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 지음 | 고전문학
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 지음
프롤로그스타크필드의 겨울은 길고 혹독했다. 발전소 업무가 지연되는 바람에 이 춥고 고립된 마을에 머물게 된 나는, 우체국 앞에서 그를 처음 목격했다. 그의 이름은 이선 프롬이었다. 그는 눈에 띄게 키가 컸지만, 한쪽 어깨와 팔이 기형적으로 굽어 있었고 걸을 때마다 다리를 심하게 절며 질질 끌었다. 우체국장 하먼 가우는 그를 가리켜 ‘망가진 폐허’라고 불렀다. 24년 전 그의 젊은 시절 이 마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고’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롬은 매일 정오 무렵 마차를 몰고 우체국에 들러, 자신의 신문이나 아내 지나의 이름으로 온 약봉지를 챙겨 조용히 돌아갔다. 그의 창백하고 앙상한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읽히지 않았다. 하먼 가우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생각에 그는 스타크필드에서 너무 많은 겨울을 보낸 것 같소.” 그즈음 내 썰매를 끌던 말들이 병이 나자, 나는 프롬에게 역까지 나를 태워다 주는 일을 돈을 주고 부탁했다. 우리는 매일 낡은 썰매를 타고 얼어붙은 눈길을 오갔다. 그는 이동하는 내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고집이나 적의가 아니라, 철저한 고립에서 비롯된 굳어버린 무감각에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독한 눈보라가 예고 없이 스타크필드를 덮쳤다. 쏟아지는 폭설로 도저히 마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프롬은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과수원이 끝나는 언덕 너머,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뼈대만 남은 듯 앙상하고 황량한 집이 눈보라 속에 서 있었다. 가난과 추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프롬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들어오시죠.”
그 짧고 건조한 한마디와 함께, 나는 24년 동안 폭설 속에 갇혀 있던 프롬 가문의 차가운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짙은 어둠이 깔린 좁은 복도 끝에서,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게 불평하는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1장마을은 이 피트 깊이의 눈 아래 깊이 파묻혀 있었고, 철빛으로 물든 차가운 하늘에는 북두칠성이 날카로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었으며 오리온자리는 서늘한 불꽃을 번쩍이고 있었다. 달은 이미 졌으나 겨울밤은 너무나도 투명하여, 앙상한 느릅나무들 사이로 드러난 하얀 집들의 전면이 눈밭과 대비되어 잿빛으로 보였고, 덤불 무더기들은 그 위에 검은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교회의 지하실 창문들은 끝없이 펼쳐진 눈의 파동 너머로 노란 빛줄기를 길게 뿜어내고 있었다.
젊은 이선 프롬은 인적 끊긴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은행과 마이클 이디의 새 벽돌 가게, 그리고 문가에 검은 노르웨이 가문비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바넘 변호사의 집을 지나 코버리 계곡 쪽으로 솟아 있는 교회로 향했다. 대기는 너무나 건조하고 맑아서 추위마저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발아래의 하얀 대지와 머리 위 금속성의 하늘 사이에 에테르만큼이나 희박한 공기만 존재하는 듯했다. ‘마치 공기가 다 빠져나간 진공 용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군.’ 그는 생각했다. 사오 년 전 우스터의 기술 대학에서 일 년간 수학하며 친절한 물리학 교수와 함께 실험실을 드나들었던 경험은, 비록 아버지의 죽음과 연이은 불행으로 일찍 끝나버렸지만, 여전히 뜻밖의 순간마다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일상의 표면 뒤에 숨겨진 거대하고 흐릿한 의미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바넘 변호사의 가문비나무 아래로 뻗은 코버리 길의 비탈은 맑은 날이면 썰매 타는 이들의 함성이 밤늦게까지 울려 퍼지던 스타크필드 최고의 썰매장이었으나, 오늘 밤만큼은 고요한 자정의 정적만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고, 깨어 있는 모든 생명은 노란 빛줄기와 함께 춤곡이 흘러나오는 교회 창문 뒤로 한데 모여 있었다. 이선은 건물 측면을 돌아 지하실 문 쪽 비탈을 내려간 뒤, 자신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피해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우회하여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꼿꼿하고 마른 몸을 어둠 속에 숨긴 채 목을 길게 빼고 방 안을 훔쳐보았다.
