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페렐란드라 2

C. S. 루이스 지음 | 고전문학


페렐란드라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2

C.S. 루이스 지음





제11장




그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잔 덕분에 엘윈 랜섬은 다음 날 밤을 지새우기가 수월했다. 바다는 평온했고 비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나무에 등을 기대고 똑바로 앉았다. 곁에는 초록 부인이 잠들어 있었고, 언-맨은 랜섬이 졸기만을 기다리며 그녀를 다시 유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랜섬은 이 상황이 더는 계속될 수 없다는 생각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느꼈다. 적은 가혹한 심문 방식을 구사하고 있었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부인의 저항은 결국 무너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랜섬은 왜 선한 쪽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지, 왜 악마는 직접 나타났는데 말렐딜은 부재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으며 신성한 정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치 어둠이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처럼 말렐딜도 부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렐란드라에서 이전에 경험했던 그 현존의 감각이 돌아왔다. 어둠은 밀도가 높았고, 그의 가슴을 압박하여 숨쉬기조차 힘들게 했으며 머리 위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지난 며칠간 자신의 무의식적인 활동이 이 현존을 무시해 왔을 뿐, 그분이 한 번도 떠나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인간에게 내면의 침묵은 성취하기 어려운 과업이다. 랜섬의 내면 한구석에서는 경외심에 사로잡혀 침묵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질문과 반박을 쏟아내는 수다스러운 자아가 있었다. 그 자아는 언-맨이 지옥의 대리인으로 이곳에 있다면 말렐딜의 대리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랜섬은 자신이 말렐딜의 대리인이라는 그 암시에 경악했다. 그는 그것이 오만한 자만심이나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유혹이라며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어둠은 그의 논리를 가차 없이 되받아쳤다. 그가 페렐란드라에 온 것 자체가 적의 등장만큼이나 큰 기적이었다. 그가 요구했던 선한 쪽의 기적은 이미 일어났으며, 그 자신이 바로 그 기적이었다.

랜섬은 다시 도망칠 구멍을 찾았다. 기적적으로 이곳에 왔으니 이제 하나님의 손에 달린 일이며, 자신은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는 말렐딜이 책임지실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말렐딜은 단지 자신을 무사히 지구로 돌려보내 페렐란드라의 진실을 전하게 하려는 계획일 것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런 회피는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둠은 이 상황이 도덕적 훈련이나 가짜 전쟁이 아니라는 지식을 그에게 엄중하게 주입했다. 이 세계의 운명은 앞으로 몇 시간 동안 그와 초록 부인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우주의 다른 어떤 피조물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그들만이 결정할 수 있는 실재적인 현실이었다.

랜섬의 수다스러운 자아는 불공평하고 터무니없는 일이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는 지구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행동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깨닫는 젊은 군인들, 혹은 다리 위를 지키던 호라티우스나 기독교 수용을 고민하던 콘스탄티누스, 그리고 금단의 열매 앞에 선 하와를 떠올렸다.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개인의 선택에 무언가가 달려 있어야만 했고, 작은 돌멩이 하나가 강물의 줄기를 바꿀 수도 있는 법이다. 랜섬은 지금 온 우주의 중심이 된 그 돌멩이 하나가 자신임을 깨달았다. 깊은 하늘의 엘딜라들이 엘윈 랜섬이 무엇을 할지 지켜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직 구체적인 과업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안락한 경건함에 빠져들려 했다.

그러나 랜섬은 곧 뜨거운 인두에 닿은 사람처럼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악마와의 투쟁이 영적인 싸움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언-맨과의 육체적인 전투라는 개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언-맨의 차가운 손과 살점을 찢어발기는 금속 같은 손톱, 느리게 다가올 죽음의 공포를 생생하게 떠올렸다. 죽기 전에 굴복하여 자비를 구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이토록 끔찍한 일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엘윈 랜섬은 침묵과 어둠이 전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병적인 공상일 뿐이라고 치부하려 했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투쟁은 말렐딜께서 의도하신 고결한 영적 전쟁을 신화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화성에서부터 느꼈던 것처럼, 진리와 신화 그리고 사실 사이의 구분은 지구에서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영육의 분리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성육신은 그 경계가 사라지는 시작이었으며, 이곳 페렐란드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지구인의 눈에 신화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실재였다. 어둠 속의 현존은 이 무거운 진리를 마치 두려운 보석처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따지기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자아는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보내달라고 애걸하다가 다시 논리를 세웠다. 언-맨과의 육체적 전투가 영적인 사안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반박이었다. 유혹자를 힘으로 제거하여 초록 부인을 순종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와가 굴복하기 직전에 코끼리가 우연히 뱀을 밟아 죽였다면 우리 세계가 구원받았을 것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비도덕적인 가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묵묵히 바라보는 슬픈 얼굴과 같았다. 결국 랜섬의 수다스러운 자아는 힘을 잃었다. 어둠은 그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라고 꾸짖는 듯했다. 페렐란드라는 텔루스(지구)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말렐딜은 결코 자신을 되풀이하지 않으신다. 초록 부인의 말처럼 같은 파도는 두 번 오지 않는다. 하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아직 인간이 아니셨으나, 베들레헴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이후 우주는 영원히 변했다. 이제 그분은 인간을 자신의 몸으로 삼으셨고, 그들을 통해 구원하고 고난을 겪으신다. 말렐딜은 자신이 직접 나서는 대신 랜섬을 통해 페렐란드라를 구원하려 하시는 것이었다. 랜섬이 거부한다면 이 장대한 우주적 계획은 실패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 복잡한 이야기의 중심에 선택된 자임을 깨달았다.

