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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지음 | 고전문학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백 지음





제1장


오클라호마의 붉은 흙과 회색 들판은 얼마 전까지 부드러운 비를 머금었지만, 5월 말부터 가혹한 해가 타오르며 갈색 마름무늬를 품기 시작했다. 한때 싱그럽게 퍼졌던 풀이며 잡초는 이제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고 진한 녹색을 간신히 유지한 채 지친 숨을 내쉬었다. 대지는 단단한 껍질을 형성했고, 하늘도 빛바랜 창백함으로 물들었다.

6월이 되자 태양은 더욱 세차게 내리쬈고, 바람은 먼지를 일으키며 옥수수를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문틈마다 헝겊을 끼우고 밖으로 나갈 때면 코를 막고 고글을 써야 했다. 하지만 먼지는 실내마저 파고들어 가구와 식기에 희미한 선을 그렸고, 며칠 밤낮이 지나자 옥수수 줄기는 거의 바싹 마른 채 먼지로 뒤덮였다.

그때 남자들은 말없이 굳은 얼굴로 곡식을 바라보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남자들이 굴복할지 아닐지,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시간이 흘러 남자들의 시선에 단단한 결의와 분노가 깃들자, 비로소 여자들과 아이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옥수수는 망가졌어도 남자들의 결심이 무너지지 않는 한, 가정은 무너질 리 없으리라 믿었다.

햇살은 다시금 이글거렸고, 남자들은 문턱에 앉아 막대기나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삶의 길을 다시금 모색해야 할 시간이었다.

한편, 길가의 작은 식당 옆에는 붉은 대형 트럭 한 대가 서있었고, 트럭 운전수와 여종업원은 지루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밖에서는 한 남자가 고단한 걸음으로 트럭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는 새 옷차림에 고생으로 단단해진 손을 가진 젊은 사내였고, 이름은 톰 조드라 했다. 식당 주인은 트럭에 “승객 탑승 금지” 딱지를 붙였지만, 운전수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를 태웠다.

트럭이 덜컹거리며 길을 달리는 동안, 두 남자는 서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말을 주고받았다. “요즘 농사일이 예전 같지 않다더군.” 하고 운전수가 낮게 말하자, 톰은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집에 가 봐야 알겠지요. 그래도 내 기억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으니까.” 묵직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들 사이에는 또 한 겹의 이해심과 동료애 같은 것이 가느다랗게 깔려 있었다. 먼지에 덮인 고향, 농부들의 몰락, 기계화된 농업 속에서 밀려나는 소작농들에 대한 암시가 오갔다. 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나아가는 트럭의 진동 사이로, 두 남자는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희미한 희망을 함께 싣고 달렸다.

남자들은 문턱에 주저앉아 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과 맞서야 할 길을 고민했다. 옥수수 밭은 이미 망가졌어도, 그들의 결심만큼은 메마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톰의 귀향은 단순한 집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더 거센 폭풍 같은 현실과 부딪칠 서막이 되고 말았다. 먼지와 태양이 뒤엉킨 대지 위에서, 사람들은 새 계절을 기다리며 서로의 굳은 의지를 확인했다. 아직 봄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마쳤다.



제2장


운전수는 매일 한결같이 이어지던 도로 위의 노동 속에서 무의미한 일상과 꿈꾸는 미래 사이를 줄타기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때로는 그저 외로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입에 담배를 물고, 고속도로 옆 허름한 식당에서 커피 한 잔과 파이 한 조각을 시켜놓고 점원과 시시한 말장난을 주고받곤 했다. 그저 끝없이 미끄러지는 검은 아스팔트 위를 정신없이 달리다 미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는 트럭을 모는 동안 기묘한 방법으로 정신을 단련했고, 언젠가 기계공학 원격 강좌를 수료해 더 이상 이 길 위를 홀로 굴러가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위치에 오를 것이라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톰 조드는 말수가 적었지만 내면에는 단단한 무엇인가가 박혀 있는 듯했다. 새 옷을 걸쳤으나 그것은 갓 출소한 죄수에게 관청에서 지급한 옷일 뿐, 삶의 결의나 희망이 깃든 선택이 아니었다. 톰은 운전수가 던지는 질문들의 함의를 간파했다. 운전수는 궁금증과 불안, 그리고 경계심을 숨기지 못하고 톰을 힐끗거리며 그의 과거를 추측했다. 그 무언의 신경전 속에서 톰은 결국 숨기는 것 없이 고백했다. 자신은 사람을 죽였고, 그 죄로 감옥에서 4년을 보낸 뒤 막 나왔다는 사실을 거침없이 꺼내놓았다.