그가 서 있는 서리가 내린 듯한 바깥의 어둠 속에서 바라본 방 안은 끓어오르는 열기의 안개 속에서 요동치는 듯했다. 가스등의 금속 반사판이 뿜어내는 거친 빛의 파도가 하얀 벽을 때렸고, 홀 끝에 놓인 난로의 무쇠 측면은 마치 화산의 불꽃을 품고 헐떡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도회장의 사람들은 막 떠날 채비를 하며 코트와 숄이 걸린 통로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으나, 그때 숱 많은 까만 머리칼에 경쾌한 발놀림을 가진 활기찬 젊은 남자가 플로어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손뼉을 치며 신호를 보냈다. 춤꾼들은 다시 줄을 섰고, 그 쾌활한 남자는 무리 속을 이리저리 파고들더니 이미 체리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소녀를 끌어내어 버지니아 릴의 튀어 오르는 듯한 곡조에 맞춰 무도회장을 가로지르며 그녀를 회전시켰다.
이선의 심장은 빠르게 고동쳤다. 그는 체리색 스카프 아래의 어두운 머리칼을 훔쳐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기에, 다른 이의 눈이 자신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냈다는 사실에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아일랜드계 피가 흐르는 듯한 데니스 이디는 춤을 아주 잘 추었고, 그의 파트너가 된 매티 역시 그 뜨거운 열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점차 빨라지는 원형의 춤사위 속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며 가벼운 몸을 내맡기던 그녀의 스카프가 벗겨져 어깨 뒤로 날렸다. 이선은 그녀가 회전할 때마다 웃음을 터뜨리며 헐떡이는 입술과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칼, 그리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선들의 미로 속에서 유일하게 고정된 지점처럼 빛나는 어두운 눈동자를 시선에 가득 담았다.
춤꾼들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고 악사들이 결승점을 앞둔 경주마를 채찍질하듯 거칠게 악기를 두들겨대는 동안, 차가운 창밖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젊은 이선 프롬에게 그 뜨거운 열기 속의 춤사위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따금 소녀의 얼굴에서 파트너의 얼굴로 시선을 돌릴 때면, 춤의 고양감에 취한 데니스 이디의 표정에는 뻔뻔한 소유욕이 노골적으로 서려 있었다. 야심 찬 아일랜드계 식료품점 주인 마이클 이디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의 상술과 오만함을 물려받아 스타크필드의 처녀들을 정복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선은 평소 그를 그저 비열한 놈이라 여겨왔으나, 지금은 당장이라도 말채찍을 휘두르고 싶은 격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매티는 그 불쾌한 시선과 손길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넋을 잃고 데니스에게 두 손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 환희에 찬 모습은 이선의 가슴속에 서늘하고 뼈아픈 질투를 피워 올렸다.
아내 지나의 사촌 동생인 매티 실버가 스탬퍼드에서 무보수 가사 도우미로 프롬 가에 온 이후, 이선은 어쩌다 그녀가 마을에서 저녁 시간을 보낼 일이 생기면 데리러 가는 습관이 생겼다. 애초에 삭막한 농장 생활의 고립감을 덜어주자며 그 외출을 제안한 것은 지나였지만, 이선은 그것이 보수 없이 일하는 매티를 달래기 위한 지나의 머리를 굴린 계산임을 알고 있었다. 고된 농사일을 마친 뒤 이 마일을 걸어 마을을 오가는 일에 내심 난색을 표했던 이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타크필드의 모든 밤이 춤과 축제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
지난 일 년 간 한 지붕 아래서 지내며 매티의 가벼운 발걸음에 맞춰 밤길을 걸어 농장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이선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미로운 환희였다. 플래츠 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짐보따리와 함께 뛰어내리며 “당신이 이선이군요!” 하고 외치던 그녀의 밝은 생명력은 차갑게 식은 난로에 지펴진 따스한 불꽃과도 같았다. 그때 이선은 가녀린 그녀를 훑어보며 속으로 ‘집안일을 잘할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짜증을 내는 성격은 아니겠군.’ 하고 무뚝뚝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매티는 그저 쓸모 있는 일꾼을 넘어 이선과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이선은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늘 침묵하는 고통을 앓아왔으나, 이제는 곁에 있는 그녀에게 “저기 아래 있는 게 오리온이고, 오른쪽의 큰 별이 알데바란, 그리고 벌떼처럼 모여 있는 작은 별들이 플레이아데스야.”라고 속삭이며 억눌렸던 내면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었다. 겨울 언덕 뒤로 지는 차가운 붉은 노을이나 햇빛 찬란한 눈밭 위로 드리운 짙푸른 그림자 앞에서 두 사람은 묵언의 환희로 결속되었다. 언젠가 그녀가 “마치 그림 같아요!”라고 다정하게 감탄했을 때, 이선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영혼을 표현할 완벽한 언어를 마침내 찾은 듯한 충만함을 느꼈다.