랜섬은 또한 자신의 자아가 논점을 회피했음을 깨달았다. 초록 부인은 지금까지 유혹자의 공격을 잘 견뎌냈다. 지치고 상처 입었을지언정 그녀는 굳건히 서 있었다. 이는 지구의 어머니와는 다른 전개였다. 만약 뱀이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 돌아왔다면 하와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끝없는 유혹을 어떻게 멈춰야 하는가? 페렐란드라에서 랜섬이 느낀 직관은 이 유혹이 더는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구의 타락 사건은 이 새로운 과업에 아무런 실마리를 주지 못했다. 초록 부인이 그 타락의 가정 속을 헤매는 것은 무의미했다. 오직 현재의 실재만이 중요했다. 이 장면에 등장한 새로운 인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페렐란드라의 유혹은 랜섬에 의해 멈춰지거나, 아니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우주적 역사의 이 페이지는 오직 그에 의해서만 쓰일 수 있는 고유한 것이었다.

그는 다른 방어선을 구축했다. 어떻게 불멸의 적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시력도 나쁘고 지난 전쟁의 부상도 가시지 않은 학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답은 명확했다. 에드워드 롤스 웨스턴의 육체는 파괴될 수 있으며, 그 육체는 언-맨이 페렐란드라에 발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었다. 언-맨은 웨스턴의 초대를 받아 그 몸에 들어왔으므로, 그 몸에서 쫓겨나면 다른 거처를 찾지 못할 것이었다. 랜섬은 성경 속 불결한 영들이 심연으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대목을 떠올렸다. 결국 그에게 요구된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년의 몸과 또 다른 몸이 맨손과 이빨과 손톱으로 벌이는 처절한 육체적 싸움이었다. 그 구체적인 광경을 상상하자 공포와 혐오감이 몰려왔다. 죽기보다 싫은 고통과 비참함이 그를 짓눌렀다. ‘내 평생 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자문했다.

이제 그는 더는 저항할 기력조차 없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명확해 곁에 잠든 부인이 깨어날 것만 같았다. 그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지구에서 이름 없는 병사들이 더 작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지만, 수치심조차 그에게는 힘이 되지 못했다. 언-맨의 죽어 있으면서도 살아 있는 팔과 맨가슴을 맞대고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나중에 지구로 돌아가 회개하면 될 것이라는 비겁한 생각이나, 베드로처럼 실패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유혹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지성적인 답변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승리에 대한 보장도, 미래에 대한 한 줄기 빛도 없었다. 미래는 눈앞의 밤처럼 그저 칠흑같이 어두울 뿐이었다.

“너의 이름이 랜섬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윈 랜섬은 이것이 자신의 환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성이 몸값(ransom)이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온 것이 아니라 라놀프의 아들(Ranolf’s son)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두 단어를 연결하는 것은 그에게 단순한 언어유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인간 언어학자들에게는 우연한 일치로 보이는 소리의 유사성이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직시했다. 우연과 설계, 사실과 신화 사이의 구분은 오직 지구적인 틀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우주의 거대한 문양 속에서 인간은 연결고리를 보지 못할 뿐이며, 달 너머의 세계에는 우연이나 행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영원 속에서 모든 것은 이 순간을 향해 배열되어 있었다. 랜섬은 고개를 숙이고 신음하며 자신의 운명에 항거했다. 여전히 인간이면서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끌려 올라가 철학이 사유만 하던 바를 몸소 실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 또한 랜섬이다.”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 말의 의미가 랜섬의 머릿속에 떠오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다른 세계에서 말렐딜이라 불리는 분이 바로 세상의 몸값이자 자기 자신의 몸값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진리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듯 두 팔을 내밀어 막아보려 했으나, 진리는 기어이 밀려 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실패하더라도, 훗날 이 세계 또한 구원받을 것이다. 그가 몸값이 되지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맡을 터였다. 그러나 말렐딜은 결코 자신을 되풀이하지 않으신다. 두 번째 십자가 처형은 없을 것이며, 어쩌면 두 번째 성육신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대신 더 끔찍한 사랑이나 더 깊은 겸비의 영광이 뒤따를 것이었다. 랜섬은 우주적 자유의 광대한 너비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음을 깨닫고 전율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주님 앞에 선 베드로와 같다고 여겼으나, 실상은 빌라도였다. 살리느냐 죽이느냐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는 “주여, 왜 하필 저입니까?”라고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여전히 불가능해 보였으나 점차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지난 전쟁에서 위험한 임무를 결심했을 때나, 수치스러운 고백을 하러 가야 했을 때 느꼈던 기묘한 확신이 그를 찾아왔다. 두려움과 수치심, 온갖 논리는 여전했지만, 그는 이제 ‘내일 이맘때면 나는 이 불가능한 일을 완수했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역사적 명제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가 울부짖든, 반항하든, 순교자처럼 노래하든, 악마처럼 저주하든 상관없었다. 미래의 행위는 이미 행해진 과거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예정과 자유의지는 이제 그에게 같은 의미였다.