그 순간 차창 밖의 세상은 먼지와 뜨거운 태양빛 아래 여전히 음울했지만, 톰의 목소리는 마치 주저 없이 바닥을 드러내는 심해어처럼 어둡고 침착했다. 그는 더 이상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의심 어린 시선을 향해 “그래, 나 감옥에 있었어. 그게 어쨌다고?”라고 되묻는 듯한 당돌함이 있었다.

그렇게 비밀 아닌 비밀을 드러낸 뒤, 톰은 갈림길에서 내려 혼자 길을 따라 걸었다. 두 남자 사이의 짧은 동행은 서로를 간파하는 눈빛 교환만을 남기고 끝난 셈이었다. 트럭 운전수는 뒤늦게 “행운을 빈다!”고 외쳤지만, 톰은 무심히 손을 흔들 뿐,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음울한 먼지구름 속에서 붉은 트럭은 다시 무겁게 나아갔다.



제3장


도로 가장자리에 깔린 메마른 풀밭은 바싹 말라 있었고, 그 풀잎마다 강아지나 양의 털에 달라붙는 가시나 씨앗이 잔뜩 붙어 있었다. 벌어진 귀리 수염과 토끼풀 열매, 여우꼬리풀 같은 것들이 각각 동물이나 바람을 타고 퍼지기를 노리는 형국이었다. 겉으로는 가만히 누워 있는 듯했지만, 모든 씨앗이 자신을 옮길 장치를 갖추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바로 옆 콘크리트 도로는 태양 빛을 받아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가에서 곤충들이 엉겨 붙어 움직이는 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땅속을 파고드는 개미나 그 개미를 노리는 개미귀신, 뛰어오르며 노란 날개를 살짝 펼치는 메뚜기, 그리고 바닥을 느릿하게 기어 다니는 쥐며느리 같은 것들이었다. 그 위로, 껍데기가 돔처럼 볼록하게 솟은 땅거북 한 마리가 풀숲을 헤치며 기어가고 있었다. 우회하지 않고, 노란 발톱을 단단히 세운 채 껍질을 질질 끌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거북이가 지나온 풀밭 뒤로는 앙상한 흔적이 길처럼 이어졌다. 앞에 언덕처럼 솟아 있는 도로 제방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거북이는 서서히 발톱으로 흙을 차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사가 점점 가팔라질수록 뒷발은 미끄러졌고, 등껍질이 땅을 긁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러다 콘크리트 도로 턱이 눈앞을 막아서자, 거북이는 머리를 들어 도로 너머를 살폈다. 그러고는 거친 발톱을 도로 턱 위에 걸쳐 조금씩 온몸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거북이는 다시 느릿하게 머리를 내밀고 다리를 뻗었다. 뒷다리에 집중적으로 힘을 주어 몇 번 더 밀어내더니, 마침내 도로 위로 몸을 완전히 끌어올렸다. 거기엔 야생 귀리 줄기가 한 가닥 걸려 있었지만, 거북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등껍질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몰던 세단 승용차가 도로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거북이를 보곤 핸들을 오른쪽으로 크게 틀었다. 거북이는 그 순간 등껍질 안으로 머리를 깊이 집어넣었지만, 큰 충돌 없이 무사하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도로 표면이 햇볕에 달궈져 뜨거웠기에 서둘러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뒤이어 가벼운 트럭 한 대가 거북이 쪽으로 달려왔다. 운전자는 거북이를 보자 장난을 치려는 건지, 아니면 별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살짝 핸들을 돌려 거북이를 치려고 시도했다. 그 트럭의 앞바퀴가 거북 등껍질 가장자리에 닿았고, 거북이는 팽이처럼 한 바퀴 휘말려 도로 밖으로 튕겨 나갔다. 트럭은 다시 본래 차선으로 되돌아가며 달아났다. 도로 밖 자갈밭 위에서 등껍질이 뒤집힌 거북이는 한 발로 요령껏 돌 조각을 잡아 조금씩 뒤집기를 시도했다. 결국, 등껍질을 비틀어 중심을 되찾았고, 그 과정에서 끼어 있던 야생 귀리 일부분이 땅에 떨어져 그곳에 씨앗을 묻었다.

