이 아니라 우주의 선한 주인 엘딜라들을 대리하여 온 정통 후계자임을 단박에 깨닫게 되리라는 계산이었다. 소장은 딤블에게 가슴에 권총을 쥐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오직 말렐딜의 권능에 마음을 고정시킨 채 고대 로그레스의 왕인 펜드래건의 이름으로 그 노인을 불러내라고 명했다.
딤블 박사가 숨을 고르고 마침내 그 신성하고 위대한 언어의 음절을 입술 위로 올렸다. 거대한 화강암 성채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장엄하고 웅장한 음절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 저 머나먼 달 너머의 깊은 우주에서 온 우주가 공유하던 언어, 즉 순수한 태초의 소리였다. 그 신성한 음성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창가의 작은 새들과 거대한 곰, 그리고 도도한 고양이들까지 일제히 숨을 죽인 채 우주적 경외감 앞에 납작 엎드렸다.
소장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딤블 박사의 아내 마거릿의 손을 따뜻하게 쥐며 위로했다. “마거릿,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만약 오늘 밤 세실이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우리 역시 불과 몇 시간도 더 버티지 못하고 적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이오. 그러니 이 이별은 대자연이 선사하는 영원한 사별에 비하면 아주 잠깐의 헤어짐일 뿐이라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오늘 밤 여덟 시 십 분에 다시 이곳에 모여 작전을 시작하기로 결의했다. 식구들이 모두 방을 나가고 홀로 남겨진 제인에게 소장 랜섬이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제인, 당신은 우주의 창조주이신 말렐딜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소?” 제인은 고개를 떨구며 솔직하게 답했다. “저는 말렐딜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 눈앞에 계신 소장님, 당신의 권위에는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
소장이 깊고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일러주었다. “오늘 밤은 그 고백만으로도 충분하오. 하지만 기억하시오. 그분은 대단히 질투가 많으신 신이시라, 결국에는 당신의 그 얄팍한 의지마저 온전히 꺾으시고 당신이라는 존재 전체를 오직 자신만의 거룩한 소유로 삼으실 것이오.” 그 신비롭고 영적인 대화를 문가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철저한 이성주의자 맥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내 평생 이 바닥에서 살아오며 들어본 중 가장 허무맹랑한 말이로군.”
11장 시작된 전투
1.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제인과 딤블, 데니스턴은 비스듬히 부러진 흰 나무 대문을 찾아 어둠 속으로 차를 몰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그들의 계획을 수시로 방해하며 가로막았다. 바로 그 순간, 제인의 눈에 작은 숲의 움푹한 골짜기 사이로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들어왔고, 그녀는 여태껏 까맣게 잊고 있었던 꿈의 마지막 부분을 마법처럼 떠올렸다. 지하의 비밀 방에서 걸어 나온 뒤, 그녀는 바로 저기,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 마법사 멀린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세 사람은 차를 세우고 질퍽이는 들판으로 발을 내디뎠다. 단단한 도로를 벗어나 어두운 들판으로 들어서는 그 짧은 순간은, 마치 이성적이고 깨어 있는 세계에서 기괴한 환영의 세계로 국경을 넘어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선사했다. 사방은 그저 어둡고 축축했으며,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딤블 박사의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피어오른 원초적인 두려움은, 마치 틈새로 새어 드는 물처럼 나머지 두 사람의 영혼으로 거침없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멀린이라는 존재를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 진정으로 믿고 있었던 게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죽었으나 완전히 죽지 않은 존재, 저 고대 로마의 찬란한 빛과 잉글랜드라는 국가의 시작 사이, 그 까마득한 암흑의 구덩이에서 파내어 올린 유물과의 위험한 조우였다.
평생 고대사를 연구해 온 학자 딤블의 눈앞에 옛 브리튼의 참혹한 지옥도가 환영처럼 솟아올랐다. 로마의 문명이 흐려지며 허물어져 가던 작은 도시들, 그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젖은 원시림, 이름조차 듣도 보도 못한 야만적인 왕들의 초라한 요새, 잔인한 드루이드의 회당, 그리고 견고함을 더하기 위해 갓난아이의 생혈을 섞어 회반죽을 갠 진흙 집들…. 고대의 마법사 멀린 역시 그 야만의 시대에 발을 딛고 서서 그 잔인한 짓을 자행하려 했던 존재였다. 박제되어 있어야 할 한 시대가 제자리에서 통째로 뽑혀 나와, 갑절의 흉측한 형상으로 되돌아와 자신들을 삼키려 흘러오고 있는 형국이었다.
제인은 비로소 ‘죽음’이라는 실체에 직면했다. 세인트앤의 소장이 저택을 떠나기 전 아내들에게 그토록 비장하게 작별을 명했던 까닭은, 이 수색 작업이 곧 자신들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말렐딜’이라는 이름이 스쳤다. 어쩌면 그 낯선 존재가 바로 목사들이 말하던 하느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죽음 뒤의 영원한 삶이,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정말로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깨달음이 그녀의 메마른 마음에 불티처럼 번져나가며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