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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행성 밖에서

C. S. 루이스 지음 | 고전문학
침묵의 행성 밖에서

C. S. 루이스 지음





제1장




소나기의 마지막 빗방울이 멎기가 무섭게, 도보 여행자는 젖어버린 풍경에 눈길을 주는 대신 지친 어깨 위로 배낭을 고쳐 메고는 단호한 걸음으로 다시 길을 나섰다. 머치 내더비의 불친절한 여관에서 뻔히 빈방이 있음에도 숙박을 거절당한 그는, 어쩔 수 없이 언덕 너머로 6마일이나 떨어진 스터크까지 곧장 걸어가야만 하는 처지였다. 다소 구부정한 어깨에 휴가를 떠나온 지식인 특유의 초라한 옷차림을 한 서른다섯에서 마흔 살가량의 이 남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언어학자이자 교수인 랜섬이었다. 내더비 남쪽의 풍요로운 지역과 달리 스터크로 향하는 길목은 양배추와 순무밭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하고 적막한 곳이었으며, 날이 저물고 새들의 지저귐조차 잦아들자 포장된 도로 위로 울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이 유독 신경을 거슬리게 할 뿐이었다.

상념에 빠진 채로 2마일쯤 걸었을 때, 랜섬은 19세기에 지어진 볼품없는 벽돌 오두막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발견했다. 그가 다가가자 한 여자가 열린 문밖으로 황급히 뛰어나오며 그와 부딪칠 뻔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우리 해리인 줄 알았어요.” 랜섬이 스터크보다 가까운 곳에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이 있는지 정중히 묻자, 여자는 근처에 사람 사는 곳이라고는 해리가 일하는 ‘더 라이즈’뿐이라고 대답했다. “더 라이즈가 농장입니까? 그곳에서 저를 재워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선생님. 앨리스 아가씨가 돌아가신 후로 그곳에는 교수님과 런던에서 온 신사분밖에 안 계십니다. 용광로 불을 지피는 우리 해리 말고는 하인도 없지요.”

여자의 어눌한 설명에 따르면, 런던에서 온 신사의 이름은 디바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름 모를 교수였다. 지적장애가 있는 아들 해리가 약속된 저녁 6시가 한참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여자는 겁에 질려 울먹이고 있었다. 여자의 단조로운 목소리 이면에 자리한 극심한 두려움을 눈치챈 랜섬은, 그 미지의 교수를 찾아가 소년을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더불어, 같은 학자들끼리 하룻밤의 호의 정도는 베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내심의 기대도 작용했다.

그가 자신의 의향을 밝히자 여자는 깊이 감사하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해리는 교수님을 무척 무서워해서, 선생님이 문밖으로 데리고 나와 주시지 않으면 오지 못할 거예요.” 랜섬은 동정심을 담아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여자를 안심시킨 뒤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가만히 서 있는 동안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그는, 밀려오는 고통을 참아내며 천천히 더 라이즈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도로 왼쪽으로 평평한 들판과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 도착한 랜섬은 곧 그곳이 나무들로 둘러싸인 저택과 정원, 즉 ‘더 라이즈’임을 깨달았다. 굳게 잠긴 하얀 문턱에서 그는 적막과 짙어지는 어둠에 짓눌려 잠시 망설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스터크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여인과 한 약속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히스테릭한 어머니의 허튼소리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산다는 괴짜의 사유지에 무단 침입하는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는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배낭을 문 너머로 던져버린 후 두 손과 무릎을 땅에 대고 덤불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가시와 쐐기풀에 긁히며 간신히 울타리를 통과한 그는 축축한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방치된 잔디밭 너머로 커다란 석조 저택이 보였다. 진입로는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는데, 저택 뒤편으로 향하는 왼쪽 길은 무거운 트럭이 오간 듯 깊은 바퀴 자국과 물웅덩이로 패어 있었고, 현관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길은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불빛 하나 없이 덧문이 닫힌 저택은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삭막했으며, 오직 뒤편에서 부엌이라기보다는 공장 굴뚝에 가까운 짙은 연기만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노부인과의 약속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렸을 터였다.