거북이는 다시 자세를 추스르고, 도로 제방 아래로 미끄러지듯 기어 내려갔다. 무표정해 보이는 거북이의 눈에는 옅은 농담기가 서려 있었고, 뾰족한 부리는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어디로 가든, 누가 날 헤치려 해도 난 가야 할 길이 있으니 기어갈 뿐이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노란 발톱이 땅을 밀 때마다 아주 조금씩 미끄러졌지만, 거북이는 굴하지 않고 더 먼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제4장


톰 조드는 트럭의 자취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술병을 꺼내 천천히 맛을 보았다. 그러고는 뜨거운 햇살을 피할 그늘을 찾았고, 결국 앙상한 가지로 성긴 그늘을 던지는 버드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 나무 아래에는 한 사내가 기대 앉아 있었다. 조드가 다가서자, 사내는 노래를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사내는 기다란 얼굴에, 피부는 볕에 그을려 윤이 났으며, 두 눈은 깊고 번들거리는 갈색이었다. 조드는 그를 한동안 살핀 뒤, 그가 예전의 설교자 짐 케이시 목사임을 알아보았다. 한때 불같은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외치던 사내였다. 조드가 어릴 적, 물가에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세례를 베풀던 그는 조드의 장난스럽던 어린 시절마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케이시는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신성한 영감이 자신 안에 깃들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예전에는 열띤 설교로 사람들을 황홀경에 빠뜨렸지만, 정작 자신은 설교 뒤 한껏 흥분한 신도 소녀들과 들판에 나가 육체적 욕망을 풀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것이 큰 죄라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과연 진정한 죄인지, 아니면 인간 본연의 성정에 불과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성령으로 가득 찬 순간에도 악마라 일컫는 충동이 스며드는 것이 이상했고, 그 모순 속에서 신앙의 기틀은 조금씩 흔들렸다. 결국 그는 그곳을 떠나 방황하다가 자신이 설교자로서 품어야 할 거룩한 확신을 잃었다고 했다.

조드는 그런 케이시의 변화를 흥미롭다는 듯 들어주었다. 그는 케이시에게 위스키를 권했고, 둘은 목을 축이며 거칠고 더운 대지 한가운데서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조드는 감옥에서 갓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털어놓았고, 케이시는 이전의 자신, 즉 ‘영혼을 인도한다’는 사명 속에서 허우적대던 목사 시절을 되짚으며, 이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사유하고 싶다고 했다. 두 남자는 먼지투성이의 들판 가운데 나무 그늘 아래서, 신앙과 죄,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곱씹었고, 그 불확실한 결론 속에서 묘한 동료애를 느꼈다.

이 광활한 들판에서는 다시금 스스로 무엇을 할지 고민해야 했다.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앞으로 땅거미가 깔려갔고, 먼지로 덮인 농지와 빈 들판이 금빛 노을 아래 음영진 모습으로 드러났다. 케이시와 조드는 억센 옥수수 줄기가 메말라 누운 들판을 따라, 쇠약한 목화가 드문드문 자라는 밭가를 걸으며 점점 집 가까이 다가갔다. 조드는 가족과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가족들 소식을 잘 몰랐다. 크리스마스에 온 할머니의 우스꽝스런 엽서나, 아버지가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간 연락이 끊긴 세월을 되새겼다.

조드는 발길을 재촉했고, 케이시는 미소처럼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따라 걸었다. 그 뒤엔 목적지도 분명치 않은 개 한 마리가 더위 속을 우울하게 지나갔다. 세상의 먼지와 갈증, 과거의 믿음과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등껍질에 갇힌 채 발버둥 치는 거북처럼, 모든 것이 현재를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때 설교자로서 영혼을 구제하던 케이시나, 감옥살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조드나, 결국 이 길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성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는 메마른 대지 위에서, 두 사내는 마치 묵직한 예감의 씨앗을 나누듯 그늘 속에 머물렀고, 무거운 발자국을 남기며 집을 향해 나아갔다.