내일 언-맨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 일은 오히려 작게 느껴졌다. 만약 그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말렐딜께서 직접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말렐딜을 대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지 않음으로써 그분을 대신했을 경우와 다를 바 없었다. 거대한 화재를 막기 위해 불꽃을 끄다가 손가락을 데는 사람과, 그 불꽃을 끄지 않아 번진 대화재 속에서 목숨을 잃는 소방관 사이에는 고통의 비교가 무의미했다. 그는 더 이상 ‘왜 저입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누구라도 상관없었으며, 어떤 선택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의 순간에 비치던 강렬한 빛은 사실 모든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너의 적을 잠들게 했다.”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침까지 깨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 숲속으로 스무 걸음쯤 들어가 그곳에서 자거라. 너의 자매도 잠들어 있다.”



제12장




랜섬은 꿈 없는 잠에서 깨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온전하고 명확하게 의식했다. 섬은 잔잔한 바다 위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는 물가로 나가 몸을 씻은 뒤 갈증을 해소했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그는 햇빛에 탄 피부와 창백했던 피부가 조화를 이루며 상아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발견했다. 오랜 시간 맨발로 지낸 덕분에 장화에 짓눌렸던 발가락도 제 모양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온 우주에 더 위대한 아침이 오기 전까지 다시는 이토록 온전한 육체를 갖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며, 이 도구가 최후의 헌신을 앞두고 악기처럼 조율된 것에 감사했다. “주의 형상으로 깨어날 때에 내가 만족하리이다.” 그는 나직이 읊조렸다.

숲으로 들어간 그는 공중에 떠 있는 거품 열매들을 지나치며 강렬한 즐거움을 느꼈다. 비록 이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지라도 그는 특별한 열매를 찾으려 애쓰지 않고 눈앞에 나타난 조롱박 열매를 먹으며 세상 전체가 춤을 추는 듯한 기쁨을 누렸다. “결국 가치 있는 일이었어. 나는 낙원에서 살았노라.” 그는 생각했다. 숲속 더 깊은 곳에서 그는 잠든 초록 부인을 발견했다. 말렐딜께서 그녀를 잠재우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다시는 이러한 그녀를 보지 못할 것임을, 그리고 인류의 어머니 또한 이처럼 순수하고 찬란한 모습이었을 것임을 생각하며 서글픈 상실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단호하게 그녀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적을 찾아 숲을 헤맸다. 나무에 몸을 감고 잠든 용을 보았고, 온 세상이 깊은 잠에 빠진 듯 정적만이 가득했다.

약 한 시간 뒤, 그는 언-맨과 마주쳤다. 언-맨의 가슴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피가 아니라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새의 피였다. 랜섬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어린 시절 권투를 배웠던 기억이 되살아나 언-맨의 턱에 온 힘을 다해 왼손으로 주먹을 날렸다. 장갑 없는 맨주먹이 뼈에 부딪히는 고통이 팔 전체로 전해졌다. 언-맨은 뒤로 물러나며 혀를 깨물었는지 입가에 피를 흘렸다.

“힘을 써보겠다는 건가.” 언-맨이 둔해진 발음의 영어로 웅얼거렸다. “그 새를 내려놓아라.” 랜섬이 말했다. 언-맨은 오만하게 웃으며 랜섬을 조롱했다. “너는 그분이 너를 도울 거라 생각하나? 내가 너보다 그분을 더 오래 알았어. 그들은 모두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배교하거나 미쳐버릴 때까지 그분이 도와줄 거라 믿었지. 그런데 그분 스스로나 도울 수 있었던가?” 그러더니 언-맨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이 깨질 듯한 목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다. 그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1세기 아람어의 완벽한 재현이었으며, 십자가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 추방된 존재의 가증스러운 기억이었다. 그 끔찍한 조롱에 랜섬이 몸서리칠 때, 언-맨이 폭풍처럼 달려들었다. 눈꺼풀 없는 눈을 부라리며 언-맨은 손톱으로 랜섬의 등을 찢어발겼다. 랜섬은 언-맨의 팔 근육을 깊숙이 물어뜯으며 저항했고, 마침내 풀려나 심장 부근에 무수한 주먹을 퍼부었다. 두 존재는 서로의 손목을 움켜쥔 채 온 힘을 다해 대치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언-맨이 다리를 뻗어 랜섬의 무릎 뒤를 걸었다. 그는 거의 중심을 잃을 뻔했다. 양측의 움직임은 빠르고 어지러워졌다. 랜섬은 적의 왼쪽 팔을 꺾어 부러뜨리려 시도했으나, 그 과정에서 다른 쪽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언-맨의 날카로운 손톱이 랜섬의 뺨을 할퀴었고, 통증으로 인해 공격이 잠시 멈췄다. 잠시 후 두 존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