현관으로 다가간 그는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다. 인기척이 없자 다시 종을 울린 뒤 깊숙한 현관 한쪽에 놓인 나무 벤치에 주저앉았다. 별빛이 쏟아지는 따뜻한 밤공기 속에서 땀이 식어가며 어깨 위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정원의 고요함과 이따금 들려오는 올빼미의 울음소리에 취해 깜빡 졸음에 빠져들 무렵, 갑자기 럭비 스크럼을 짤 때처럼 거칠게 몸싸움을 벌이는 듯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찬 사내들의 고함 사이로 절박한 외침이 밤공기를 갈랐다. “이, 이거 놔요. 놔달라고요. 저, 저기엔 안 들어갈 거예요. 제발 집에 보내주세요.”

랜섬은 배낭을 내팽개치고 뻣뻣한 다리를 이끌며 저택 뒤편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진흙탕 길 끝에 나타난 마당에는 붉은 화염이 어른거리는 낮은 문과 천문대 돔처럼 생긴 거대한 검은 물체가 별빛을 배경으로 솟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자신과 부딪힐 만큼 가까운 곳에서 엉겨 붙어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이는 세 명의 사내였다. 두 남자에게 붙들려 발버둥 치는 가운데의 인물이 노부인의 아들 해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랜섬은 그 소년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천둥처럼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정작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다소 위엄 없는 목소리였다.

“이보십시오! 저기요……!” 세 사람은 돌연 움직임을 멈췄고, 소년은 훌쩍거렸다. 두 사내 중 체격이 크고 건장한 남자가 랜섬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여기서 얼쩡거리는 거요?” 그의 목소리에는 랜섬의 목소리에 그토록 유감스럽게 결여되어 있던 위압감이 가득했다. “도보 여행 중인데, 한 가여운 여인과 약속을 해서…….” 랜섬이 대답했다. “가여운 여인 따위는 무슨 얼어 죽을.” 사내가 내뱉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요?” “생울타리를 뚫고 들어왔소.” 랜섬은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당신들이 저 소년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덩치 큰 사내는 랜섬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한 채 동행을 향해 이래서 개를 키워야 한다고 투덜거렸고, 아직 입을 열지 않았던 호리호리하고 젊은 사내가 당신이 기어코 타르타르를 실험에 희생시키지만 않았어도 개가 있었을 것이라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는 랜섬의 귓가에 어렴풋이 낯익게 울렸다. 늦은 시간이니 소년을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랜섬의 거듭된 개입에 덩치 큰 사내가 윽박지르듯 정체를 물었고, 랜섬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순간 호리호리한 사내는 위든쇼 학교 출신이 아니냐며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랜섬의 학창 시절 동창 디바인이었다. 두 사람은 이토록 우연한 재회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과장되고 작위적인 환대를 표하며 악수를 나누었으나, 사실 랜섬은 학창 시절 자신이 기억하는 그 누구보다도 디바인을 몹시 꺼림칙하게 여겼었다.

디바인은 덩치 큰 자신의 동행을 위대한 물리학자 웨스턴이라 소개하며, 스터크와 내더비 같은 황량한 시골구석에서 이루어진 뜻밖의 만남을 너스레와 함께 반겼다. 그러나 불쌍한 해리의 멱살을 여전히 틀어쥔 웨스턴은 정원에 무단 침입한 자가 어느 학교 출신이든, 어떤 비과학적인 헛짓거리에 돈을 낭비하고 있든 알 바 아니며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에 디바인은 웨스턴의 험악한 겉모습 아래 관대한 심성이 숨어 있다며 분위기를 무마하고는, 랜섬에게 저택으로 들어와 요기라도 하며 목을 축이라고 권했다.