제5장


마른 흙바람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농부들의 눈에는 시퍼런 하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보였다. 제자리에서 힘없이 시들어가는 옥수수밭, 금세라도 흐드러질 듯 위태롭게 선 마른 지붕,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칠 통지서의 그림자…. 어느 날부턴가 사람이 직접 찾아와서 한 마디 툭 던지고 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 땅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 집을 비우셔야겠습니다.”

농가마다 그 말을 전하는 사람들은 달랐다. 어떤 이는 은행의 이름을 들먹였고, 또 다른 이는 땅 주인의 대리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누구든 똑같은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자기도 원치 않는 일을 떠맡았다는 듯, 잔뜩 그늘진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다가, 농부 가족들의 울분과 눈물 어린 항변을 건성으로 듣고는 “우린 명령을 받았을 뿐이에요.” 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그 짧디짧은 말 한마디가 농부들의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거기엔 사람 냄새도, 책임감도, 온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머지않아 무지막지하게 큰 트랙터가 들이닥쳤다. 기계의 날 선 굉음은 그토록 넓은 평원을 훑고도 남아, 하늘과 땅 사이를 진동시켰다. 농부들은 주먹을 움켜쥐고, 쟁기를 끌어안고, 두 손으로 흙을 움켜쥐었지만 그것으론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트랙터 운전석에 앉은 사내는 종종 이웃 마을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우리 땅을 갈아엎는 거요?” 하지만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비슷했다. “나도 먹고 살아야지요.” 남자는 자기 자식들이 주릴까 봐 벌벌 떨며 이 일을 한다고 했다. 은행에서 주는 임금으로 가족을 건사해야 한다고. 그것은 농부들이 땅을 지키는 이유와 다르지 않은데, 지금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셈이었다.

아버지가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이제 그 은행이 땅을 원한다. 토지 회사, 혹은 토지를 소유한 은행은 트랙터를 원한다. 트랙터가 나쁜 것인가? 길게 고랑을 그리며 땅을 갈아엎는 그 힘이 잘못된 것인가? 만약 이 트랙터가 우리 거라면 트랙터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라면. 만약 우리 트랙터가 길게 고랑을 그리며 우리 땅을 갈아엎는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내 땅이 아니라 우리 땅을 갈아엎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한때 우리 것이었던 이 땅을 사랑한 것처럼 트랙터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트랙터는 두 가지 일을 한다. 땅을 갈아엎는 일과 우리를 땅에서 쫓아내는 일. 이 트랙터는 탱크와 거의 다르지 않다. 둘 다 사람들을 위협하고 상처를 입혀서 쫓아내 버린다.

농부들은 분노와 체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트랙터에 달려가 들이받아 보아도, 그 뒤에는 또 다른 트랙터가, 또 다른 대리인이, 그리고 ‘은행’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괴물이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면 허망했다. 거기에는 얼굴이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불가항력처럼 느껴지는 구조가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여태 이 땅에 땀을 뿌리고, 조상 대대로 살아왔는데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속이 끓어오르며 소리쳐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전에 이웃하던 집들 중 이미 문짝이 뜯긴 채 텅 빈 곳이 늘어났다. 가끔 사람들이 한 짐 가득 트럭에 짐을 실은 채 어디론가 떠나가는 광경이 목격됐다. “캘리포니아라면 일자리가 널렸다는구먼, 잘만 하면 부자가 될 수도 있대.” 뿌리 뽑힌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 다녔다. 사실 그곳에 도착해봐야 얼마나 나을지 가 보지도 않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있는 이곳이 이미 끝장이라는 확실함보다는 그래도 나은 희망처럼 보였다.

어떤 집안은 밤늦도록 깨어서 가족회의를 했다. 남자들은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여자들은 고개를 떨군 채, 노인들은 젖은 눈가로 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창문 틈으로 밀려들 때마다 마룻바닥엔 흙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다가 곤히 잠들었다.

결국 몇몇 사람들은 정들었던 울타리를 헐고, 마른 풀잎으로 엉성하게 덮었던 창고를 정리하여 차에 실었다. 밭 한구석에 모아둔 곡식 자루는 거의 비어, 이것저것을 보태야 겨우 먼 길을 떠날 간단한 식량이 됐다. 그때 한 노인은 마당 한가운데서 두 손으로 흙을 움켜쥐곤,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피 흘려 지킨 이 땅인데… 우린 이렇게 쫓겨나야 하는 건가.”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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