그러나 교회 밖 차갑고 투명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끓어오르는 열기 속을 응시하는 지금, 그 모든 찬란한 기억들은 속절없이 사라져버린 것들처럼 날카롭게 이선의 가슴을 찔렀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며 바닥을 빙글빙글 도는 매티를 지켜보며, 이선은 자신의 그 지루하고 무뚝뚝한 이야기들이 그녀의 흥미를 끌었다고 믿었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자조했다. 오직 그녀 앞에서만 활기를 띠었던 그에게, 춤을 추며 발산하는 그녀의 열정적인 명랑함은 곧 자신을 향한 무관심의 명백한 증거처럼 보였다. 춤꾼들을 향해 치켜든 그녀의 얼굴은 자신을 바라볼 때처럼 석양을 품은 창문같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즐거울 때 고개를 뒤로 젖히거나 감동할 때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깔던,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 굳게 믿었던 그 은밀하고 아름다운 몸짓들마저 타인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달은 이선은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광경은 이선의 가슴에 서늘한 불행을 안겨주었고, 그 불행은 내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던 잠재된 두려움을 일깨웠다. 아내 지나가 매티를 대놓고 질투한 적은 없었으나, 최근 들어 그녀는 집안일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매티의 서투름을 교묘하게 지적하곤 했다. 스타크필드에서 늘 병약한 사람으로 통했던 지나가 자신의 주장만큼이나 아픈 것이 사실이라면, 그녀에게는 야간 산책길에 이선의 팔에 가볍게 얹히곤 하는 매티의 가녀린 팔보다 훨씬 더 튼튼한 일손이 필요했다.
가사 노동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매티를 위해 이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부엌에 불을 지피고 밤새 장작을 날랐으며, 심지어 제재소 일마저 뒷전으로 미룬 채 농장에 머물며 그녀의 부족한 일솜씨를 보충하려 애썼다. 여자들이 잠든 토요일 밤에 몰래 부엌으로 내려가 바닥을 닦기도 했던 그는, 어느 날 버터 교반기를 돌리다 지나에게 들켰을 때 그녀가 말없이 돌아서며 남기고 간 기묘하고도 서늘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지나의 불만은 더욱 형태가 없고 불길한 징후로 나타났다. 어느 매서운 겨울 아침, 틈새가 벌어진 창문으로 스며든 외풍에 촛불이 흔들리는 어둠 속에서 옷을 입던 이선의 등 뒤로 지나의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의사 선생님께선 절 돌봐줄 사람도 없이 혼자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잠든 줄 알았던 아내의 목소리는 이선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는 오랜 침묵 끝에 불쑥 말을 내뱉는 습관이 있었다. 어두운 옥양목 퀼트 이불 아래로 윤곽만 흐릿하게 드러난 채, 뼈가 앙상한 얼굴에 잿빛 그림자를 드리운 그녀를 향해 이선이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돌봐줄 사람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매티가 떠나고 나면, 우리가 가정부를 고용할 형편이 안 된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이선은 다시 고개를 돌려 얼룩진 거울에 비친 자신의 팽팽한 뺨을 들여다보며 면도기를 집어 들었다. “도대체 매티가 왜 떠난다는 거야?” “글쎄, 걔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말이에요.” 등 뒤에서 늘어지는 지나의 목소리에 이선은 턱을 세게 긁어내리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한 매티는 절대 우릴 떠나지 않을 거야.”