“정말 고마워. 하지만 저 소년은….” 랜섬이 묻자 디바인은 그를 한쪽으로 끌고 가 낮게 속삭였다. 평소에는 비버처럼 고분고분 일하는 해리가 오늘은 발작을 일으켜 진정될 때까지 세탁실에 가두려던 참이었으니, 잠시 후 랜섬이 원한다면 직접 아이를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랜섬은 몹시 당혹스러웠다. 이 일련의 상황은 무언가 끔찍한 범죄 현장에 우연히 발을 들인 것처럼 의심스럽고 불쾌하게 느껴졌으나, 한편으로는 대학교수나 옛 동창 따위의 인물들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악행을 저지를 리 없다는, 그의 세대와 계급 특유의 깊고 비이성적인 확신이 그의 내면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게다가 무력을 써서 억지로 아이를 빼앗을 방도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념이 랜섬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동안, 디바인과 대화를 나눈 웨스턴은 마지못해 앓는 소리를 내고는 해리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충분히 말썽을 피웠다, 해리. 정 원하지 않는다면 세탁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좋아….” “세탁소가 아니었잖아요.” 소년이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아니란 거 알잖아요. 난 그 안에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디바인은 아이가 우연히 실험실에 갇힌 적이 있어 지레 겁을 먹은 것이라며 랜섬을 안심시킨 뒤, 술병 따는 소리를 흉내 내며 얌전히 굴면 좋아하는 것을 주겠다고 아이를 달랬다. 그것은 랜섬이 기억하는 디바인의 학창 시절 장기 중 하나였고, 해리의 입에서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비소가 흘러 나왔다. 웨스턴이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사라지자 랜섬은 뒤따르기를 잠시 망설였으나, 휴식과 술 한잔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 그의 사회적 체면과 짙은 의구심을 빠르게 잠재우고 있었다. 결국 디바인과 해리를 앞세워 저택으로 들어선 그는 이내 낯선 안락의자에 주저앉아 다과를 가지러 간 디바인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되었다.



제2장



안내받은 방은 호화로움과 지저분함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굳게 닫힌 창문. 카펫 없는 바닥엔 포장용 상자와 신문지, 장화가 널브러져 있었다. 최고급 안락의자 두 개 주변으로 시가 꽁초, 빈 샴페인 병, 통조림, 먹다 남은 빵조각 따위가 어지럽게 뒹굴었다. 일행을 기다리며 랜섬은 디바인에 대해 생각했다. 학창 시절 잠시 동경했으나 이내 넌더리를 치게 했던 인물. 케임브리지에서도 그를 피했다. 런던으로 떠나 부유해졌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었다. 마당에서 나눈 짧은 대화로 보아 그는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디바인이 위스키와 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코르크를 따며 물었다. “어쩌다 이런 후미진 시골구석에 오게 된 거지?” “도보 여행 중이야.” 랜섬이 대답했다. “내더비에서 묵으려다 거절당해서 스터크로 가려던 참이었지.” 대학 교수인 랜섬은 긴 방학 동안 아무도 자신의 행방을 알지 못하며 찾지도 않을 거라 덧붙였다. 디바인은 랜섬이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아내나 자식, 당장 그를 찾을 부모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코르크가 열리고 디바인이 잔을 건넸다. 랜섬은 단숨에 목을 축였다. 대화가 이어졌다. 디바인이 웨스턴의 실험에 투자하고 있다는 말을 꺼낼 즈음,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디바인의 말이 더 이상 앞뒤가 맞지 않고 소리가 아득해졌다. 망원경을 거꾸로 들여다보듯 디바인이 까마득히 멀어졌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팔다리가 의자에 묶이고 머리가 바이스에 짓눌린 듯했다.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방이 시야에서 완전히 흐려졌다. 어둠과 벽,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기괴한 꿈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랜섬은 불이 켜진 방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은 차갑고 뻣뻣했다. 약물이나 최면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몸을 통제할 힘이 서서히 돌아왔지만 여전히 몹시 약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곁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난 이제 지쳤어, 웨스턴.” 디바인이 말했다. “저 자가 그 소년 대신, 아니 어떤 면에선 더 나은 역할을 할 거야. 곧 깨어날 테니 당장 배에 태워야 해.” “그 소년이 완벽했는데.” 웨스턴이 뚱하게 대꾸했다. “인류에 봉사할 능력도 없는 백치였지. 국가 실험실에 넘겨졌어야 할 부류라고.” “하지만 영국에서는 경찰이 관심을 가질 만한 아이야. 반면 이 오지랖 넓은 자는 몇 달 동안 아무도 찾지 않을걸. 혼자 왔고, 주소도 안 남겼고, 가족도 없어. 게다가 제 발로 여기 굴러들어 왔지.”