“매티처럼 가엾은 애가 데니스 이디같이 똑똑한 청년과 결혼하는 걸 내가 가로막았다는 소리는 죽어도 듣고 싶지 않거든요.” 지나는 애처롭게 자신을 낮추는 듯한 수동 공격적인 어투로 쏘아붙였다. 이선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며 턱에서 귀 쪽으로 면도기를 움직였다. 손길은 흔들림이 없었으나, 그것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선 절 혼자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하셨어요.” 지나가 완강하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아는 어떤 아가씨를 소개할 수 있다며 당신에게 말해보라고 하셨는데….” 이선은 면도기를 내려놓고 헛웃음을 치며 자세를 고쳐 세웠다. “데니스 이디라고! 고작 그런 이유라면 당장 가정부를 찾아봐야 할 만큼 급한 일은 아니겠군.” “글쎄요, 그래도 난 당신과 이 얘기를 마저 하고 싶어요.” 지나가 고집스럽게 말하자, 이선은 서둘러 옷을 주워 입으며 낡은 은시계를 촛불에 비춰보았다. “알았어.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벌써 늦었다고.”
지나는 이 말을 끝으로 받아들인 듯, 이선이 멜빵을 어깨에 걸치고 외투에 팔을 꿰어 넣는 동안 침묵 속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날카로운 비수가 돌연 날아들었다. “요즘 매일 아침 면도를 하시니 항상 늦을 수밖에요.”
그 한마디는 데니스 이디에 대한 그 어떤 모호한 암시보다도 이선을 끔찍한 공포로 몰아넣었다. 매티 실버가 온 이후로 매일 면도를 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는 겨울의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침대를 떠날 때면 늘 잠들어 있는 것 같던 지나가 자신의 외양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어리석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도 지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상황을 넘기다가 몇 주 뒤에 무심코 내뱉는 말로 자신이 그동안 모든 것을 관찰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음을 드러내어 이선을 섬뜩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선의 머릿속에는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지나 본인은 점차 실체 없는 그림자처럼 희미해져 갔고, 이선의 모든 삶은 오로지 매티 실버의 모습과 숨결로만 가득 차 있어 그는 매티가 없는 삶을 더 이상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살을 에는 듯 차갑고 투명한 겨울밤의 어둠 속에 서서 창문 너머로 훅 끼쳐오는 교회 안의 뜨거운 열기와 눈부신 불빛 아래 데니스 이디와 함께 빙글빙글 춤을 추는 매티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선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애써 무시하며 억눌러왔던 아내의 날카로운 경고와 불길한 위협들이 먹구름처럼 피어올라 그의 온 정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제2장무도회장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자, 이선 프롬은 돌출된 덧문 뒤로 물러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매티에게 마차를 함께 타지 않겠냐고 묻는 한 여자의 외침에 이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윽고 매티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아니에요! 이런 밤엔 안 탈래요.” 그녀가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의 곁에 있었다. 이선은 밀려드는 수줍음에 벽의 어두운 구석으로 몸을 숨긴 채 침묵했다. 우스터의 여학생들에게 농담을 건네려다 실패했던 학창 시절처럼, 그는 자신이 한없이 무겁고 둔하게 느껴졌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홀로 밖으로 나온 매티 곁으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다가갔다. “남자친구가 바람이라도 맞혔나? 그거 참 안됐네, 매티! 다른 애들한테 말하고 다닐 만큼 내가 치사하진 않지.” 이선은 데니스의 얄팍한 농담을 혐오했다. “그건 그렇고, 저기 우리 아버지 썰매가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 운이 좋지 않아?”
매티가 가볍게 못 믿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버님 썰매가 대체 왜 저기 있는데요?” “당연히 널 태워주려고 기다리는 거지. 적갈색 망아지도 끌고 왔어. 왠지 오늘 밤엔 드라이브가 하고 싶어질 것 같았거든.” 데니스는 의기양양하게 허세를 부렸다. 매티가 스카프 끝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듯하자, 숨어서 지켜보는 이선의 속은 타들어 갔다.
“망아지 끈을 풀 테니 잠깐만 기다려.” 데니스가 썰매를 향해 달려갔다. 매티는 가만히 서서 지켜보다가, 그가 썰매를 끌고 나와 그녀를 태우려 자리를 내어주자 돌연 새처럼 몸을 돌려 교회를 향해 비탈 위로 내달렸다. “안녕히 가세요! 즐거운 드라이브가 되길 바랄게요!” 데니스가 서둘러 말을 몰고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어서 타! 이 커브 길은 엄청 미끄럽다고.” 매티는 웃으며 거절했다. “잘 가요! 난 안 타요.” 데니스가 썰매에서 내려 그녀의 팔짱을 끼려 했지만 매티는 재빠르게 몸을 피했고, 칠흑 같은 허공을 맴돌던 이선의 심장도 그제야 안도감에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