웨스턴은 마지못해 동의하며 랜섬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디바인은 시간이 없다며 랜섬의 발을 들라고 지시했다. 랜섬이 깨어날 기미를 보이자, 웨스턴은 해가 뜰 때까지 세 시간 동안 몸부림치는 꼴을 볼 수는 없다며 약을 더 투여하자고 제안했다. 디바인은 약을 가지러 위층으로 향했다. 랜섬이 반쯤 감긴 눈으로 보니. 웨스턴이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랜섬은 지금이 유일한 기회임을 직감하고는 온 힘을 다해 웨스턴의 다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과학자가 의자 위로 쓰러졌다. 랜섬은 고통스러운 노력을 쥐어짜며 일어나 복도로 뛰쳐나갔다. 지독한 공포가 등 뒤를 쫓았다.

현관문을 찾아 필사적으로 빗장을 풀려 했으나 어둠과 떨리는 손이 그를 가로막았다. 빗장 하나를 채 풀기 전, 무거운 발소리가 카펫 없는 바닥을 울리며 다가왔다. 어깨와 무릎이 거세게 붙잡혔다. 랜섬은 발길질을 하고 몸부림치며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구조되기를 바라는 가느다란 희망으로 고함을 질렀다. 자신에게 이런 폭력성이 있었나 싶을 만큼 맹렬한 저항이었다.

그때, 찰나의 순간, 문이 열리고 신선한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위안을 주는 별빛과 함께 현관에 놓인 자신의 배낭이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머리에 둔탁한 일격이 쏟아졌다. 의식이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자신을 어두운 복도로 다시 끌고 가는 억센 손아귀, 그리고 굳게 닫히는 문소리였다.



제3장



랜섬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극심한 두통과 전반적인 무기력증이 덮쳐와 처음에는 몸을 일으키거나 주변을 살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마를 짚던 그는 자신이 땀을 몹시 흘리고 있으며, 방 안이 기이할 정도로 덥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 오른편의 벽은 단순한 따뜻함을 넘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왼쪽 눈가의 멍을 만지며 웨스턴, 디바인과 벌였던 몸싸움을 떠올린 그는 자신이 보일러실 뒤쪽 헛간에 갇혔다고 단정했다.

바로 그때 머리 위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희미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의 사각형이었다. 랜섬은 지금껏 이토록 차가운 밤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나 쾌락처럼 밝게 맥동하고 있었다. 꿈결처럼 맑고 완벽한 칠흑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무리들이 타오르는 모습은 그의 모든 주의를 사로잡고 뒤흔들며 흥분시켜, 기어이 그를 자리에 앉게 만들었다. 약물 탓에 동공이 확장되어 하늘이 이토록 비현실적으로 찬란한 것이리라 짐작할 즈음, 천창 한구석에서 창백하고 자그마한 일출 같은 은빛 광채가 일렁였다. 이내 거대한 보름달의 구체가 시야를 밀고 들어왔다. 랜섬은 가만히 앉아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토록 하얗고 눈부시며 거대한 달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치 유리창 바로 밖의 거대한 축구공 같군.’ 그는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커.’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어떤 달도 저토록 거대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달빛이 방 안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었다. 기묘한 구조였다. 바닥은 너무나 좁아서 침대와 탁자가 그 너비를 다 차지할 정도였고, 천장은 그 두 배는 넓어 보였으며 벽은 위로 갈수록 밖으로 기울어져 있어, 마치 깊고 좁은 손수레 바닥에 누워 있는 듯했다. 여전히 숨 막히는 열기에 셔츠와 바지만 남기고 옷을 벗은 랜섬은 방을 살피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는 힘을 주었음에도 그의 몸은 비정상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며 천창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몸이 기이할 정도로 가벼워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자신이 죽어서 이미 유령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쳤지만, 수많은 이성적 습관들이 그 가능성을 밀어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방을 탐색한 결과, 밖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던 벽들은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바닥과 완벽한 수직을 이루고 있었다. 사방이 금속으로 덮인 방은 기계적이라기보다는 신비로울 만치 생명력 넘치는 미세하고도 소리 없는 진동을 끊임없이 내뿜고 있었다. 진동은 고요했지만, 천장에서는 마치 작은 발사체들이 부딪히는 듯한 불규칙한 타악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랜섬은 전쟁터에서 겪는 산문적인 두려움이 아닌, 당장이라도 섬망 같은 공포나 환희의 황홀경으로 넘어갈 듯한 아슬아슬한 감정의 분수령 위에서 맹렬하게 요동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이 집이 아닌 움직이는 금속 용기, 즉 일종의 비행선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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